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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JS <3

제보

  1.

  지석은 겨울이 싫었다. 너무너무 추운 계절이었다. 손이 얼어버려서 공부도 제대로 안 되는 이 날씨를 지석은 언제나 미워했다. 여느 때와 같이 야자를 하기 위해 책상 서랍에서 책을 몽땅 꺼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제는 질려버린 재미없는 두꺼운 책들 위에 살포시 놓여있는 건, 너무나도 화사한 연분홍색 편지봉투와 가나 초콜렛이었다.

 

 

   [ To. JS <3 ]

 

 

   편지를 발견한 지석은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괜히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기도 하고, 콩콩 뛰는 심장으로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얼어있던 것들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이거 설마 러브레터... 그런 건가? 나한테 누가 이런 걸 줬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지석은 연애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체육시간에도 공부하기에 바빴고 방과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내에 나가 노래방에 가거나, 뽑기를 하거나, 캔모아에서 데이트를 하는 등의 일과는 지석의 하루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달콤한 이벤트는 절대 지석에게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이 편지는 누구인 걸까. 시험을 볼 때보다 더 긴장돼서 미칠 것 같았다.

 

 근데 난 연애를 할 마음이 없는데 어떡하지...?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지석이 일단 편지를 가방에 곱게 넣었다. 학교에서 봤다가 이주연한테라도 걸리면 끝장이다. 전교생한테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고.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의 교실이 한적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아침 뉴스에 분명 한파주의보라고 했었는데. 지석은 야자시간 내내 자꾸만 뜨거워지는 귀를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샤프 뒤로 쿡쿡 입술을 눌러댔고 영어 지문을 읽을 때도 J와 S만 보면 웃음이 나 괜히 밑줄을 치고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자꾸만 이상행동을 보이는 지석에 주연이 몇 번이나 뒤에서 샤프로 등을 찍어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곽지석 수상함' 쪽지가 주연에게서 승민으로, 승민에게서 형준으로 전해지는 것도 모른 채 지석은 몰래 가나 초콜렛을 까먹으며 달콤한 야자시간을 보냈다. 평소라면 나눠줬을 법도 한데 아득바득 한 조각도 주지 않고 모조리 먹어버렸다.

 

 

  [비상 오늘 곽지석 진짜 이상함! -_-^]

 

 

  2.

  행동이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순식간에 가방을 챙긴 지석이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다. 책 한 권 들어있지 않았는데 겨우 그 작은 편지가 뭐라고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편안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읽고 싶어서 샤워까지 빠르게 마친 뒤 책상 위에 앉았다. 혹시라도 찢어질까 조심스레 꺼내든 편지는 빳빳했으나 지석의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름이 적힌 봉투 위를 몇 번이나 문지르며 생각했다.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나 이 정도인가? 큼큼. 괜히 헛기침을 하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다. 공부만 하던 지석에게 연애 좀 하라고 잔소리하던 형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했지만 사실 이런 바람이 불어올 때 흔들리지 않는 편은 아니었다. 들뜬 마음은 이미 저 위로 붕 떠올랐다. 지석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편지를 열었다. 귀여운 글씨가 빼곡한 정성이 가득한 편지였다.

 


다정한 JS에게 ♡.♡ 안녕! 갑자기 편지 받아서 놀랐지? ㅎ.ㅎ 사실은 몇 번이나 전하고 싶었는데 고민하다가 이제서야 주게 되네 >< 우리 곧 방학하잖아... 그럼 너무 오래 못 만날 것 같아서 이렇게 용기 내서 전해!!! 아, 마주 보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당 ㅠ.ㅠ

 

 

  몇 번을 다시 쓴 건지 편지지 위로 꾹꾹 눌린 흔적들이 가득했다. 귀여운 글씨체에 가득 담긴 애정이 편지를 쥐고 있는 손까지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시도했다니. 한 번도 눈치챈 적 없는데. 나 눈치 빠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럼 꽤 오래 나를 좋아했다는 건데... 누구지?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일 거라 확신했다. 지은이인가? 음... 연주?

 

 

  있지, 너랑 마주치면 꼭 지금이 겨울이 아닌 봄 같은 거 너는 알아? 나는 하늘이 맑을 때마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해. 너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 텐데도 말이야! ㅎㅎ  아, 편지에 왜 이름이 없냐면... 나 사실 네 이름만 마주치면 아무 생각도 안 나... ㅜ.ㅜ;; 그래서 이게 지금 네 번째 다시 쓰는 거다...? 내 일기장에도 네 얘기밖에 없는데 네 이름 세 글자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 ㅎ.ㅠ 나 진짜 바보 같지?



  지석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바보 안 같은데!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을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시 같은 고백의 문장들에 지석은 이 편지의 발신자가 문학소녀임을 확신했다. 그러면 이건 설마 정민이인가? 아, 소연이일지도 모르겠다. 가늠해 보던 지석은 다음 줄을 읽고 편지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나 사실 너가 큰 키로 배드민턴 콕 꺼내줬을 때 반한 것 같아 >.<///

 

 

  ...지석의 키는 168이었다.

 

  비상이다. 비상. 진짜 비상. 지석은 순간 정말이지 뭔가가 너무나도 잘못됐음을 느꼈다. 음? 꿈인가? 눈을 다시 비비고 읽어봐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지석은 큰 키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누군가에게 배드민턴 콕을 꺼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석은 체육시간마다 몰래 빠져나와 과외 숙제를 했기 때문에 키가 아무리 상대적인 기준이라고(...) 쳐도 이 편지의 주인공은 어찌 되었든 지석이 아니었다. 쭉 읽어 내려가도 이건 정말이지, 확실히 지석이 아니었다. 

 

  너를 좋아하는 민지가. 거기까지 읽고는 쿵, 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민지야 진짜 미안. 진짜 미안해. 순식간에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겨울은 너무나도 추운 계절이다.

 

 

  3.

  어떻게 이 편지가 나에게 오게 된 걸까. 왜 이렇게 된 걸까. 지석은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등교하는 내내 얼이 빠져있었다. 다시 가방에 고이 넣어온 편지가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왜 하필이면 JS였던 거냐고오...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척거리던 지석을 발견한 주연이 가볍게 헤드락을 걸어왔다.

 

 

 "지슥 왜 죽어감?"

 "가라... 오늘 너 상대할 기분 아니다."

 "싫은데? 초콜렛도 안 주는 쪼잔한 놈 괴롭힐 건데?"

 

 

  아, 젠장! 초콜렛 내가 먹었지.

 

  우뚝 서서 머리를 쥐어뜯는 지석에게서 주연이 멀어졌다. 나 오늘은 너랑 안 있을랭. 너 진짜 이상하당... 주연이 떨어지자마자 지석이 쪼그려 앉아 비명을 질렀다. 주연은 삼십 초 남은 등교 시간을 확인하고 지석을 버린 뒤 전력을 다해 달렸다. 청소는 너 혼자 해!

 

 

  지각으로 벌점까지 받았는데도 정신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남아서 청소하라는 말에도 좀비처럼 끄덕이자 어디 아프냐는 걱정까지 받았다. 그런 건 아니었고, 머릿속에 러브레터 생각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지석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죄다 지석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수신자 오류로 인한 해프닝이었을 뿐이지만 지석에겐 분명히 그 무거운 마음을 읽어낸 책임이 있었다. 게다가 타인의 선물까지 먹어버렸으니, 완전히 책임지고 모든 걸 돌려놓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매점에서 초콜렛을 사서 편지와 함께 JS에게 다시 전해줘야만 한다. 방학까지는 딱 이 주가 남아있었다. 그 안에 모든 걸 해결 해야 한다. 그래. 그렇게 하면 다 없던 일이 되는 거니까,

 

  어, 그런데... JS가 누구지?

 

 

   4.

  사 교시 체육시간에 지석은 자발적으로 체육 창고 구석에 처박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편지를 꺼내 읽었다. 붕 뜬 기분으로 읽어내렸던 편지는 충격적인 문장 -키- 이후로 기억에서 휘발됐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어서 편지를 분석해 JS를 찾아내야 한다. 지석이 한 줄 한 줄 곱씹어가며 JS에 대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현재 알고 있는 거라곤 이니셜이 JS인 데다 키가 크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 몇 명 떠오르는 후보가 있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 반에는 키 크고 다정한 정수도 있고, 지섭이도 있었으며, 재성이도 있었다. 으으... JS가 우리 반에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이러니까 이런 사건이 생긴 걸까. 아, 그래도 지섭이는 아닌 것 같은데. 지섭이는 안 다정한데. 아 근데 민지한테는 다정했을 수도. 머리가 아파온다. 평소에 추리소설을 좀 읽어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 걸 본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차라리 수학문제를 푸는 게 더 쉬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 수학문제? 문득 떠오른 문장에 지석이 편지의 두 번째 장을 헤집었다.

 

 

   '나 너가 모르는 문제 알려줄 때마다 엄청 설렌다? 너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거 같아!'

 

 

  찾았다. 이러면 정말이지 지섭이는 아니다. 지섭이는 전교 꼴찌에서 두 번째를 달리고 있는 친구였으니까. 그럼 남은 건 정수와 재성이 딱 둘이다. 정수는 도서부인 지석이 가장 많이 만나는 친구였다. 항상 소설을 빌려 가는 차분한 친구. 지석과 같은 무리는 아니었지만 매번 다정히 인사해 주고 간식을 나눠주고, 종종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지석이 한 번 아팠던 날 다가와 먼저 필기를 보여준 적도 있었다. 성적이 반장인 재성이만큼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게 문학 문제라면 말이 달랐다. 어떤 과목인지 알려줬으면 쉬웠을 텐데. 국어였는지 수학이었는지 정확히 적어줬다면, 그럼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둘 중에 하나인 건 확실하네. 확률은 오십 퍼센트. 더 얻을 단서가 있을까 싶어 다시 편지를 읽어내리는데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석아 왜 여기 있어?"

  "어? 정수..."

  "공부하고 있었어?"

