

To. J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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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석은 겨울이 싫었다. 너무너무 추운 계절이었다. 손이 얼어버려서 공부도 제대로 안 되는 이 날씨를 지석은 언제나 미워했다. 여느 때와 같이 야자를 하기 위해 책상 서랍에서 책을 몽땅 꺼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제는 질려버린 재미없는 두꺼운 책들 위에 살포시 놓여있는 건, 너무나도 화사한 연분홍색 편지봉투와 가나 초콜렛이었다.
[ To. JS <3 ]
편지를 발견한 지석은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괜히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기도 하고, 콩콩 뛰는 심장으로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얼어있던 것들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이거 설마 러브레터... 그런 건가? 나한테 누가 이런 걸 줬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지석은 연애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체육시간에도 공부하기에 바빴고 방과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내에 나가 노래방에 가거나, 뽑기를 하거나, 캔모아에서 데이트를 하는 등의 일과는 지석의 하루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달콤한 이벤트는 절대 지석에게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이 편지는 누구인 걸까. 시험을 볼 때보다 더 긴장돼서 미칠 것 같았다.
근데 난 연애를 할 마음이 없는데 어떡하지...?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지석이 일단 편지를 가방에 곱게 넣었다. 학교에서 봤다가 이주연한테라도 걸리면 끝장이다. 전교생한테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고.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의 교실이 한적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아침 뉴스에 분명 한파주의보라고 했었는데. 지석은 야자시간 내내 자꾸만 뜨거워지는 귀를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샤프 뒤로 쿡쿡 입술을 눌러댔고 영어 지문을 읽을 때도 J와 S만 보면 웃음이 나 괜히 밑줄을 치고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자꾸만 이상행동을 보이는 지석에 주연이 몇 번이나 뒤에서 샤프로 등을 찍어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곽지석 수상함' 쪽지가 주연에게서 승민으로, 승민에게서 형준으로 전해지는 것도 모른 채 지석은 몰래 가나 초콜렛을 까먹으며 달콤한 야자시간을 보냈다. 평소라면 나눠줬을 법도 한데 아득바득 한 조각도 주지 않고 모조리 먹어버렸다.
[비상 오늘 곽지석 진짜 이상함! -_-^]
2.
행동이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순식간에 가방을 챙긴 지석이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다. 책 한 권 들어있지 않았는데 겨우 그 작은 편지가 뭐라고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편안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읽고 싶어서 샤워까지 빠르게 마친 뒤 책상 위에 앉았다. 혹시라도 찢어질까 조심스레 꺼내든 편지는 빳빳했으나 지석의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름이 적힌 봉투 위를 몇 번이나 문지르며 생각했다.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나 이 정도인가? 큼큼. 괜히 헛기침을 하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다. 공부만 하던 지석에게 연애 좀 하라고 잔소리하던 형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했지만 사실 이런 바람이 불어올 때 흔들리지 않는 편은 아니었다. 들뜬 마음은 이미 저 위로 붕 떠올랐다. 지석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편지를 열었다. 귀여운 글씨가 빼곡한 정성이 가득한 편지였다.
다정한 JS에게 ♡.♡ 안녕! 갑자기 편지 받아서 놀랐지? ㅎ.ㅎ 사실은 몇 번이나 전하고 싶었는데 고민하다가 이제서야 주게 되네 >< 우리 곧 방학하잖아... 그럼 너무 오래 못 만날 것 같아서 이렇게 용기 내서 전해!!! 아, 마주 보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당 ㅠ.ㅠ |
몇 번을 다시 쓴 건지 편지지 위로 꾹꾹 눌린 흔적들이 가득했다. 귀여운 글씨체에 가득 담긴 애정이 편지를 쥐고 있는 손까지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시도했다니. 한 번도 눈치챈 적 없는데. 나 눈치 빠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럼 꽤 오래 나를 좋아했다는 건데... 누구지?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일 거라 확신했다. 지은이인가? 음... 연주?
있지, 너랑 마주치면 꼭 지금이 겨울이 아닌 봄 같은 거 너는 알아? 나는 하늘이 맑을 때마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해. 너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 텐데도 말이야! ㅎㅎ 아, 편지에 왜 이름이 없냐면... 나 사실 네 이름만 마주치면 아무 생각도 안 나... ㅜ.ㅜ;; 그래서 이게 지금 네 번째 다시 쓰는 거다...? 내 일기장에도 네 얘기밖에 없는데 네 이름 세 글자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 ㅎ.ㅠ 나 진짜 바보 같지? |
지석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바보 안 같은데!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을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시 같은 고백의 문장들에 지석은 이 편지의 발신자가 문학소녀임을 확신했다. 그러면 이건 설마 정민이인가? 아, 소연이일지도 모르겠다. 가늠해 보던 지석은 다음 줄을 읽고 편지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나 사실 너가 큰 키로 배드민턴 콕 꺼내줬을 때 반한 것 같아 >.</// |
...지석의 키는 168이었다.
