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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cibo message

개똥이

정수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합주실에는 습기와 묵은 먼지 냄새가 배어 있었다. 벽 곳곳의 방음재가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연습을 마친 뒤 키보드 전원을 끄고 건반을 수건으로 닦았다. 지석은 오래되어 엉덩이가 닿는 부분이 푹 꺼진 낡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습이 끝난 뒤 남아 있는 건 둘뿐이었고, 합주실의 공기는 유난히 조용했다. 

 

지석은 무슨 자료를 찾아보는지 한참을 화면에 고개를 박은채 눈동자만 바삐 움직였다. 이내 톡톡톡, 조용한 합주실에 가벼운 자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자리를 옮겨와 지석의 옆으로 다가온 정수가 등받이에 팔을 기대어 비뚤게 앉아 지석의 옆모습을 지켜봤다. 글자가 빼곡한 화면을 읽어 내려가느라 잔뜩 찌푸린 미간,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 흰 피부에 옅게 박힌 주근깨.

 

어, 속눈썹.

 

앞 볼에 정수의 손가락이 닿자, 지석이 순간적으로 엉덩이가 소파에서 떨어질 정도로 팔짝 뛰어올랐다. 다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수를 바라봤다. 지석이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던 정수는 민망한 듯 웃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어, 아니. 정수. 먼저 가지. 해도 다 졌는데.”

“너 다하면 같이 가지 뭐.”

“미안해서 그러지. 아잇, 집에 가서 할래.”

 


말끝을 늘어뜨리던 지석이 노트북을 덮었다. 다 끝나고 가도 괜찮다는 정수의 만류에도 지석은 무릎에 펼쳐놨던 노트북과 종이들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정리를 시작하는 지석을 도와 주변에 흩뿌려진 종이를 모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종이 안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아...레시...보…

 


“아레시보 메시지?”

“봤어? 아직 그냥 구상만 하던 건데…”

“곡 쓰게?”

“으응, 근데 아직 좀 지저분해…”


 

민망한 듯 몸을 베베 꼬았지만 정수는 알 수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과 묘하게 붉어진 양 볼,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 지금 지석은 정수에게 설명해 주고 싶어 못 견디는 상태였다. 얘기해 봐. 지석의 손을 끌어 다시 소파에 앉혔다.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지석이었지만 음악과 관련된다면 정리가 덜 된 생각도 툭툭 내놓곤 했다. 정수는 지석의 그런 정리 안 된 생각을 듣는 것이 재밌었다.

 


“진짜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레시보 메시지는 외계 지적 생명체에게 보낸 신호야. 이진법으로 된 숫자고 이걸 계산해서 정리하면 이렇게 나오거든.”

 


지석은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숫자와 기호가 뒤섞인 도형들이 지나갔다. 정수는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는 척이라기보다는, 지석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인간이 외계의 존재에게 자기 존재를 한 번에 설명한 최초의 메시지야. 수학으로 DNA 구조, 인간 형상, 우리가 있는 위치 같은 걸 압축해서 보낸 거지.”

 


지석은 잠깐 말을 멈췄다. 괜히 한 말처럼 들릴까 봐, 아니면 너무 솔직해질까 봐.

 


“뭔가…. 짝사랑 같아. 상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고, 그 사람이 알아주길 바라며 답장을 기다리는 모습이.”

 


음, 그 말에 정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괜히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을 밟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석의 얼굴을 봤다가 노트북 모니터에 띄워둔 그림을 보고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너무 자기식으로 보내는 거 아니야?”

 


정수의 말에 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호를 해석하는 건 수학이라니까 통한다고 치지만 저 그림들 해석하는 거 말이야. 좀 힘들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자기 기준으로 보내면… 상대가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지석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봉긋하던 광대가 가라앉고 동그란 눈이 천천히 깜박거렸다. 제 말이 지석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은 걸까 걱정돼 사과하려던 순간, 지석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는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아레시보 메시지를 보낸 과학자들도 답신을 받을 거라고 확신해서 보낸 건 아닐 거야. 혹시나 하는 확률을 뚫고 답신을 받더라도 이미 오만 년 뒤일 테니까.”

 


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는 듯 심호흡을 한번 내쉬었다.

 


“사랑도 비슷한 거잖아. 꼭 상대가 받아줘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그 감정을 가진 내가, 그걸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지.”

 


허공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정수를 바라보지 않아 지석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꽉 쥔 주먹,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보고 정수는 알 수 있었다.

 

 

지석이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잇는 질문.

누구를? 

 

 

-

 

 

그날 밤, 정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예민한 편이라 원래도 잠에 들기 어려웠지만, 오늘은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창문 너머 가로등 불빛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도 비슷한 거잖아. 꼭 상대가 받아줘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그 감정을 가진 내가, 그걸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지.

 

지석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결국, 입 밖으로 던지고 만 질문.