 

 

  찾을 게 있는지 자연스레 창고로 들어오는 정수에 지석의 눈이 커졌다. 아, 들키면 안 되는데. 순간 보기라도 할까 봐 급히 편지를 등 뒤로 숨겼다. 누가 봐도 이상한 움직임이었으나 손에 든 게 뭐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정수는 무례하게 굴지 않는구나. 다행이다.

 

 

  "어, 어... 응. 나 그냥 단어 외우고 있었어."

  "나는 셔틀콕 찾으러 왔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두리번대는 정수에 지석이 같이 셔틀콕을 찾는 척 뒷걸음질 쳤다. 만약 정수가 뒤쪽으로 오기라도 한다면 편지가 보일 게 분명해 최대한 벽 쪽으로 붙는 편이 좋았다. 좁은 체육 창고에서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아,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데. 진짜 들킬 수도 있는데. 지석이 크게 한 발짝 멀어지는 순간, 어깨에 툭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정리되지 않아 아무렇게 쌓여있던 상자 중 하나였다. 먼지가 가득한 무거운 정체 모를 위태로운 상자들. 언젠간 쓰러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다. 와, 나 이대로 깔리는 건가.

 

  으앗. 지석이 눈을 꽉 감고 확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정수가 급히 달려와 팔을 높이 뻗었다. 무거운 상자가 중심을 잃고 정수의 오른팔에 기울었다. 윽.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떤 기구들인 것 같은 무게다. 정수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지자 지석이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살짝 찌푸리며 상자들을 받치고 있는 정수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벽에 지석을 가둔 것 같은 자세였다. 살짝 올려다본 팔에 올라온 핏줄까지 마치 영화 같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어...? 다정하다.

 

  지석의 머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촉이 좋은 지석은 순간 확신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정수일 거라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대는 걸 보면 확실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살짝 박스를 민 정수가 지석의 눈을 맞췄다. 겹쳐진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다칠 뻔한 건 오히려 정수인데 나를 왜...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지석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배드민턴 콕도 이렇게 꺼내줬겠지. 정수는 착해서 무조건 도와줬을 테니까. 지석이 뒤로 숨긴 편지를 급히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정수는?"

  "다행이다. 나도 안 다쳤어."

 

 

  아무렇지 않게 지석의 허리 옆으로 뻗어온 왼쪽 팔이 어그러진 상자를 툭 밀어 넣었다. 됐다. 그제야 머리 위의 팔도 내려왔다. 지석에게 먼지가 닿지 않게 옆으로 손을 탁탁 터는 정수를 보며 생각했다.

 

  러브레터의 주인공은, 확실하게 정수라고.

 

 

  5.

  음... 아닌가. 겨우 그런 걸로 확신할 수 있나? 두근거리는 심장을 문지르던 지석이 몇 번이나 입술을 짓씹었다. 모든 신경이 다 정수에게 향해 있었다. 아까 체육시간 일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리플레이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지에서 묘사된 모습과 너무 흡사한데. 심증은 확실했으나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또 오배송이 된다면 민지한테 너무 미안해지니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지석이 문학 지문 위로 몇 번이나 이니셜을 그려댔다. 제이. 에스. 정수. 재성. 내 이름이 이렇게 흔한 이니셜이었다니. 심란함에 낙서하다 정신 차려 보니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헐 이거 정수 같다. 정수는 좀 날카롭게 생겼는데 귀엽기도 했다. 편지 안에 적힌 잘생겼다는 말에도 적합한 얼굴. 막 정석 미남은 아니지만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 재성이보단 정수 쪽이, 아 아니다. 이러면 안 되지 곽지석! 민지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 민지 취향은 재성이일 수도 있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종이 울렸다. 아냐 내가 짐작하기보다는 증명을 해야겠어. 그러니까 백 퍼센트의 확신이 들 때, 그때 주는 거야.

 

  지석이 서랍 속 국어 문제집을 들고 재성의 자리로 향했다. 내가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서 정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재성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잖아?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재성의 곁에 다가간 지석이 문제집을 살짝 내밀었다.

 

 

  "재성아 혹시 나,"

  "아, 나 지금 교무실 가야 되는데."

  "어, 어..."

 

 

  책상 서랍에서 유인물을 꺼낸 재성이 빠르게 지석의 옆을 지나쳤다. 순식간에 사라진 재성에 지석이 멍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치... 재성이는 항상 바쁘지. 아 재성이 원래 착한데 너무 바빠서 그런 거야. 재성의 게이지가 오십 퍼센트에서 상승하지 않고 멈춰 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재성이도 확인해봐야 하는데. 지석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곤 꽤 바빠 보이는 동그란 뒤통수에 시선을 옮겼다. 정수도 지금 바빠 보이니까, 오히려 비교하기 좋지 않을까? 한참 노트필기를 하느라 바쁜 움직임 옆으로 지석이 다가섰다. 생각보다 너무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지석의 손이 몇 번이나 허공을 배회했다. 음... 바빠 보이는데 다음에 올까? 방해하는 건 좀 그러니까. 하하. 눈치 보다가 지나치려는데 정수가 먼저 고개를 들고 지석을 마주 봤다.

 

 

  "응? 뭐 물어볼 거 있어 지석아?"

 

 

  ...아, 다정하다.

 

  말하기도 전에 눈치채는 이 세심함. 정수는 진짜... 진짜 뭐지? 지석이 속으로 또 정수의 게이지를 올렸다. 단 두 번의 마주침으로 벌써 칠십 퍼센트까지 상승했다. 지석이 살짝 문제집을 내밀자 정수는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앉아서 들어. 쪼그려 앉으려던 지석을 만류하고 의자를 빼주는 게 한 치의 의심 없는 다정한 남자 주인공 같았다. 지석의 눈을 맞추며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정수는 정말 사소한 것까지 다 챙기는구나. 정수는 정말이지, 좋아할 만한 사람이구나. 내용은 하나도 듣지 못하고 게이지만 자꾸 상승했다. 으음. 이 정도면 팔십 퍼는 되지 않나.

 

 

  "이해됐어?"

  "어? 어, 고마워..."

  "아냐 뭘.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끄덕이는 지석에 정수가 웃는다. 때마침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에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정수의 눈은 이렇게까지 반짝이는구나. 아무래도 편지 속 여름 밤하늘 같던 눈동자의 주인공은 정수가 맞는 것만 같았다.

 

 

  6.

  너무 성급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치만 너무 명확하지 않나. 지석이 반납된 책들을 꽂아 넣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정수처럼 다정한 사람을 안 좋아할 리가 없잖아. 몇 번이나 읽어 이제는 외워버린 문장들이 머릿속에 자꾸만 스쳐 지나간다. 반짝이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세심한. 언제나 한결같이 친절하고 착한.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눈길이 가는. 지석이 읽었던 어떠한 소설의 주인공보다도 유려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점이 신기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단단한 느낌. 대단한 것보다 사소한 것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쌓이면 그렇게 된다. 그런 말들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정수를 떠올리며 소설 코너로 걸음을 옮기자 책장 끝 벽에 기대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자고 있는 건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잘 안 보였지만 손에 쥐고 있는 책과 꽂혀있는 이어폰이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와, 여기 나만 아는 비밀장소였는데 또 아는 사람이 있었다니. 유일하게 책장에 둘러싸여 아지트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여기 진짜 잠 잘 오는데 어떻게 알았지? 곧 종 칠 시간이라 가까이 다가가 깨우려 보니 명찰엔 또 김정수 세글자였다. 어, 또 정수야?

 

 

  "정수, 이제 종 쳐."

 

 

  이어폰 때문에 잘 안 들리는지 미동도 없었다. 깨우기 위해 정수의 앞에 쪼그려 앉자 지석의 귀에도 미약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아마도 캐롤인 것 같은 멜로디. 귀에서 살짝 이어폰을 빼주자 소리는 더 선명해졌다. 작게 깔리는 배경음악같이 부드러웠다. 인기척에 살짝 눈을 뜬 정수가 지석을 확인하고는 웃어 보였다.

 

 

  "응? 지석아 왜?"

  "어, 곧 종 칠 거 같아서... 노래 좋다."

  "좋아하는 노래야."

 

 

  살풋 웃은 정수가 지석의 손에 들린 이어폰을 귀에 대준다. 한 쪽씩 나눠 낀 이어폰 사이로 간지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영어라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예쁜 가사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꽤 남았는데, 엄청 기대하나보네. 전에 축제에서 정수가 노래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다. 깨끗하게 뻗어나가는 음색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노래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기분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한 곡이 끝나는 동안 가만히 마주친 정수의 눈은 또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멍하게 굳어있는 지석의 머리를 정수가 살살 매만졌다.

 

 

  "종 쳤다."

 

 

  이어폰도 빠졌는데 어느샌가 종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7.

  지석이 추리 노트를 몇 번이나 매만졌다. 벌써 정수의 이름 아래 수없이 다양한 묘사들이 가득 쌓였다. 비어 있는 재성과 달리 구십의 수가 쓰여있는 페이지 위를 톡톡 두드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으나 재성에게 이렇다 할 확신을 얻지는 못했다. 곧 방학이라 동아리에 여러 일정까지 마무리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다들 시험이 끝나서 여유로웠는데 고삼을 대비하는 건지 하루 종일 공부하는 모습에 쉽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샤프 꼭다리에 제 볼을 꾹꾹 누르던 지석의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해?"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정수였다. 혹시나 볼까 급히 공책을 덮은 지석이 어색하게 소매로 책상을 덮었다. 어색한 움직임 사이로 마이쮸가 하나 놓인다. 갑자기? 나 주는 건가? 지석이 눈을 깜빡이자 정수가 제 입꼬리를 톡톡 두드려댔다.

 

 

  "기분 안 좋아 보이길래."

 

 

  그 말에 지석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 기분 안 좋은 건 아니었는데. 그냥 고민하느라 잠깐 진지해졌을 뿐인데. 정수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구나. 예상하지 못한 다정함이라 지석의 게이지도 고장 난 듯 왔다 갔다 했다. 이런 경우엔 몇 퍼센트나 올려야 하지. 생각 안 해봤는데. 풀어진 지석의 표정이 만족스러운지 예쁘게 웃어 보이는 얼굴에 숫자가 널뛰었다. 순식간에 백 퍼센트를 찍고 서서히 가라앉는다. 아냐 이건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잖아. 이렇게 주관적으로 판단하면 안 돼 곽지석.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정수의 눈동자가 너무 반짝여서. 그 눈을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안 해. 요즘 자주 느끼는 건데, 정수는 가까이서 볼수록 예뻤다. 얄쌍하게 빠진 눈꼬리도 그렇고 각지지 않은 턱도 그렇고, 도톰한 입술도 그렇고...