비상이다. 비상. 진짜 비상. 지석은 순간 정말이지 뭔가가 너무나도 잘못됐음을 느꼈다. 음? 꿈인가? 눈을 다시 비비고 읽어봐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지석은 큰 키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누군가에게 배드민턴 콕을 꺼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석은 체육시간마다 몰래 빠져나와 과외 숙제를 했기 때문에 키가 아무리 상대적인 기준이라고(...) 쳐도 이 편지의 주인공 은 어찌 되었든 지석이 아니었다. 쭉 읽어 내려가도 이건 정말이지, 확실히 지석이 아니었다.
너를 좋아하는 민지가. 거기까지 읽고는 쿵, 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민지야 진짜 미안. 진짜 미안해. 순식간에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겨울은 너무나도 추운 계절이다.
3.
어떻게 이 편지가 나에게 오게 된 걸까. 왜 이렇게 된 걸까. 지석은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등교하는 내내 얼이 빠져있었다. 다시 가방에 고이 넣어온 편지가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왜 하필이면 JS였던 거냐고오...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척거리던 지석을 발견한 주연이 가볍게 헤드락을 걸어왔다.
"지슥 왜 죽어감?"
"가라... 오늘 너 상대할 기분 아니다."
"싫은데? 초콜렛도 안 주는 쪼잔한 놈 괴롭힐 건데?"
아, 젠장! 초콜렛 내가 먹었지.
우뚝 서서 머리를 쥐어뜯는 지석에게서 주연이 멀어졌다. 나 오늘은 너랑 안 있을랭. 너 진짜 이상하당... 주연이 떨어지자마자 지석이 쪼그려 앉아 비명을 질렀다. 주연은 삼십 초 남은 등교 시간을 확인하고 지석을 버린 뒤 전력을 다해 달렸다. 청소는 너 혼자 해!
지각으로 벌점까지 받았는데도 정신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남아서 청소하라는 말에도 좀비처럼 끄덕이자 어디 아프냐는 걱정까지 받았다. 그런 건 아니었고, 머릿속에 러브레터 생각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지석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죄다 지석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수신자 오류로 인한 해프닝이었을 뿐이지만 지석에겐 분명히 그 무거운 마음을 읽어낸 책임이 있었다. 게다가 타인의 선물까지 먹어버렸으니, 완전히 책임지고 모든 걸 돌려놓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매점에서 초콜렛을 사서 편지와 함께 JS에게 다시 전해줘야만 한다. 방학까지는 딱 이 주가 남아있었다. 그 안에 모든 걸 해결 해야 한다. 그래. 그렇게 하면 다 없던 일이 되는 거니까,
어, 그런데... JS가 누구지?
4.
사 교시 체육시간에 지석은 자발적으로 체육 창고 구석에 처박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편지를 꺼내 읽었다. 붕 뜬 기분으로 읽어내렸던 편지는 충격적인 문장 -키- 이후로 기억에서 휘발됐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어서 편지를 분석해 JS를 찾아내야 한다. 지석이 한 줄 한 줄 곱씹어가며 JS에 대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현재 알고 있는 거라곤 이니셜이 JS인 데다 키가 크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 몇 명 떠오르는 후보가 있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 반에는 키 크고 다정한 정수도 있고, 지섭이도 있었으며, 재성이도 있었다. 으으... JS가 우리 반에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이러니까 이런 사건이 생긴 걸까. 아, 그래도 지섭이는 아닌 것 같은데. 지섭이는 안 다정한데. 아 근데 민지한테는 다정했을 수도. 머리가 아파온다. 평소에 추리소설을 좀 읽어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 걸 본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차라리 수학문제를 푸는 게 더 쉬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 수학문제? 문득 떠오른 문장에 지석이 편지의 두 번째 장을 헤집었다.
'나 너가 모르는 문제 알려줄 때마다 엄청 설렌다? 너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거 같아!'