 

누구야? 좋아하는 사람.

 

당황한 지석은 잠시 눈만 깜박였다. 장난처럼 넘길 수 없는 질문이라는걸, 정수의 표정만 보고도 알아버린 얼굴이었다. 정수의 손에 쥐어졌던 종이를 낚아채듯 가져가곤, 아무 말 없이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로 어떻게 자취방에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억울했다. 친구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궁금해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동시에, 지석에게 자신이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싫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색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이기적인 어린아이 같아 더 기분이 나빠졌다. 정수는 몸을 일으켜 베개를 마구 두드리다 얼굴을 파묻고 낮게 신음을 흘렸다. 한참 뒤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김정수, 뭐 해. 지석이가 누구 좋아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잠이나 자라. 너 내일 1교시야.”

 


자신을 타박하며 다시 누웠지만, 하나의 의문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

 


[지석아 어디야?]

[도서관]

[누구랑.]

 

 

메시지를 보내고서야 질문이 조금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답장을 재촉할 명분도 없는데, 괜히 화면만 내려다보게 됐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지석은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작업에 대한 언급도,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정수를 대했다. 정수만 그 일을 신경 쓰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수는 그날 이후 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유난히 신경 쓰기 시작했다. 원래도 같은 과가 아닌 것 치고는 자주 보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지석의 일상 안으로 파고들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했다. 친한 동생 짝사랑 상대를 알고자 이렇게까지 한다고? 지석이가 알면 징그러워할지도 모르겠다.

 

 

-

 

 

그날도 카페엔 과제를 하는 학생들로 꽉 차 있었지만 소란스럽진 않았다. 지석과 정수가 계산대 앞에 멈춰 섰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잔이요.”

“아, 사장님. 바닐라 라떼 한잔이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정수는 놀라서 옆에 서 있는 지석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지만 별다른 말을 꺼내진 않았다. 자리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손에는 각각 아이스 바닐라 라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있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정수는 지석의 손에 들린 투명한 컵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컵 안에는 갈색의 음료가 담겨 있었고, 지석이 쭉 빨아 마시자, 빨대를 따라 입술까지 딸려 올라갔다.


 

“뭐야.”


 

응? 지석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정수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자기 손에 들린 아.아.를 발견했다.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줄여서는 아.아.”

 


내가 그걸 모르겠니? 목젖까지 치고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귀엽게 윙크까지 해가며 대답하는 지석의 모습을 보면서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속에 뭐가 얹힌 듯 답답한 기분이었다. 


 

“너 원래 안 마시잖아. 쓰다고.”

“요즘은 가끔 마셔. 정수, 이제 나도 어른이다 이거야.”

 

 

지석이 정말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정수는 그날 자기가 주문한 바닐라 라떼를 반도 마시지 못했다. 언제 입맛이 바뀌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자신이 모르는 '요즘'과 '가끔'이 생긴 건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이제 와 보니 자신이 알지 못하던 모습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

 

 

[건일이 형이랑 왔는데 지금은 형님 강의 들으러 가셨어]

[몇 층이야?]

[3층]

[정수 빨리와ㅏㅏㅏ]

 


징- 상념을 깨는 진동 소리와 함께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정수가 피식 웃었다. 웃음은 먼저 나왔지만, 마음까지 가벼워진 건 아니었다. 멈춰 서 있다가 지석이에게로 옮기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렇게 누군가를 궁금해 한 적이 있었나. 물론 있겠지만 그것과 조금 결이 달랐다. 지석이의 모든 순간이 알고 싶었다. 지석이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없었으면 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걸 알아버린 순간부터 지석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나이길 바라게 된다는 것이었다. 

 

 

3층 열람실로 올라가 보면 페이지 넘기는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입구에서 지석을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 멀어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항상 앉는 자리. 책장 사이를 지나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햇빛이 비치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다. 지석이 이어폰을 낀 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석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모니터의 검은 화면에 흰 글자들이 써 내려갔다.

 


“지석아.”

 


정수가 가까이 다가가자, 지석이 인기척을 느끼고 올려다봤다. 집중하느라 무표정으로 있다가 정수와 마주치자, 평소와 같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정수. 일찍 왔네.”


 

정수가 맞은편 넘어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옆자리에 얹어둔 가방을 치우려다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정수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가방을 정리 후 자리에 앉아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석의 얼굴을 가만히 봤다. 며칠째 계속 이러고 있는 거 지석이는 눈치챘을까.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괸 채로 말없이 빤히 쳐다보자, 지석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앞니만 뿅 나온 모습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눈을 데굴 굴리고는 나 이것만 마무리하고. 정수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억지로 모니터에 눈을 고정했다.