 

 

  "웃는 게 예뻐."

 

 

  아, 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순식간에 대사 빼앗겨버린 지석이 어버버대자 정수에게서 귀여운 웃음소리가 났다. 아니 근데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웃는 게 예쁘... 예쁘다고? 무슨 그런 남주 같은 말을 이렇게 쉽게 하지. 나는, 나는 그리고 남잔데? 이렇게 모두한테 다정할 필요는 없잖아!

 

  귀 끝까지 열이 오른 게 느껴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빨개졌을 게 분명했다. 괜히 민망해진 지석이 마이쮸 만지작대는 소리만 조용한 교실에 울렸다. 어색한 기분이 왜인지 자꾸 심장을 간지럽혔다. 정수는 정말 알면 알수록 넘치게 다정하구나. 그리고 정수가 주는 다정함은 부드럽고 반짝거린다. 마치 별가루를 삼킨 것 마냥 속이 간지러웠다. 이래서 민지가 그런 편지를 쓴 걸까? 민지도 이런 말을 듣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까? 만약에 아니라고 해도 이 편지의 주인공이 꼭 정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장이 향하는 사람은 정수여야 마땅하다고, 지석은 입안 가득 퍼지는 포도 맛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8.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엔 정신이 좀 빠지는 게 분명하다. 아침에 분명히 우산을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오후에 무조건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했음에도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오락실에 가자는 주연의 말을 거절한 뒤라 이미 전부 다 하교한 상태였다. 조금 더 일찍 나올걸. 느긋하게 가방을 정리하고 나온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지석이 닫혀있는 유리문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잔뜩 튀고 있는 걸 보다 가방을 고쳐 들었다. 겨울비는 맞으면 바로 감기 걸릴 텐데. 지석은 원래도 몸이 약한 편이라 내일의 컨디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산 가져다 달라고 형한테 부탁하기는 좀 그런데. 알도 이미 다 써버렸고. 그러면 그냥 뛰는 수밖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잣. 머리에 가방을 올리고 문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지석을 부르는 목소리가 울렸다.

 

 

  "지석아 같이 가!"

  "어? 정수 왜 안 갔어?"

  "나 잠깐 음악실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가지고 오느라... 우산 없어?"

  "응..."

  "그렇게 비 맞고 가면 감기 걸릴 텐데."

  "정수는 우산 있어?"

 

 

  혹시 날 구원해 줄 천사인 걸까? 호감도를 올리려 준비하고 있는데 정수가 빈손을 펼치며 웃었다. 나도 없어. 옆으로 맨 크로스백이 납작한 걸 보니 아마도 악보 정도만 들어있는 것 같았다. 둘 다 맞고 갈 운명이었군. 정수는 다정하지만 좀 허술한 편. 지석의 메모장에 정수의 정보가 업데이트됐다. 아쉽게도 호감도는 유지.

 

 

  "오늘 밤까지 안 그칠 거라던데, 빨리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어... 도서관에 우산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정수의 말에 지석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렸다. 정수 진짜 천잰가? 순간 도서관을 정리하며 발견했던 주인 없는 우산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두 개 정도는 분명히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확신하고 올라간 삼 층의 도서관 앞 우산꽂이는 생각보다 휑했다. 아, 정수만 똑똑한 건 아니었구나. 이미 다 가져가고 딱 하나 남은 투명우산을 든 정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인용 우산이 정수의 손에 닿자마자 더 작게 느껴졌다.

 

 

  "지석아 너 어느 쪽에 살아?"

  "나 신영슈퍼 옆에 사는데... 정수는 이쪽 아니지?"

  "어? 나 영웅철물 위에 살아!"

 

 

  영웅철물은 신영슈퍼에서 뜀박질로 딱 삼십 초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사는데 왜 몰랐지? 정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잘됐다고 웃었다. 같이 쓰고 가면 되겠다. 우산을 펼치고 가까이 붙는 정수에게서 훅 섬유유연제 향이 끼쳤다. 키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옆에 있으니까 더 큰 것 같네. 어깨를 감싸 당기는 팔이 조심스러운 게 느껴졌다. 정수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들이 죄다 부드러운 편이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거셌음에도 붙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다. 가까운 거리 때문에 바로 귓가에 정수의 목소리가 꽂히는 게 묘하게 간지러운 것만 빼면 괜찮았다. 누군가랑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있었나. 괜히 민망해진 지석이 가방끈을 만지작댔다. 어색하지 않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정수가 꼭 귓속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도망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정수는 이렇게 가까워도 아무렇지 않은가. 나만 좀 이상한 건가. 괜히 여기저기 벅벅 긁고 싶은 그런 마음. 듣기만 해도 착한 게 느껴지는 듯한 말투가 나긋나긋해서 더 그랬다. 노래를 부를 때만큼이나 특이했지만 오히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들어간다. 날씨가 이래서 그런가 더 묘하게 차분한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으면 자주 같이 갈 걸 그랬다. 그치, 지석아."

  "어... 정수 원래 밴드부 애들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니야?"

  "응, 보통은? 근데 대부분 사거리에서 헤어져서 혼자 가거든."

 

 

   이렇게 가까이 사는 건 지석이 너가 처음이라고, 앞으로는 끝나고 항상 같이 가자는 말에 지석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부분 혼자 가기도 했고, 정수와 가까워지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재성이를 확인할 수 없다면 정수를 하나하나 체크해 보는 게 확실해질 것 같았다. 이렇게 매일 보면, 그러면 진짜 알 수 있겠지. 금세 기분이 좋아진 지석이 무의식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하는 습관이었다. 작게 허밍 하는 지석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정수는 굳이 말하지 않고 우산만 더 기울여줬다. 반에서 꼭 처음으로 감기에 걸려 오는 지석을 알았다. 공부하느라 운동을 안 해서 그런 걸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자주 아픈 편이긴 하지만. 강아지 귀처럼 걸을 때마다 붕붕거리는 머리를 구경하는 게 재밌었다. 눈앞에 신영슈퍼가 보이자 지석이 고개를 든다. 순간 귀가 쫑긋 올라온 것처럼 서버린 머리카락이 귀여웠다. 고개를 돌리자 딱 한 뼘 거리로 마주한 지석의 얼굴이 맑게 웃었다.

 

 

  "고마워, 정수 잘 가!"

 

 

  대답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우다다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아. 앞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데. 대문을 열기 전 크게 흔드는 손에 웃음이 났다. 꼭 하얀 말티즈가 사람 된 것 같은 기분. 어깨를 안았던 손이 괜히 허전한 거 같아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도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한쪽 어깨가 다 젖은 줄도 모른 채 정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지석이 부르던 콧노래를 따라 불렀다.

 

 

  9.

  설마. 아니겠지? 어제 고마웠다고 이야기하러 온 정수의 자리엔 젖은 악보 하나만 놓여있었다. 어떤 표시들인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연습하면서 적어둔 것 같은 메모들이 빼곡했다. 그리고 그게 죄다 번져있었다. 지석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작은 우산으로 왔는데도 왜 어깨가 하나도 젖지 않았는지. 내가 더 크니까 내가 들게. 그게 편할 거 같아. 그 말에 그냥 끄덕인 게 잘못이었나. 우산을 기울여준 줄 알았으면 괜찮다고 다시 밀어줬을 텐데. 아니면 가방 나 주지...

 

 

  '언제나 너보다 나를 더 챙겨주는 것 같은 모습이 좋았어.'

 

 

  순간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또다시 정수를 그려낸다. 처음에 읽었을 땐 지석도 스스로를 의심하느라 뒷머리를 긁적였던 말. 내가 누군가를 그 정도로 배려했던가. 그렇게 되돌아보게 되던 말. 그걸 정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증명해 낸다. 왠지 묘해지는 마음에 지석이 손톱 끝을 틱틱 뜯었다. 정수는 왜 이렇게 착한 거야. 그럼 지금까지 항상 이래왔다는 거잖아.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바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악보를 몇 번이나 빤히 바라보던 지석은 결국 고심하다 쉬는 시간에 매점을 튀어갔다 왔다. 만약에 음악을 좀 더 잘했다면, 정수를 조금 더 잘 알았다면 복구라도 시켜줄 텐데 그게 안 돼서. 지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은 간식공세밖에 없었다. 매점에서 가장 비싼 큰 페레로로쉐를 사서 돌아온 자리엔 다행히도 정수가 있었다.

 

 

   "저기 정수,"

   "응?"

   "이거..."

 

 

   지석이 두 손으로 조심스레 초콜렛을 내밀자 정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 그런 건 아닌데...

 

 

   "이거 나 먹으라고? 왜?"

 

 

   빠르게 깜빡거리는 눈에 지석이 책상 위를 콕콕 가리킨다. 거의 다 말라서 쭈글쭈글해진 악보가 걸렸다. 아 이게 신경 쓰여서?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죽은 얼굴이 눈치를 봤다. 따지고 보면 지석의 탓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집에 가서도 혹시 지석이 감기에 걸렸을까 걱정했으나 목소리 들으니까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기울여주길 잘했다. 눈도 잘 못 마주치고 있는 지석이 오늘은 꼭 귀가 축 처진 토끼 같다.

 

 

   "지석아 너 진짜 착하다."

   "내가? 정수가 착한 거지!"

   "나는 연습 다 해서 괜찮아."

   "그래도오... 내 필기 노트 이렇게 젖었으면 난 조금 울었을 거야."

   "안 젖었지? 앞으로는 문 앞까지 데려다줄게. 뛰지 마."

 

 

   악보를 만지작대는 지석의 손등 위를 톡톡 친 정수가 느낌표를 그려댔다. 간지러운 느낌에 입술을 꼭 문 지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먹을게 지석아. 고마워."

 

 

  10.