찾았다. 이러면 정말이지 지섭이는 아니다. 지섭이는 전교 꼴찌에서 두 번째를 달리고 있는 친구였으니까. 그럼 남은 건 정수와 재성이 딱 둘이다. 정수는 도서부인 지석이 가장 많이 만나는 친구였다. 항상 소설을 빌려 가는 차분한 친구. 지석과 같은 무리는 아니었지만 매번 다정히 인사해 주고 간식을 나눠주고, 종종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지석이 한 번 아팠던 날 다가와 먼저 필기를 보여준 적도 있었다. 성적이 반장인 재성이만큼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게 문학 문제라면 말이 달랐다. 어떤 과목인지 알려줬으면 쉬웠을 텐데. 국어였는지 수학이었는지 정확히 적어줬다면, 그럼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둘 중에 하나인 건 확실하네. 확률은 오십 퍼센트. 더 얻을 단서가 있을까 싶어 다시 편지를 읽어내리는데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석아 왜 여기 있어?"
"어? 정수..."
"공부하고 있었어?"
찾을 게 있는지 자연스레 창고로 들어오는 정수에 지석의 눈이 커졌다. 아, 들키면 안 되는데. 순간 보기라도 할까 봐 급히 편지를 등 뒤로 숨겼다. 누가 봐도 이상한 움직임이었으나 손에 든 게 뭐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정수는 무례하게 굴지 않는구나. 다행이다.
"어, 어... 응. 나 그냥 단어 외우고 있었어."
"나는 셔틀콕 찾으러 왔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두리번대는 정수에 지석이 같이 셔틀콕을 찾는 척 뒷걸음질 쳤다. 만약 정수가 뒤쪽으로 오기라도 한다면 편지가 보일 게 분명해 최대한 벽 쪽으로 붙는 편이 좋았다. 좁은 체육 창고에서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아,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데. 진짜 들킬 수도 있는데. 지석이 크게 한 발짝 멀어지는 순간, 어깨에 툭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정리되지 않아 아무렇게 쌓여있던 상자 중 하나였다. 먼지가 가득한 무거운 정체 모를 위태로운 상자들. 언젠간 쓰러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다. 와, 나 이대로 깔리는 건가.
으앗. 지석이 눈을 꽉 감고 확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정수가 급히 달려와 팔을 높이 뻗었다. 무거운 상자가 중심을 잃고 정수의 오른팔에 기울었다. 윽.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떤 기구들인 것 같은 무게다. 정수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지자 지석이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살짝 찌푸리며 상자들을 받치고 있는 정수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벽에 지석을 가둔 것 같은 자세였다. 살짝 올려다본 팔에 올라온 핏줄까지 마치 영화 같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어...? 다정하다.
지석의 머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촉이 좋은 지석은 순간 확신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정수일 거라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대는 걸 보면 확실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살짝 박스를 민 정수가 지석의 눈을 맞췄다. 겹쳐진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다칠 뻔한 건 오히려 정수인데 나를 왜...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지석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배드민턴 콕도 이렇게 꺼내줬겠지. 정수는 착해서 무조건 도와줬을 테니까. 지석이 뒤로 숨긴 편지를 급히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정수는?"
"다행이다. 나도 안 다쳤어."
아무렇지 않게 지석의 허리 옆으로 뻗어온 왼쪽 팔이 어그러진 상자를 툭 밀어 넣었다. 됐다. 그제야 머리 위의 팔도 내려왔다. 지석에게 먼지가 닿지 않게 옆으로 손을 탁탁 터는 정수를 보며 생각했다.
러브레터의 주인공은, 확실하게 정수라고.
5.
음... 아닌가. 겨우 그런 걸로 확신할 수 있나? 두근거리는 심장을 문지르던 지석이 몇 번이나 입술을 짓씹었다. 모든 신경이 다 정수에게 향해 있었다. 아까 체육시간 일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리플레이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지에서 묘사된 모습과 너무 흡사한데. 심증은 확실했으나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또 오배송이 된다면 민지한테 너무 미안해지니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지석이 문학 지문 위로 몇 번이나 이니셜을 그려댔다. 제이. 에스. 정수. 재성. 내 이름이 이렇게 흔한 이니셜이었다니. 심란함에 낙서하다 정신 차려 보니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헐 이거 정수 같다. 정수는 좀 날카롭게 생겼는데 귀엽기도 했다. 편지 안에 적힌 잘생겼다는 말에도 적합한 얼굴. 막 정석 미남은 아니지만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 재성이보단 정수 쪽이, 아 아니다. 이러면 안 되지 곽지석! 민지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 민지 취향은 재성이일 수도 있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종이 울렸다. 아냐 내가 짐작하기보다는 증명을 해야겠어. 그러니까 백 퍼센트의 확신이 들 때, 그때 주는 거야.