  첫눈이 내렸다. 날씨가 추워져서 곧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석의 예상보다는 늦어졌다. 작년에는 조금 더 빠르지 않았나. 멍하게 본 창밖엔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는 친구들로 가득했다. 추위를 즐기지 않는 지석만 이렇게 혼자 교실을 지키곤 했다. 첫눈만이 주는 들뜨는 기분은 지석도 느낄 수 있었지만 굳이 나갈 필요까지 느끼진 못했다. 꼭 미리 찾아온 크리스마스처럼 하루 종일 들뜬 분위기가 교실을 꽉 채웠다.

 

  야자가 없는 수요일엔 학교가 금세 조용해진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사라진 친구들에 지석만 또 여유로웠다. 근데 애들만 그런 게 아니고 쌤들도 그만큼 기다렸구나. 오늘 신간 도서 들어온 거 정리하는 날인데. 텅 비어버린 도서관을 보곤 지석이 자연스레 화분 밑의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사서쌤도 칼퇴가 좋으셨을 거야. 전에 빌린 우산 까먹고 안 들고 왔으니까 이걸로 무마시켜야겠다. 지석이 별다른 불만 없이 도서관 불을 켜고 책들을 점검했다. 꼼꼼히 라벨링이 되어있는지 확인한 뒤 간지에 도장을 찍고 있는데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지석아 너 혼자 있는 거야?

  "아, 응. 이것만 금방 하고 가려고. 정수는 왜?"

  "혹시 지금 대출 안 되지?"

 

 

  정수가 지석이 들고 있는 소설을 콕콕 가리키며 물었다. 컴퓨터도 꺼져있고, 아직 정리도 안 끝난 도서였지만 왜인지 고민됐다.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면 엄청 기대한 책인가 보네. 설레 보이는 듯한 정수의 표정이 귀여워서 지석은 그냥 끄덕였다. 컴퓨터야 켜면 되는 거고,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원래는 안 되는데 정수니까 특별히 해줄게."

  "진짜? 너 너무 귀찮은 거 아니야?"

  "그냥 컴퓨터만 켜면 되는데 뭘..."

  "그럼 그거 하는 동안 도와줄게."

 

 

  정수가 자연스레 지석의 옆으로 붙어왔다. 그리 많지 않은 권수였지만 일찍 끝나면 좋긴 하니까. 괜찮겠지? 스티커가 꼼꼼히 붙었는지 확인한 뒤 표지만 넘겨 도장을 찍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바로 끄덕거리는 정수의 머리가 차르르 흔들린다. 연예인처럼 약간 긴 머리카락이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학교와는 달리 학생의 인권을 존중한다며 제지하지 않아 가능한 머리. 지석으로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었지만 오늘은 좀 그 점이 마음에 드느 것도 같았다.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정수는 유독 어른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음... 따지면 같은 반에도 이렇게 머리 긴 애들이 많긴 하지만 아무튼 정수는 좀 달랐다. 어쩌면 겉모습이 아니라 새어 나오는 배려에서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지석이 집중하느라 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도장 찍는 정수를 빤히 쳐다보다 컴퓨터 켜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빤히 쳐다봤나. 몰랐겠지? 신경 쓰여서 느려진 타자가 두 번이나 비밀번호를 틀린 걸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겨우겨우 김정수 세 글자를 치니 이미 빌려둔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 정수는 한 번에 다양하게 읽는 편이구나.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과거 대출 기록은 봤던 대로 대부분이 소설책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에세이가 있고, 어...

 

 

  "정수 사피엔스도 읽었어?"

  "재밌어 보여서. 근데 너무 어렵더라... 사실 중간에 포기했어."

  "나돈데... 음, 혹시 나 책 한 권 추천해 줄 수 있어?"

  "내가? 너가 더 많이 읽을 텐데."

  "아, 나는 소설은 잘 몰라서..."

  "혹시 러브레터 읽어봤어? 영화로 유명한 건데."

 

 

  마침 눈도 왔고, 겨울에 읽으면 따뜻해지는 책이라고 조곤조곤 설명하는 말투가 친절하다. 너가 겨울이랑 닮아서 그런가? 잘 어울려. 정수는 또 그런 대사 같은 말과 함께 웃었다. 겨울에 태어난 건 맞지만 겨울과 잘 어울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그런가? 머쓱해져 볼을 긁적이니 그새 책을 다 정리한 정수가 몸을 일으켰다.

 

 

  "이거 이제 꽂기만 하면 되는 거지?"

  "아, 응. 내가 할 게 도와줘서 고마워. 책 대출됐어!"

  "아니야. 같이 하고 같이 가자."

 

 

  이것까지 시킬 생각은 정말 아니었는데. 중학생 때 도서부였다는 정수의 말에 지석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각자 일곱 권씩 나눴는데 높은 책장도 의자 없이 정리하느라 오히려 정수가 더 빨랐다. 손이 닿지 않는지 지석이 으아아 하는 작은 비명소리를 내는 게 꼭 만화 효과음 같았다. 정리를 마치고 작은 뒷모습을 구경하는 게 꽤나 재밌었다. 지석은 귀여운 구석이 정말 많았다. 조금 버거우면 끄응 하는 소리를 낸다거나 살짝 든 까치발이라거나,

 

 

  "정수 다 했어?!"

 

 

  이렇게 예쁘게 웃는 눈이라거나. 죄다 캐릭터 같은 설정들. 이것저것 가져다 대고 표현해 봐도 정확히 묘사하기 어려웠다. 지석이가 읽는 책을 따라 읽으면 좀 묘사할 수 있으려나.

 

 

  11.

  펑펑 오는 눈은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이미 모두 하교하고 난 뒤의 운동장이 다시 새하얗게 덮일 만큼 내리고 있었다. 발자국 찍을 수 있겠다. 백색소음까지 죄다 사라져 버린 거리에 뽀득뽀득 둘의 눈 밟는 소리만 울렸다. 고요하고 기분 좋다. 지석이 조심조심 더 예쁘게 발자국을 찍으려 노력하자 정수도 그 옆에 선명히 발자국을 남겼다. 작은 곽지석 발이 세 번 새겨지면 김정수는 두 번을 꾹꾹 누르곤 속도를 맞춰갔다.

 

 

  "정수 이거 꼭 유치원생 된 거 같지 않아? 그 소리 나는 신발 있잖아."

  "그러네. 너 지금 유치원생 같아."

  "어? 아니 무슨 소리야, 정수도 똑같애!"

  "이렇게 큰 유치원생이 어딨어 지석아."

 

 

  그 말에는 또 할 말이 없어서 지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수가 좀 크긴 하지. 그래서 민지도 그게 좋다고 했고... 사실이긴 한데. 금방 전투력을 잃은 지석에 정수가 큭큭 웃었다. 조금만 장난쳐도 이렇게 반응이 재밌었다. 그런데 거기에 딱히 상처를 받지는 않고 다시 금방 웃어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 지석을 보면 정수도 다른 고민 없이 마음이 편해졌다. 지석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알면 알수록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질 만큼.

 

 

  "있잖아 정수, 전에 듣던 노래도 연습하던 거야?"

  "응. 들려줄까? 녹음해 둔 파일 있는데."

 

 

  끄덕이는 지석에 정수가 주머니에서 엠피쓰리를 꺼내 들었다. 도서관에서처럼 한 쪽씩 나눠 낀 이어폰 사이로 몇 번을 불렀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저스틴 비버는 아는데 이 노래는 처음 들어. 가장 좋아하는 캐롤이라 그런 건지 감미로운 기타와 정수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수의 목소리는 섬세한데 단단한 힘이 있었다. 진작 들려달라고 할 걸. 괜히 간질거리는 마음에 꼭 이제야 완전한 겨울을 맞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이런 설렘을 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정수는 정말이지 좋아할 만한 사람이구나. 나 같아도 반하겠다. 노래에 맞춰 지석의 머리칼이 살살 흔들렸다.

 

 

  "정수는 캐롤 자주 들어?"

  "응. 겨울 시작되면 거의 바로? 크리스마스 설레잖아."

 

 

  아. 아, 크리스마스. 순간 스치는 문장에 지석이 괜히 정수의 눈치를 봤다. 민지가 꼭 크리스마스는 정수랑 보내고 싶다고 했는데.

 

 

  "그럼... 크리스마스에 약속 있어?"

  "음, 아직은?"

 

 

  다행이다. 괜히 편지가 늦어서 뺏기기라도 했을까 긴장했던 표정이 풀렸다. 그래도 정수 인기 많아서 더 늦어지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빨리 줘야겠다. 또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리는 지석에 정수가 말랑한 볼을 콕 찔렀다.

 

 

  "너는? 크리스마스에 약속 있어?"

  "어... 나도 아직은? 왜?"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정수가 조심스레 지석의 머리를 살살 털어주었다. 쌓여있던 눈들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려와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손으로 막아준 건 정수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12.

   다이어리 위 숫자가 금세 한 자리가 되기 직전이었다. 멍하니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흐른다. 지석이 괜히 볼펜으로 종이만 콕콕 찍어댔다. 정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데. 정수의 옆에 쓰여있는 숫자는 이미 꽉 채워진 채였다. 그 아래에 해당되는 문장들은 이미 편지를 그대로 옮겨 쓴 수준이었다. 정수가 해당되지 않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봐도 수신자가 명확했다. 그런데 왜인지 자꾸 어딘가 걸리는 느낌. 비 오는 날 일인용 우산까지 기울여준 정수가, 사소한 것까지 다 챙겨주는 정수가 민지의 첫사랑이 아닐 리가 없는데도 뭔가 괜히 망설여졌다. 그냥 들키지 않게 편지를 두는 게 무서워서 그런가. 음... 그런 거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떡하지.

 

 

   "곽지석 빨리 뽑아!"

   "어, 어. 미안."