지석이 서랍 속 국어 문제집을 들고 재성의 자리로 향했다. 내가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서 정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재성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잖아?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재성의 곁에 다가간 지석이 문제집을 살짝 내밀었다.
"재성아 혹시 나,"
"아, 나 지금 교무실 가야 되는데."
"어, 어..."
책상 서랍에서 유인물을 꺼낸 재성이 빠르게 지석의 옆을 지나쳤다. 순식간에 사라진 재성에 지석이 멍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치... 재성이는 항상 바쁘지. 아 재성이 원래 착한데 너무 바빠서 그런 거야. 재성의 게이지가 오십 퍼센트에서 상승하지 않고 멈춰 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재성이도 확인해봐야 하는데. 지석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곤 꽤 바빠 보이는 동그란 뒤통수에 시선을 옮겼다. 정수도 지금 바빠 보이니까, 오히려 비교하기 좋지 않을까? 한참 노트필기를 하느라 바쁜 움직임 옆으로 지석이 다가섰다. 생각보다 너무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지석의 손이 몇 번이나 허공을 배회했다. 음... 바빠 보이는데 다음에 올까? 방해하는 건 좀 그러니까. 하하. 눈치 보다가 지나치려는데 정수가 먼저 고개를 들고 지석을 마주 봤다.
"응? 뭐 물어볼 거 있어 지석아?"
...아, 다정하다.
말하기도 전에 눈치채는 이 세심함. 정수는 진짜... 진짜 뭐지? 지석이 속으로 또 정수의 게이지를 올렸다. 단 두 번의 마주침으로 벌써 칠십 퍼센트까지 상승했다. 지석이 살짝 문제집을 내밀자 정수는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앉아서 들어. 쪼그려 앉으려던 지석을 만류하고 의자를 빼주는 게 한 치의 의심 없는 다정한 남자 주인공 같았다. 지석의 눈을 맞추며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정수는 정말 사소한 것까지 다 챙기는구나. 정수는 정말이지, 좋아할 만한 사람이구나. 내용은 하나도 듣지 못하고 게이지만 자꾸 상승했다. 으음. 이 정도면 팔십 퍼는 되지 않나.
"이해됐어?"
"어? 어, 고마워..."
"아냐 뭘.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끄덕이는 지석에 정수가 웃는다. 때마침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에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정수의 눈은 이렇게까지 반짝이는구나. 아무래도 편지 속 여름 밤하늘 같던 눈동자의 주인공은 정수가 맞는 것만 같았다.
6.
너무 성급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치만 너무 명확하지 않나. 지석이 반납된 책들을 꽂아 넣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정수처럼 다정한 사람을 안 좋아할 리가 없잖아. 몇 번이나 읽어 이제는 외워버린 문장들이 머릿속에 자꾸만 스쳐 지나간다. 반짝이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세심한. 언제나 한결같이 친절하고 착한.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눈길이 가는. 지석이 읽었던 어떠한 소설의 주인공보다도 유려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점이 신기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단단한 느낌. 대단한 것보다 사소한 것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쌓이면 그렇게 된다. 그런 말들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정수를 떠올리며 소설 코너로 걸음을 옮기자 책장 끝 벽에 기대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자고 있는 건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잘 안 보였지만 손에 쥐고 있는 책과 꽂혀있는 이어폰이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와, 여기 나만 아는 비밀장소였는데 또 아는 사람이 있었다니. 유일하게 책장에 둘러싸여 아지트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여기 진짜 잠 잘 오는데 어떻게 알았지? 곧 종 칠 시간이라 가까이 다가가 깨우려 보니 명찰엔 또 김정수 세글자였다. 어, 또 정수야?
"정수, 이제 종 쳐."
이어폰 때문에 잘 안 들리는지 미동도 없었다. 깨우기 위해 정수의 앞에 쪼그려 앉자 지석의 귀에도 미약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아마도 캐롤인 것 같은 멜로디. 귀에서 살짝 이어폰을 빼주자 소리는 더 선명해졌다. 작게 깔리는 배경음악같이 부드러웠다. 인기척에 살짝 눈을 뜬 정수가 지석을 확인하고는 웃어 보였다.
"응? 지석아 왜?"
"어, 곧 종 칠 거 같아서... 노래 좋다."
"좋아하는 노래야."
살풋 웃은 정수가 지석의 손에 들린 이어폰을 귀에 대준다. 한 쪽씩 나눠 낀 이어폰 사이로 간지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영어라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예쁜 가사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꽤 남았는데, 엄청 기대하나보네. 전에 축제에서 정수가 노래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다. 깨끗하게 뻗어나가는 음색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노래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기분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한 곡이 끝나는 동안 가만히 마주친 정수의 눈은 또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멍하게 굳어있는 지석의 머리를 정수가 살살 매만졌다.