 

 

   얼마 남지 않은 방학에도 자리를 바꾸겠다고 쪽지 통이 돌고 있었다. 부반장인 연희의 재촉에 대충 맨 위에 있는 쪽지를 뽑아 든 지석이 칠판 앞의 표를 확인했다. 이십오. 이십오.... 창가 맨 뒷자리였다. 그리고 그 옆의 이십육엔, 방금 분필로 또박또박 적은 김정수 세 글자가 있었다. ...어? 헐. 나 불쌍해보였나. 아니면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세상이 전부 지석을 돕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이러지. 일 년 내내 가까운 자리도 걸려본 적이 없는데. 멍하게 눈 깜빡이자 주연이 지석의 쪽지를 훔쳐보곤 빼앗아 들었다. 와 제발 나랑 바꾸자. 제발. 너 앞자리 좋아하잖아 지석. 나 조용히 자고 싶어! 랩이라도 하듯 우다다다 튀어나오는 말에 지석이 빠르게 다시 쪽지를 잡아채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싫은뎅. 평소라면 조용히 주연의 맨 앞자리와 교환했겠지만 이번엔 아니다.

 

 

  "아니 진짜 너 요즘 왜 이렇게 이상하지? 엉?"

  "가라고 했다."

 

 

  뺏기기라도 할까 급히 쪽지 들고 일어선 지석이 제 이름 세글자 예쁘게 적고 돌아왔다. 잔뜩 표정 구기고 혀 내미는 주연을 못 본 척하고 자리를 옮기는 내내 콧노래가 나왔다. 짝이 되면 어떻게든 기회는 많아질 테니까. 금방이라도 울적했던 기분이 맑게 개는 것 같았다. 웃으며 손 흔드는 정수가 꼭 이른 봄이라도 되는 것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정수는 정말 이주연이랑 달라. 낑낑대며 옮기는 지석의 책을 대신 받아 넣어주고 의자를 빼주는 행동이 익숙하다. 꼭 그려낸 다정한 남자 주인공처럼. 이미 꽉 채워진 게이지가 자꾸 넘쳐흘렀다. 사르르 퍼지는 웃음에 정수의 몸이 지석을 향해 기운다. 가까워진 거리에 시선이 맞아들어갔다.

 

 

  "잘 부탁해 지석아."

  "응 정수도 잘 부탁해!"

  "자리 더 빨리 바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방학까지는 겨우 십 일. 내년이 되면 아마 다른 반이 될 확률이 높다. 정수의 말처럼 일찍 짝이 됐다면 빨리 친해졌을까? 아마도 정수는 착하고 다정하니까 그랬을 거다. 아쉬워진 지석이 옆머리를 살짝 긁적이자 또 책상 위에 마이쮸가 놓였다. 이번에도 포도 맛이려나. 은색 포장지를 뜯고 입에 넣자 가득 요구르트 맛이 퍼졌다. 새콤달콤한 맛에 지석이 맑게 웃었다.

 

 

  "이거 뭔가 너랑 잘 어울려."

 

 

  파란색과 하얀색이 섞인 마이쮸 포장지를 흔드는 정수의 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하얗다는 말인가 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별거 아닌 행동에도 마음이 간지러운 걸 보면, 괜히 민지가 정수를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젠 너무 확실해져 버렸다. 진짜 주기만 하면 된다. 가방 안에 든 편지를 떠올리며 지석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13.

  체육시간 지석의 자리는 언제나 고정석이었다. 겨울에는 대부분 가장 골대와 먼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연말이라 꼬여버린 시간표 덕분에 지석의 반은 체육관 농구 코트를 빼앗겼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운동장 스탠드네. 지석이 시끌벅적하게 팀을 나누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책을 꺼내 들었다. 추워서 죽죽 늘린 소매로 고정해 둔 단어장에 시선을 내리자 얼마 가지 않아 그림자가 졌다. 살짝 고개를 드니 웃고 있는 정수가 있었다.

 

 

  "정수 오늘 안 해?"

  "응. 나 이거 때문에."

 

 

  살살 흔들어 보이는 왼손의 새끼손가락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끝에 삐져나온 은색 지지대가 반짝였다. 뭐야 왜 이래? 분명히 아침까지는 못 본 것 같은데. 정수가 계속 손을 아래에 두고 있어서 몰랐던 건가? 축 쳐진 지석의 눈썹에 정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까 점심시간에 문을 잡아주다가 바람에 닫혀버려서 끼었다고 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유를 알자 더 심각해진 지석이 정수의 손가락만 빤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석아 호 해줘."

  "호오... 빨리 나아야 돼. 아 진짜 아팠겠다."

 

 

  어... 장난이었는데. 아무런 의심 없이 바로 두꺼운 입술 내밀고 호 불어주는 지석에 정수가 살짝 굳었다. 전에 사물함에 손가락 끼인 적 있었다고 그때 너무 아팠다며 조잘거리는 지석의 말은 하나도 안 들렸다. 여전히 걱정하느라 팔자가 된 눈썹과 공감하며 꾹꾹 눌러대는 입술만 정수의 시선에 떠다녔다. 진짜... 착하고 귀엽다.

 

 

  14.

  공부가 아닌 다른 주제가 하루를 이렇게 꽉 채울 줄 지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좋은 노래가 있으면 형한테 알을 빌려 정수에게 문자를 보냈고, 정수는 꼭 답장으로 좋은 가사를 골라 답했다. 신기하게도 전부 지석이 좋아하는 구절들이었다. 크리스마스 디데이와 함께 정수가 매일 보내주는 노래들도 어느새 지석의 재생목록을 꽉 채우고 있었다. 주고받은 문자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속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가끔은 필사를 하기도 했다. 그럼 그게 다 정수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지석이 라디오 신청곡을 보내듯 정수에게 주면, 정수는 늦은 시간에 지석에게 전화를 걸어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했다. 꼭 상상한 것보다 두 배 정도 좋은 목소리였다. 짧은 전화를 마치고 잠에 들면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정수 덕분에 기상 시간이 십 분이나 빨라졌다. 꼭 처음 입학하던 날처럼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방학이 가까워져 왔어도 곧 고삼이라는 이유로 수업 진도는 멈추지 않았다. 정수는 유난히 수학을 어려워했는데, 집중력이 떨어질 때마다 노트에 이것저것 낙서하기를 좋아했다. 문제를 풀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치 열심히 문제를 풀 듯 책상에 얼굴을 박고 이것저것 그려댔다. 그러고는 문제를 다 푼 지석에게 보여주는데 대부분 강아지나 입술이 두꺼운 알 수 없는 캐릭터 따위였다. 지석이 전날 보내준 가사가 여기저기 쓰여있고 그 가운데에는 지석이 가득한 낙서장. 그러면 지석은 그걸 보고 웃다가 쌤이 돌아보기 전에 선을 찍찍 그어 정수의 얼굴을 옆에 그려놓았다. 웃음을 참느라 다시 고개를 책상에 묻은 정수의 어깨가 흔들렸다. 지석은 이전에 수업시간에 이렇게 장난쳐본 적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 이주연이 자꾸 쪽지를 던지고 놀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방학 안 했으면 좋겠다아."

  "그러게... 지석아 우리 또 같은 반 될 수 있을까?"

  "반이 총 열세 개니까, 우리가 같은 반이 될 확률은 7퍼센트. 정확히 말하자면 약 7.7퍼센트 정도야."

 

 

  지석이 꾹꾹 계산된 확률을 적자 그 옆에 정수가 초록색 형광펜으로 네잎클로버를 잔뜩 그려댔다. 칠은 행운의 숫자니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두 개잖아. 그러면 두 배로 행운이 오지 않을까? 지석이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하곤 웃는다. 모든 걸 다 영화같이 만들어버리는 정수. 도저히 다른 친구들에게서는 듣지 못할 말랑한 말들을 정수는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렇게 맑은 얼굴을 보니 겨우 두 자릿수도 안 되던 그 낮은 확률이 왜인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수학적 계산보다 예쁜 말들이 더 믿고 싶어질 때가 있구나. 지석으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15.

  아침부터 정수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추우니까 꼭 따뜻하게 챙겨입어. 정수의 당부로 목도리부터 장갑까지 끼고 나왔더니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나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녹아버린 눈에 전부 빙판길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고 그냥 편한 신발을 신은 게 문제였다. 덕분에 등교 시간이 두 배로 걸릴 줄은. 넘어지는 순간 큰일 나. 조심해야 돼. 정수가 휘청거리는 지석을 몇 번이나 잡아주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도 교실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나가는 게 위험했다. 점심시간 종이 울렸는데도 일어나지 못한 지석이 멍하게 창문 밖만 바라봤다. 특히나 급식실로 가는 길은 조리실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해 여기저기 방해물이 있는 위험 코스였다. 그치만 오늘은 수다날인데. 잔치국수 나오는데. 진짜 맛있을 것 같은데. 괴로움에 끙끙 앓자 겨우 잠에서 깬 정수가 지석의 볼을 콕 찔렀다.

 

 

  "점심 안 먹어?"

  "으아아... 고민 중이야."

  "엄청 형광펜 많이 쳐져 있는데도?"

 

 

  지석이 붙여둔 급식표를 콕콕 가리킨 정수가 고개를 갸웃댔다. 나도 먹고 싶은데 안 될 거 같애. 자초지종을 듣자 웃음이 터진 정수가 지석을 일으켰다. 뭐가 걱정이야. 나랑 같이 가면 되지. 그런 왕자님 같은 말과 함께. 정수는 원래 균형감각이 남들보다 좋은 건지 아침보다 휘청이는 지석의 손을 단단히 잡고 걸었다. 조금이라도 미끄러워 보이면 깍지를 꽉 끼곤 옆으로 당겼다. 넘어져도 받을 수 있는 쪽으로. 장갑 대신 닿는 정수의 손은 차가웠으나 별로 놓고 싶지는 않았다. 위험해질 때마다 가까워진 덕에 급식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빈틈없이 딱 붙은 상태였다. 유리문에 비친 모습이 너무 다정한 연인 사이 같아서 화들짝 놀란 지석이 괜히 헛기침하며 떨어졌다. 와 진짜 깜짝이야.

 

 

  "하하. 누가 보면 오해 하겠,"

  "어, 조심!"