"종 쳤다."
이어폰도 빠졌는데 어느샌가 종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7.
지석이 추리 노트를 몇 번이나 매만졌다. 벌써 정수의 이름 아래 수없이 다양한 묘사들이 가득 쌓였다. 비어 있는 재성과 달리 구십의 수가 쓰여있는 페이지 위를 톡톡 두드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으나 재성에게 이렇다 할 확신을 얻지는 못했다. 곧 방학이라 동아리에 여러 일정까지 마무리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다들 시험이 끝나서 여유로웠는데 고삼을 대비하는 건지 하루 종일 공부하는 모습에 쉽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샤프 꼭다리에 제 볼을 꾹꾹 누르던 지석의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해?"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정수였다. 혹시나 볼까 급히 공책을 덮은 지석이 어색하게 소매로 책상을 덮었다. 어색한 움직임 사이로 마이쮸가 하나 놓인다. 갑자기? 나 주는 건가? 지석이 눈을 깜빡이자 정수가 제 입꼬리를 톡톡 두드려댔다.
"기분 안 좋아 보이길래."
그 말에 지석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 기분 안 좋은 건 아니었는데. 그냥 고민하느라 잠깐 진지해졌을 뿐인데. 정수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구나. 예상하지 못한 다정함이라 지석의 게이지도 고장 난 듯 왔다 갔다 했다. 이런 경우엔 몇 퍼센트나 올려야 하지. 생각 안 해봤는데. 풀어진 지석의 표정이 만족스러운지 예쁘게 웃어 보이는 얼굴에 숫자가 널뛰었다. 순식간에 백 퍼센트를 찍고 서서히 가라앉는다. 아냐 이건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잖아. 이렇게 주관적으로 판단하면 안 돼 곽지석.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정수의 눈동자가 너무 반짝여서. 그 눈을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안 해. 요즘 자주 느끼는 건데, 정수는 가까이서 볼수록 예뻤다. 얄쌍하게 빠진 눈꼬리도 그렇고 각지지 않은 턱도 그렇고, 도톰한 입술도 그렇고...
"웃는 게 예뻐."
아, 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순식간에 대사 빼앗겨버린 지석이 어버버대자 정수에게서 귀여운 웃음소리가 났다. 아니 근데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웃는 게 예쁘... 예쁘다고? 무슨 그런 남주 같은 말을 이렇게 쉽게 하지. 나는, 나는 그리고 남잔데? 이렇게 모두한테 다정할 필요는 없잖아!
귀 끝까지 열이 오른 게 느껴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빨개졌을 게 분명했다. 괜히 민망해진 지석이 마이쮸 만지작대는 소리만 조용한 교실에 울렸다. 어색한 기분이 왜인지 자꾸 심장을 간지럽혔다. 정수는 정말 알면 알수록 넘치게 다정하구나. 그리고 정수가 주는 다정함은 부드럽고 반짝거린다. 마치 별가루를 삼킨 것 마냥 속이 간지러웠다. 이래서 민지가 그런 편지를 쓴 걸까? 민지도 이런 말을 듣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까? 만약에 아니라고 해도 이 편지의 주인공이 꼭 정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장이 향하는 사람은 정수여야 마땅하다고, 지석은 입안 가득 퍼지는 포도 맛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8.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엔 정신이 좀 빠지는 게 분명하다. 아침에 분명히 우산을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오후에 무조건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했음에도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오락실에 가자는 주연의 말을 거절한 뒤라 이미 전부 다 하교한 상태였다. 조금 더 일찍 나올걸. 느긋하게 가방을 정리하고 나온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지석이 닫혀있는 유리문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잔뜩 튀고 있는 걸 보다 가방을 고쳐 들었다. 겨울비는 맞으면 바로 감기 걸릴 텐데. 지석은 원래도 몸이 약한 편이라 내일의 컨디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산 가져다 달라고 형한테 부탁하기는 좀 그런데. 알도 이미 다 써버렸고. 그러면 그냥 뛰는 수밖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잣. 머리에 가방을 올리고 문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지석을 부르는 목소리가 울렸다.
"지석아 같이 가!"
"어? 정수 왜 안 갔어?"
"나 잠깐 음악실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가지고 오느라... 우산 없어?"
"응..."
"그렇게 비 맞고 가면 감기 걸릴 텐데."
"정수는 우산 있어?"
혹시 날 구원해 줄 천사인 걸까? 호감도를 올리려 준비하고 있는데 정수가 빈손을 펼치며 웃었다. 나도 없어. 옆으로 맨 크로스백이 납작한 걸 보니 아마도 악보 정도만 들어있는 것 같았다. 둘 다 맞고 갈 운명이었군. 정수는 다정하지만 좀 허술한 편. 지석의 메모장에 정수의 정보가 업데이트됐다. 아쉽게도 호감도는 유지.
"오늘 밤까지 안 그칠 거라던데, 빨리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어... 도서관에 우산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정수의 말에 지석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렸다. 정수 진짜 천잰가? 순간 도서관을 정리하며 발견했던 주인 없는 우산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두 개 정도는 분명히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확신하고 올라간 삼 층의 도서관 앞 우산꽂이는 생각보다 휑했다. 아, 정수만 똑똑한 건 아니었구나. 이미 다 가져가고 딱 하나 남은 투명우산을 든 정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인용 우산이 정수의 손에 닿자마자 더 작게 느껴졌다.
"지석아 너 어느 쪽에 살아?"
"나 신영슈퍼 옆에 사는데... 정수는 이쪽 아니지?"
"어? 나 영웅철물 위에 살아!"
영웅철물은 신영슈퍼에서 뜀박질로 딱 삼십 초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사는데 왜 몰랐지? 정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잘됐다고 웃었다. 같이 쓰고 가면 되겠다. 우산을 펼치고 가까이 붙는 정수에게서 훅 섬유유연제 향이 끼쳤다. 키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옆에 있으니까 더 큰 것 같네. 어깨를 감싸 당기는 팔이 조심스러운 게 느껴졌다. 정수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들이 죄다 부드러운 편이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거셌음에도 붙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다. 가까운 거리 때문에 바로 귓가에 정수의 목소리가 꽂히는 게 묘하게 간지러운 것만 빼면 괜찮았다. 누군가랑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있었나. 괜히 민망해진 지석이 가방끈을 만지작댔다. 어색하지 않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정수가 꼭 귓속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도망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정수는 이렇게 가까워도 아무렇지 않은가. 나만 좀 이상한 건가. 괜히 여기저기 벅벅 긁고 싶은 그런 마음. 듣기만 해도 착한 게 느껴지는 듯한 말투가 나긋나긋해서 더 그랬다. 노래를 부를 때만큼이나 특이했지만 오히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들어간다. 날씨가 이래서 그런가 더 묘하게 차분한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으면 자주 같이 갈 걸 그랬다. 그치, 지석아."
"어... 정수 원래 밴드부 애들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니야?"
"응, 보통은? 근데 대부분 사거리에서 헤어져서 혼자 가거든."
이렇게 가까이 사는 건 지석이 너가 처음이라고, 앞으로는 끝나고 항상 같이 가자는 말에 지석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부분 혼자 가기도 했고, 정수와 가까워지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재성이를 확인할 수 없다면 정수를 하나하나 체크해 보는 게 확실해질 것 같았다. 이렇게 매일 보면, 그러면 진짜 알 수 있겠지. 금세 기분 이 좋아진 지석이 무의식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하는 습관이었다. 작게 허밍 하는 지석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정수는 굳이 말하지 않고 우산만 더 기울여줬다. 반에서 꼭 처음으로 감기에 걸려 오는 지석을 알았다. 공부하느라 운동을 안 해서 그런 걸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자주 아픈 편이긴 하지만. 강아지 귀처럼 걸을 때마다 붕붕거리는 머리를 구경하는 게 재밌었다. 눈앞에 신영슈퍼가 보이자 지석이 고개를 든다. 순간 귀가 쫑긋 올라온 것처럼 서버린 머리카락이 귀여웠다. 고개를 돌리자 딱 한 뼘 거리로 마주한 지석의 얼굴이 맑게 웃었다.
"고마워, 정수 잘 가!"
대답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우다다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아. 앞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데. 대문을 열기 전 크게 흔드는 손에 웃음이 났다. 꼭 하얀 말티즈가 사람 된 것 같은 기분. 어깨를 안았던 손이 괜히 허전한 거 같아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도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한쪽 어깨가 다 젖은 줄도 모른 채 정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지석이 부르던 콧노래를 따라 불렀다.
9.