 

 

  뒷걸음질 치다가 헛디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지석의 팔을 잡아당기자, 가벼운 몸이 푹 정수의 품에 안겼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감싼 손이 단단하다. 의도치 않게 가슴팍에 볼이 닿은 그런 너무 클리셰적인 장면이 됐다. 귀로 들리는 심장 소리가 정수의 것인지 지석의 것인지 도저히 구분되지 않는 거리였다. 쿵. 쿵. 쿵. 쿵. 쿵. 묵직하고 빠른 박동이 지석의 머리를 울린다. 여전히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너무 포근했다. 어색하게 떨어진 몸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괜찮냐고 몇 번이나 확인하는 정수에게 지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16.

  나 설마 변태는 아니겠지. 조용하게 라디오를 틀어놓고 책상에 이마를 댄 지석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까 점심시간에 정수의 가슴팍에 안겼던 게 하루 종일 리플레이돼서 오늘은 영어단어 하나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이렇게 집중이 안 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나 지금 왜 정수한테 설레냐고. 대체 왜. 정수한테 나는 향기가 좋아서 그런가. 피죤 뭐 쓰는지 물어볼 걸 그랬나. 엄마한테 그걸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다...

 

  근데, 정수는 운동부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몸이 큰 거지. 작고 왜소한 지석과 달리 정수는 지석과 비슷하게 생활하면서 과장 없이 몸이 한 뼘은 넘게 더 큰 것 같았다. 넓은 가슴팍에 닿았던 볼을 괜히 벅벅 문지르며 기억을 지워보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또다시 두근거리는 마음에 입술을 꾹꾹 씹어내느라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이마를 콩콩 책상에 박아봐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리자 책상 끄트머리엔 정수가 추천해 줬던 책이 있었다. 러브레터. 아, 맞다.

 

  잊고 있던 숙제가 떠올랐다. 나 정수랑 편지 때문에 가까워진 거였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관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편지는 뒷전이 됐다. 정수의 다정한 행동들이 편지의 묘사와 맞는지 확인하는 게 지석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요즘의 지석은 그러지 못했다. 정수의 행동이 민지에게도 그렇게 닿았을지 생각하지 않았다. 편지에 없는 내용에도 설렜고, 그냥 같이 있는 순간들이 재밌었다. 편지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로서의 정수를 알아가는 게 좋았다. 잘못 발송된 편지. 그게 계기였지만 어느샌가부터 정수는 편지 밖에서 지석에게 닿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이걸 신경 쓰고 싶지가 않은데. 빨리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왜인지 주고 싶지가 않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감정의 이름을 정의 내릴 수 없어 답답했다.

 

  근데, 사실 편지의 대상이 정수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정수가 빌려준 엠피쓰리와 편지를 꺼내든 지석이 이어폰을 꽂고 차근차근 다시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수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지금까지 지석의 생각이 다 착각인 걸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정수를 너무나도 잘 알게 된 지금,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모든 게 다 정수를 그려낸 듯한 묘사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흘러나오는 정수의 목소리가 한 치의 의심조차 전부 지워버린다. 이런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 부르는 정수가 주인공이 아닐 확률은 아마, 정수가 나를 좋아할 확률 정도 되겠지. 엠피쓰리 중간에 붙어있는 까만 별 스티커가 마음을 콕콕 찌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마음이 어떻든 편지를 주인에게 돌려줄 의무가 지석에겐 있었다. 생각보다 조금 늦어져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수신자는 명확해졌으니까 확실히 목적은 이뤘네. 정수가 맞다는 걸 알았잖아. 그래 지석아 잘했어! 그럼 됐지! 애써 속으로 밝은 척 마음을 다잡아봐도 입꼬리가 올라가지 못했다. 귀에 울리는 정수의 목소리를 더 참을 수 없어 꺼버리곤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 몇 번이나 뒤척였다.

 

 

  17.

  정수에게 연락이 오기 전 먼저 간다는 문자를 보내놓고 뛰쳐나왔다. 괜히 들키기라도 할까 봐 매점 대신 영진슈퍼에서 가나 초콜렛을 사기 위함이었다. 내내 정신이 빠진 상태라 천 원만 냈다가 혼났다. 아, 가격이 올랐었지... 겨우 주머니를 뒤져서 이백 원을 더 내고 나왔다. 이렇게 추운 날인데도 워낙 만지작대느라 표면이 살짝 녹은 게 느껴졌다. 놀라서 금세 가방에 넣었더니 어깨가 또 너무나도 무거운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정수의 사물함에 초콜릿과 편지를 넣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으나 지석은 그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곧 정수가 올 텐데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편지를 주고 싶지 않은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어젯밤부터 지석을 괴롭히는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어려운 문제. 울적한 마음에 심장이 또 무겁게 쿵쿵 댄다. 왜인지 코가 시큰거려오는 것만 같아 그냥 눈 딱 감고 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 옆으로 가나 초콜렛과 러브레터를 끼워 넣은 지석이 빠르게 문을 닫고 자리로 와서 엎드렸다. 일부러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웠다. 정수가 와도 마주치지 않게. 괜히 본 창밖은 예쁘게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백하기 좋은 날씨. 펑펑 오지도 않고 예쁘게 내리는 그런 눈. 아마 정수도 그 편지를 읽으면 민지를 좋아하게 되겠지. 더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서 눈을 감았다.

 

 

  18.

  평소보다 잠이 훨씬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정말 감기라도 걸린 건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지석이 눈을 뜬 건 이 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시끄러워진 소리에 조례가 시작된 줄 알았는데 이미 수업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고 했다. 선생님도 어디 아픈가 해서 안 깨웠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설명하는 정수에 지석이 괜히 입술을 꾹꾹 물었다.

 

 

  "진짜 어디 아파? 양호실 갈래?"

  "어... 그런 건 아닌데."

 

 

  정수가 자연스레 지석의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잰다. 또 가까워진 거리에 훅 정수의 향이 끼쳤다. 포근한 냄새. 자신보다 살짝 더 뜨거운 것 같다고 말하는 얼굴이 진지했다. 이젠 안 다정해도 되는데 또 이러네. 정수는 진짜 쓸데없이 너무 다정해. 그만 증명해도 된단 말이야.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몸을 뒤로 빼자 놀란 정수가 눈을 크게 떴다. 내린 손이 민망해 보여서 지석도 정수의 눈치를 봤다. 그런 게 아니라... 혹시 감기일 수도 있으니까. 옮을까 봐. 소심한 변명에 정수의 표정이 좀 풀린다. 난 진짜 괜찮은데. 그 말도 지석에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열이 더 오르기만 했다.

 

 

  "오늘은 마이쮸 없어. 대신 이거."

  "응?"

  "너 닮았어."

 

 

  기다렸다는 듯 져지 주머니에서 띠부띠부씰을 꺼낸 정수가 웃었다. 케로로 빵 먹고 나온 우는 타마마 스티커가 딱 지금 지석의 심정 같았다.

 

 

  19.

  지석은 저녁밥도 거르고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가장 친한 친구와 멀어지는데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하다는 사실을. 여자친구가 생기면 정수의 첫 번째는 언제나 민지일 테니까. 그러면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게 뻔하니까. 점심도 둘이 먹게 될 거고 문자도 둘이 주고받을 테니까. 당연히 지금 정수에게도 지석이 첫 번째는 아니겠지만, 다른 사람이 지석을 앞지르는 건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질투라는 감정이 좀 나쁜 것 같다가도 드는 마음을 어떻게 조절할 수는 없었다. 나랑만 놀라고 떼쓰는 초등학생은 이제 아니니까 그냥 꾹꾹 참아내야지. 친구의 연애는 응원해주는 게 맞잖아. 근데 오승민도 이주연도 여자친구 사귈 때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그냥 편지를 내가 전달해 줘서 그런 건가. 아마 지금쯤이면 정수도 편지를 읽었겠지. 그렇게 민지에게 문자를 보냈을 거고, 그리고... 음. 사귀자고 했으려나. 그랬겠지. 나 같아도 그랬을 거니까. 내일 가면 바로 축하한다고 해줘야겠다. 해줄 수 있을까.

 

  지석이 생각을 비우려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감미로운 디제이의 목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정수도 라디오 하면 진짜 잘할 것 같은데. 전화할 때 듣는 목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편이니까. 정수는 노래도 많이 아니까 재밌어할 거 같다. 밴드부가 아니었으면 아마 방송부를 했으려나. 목소리가 꼭 자장가 같다고 말해줄 걸.

 

 

  '오겡끼데스까-. 날이 많이 추워지는 요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오늘도 눈이 왔는데요, 춥고 고단하더라도 예쁘게 내리는 눈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겨울은 너무나도 설레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시작을 여는 "오겡끼데스까" 어떤 영화의 명대사인지 다들 아시죠? 바로 영화 러브레터에 나오는 대사였습니다. 흰 눈밭에서 온 마음을 다해 외치는 말. 여러분은 잘 지내고 있냐고 외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첫 곡으로 김형중의 그랬나봐, 듣고 오겠습니다.'

 

 

 하필이면 또 정수가 추천해 준 책이네. 잘 지내고 있냐고 외치고 싶은 사람. 그런 건 보통 오래도록 보지 못한 사람이 생각나기 마련인데 왜 또 정수가 생각나는 걸까. 바로 몇 시간 전에 헤어진 정수. 합주가 있는 날이라 집에 같이 오지 못해서일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책의 표지 위를 톡톡 두드리며 지석이 눈을 감았다. 시야가 깜깜해지자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지석의 마음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랬나봐, 나 너를 좋아하나봐

  하루하루 네 생각만 나는 걸

 

 

  하루가 누군가의 생각으로 꽉 찬다면, 그건 좋아하는 감정인 걸까. 단순히 친구로서의 감정은 아닌 걸까. 크게 터진 지석의 한숨이 노랫말과 섞여 흩어져갔다.

 

 

  20.

  뭔가 크게 잘못됐다. 지금이 꿈인가? 아니면... 어제의 일이 전부 꿈인 걸까? 아닌데. 아닌데... 책상 위에 붙은 타마마 스티커를 만지며 지석은 생각했다. 혹시 지금 무한루프 세계 같은 곳에 와버린 걸지도. 아, 형준이가 만화책 볼 때 같이 좀 읽을걸. 아니 이게 아니지. 이거 진짜인가. 혀끝을 씹어본 지석이 아릿한 감각에 몸을 움찔 떨었다. 꿈 아니네. 아니 근데 꿈이 아닐 수가 있나.