설마. 아니겠지? 어제 고마웠다고 이야기하러 온 정수의 자리엔 젖은 악보 하나만 놓여있었다. 어떤 표시들인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연습하면서 적어둔 것 같은 메모들이 빼곡했다. 그리고 그게 죄다 번져있었다. 지석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작은 우산으로 왔는데도 왜 어깨가 하나도 젖지 않았는지. 내가 더 크니까 내가 들게. 그게 편할 거 같아. 그 말에 그냥 끄덕인 게 잘못이었나. 우산을 기울여준 줄 알았으면 괜찮다고 다시 밀어줬을 텐데. 아니면 가방 나 주지...
'언제나 너보다 나를 더 챙겨주는 것 같은 모습이 좋았어.'
순간 스쳐 지나가 는 문장이 또다시 정수를 그려낸다. 처음에 읽었을 땐 지석도 스스로를 의심하느라 뒷머리를 긁적였던 말. 내가 누군가를 그 정도로 배려했던가. 그렇게 되돌아보게 되던 말. 그걸 정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증명해 낸다. 왠지 묘해지는 마음에 지석이 손톱 끝을 틱틱 뜯었다. 정수는 왜 이렇게 착한 거야. 그럼 지금까지 항상 이래왔다는 거잖아.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바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악보를 몇 번이나 빤히 바라보던 지석은 결국 고심하다 쉬는 시간에 매점을 튀어갔다 왔다. 만약에 음악을 좀 더 잘했다면, 정수를 조금 더 잘 알았다면 복구라도 시켜줄 텐데 그게 안 돼서. 지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은 간식공세밖에 없었다. 매점에서 가장 비싼 큰 페레로로쉐를 사서 돌아온 자리엔 다행히도 정수가 있었다.
"저기 정수,"
"응?"
"이거..."
지석이 두 손으로 조심스레 초콜렛을 내밀자 정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 그런 건 아닌데...
"이거 나 먹으라고? 왜?"
빠르게 깜빡거리는 눈에 지석이 책상 위를 콕콕 가리킨다. 거의 다 말라서 쭈글쭈글해진 악보가 걸렸다. 아 이게 신경 쓰여서?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죽은 얼굴이 눈치를 봤다. 따지고 보면 지석의 탓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집에 가서도 혹시 지석이 감기에 걸렸을까 걱정했으나 목소리 들으니까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기울여주길 잘했다. 눈도 잘 못 마주치고 있는 지석이 오늘은 꼭 귀가 축 처진 토끼 같다.
"지석아 너 진짜 착하다."
"내가? 정수가 착한 거지!"
"나는 연습 다 해서 괜찮아."
"그래도오... 내 필기 노트 이렇게 젖었으면 난 조금 울었을 거야."
"안 젖었지? 앞으로는 문 앞까지 데려다줄게. 뛰지 마."
악보를 만지작대는 지석의 손등 위를 톡톡 친 정수가 느낌표를 그려댔다. 간지러운 느낌에 입술을 꼭 문 지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먹을게 지석아. 고마워."
10.
첫눈이 내렸다. 날씨가 추워져서 곧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석의 예상보다는 늦어졌다. 작년에는 조금 더 빠르지 않았나. 멍하게 본 창밖엔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는 친구들로 가득했다. 추위를 즐기지 않는 지석만 이렇게 혼자 교실을 지키곤 했다. 첫눈만이 주는 들뜨는 기분은 지석도 느낄 수 있었지만 굳이 나갈 필요까지 느끼진 못했다. 꼭 미리 찾아온 크리스마스처럼 하루 종일 들뜬 분위기가 교실을 꽉 채웠다.
야자가 없는 수요일엔 학교가 금세 조용해진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사라진 친구들에 지석만 또 여유로웠다. 근데 애들만 그런 게 아니고 쌤들도 그만큼 기다렸구나. 오늘 신간 도서 들어온 거 정리하는 날인데. 텅 비어버린 도서관을 보곤 지석이 자연스레 화분 밑의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사서쌤도 칼퇴가 좋으셨을 거야. 전에 빌린 우산 까먹고 안 들고 왔으니까 이걸로 무마시켜야겠다. 지석이 별다른 불만 없이 도서관 불을 켜고 책들을 점검했다. 꼼꼼히 라벨링이 되어있는지 확인한 뒤 간지에 도장을 찍고 있는데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지석아 너 혼자 있는 거야?
"아, 응. 이것만 금방 하고 가려고. 정수는 왜?"
"혹시 지금 대출 안 되지?"
정수가 지석이 들고 있는 소설을 콕콕 가리키며 물었다. 컴퓨터도 꺼 져있고, 아직 정리도 안 끝난 도서였지만 왜인지 고민됐다.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면 엄청 기대한 책인가 보네. 설레 보이는 듯한 정수의 표정이 귀여워서 지석은 그냥 끄덕였다. 컴퓨터야 켜면 되는 거고,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원래는 안 되는데 정수니까 특별히 해줄게."