 

  그러니까 어제 정수 사물함에 둔 편지가, 왜 또 내 책상 서랍에 있냐고.

 

 

  하도 뜯어보느라 너덜너덜해진 스티커를 떼고 문구점에서 산 나비 스티커를 붙여두었다. 그런데 그게 열린 흔적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게다가 초콜릿까지 다시 돌아왔다. 저주인형인가? 저주편지? 사실은 세로로 읽으면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같은 내용이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그럼 이게 왜 다시 여기에 온 거지.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나 착하게 산 것 같은데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성호를 그은 지석이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잘못 본 걸 거야. 그래야만 해. 심호흡을 하고 책상 아래에 다시 손을 넣었다. 사라져 있으라는 기도가 무색하게도, 분홍색 편지는 이 주 전처럼 지석의 두꺼운 문제집 위에 살포시 놓여있을 뿐이었다. 와. 거짓말... 들키지 않도록 빠르게 다시 편지를 넣고 머리를 감쌌다. 나 설마 정수 사물함에 넣었다고 착각하고 서랍에 넣어둔 건가. 얼마나 졸렸던 거지. 나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닌데. 근데 어제 상태를 보면 아마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런가보다. 그래, 그렇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될 리가 없지.

 

 

  "오늘도 몸 많이 안 좋아?"

 

 

  끙끙대는 지석의 머리를 쓰다듬은 정수가 또 걱정된다는 듯 묻는다. 괜찮다며 고개를 들자 책상 위로 간식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케로로 빵에 포켓몬 빵, 차카니랑 나나콘까지 잔뜩이었다. 점심을 거른 지석이 신경 쓰였는지 그걸 다 밀어주곤 피크닉까지 올려둔다. 이거 나 다 먹으라고? 응. 잘 먹어야 안 아프지. 그치만 이거 다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굶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별로 대책 있는 말은 아니라 웃음이 나왔다. 해결된 줄 알았던 골칫덩어리 편지는 돌아왔지만 왜인지 마음이 개운했다. 나 아직 축하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나봐.

 

 

  "또 타마마 나오면 좋겠다."

  "과연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나 안 보고 있을게."

 

 

  정수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곤 지석을 기다렸다. 별 기대 없이 뜯은 봉지 안엔, 행복하게 과자를 먹고 있는 타마마가 있었다. 와, 정수! 놀라서 소리 지른 지석에 정수가 눈을 뜨곤 스티커를 확인했다. 빈 교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초코롤을 볼 안 가득 넣은 지석이 타마마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더 동그랗게 뜨는 지석에 정수가 연신 똑같다며 좋아했다. 입안 가득 퐁신하고 달콤한 초코맛이 퍼졌다.

 

 

  21.

  결국 다 먹지 못한 빵과 과자는 지석의 사물함에 들어갔다. 돌려주려고 해도 단호하게 고개 젓는 정수에 야자 시간 내내 차카니를 녹여 먹었는데도 도저히 포켓몬 빵까지는 무리였다. 내일 또 먹으면 되지. 그래도 정수 먹으면 안 돼...? 그러면 내일 나눠 먹자.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가 그 말에 조금 죄책감을 덜었다. 자기 전 정수랑 무슨 포켓몬 나올지 내기할 생각을 하며 잠들었는데, 아침에 본 문자는 기운을 쭉 빠지게 했다.

 

 

  [지석아 오늘 먼저 가야될 거 같아 ㅜㅜ 미안!]

 

 

  이유도 없는 짧은 문자에 기분이 묘했다. 물론 엄청 급했을 수도 있고, 너무 길어서 문자 안에는 다 안 담겨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치만 궁금하다. 비밀이라서 말해주지 않는 건가. 그건 좀 서운한 것 같은데. 물론, 나도 정수한테 비밀이 있긴 하지만. 음... 무슨 나쁜 일만 아니면 좋겠는데. 등교한 뒤 내내 문만 쳐다보고 있었는데도 아침 조례가 시작할 때까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출석에서 정수의 이름을 넘어가는 걸 보면 쌤은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다. 물어볼까. 조금 그렇겠지. 오늘 아예 안 오는 건가. 일 교시가 시작하기 전 괜히 뒷문을 밀었다 닫았다 하며 작은 창으로 복도를 보다가 승민에게 걱정도 받았다. 무슨 일 있냐는 말에 정수 기다린다고 할 수는 없어서 그냥 고개 젓고 자리로 돌아왔다.

 

  오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정수는 오지 않았다. 또 점심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아 그냥 사물함에 있는 포켓몬 빵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고로케를 씹으며 목이 막혀오는 걸 느꼈지만 억지로 열심히 삼켰다. 같이 먹자고 해놓고 왜 안 와. 휴대폰이라도 있으면 문자를 보내보는 건데. 아, 맞다. 나 어차피 알 다 썼지. 가방을 뒤져 아직 돌려주지 못한 정수의 엠피쓰리를 꺼냈다. 서로 듣는 노래를 공유하자고 교환한 것이었다. 담긴 노래가 많았지만 사실 녹음 파일 말고는 거의 재생하지 않았다. 그냥 정수의 목소리만 몇 번을 돌려 들었다. 원곡과는 다르게 숨을 쉬는 구간이 좋아서 계속 꾹꾹 눌러 반복 재생했다. 별 기대 없이 뜯은 스티커가 정수를 닮은 잠만보라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가 가라앉게 만들어버리는 김정수. 왜인지 얄미워 엠피쓰리 뒷면에 잠만보 배 위를 몇 번이나 꾹꾹 눌러 붙였다.

 

 

  22.

  야자가 없는 수요일, 지석은 머리를 비우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부만의 특권이 있다면 운영시간이 아닐 때에도 몰래 들어와 책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 전체가 불이 꺼지는 여섯 시 이전에만 나가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지석은 가장 좋아하는 책장 사이 바닥에 앉아 정수가 추천해 준 책을 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타인에게 잘못 전달된 편지. 우연치고는 운명 같은 상황에서 가까워지는 둘. 상황은 아예 다르지만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듯한 설정들에 자꾸만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만약 편지가 잘못 도착하지 않았다면 정수랑 이렇게 가까워질 일이 없었겠지. 정수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 줄도 몰랐을 테고.

 

 

  '나는 너가 너무 다정해서 좋아.'

 

 

  민지가 느끼는 좋아한다는 감정은 대체 어떤 감정일까. 다정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지석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좋은 사람을 넘어서서,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그 과정에는 대체 어느 정도의 깊이가 있는 건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편지에 적힌 그 수많은 말에 공감할 정도라면 정수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을까. 사실 정수와 함께 있는 내내 그 모든 문장이 정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정수를 보면 떠오르는 표현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면, 그렇다면, 이 감정은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 맞나보다.

 

 

  지석이 책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기기 위해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교실에 가까워질수록 이어폰 사이로 잔잔한 기타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이어폰을 빼고 교실 앞에 다다랐을 때 창문 속 보이는 모습은 정수였다. 이전에 지석이 가르쳐주던 코드를 천천히 잡으며, 벽에 기대 기타를 치는 정수. 기다린 건지 어지럽혀져 있던 지석의 책들을 모두 정리해 둔 채였다. 늦은 오후의 노을빛이 정수를 감싸고 있었다. 치직거리던 기계음이 섞이지 않은 맑고 깨끗한 정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버벅이는 기타 반주가 오히려 더 간지러운 듯한 기분. 지석은 정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숨죽인 채로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입술을 꽉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지금 당장 정수에게 가서 모든 걸 다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너의 편지를 대신 봐서 미안하다고, 다시 돌려주겠다고. 근데 정말 너는 그런 사람 같다고. 처음엔 이렇게 넘치는 마음을 받는 사람이 부러웠는데 지금은 다르다고. 그 편지에도 다 담을 수 없는 다정함이 네게 있다고. 어떤 유려한 표현으로도 너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네가 좋다고. 그런 여과 없는 고백을 쏟아내 버리고 싶었다.

 

  지석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인을 먼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조차 형에게 양보하는 걸 좋아했다. 자신의 것을 사기보다는 타인의 것을 선물해주기를 좋아했다. 그 작은 쌍쌍바조차 꼭 큰 쪽을 주는 아이였다. 그런데 정말 이번만큼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기만 하는 그런 사람은 안 되고 싶었다. 너무 못됐지만, 그만큼 정수가 좋았다.

 

 

  23.

  정수는 오디션을 보고 왔다고 했다. 우연히 미니홈피에 올린 노래 영상을 보고 연락이 왔다고. 급하게 결정된 거라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지석이 알려준 코드로 어설프게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고, 결과는 일주일 안으로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에 지석이 잔뜩 들떠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늦은 시간까지 교실에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교실이나 엠피쓰리가 아닌 티비에서 듣게 될 정수의 목소리가 기대되는 동시에 상상만으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웃으면서 축하해준 건 모두 진심이었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서 조급함이 밀려왔다. 반이 바뀌게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 더 정수를 못 보게 되면 어떡하지.

 

  집에 와서 책상 앞에 앉아 공책을 꺼내 들었다. 정리되지 않은 문장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안녕 정수! 나 지석이야.

 

 

  혹시라도 헷갈리지 않게 정수의 이름을 꾹꾹 눌러쓰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지 않으려 억지로 숨을 먹어가며 힘준 손으로 또박또박 새겨나간 글씨가 반듯하게 새겨졌다. 한 번도 적어본 적이 없었던 단어들이 하얀 종이 위를 가득 채웠다. 편지에는 없었던, 둘만 아는 내용들이 가득해져갔다. 당장 줄 것도 아닌데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문장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수 있지, 나는 사실 크리스마스 별로 안 좋아한다? 어차피 집에서 공부만 하는 날인데 괜히 들뜨게 돼서 별로 안 좋아했어. 근데 정수 덕분에 이젠 좀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것 같아. 정수가 알려준 캐롤 때문인가? 아마도 나는 크리스마스에도 정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데. 도저히 적히지 않는 문장들에 지석의 손이 떨려왔다. 민지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진심은 꺼내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겨우 이 주라는 시간 동안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정하고 또 다정한 김정수. 조금만 표정이 굳어도 바로 눈치채주고, 끊임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건네주고, 자신의 것을 망설임 없이 내어주고, 눈 떠보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김정수. 보고만 있어도 복잡한 감정에 눈물이 나게 만드는 김정수.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혹시나 하고 걸어보게 만드는 김정수. 하루 종일 가득해서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김정수. 처음으로 멀어지지 않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린 김정수. 언젠가 정수를 보며 떠올렸던 생각들이 수도 없이 터져 나왔다.

 

  정수에게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던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한 순간도 정수를 타인의 시선에서 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누군가의 대타가 아니라 곽지석으로서 설렜던 걸지도 모른다. 지석은 이제 편지 속 문단들이 아니라 정수를 생각하며 쓴 한 문장 한 문장에 마음을 담아 건네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울었다. 눈가를 벅벅 닦고 몇 번이나 다시 적어봤으나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글씨가 다 번져 읽을 수도 없었다. 지석의 마음은 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눈물 사이로 늦은 밤 짧은 진동이 울렸다. 뿌옇게 흐린 시야 사이로 열어본 폰 안에는 여느 때와 같은 정수의 문자가 와있었다.

 

 

[크리스마스 딱 이틀 남았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꼭 좋아하는 사람이랑 보낼 수 있길 ㅎㅎ


♪ L-O-V-E - Nat King Cole]

 

 

오늘의 추천곡은 굳이 틀지 않아도 귀에 들리는 노래였다. 지석도 너무 잘 아는, 제목만 봐도 간지러워지는 노래. 크리스마스를 설레하는 정수의 감정이 잔뜩 담겨있는 듯했다. 좋아하는 사람. 그 말이 계속 입술을 씹었다. 크리스마스의 정수가 누구와 함께할지 지석은 알았다. 이 주 전부터 예고 되어 있었던 일이다. 아마도 같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불러주지 않을까. 그럼 또 민지는 그런 정수한테 반하게 되겠지.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그런데 왜인지 정말 보고 싶지가 않아서 지석은 오늘만큼은 정수의 추천곡을 틀지 않았다. 밤새 우는 소리가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지석은 이불 속에 꼭꼭 숨었다.

 


  24.

방학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들뜬 마음에 교실이 소란했다. 등굣길 내내 말이 없던 지석에 정수가 몇 번이나 이것저것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보았지만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열심히 대답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이제 정수랑 더 못 볼 수도 있는데. 별로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청소 구역조차 겹치지 않아 조례 시간 이후로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도서부라는 이유로 학급 도서를 정리하게 된 지석은 금방 정리를 끝낸 뒤 주머니에 초콜릿과 편지를 숨기곤 눈치를 봤다. 교실에 청소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이 많아 들키지 않으려 약간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 더 미룰 수는 없었다. 마음이 아픈 건 지석이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다. 마지막이라며 다 같이 칠판 위에 낙서를 하고 있는 틈을 타 이번엔 헷갈리지 않게 정수의 책상 아래에 넣어두었다. 악보 파일 위에 가지런히 놓인 연분홍색 편지지가 드디어 이 주 만에 제 주인을 찾아갔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 사이로 칼에 베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지석의 뺨을 스쳤다. 따갑고도 후련한 기분이었다.

 


  25.

  체육관에 모여서 키순서로 섰다. 지루한 방학식을 하는 내내 시선을 앞에 고정해야만 해서 뒤에 있는 정수를 볼 수는 없었다. 차라리 잘 된 건가. 어차피 전달해 줄 수 있는 마음도 없으니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게 맞는 거니까. 모든 순서가 끝나고 따로 종례는 없다는 담임의 말에 모두가 빠르게 교실을 향해 뛰어갔다. 지석만 힘없이 천천히 걷느라 계단을 오르면서 이미 짐 챙겨 나오는 주연을 마주쳤다.

 


  "지석 피방 안 가?"

  "어... 오늘은 별로."

 

 

  종일 처져있던 지석을 알아 주연은 그냥 어깨나 두드려줬다. 힘내 지석. 오늘 접속 안 하면 후회할 텐데 아쉽. 그 말에 그냥 허공에 손을 저었다. 가라, 후회 안 한다. 엉 낼 되면 오셈 다섯 시! 알았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연이 저 멀리 앞서가는 승민의 이름을 외치며 뛰어나간다. 끊임없이 내려오는 사람들 사이로 지석만 올라가고 있었다. 다들 진짜 얼마나 신난 거야. 지석이 교실에 도착했을 땐 짐을 챙기고 있는 정수 하나만 남아 있었다.

 

 

  "어, 지석아!"

  "정수 아직 안 갔네?"

  "응.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찾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체육관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는 정수의 말에 지석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슬쩍 확인한 정수의 책상 서랍은 비워진 상태였다. 편지는 잘 전달됐구나. 다행이다. 숙원사업을 해결한 산타의 기분이 이런 걸까.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고, 뭔가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책 많아서 무겁겠다."

  "아, 괜찮아. 그래도 조금씩 집에 갖다놔서."

  "좀 들어줄까?"

  "어... 아니. 나 오늘 그 가야 할 데가 있어서, 정수 먼저 가도 될 것 같아."

 

 

앞자리 책상에 걸터앉은 정수에 괜히 마주 보고 있는 게 어색해 말을 지어냈다. 그렇게 깊게 생각한 결과가 회피였나.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수를 보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자꾸 피하게 됐다. 근데 왜 안 가지... 못 들은 건 아닐 텐데. 지석이 살짝 고개를 들자 정수가 지석의 책상에 손을 짚고 상체를 훅 가깝게 들이밀었다. 자꾸 눈을 피하는 지석이 못마땅하다는 듯 빤히 마주치는 시선이 명확했다.

 

 

  "지석아 왜 자꾸 눈 피해."

  "너무 가까, 워서..."

  "싫어?"

  "어, 그런 건 아닌데."

 


  싫냐는 물음에 생각도 거치지 않고 급히 대답했다. 정수가 갑자기 왜 이러지... 혹시 정수도 내 마음을 아는 건가? 추궁하는 듯한 말에 지석의 눈빛이 계속 흔들렸다. 그걸 정수는 피하지 않고 계속 바라봤다. 결국 더 둘 곳이 없던 시선이 다시 정수에게로 향하자 또 예쁘게 웃어 보인다. 반짝거리는 눈 안엔 지석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런 눈을 보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랬던 건데. 울컥하고 올라오려는 말들을 애써 꾹꾹 삼켜내자 정수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고는 말했다.

 

 

  "지석아, 우리 크리스마스에 만날래?"

 

 

  어, 어...?


 조금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삼키는 정수에 지석이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몇 번이나 곱씹어봐도 지석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나랑? 정말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한 건가? 나한테? 정수가 왜?

 

 

  "보고 싶었던 공연 티켓이 있는데 너랑 같이 가고 싶어."

 

 

  가장 기다렸던 날에 보고 싶었던 공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날. 정수가 묘사하는 크리스마스는 너무 근사했다. 근데 그 시간들을 같이 하고 싶은 게 지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캐롤일 만큼 설레했잖아. 그리고, 편지에 분명히 민지가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자고 했을 텐데. 지석이 굳어서 아무 말도 못하자 책상을 잡은 손이 꼼지락거린다.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정수의 귀끝이 달아올랐다.

 

 

  "...나 부끄럽게 왜 대답 안 해."

  "어... 그거 나랑 가도 되는 거야?"

  "응? 내가 너랑 가고 싶은데 왜 안 돼?"

  "정수 나 좋아해?"

 

 

  필터 없이 뱉어버린 말에 지석이 스스로 입을 막았다. 진짜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그러니까 정수가 왜 나한테? 이상하잖아. 이건 정말이지 도저히 좋아한다는 말로만 들리는데... 그러니까 그게,

 

 

  "응, 좋아해 지석아."

 

 

 거짓말. 그럴 리가 없잖아. 훅 다가온 고백에 지석이 굳어버린다. 어젯밤 정수에게 쓴 모든 문장은 전부 휴지통 안에 들어있는데. 그게 닿았을 리도 없는데. 지석이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가 폈다. 정말인가? 꿈인가? 또 혀끝을 씹어봐도 아릿한 고통만 퍼졌다. 아, 아프다. 진짜 아픈데. 그럼 진짜 정수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가?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좋아해. 좋아해 지석아. 지석은 도저히 적을 수 없던 세글자를 정수는 지석의 눈을 보고 헷갈리지 않게 얘기해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번져버린 편지라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라도 나도 정수를 좋아한다고 대답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황해서 눈만 빠르게 깜빡거리던 지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꽉 감곤, 정수의 입술에 꾸욱 제 입술을 눌렀다. 그 수많은 문장을 전하기엔 너무 다급해서. 지금 지석이 보낼 수 있는 러브레터는 이것밖에 없어서. 쪽 소리 하나 나지 않고 꾹 붙었다 떨어진 말랑한 입술에 정수의 입이 벌어졌다. 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나도 좋아해 정수..."

  "지석아 너, 너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그런가?"

 

 

  달아오른 정수의 볼을 보니 지석의 마음이 온전히 다 닿은 듯했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거지? 지석의 질문에 정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응, 사귀자. 오늘부터 1일이야. 헷갈리지 말고 잘 세야 돼. 정수의 말에 지석이 끄덕였다. 고백은 크리스마스에 하려고 했는데 지석이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구나. 꾹꾹 눌러 적어둔 편지가 집에 있어 아쉬울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꾹꾹 참았다. 전하고 싶었던 말은 차차 전해주면 되니까. 지금은 서로의 눈만 봐도 무슨 마음인지 다 알 수 있으니까.

 

 

 


 

  P.S.


  "근데 지석아 너 왜 자꾸 편지 내 자리에 놔...?"

  "어?"

   "민지가 이거 너 갖다주라던데."

   "에? 나를?"

   "응. 너 아니야? '봉투 보면 누군지 알지? 제대로 전달해야 돼!' 하고 가던데?"

 

 

   아. ...재성아. 미안하다 진짜. 지석이 책상 밑으로 꾹꾹 키패드를 눌러 재성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재성아 다시 와서 너 편지 좀 받아가...]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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