"진짜? 너 너무 귀찮은 거 아니야?"
"그냥 컴퓨터만 켜면 되는데 뭘..."
"그럼 그거 하는 동안 도와줄게."
정수가 자연스레 지석의 옆으로 붙어왔다. 그리 많지 않은 권수였지만 일찍 끝나면 좋긴 하니까. 괜찮겠지? 스티커가 꼼꼼히 붙었는지 확인한 뒤 표지만 넘겨 도장을 찍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바로 끄덕거리는 정수의 머리가 차르르 흔들린다. 연예인처럼 약간 긴 머리카락이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학교와는 달리 학생의 인권을 존중한다며 제지하지 않아 가능한 머리. 지석으로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었지만 오늘은 좀 그 점이 마음에 드느 것도 같았다.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정수는 유독 어른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음... 따지면 같은 반에도 이렇게 머리 긴 애들이 많긴 하지만 아무튼 정수는 좀 달랐다. 어쩌면 겉모습이 아니라 새어 나오는 배려에서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지석이 집중하느라 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도장 찍는 정수를 빤히 쳐다보다 컴퓨터 켜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빤히 쳐다봤나. 몰랐겠지? 신경 쓰여서 느려진 타자가 두 번이나 비밀번호를 틀린 걸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겨우겨우 김정수 세 글자를 치니 이미 빌려둔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 정수는 한 번에 다양하게 읽는 편이구나.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과거 대출 기록은 봤던 대로 대부분이 소설책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에세이가 있고, 어...
"정수 사피엔스도 읽었어?"
"재밌어 보여서. 근데 너무 어렵더라... 사실 중간에 포기했어."
"나돈데... 음, 혹시 나 책 한 권 추천해 줄 수 있어?"
"내가? 너가 더 많이 읽을 텐데."
"아, 나는 소설은 잘 몰라서..."
"혹시 러브레터 읽어봤어? 영화로 유명한 건데."
마침 눈도 왔고, 겨울에 읽으면 따뜻해지는 책이라고 조곤조곤 설명하는 말투가 친절하다. 너가 겨울이랑 닮아서 그 런가? 잘 어울려. 정수는 또 그런 대사 같은 말과 함께 웃었다. 겨울에 태어난 건 맞지만 겨울과 잘 어울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그런가? 머쓱해져 볼을 긁적이니 그새 책을 다 정리한 정수가 몸을 일으켰다.
"이거 이제 꽂기만 하면 되는 거지?"
"아, 응. 내가 할 게 도와줘서 고마워. 책 대출됐어!"
"아니야. 같이 하고 같이 가자."
이것까지 시킬 생각은 정말 아니었는데. 중학생 때 도서부였다는 정수의 말에 지석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각자 일곱 권씩 나눴는데 높은 책장도 의자 없이 정리하느라 오히려 정수가 더 빨랐다. 손이 닿지 않는지 지석이 으아아 하는 작은 비명소리를 내는 게 꼭 만화 효과음 같았다. 정리를 마치고 작은 뒷모습을 구경하는 게 꽤나 재밌었다. 지석은 귀여운 구석이 정말 많았다. 조금 버거우면 끄응 하는 소리를 낸다거나 살짝 든 까치발이라거나,
"정수 다 했어?!"
이렇게 예쁘게 웃는 눈이라거나. 죄다 캐릭터 같은 설정들. 이것저것 가져다 대고 표현해 봐도 정확히 묘사하기 어려웠다. 지석이가 읽는 책을 따라 읽으면 좀 묘사할 수 있으려나.
11.
펑펑 오는 눈은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이미 모두 하교하고 난 뒤의 운동장이 다시 새하얗게 덮일 만큼 내리고 있었다. 발자국 찍을 수 있겠다. 백색소음까지 죄다 사라져 버린 거리에 뽀득 뽀득 둘의 눈 밟는 소리만 울렸다. 고요하고 기분 좋다. 지석이 조심조심 더 예쁘게 발자국을 찍으려 노력하자 정수도 그 옆에 선명히 발자국을 남겼다. 작은 곽지석 발이 세 번 새겨지면 김정수는 두 번을 꾹꾹 누르곤 속도를 맞춰갔다.
"정수 이거 꼭 유치원생 된 거 같지 않아? 그 소리 나는 신발 있잖아."
"그러네. 너 지금 유치원생 같아."
"어? 아니 무슨 소리야, 정수도 똑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