 

지석이 한참 과제를 하던 중 정수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고개를 들자, 턱을 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씩 웃더니 똑같이 턱을 괴고 아까 정수가 그랬던 것처럼 빤히 쳐다본다. 그 상태로 몇 분 동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정수가 눈을 떴다. 정수가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지석을 발견하곤 민망한 듯 눈을 깜박였다. 민망해서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왜 깨우지 않았냐며 작게 지석을 타박했다.

 


“우리 동방 가서 엽기떡볶이 시켜 먹을까?”

 


지석이 태연하게 웃으면서 물어봤다. 정수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지석이 가방을 챙기는 사이 평소처럼 자신의 짐과 지석의 자질구레한 짐들을 챙겼다. 지석의 가방은 항상 노트북으로 인해 무겁기도 했고, 지석이 종종 물건을 두고 다녔기 때문에 정수가 챙겨주곤 했다. 그대로 문 쪽으로 향하다가 문 앞에서 발걸음을 잠깐 멈췄다.


 

“근데.”


 

뒤따라오던 지석이 고개를 들었다.


 

“너 먹고 싶은 건 없어?”


 

정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확인하려는 질문 같았다.


지석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별 고민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형이 먹고 싶은 거면 다 괜찮아.”


 

말끝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강조도 없고, 장난도 아니었다. 그냥 늘 그래왔다는 것처럼. 정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문손잡이에 올려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언제나 지석은 그렇게 말했다. 뭘 먹을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자기 쪽 선택은 늘 뒤로 밀어두고, 정수

의 말부터 들었다.

 

“너 많이 못 먹잖아.”

“그래서 내가 정수랑 먹는 거 좋아하잖아. 내 거 다 먹어줘서.”


 

지석이 씩 웃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수의 팔이 지석의 목을 걸었다. 그대로 끌어당겨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행동은 거칠었지만 입가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지석은 정수의 팔 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며 옷감이 스치는 소리, 억눌린 웃음소리가 겹친 순간 열람실 쪽에서 낮은 헛기침이 들려왔다.


 

“조용히 해주세요.”


 

둘은 동시에 굳었다가, 조용히 짐을 챙겨 열람실을 빠져나온 뒤에야 도서관 밖에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뛰어가는 지석의 뒷모습을 보며 정수는 아주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혹시.

정말 혹시.

지석이가 좋아하는 게-.

 


“형?”

 


앞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파란 하늘 아래 분수대 앞에 말간 얼굴의 지석이 서 있었다. 정수가 멍하니 서서 바라보자, 다시 정수의 앞으로 천천히 달려왔다. 히히, 웃으며 양 손바닥으로 정수의 양 볼을 꾹 눌렀다.


 

“가만히 서서 뭐 해. 얼른 가자.”

 

 

-

 

 

요즈음 심란한 마음에 밤새 뒤척거리다가 새벽에 겨우 잠든 정수는 그마저도 중간중간 깼다가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 여파로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눈을 떠 빠르게 씻고 대충 체육복을 걸쳤다. 덜 마른 머리를 대충 손으로 털며 혹시 몰라 비니도 하나 챙겼다.

 

정수의 급한 마음도 모르고 오늘따라 횡단보도는 왜 다 눈앞에서 바뀌는지, 헐레벌떡 달려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강의실로 들어서려다 말고 강의실 문 유리 너머로 보이는 지석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지석의 눈이 잠깐 커지더니 뭐가 그렇게 웃긴 지 큰 입을 활짝 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석의 웃음에 멍하니 서 있다가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치는 제 머리 상태가 보였다. 아이씨, 바빠서 대충 말린 머리가 달려오는 사이에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챙겨나온 비니를 대충 뒤집어쓰고는 지석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정수. 늦잠 잤어? 머리가 그게 뭐야.”


 

지석이 큰 눈을 잔뜩 접어 웃으며 정수에게 장난을 걸었다. 너 때문이거든. 이유를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어쭈, 계속 해 봐.”

“정수, 아잇. 정수…. 교수님 오신다. 교수님 오신다고오…!”

 


정수가 엄지와 중지로 지석의 양 볼을 잡아 꾸욱 누르자 원래도 두꺼운 입술이 앞으로 불퉁 튀어나왔다. 붕어입술을 한 채로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게 놔 달라고 애원하는 지석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지석의 얼굴에서 손을 뗀 정수가 지석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자신을 보며 웃는 정수에 지석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지석의 머리카락 사이로 귓바퀴가 터질 듯 붉었다.

 

강의를 듣던 중 집중이 되지 않아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지석을 바라봤다. 집중한 듯 큰 눈을 반짝이며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다. 강의하는 교수님을 바라보다가 지석을 쳐다보기를 세 번쯤 반복했을까? 지석이 주의를 주듯 정수의 손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고개는 여전히 앞의 교수님에게로 고정된 채였다.

 


“정수,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


 

대답 없이 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지석이 필기를 위해 손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정수는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깍지를 끼고 지석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 설명할 새도 없이, 당황한 지석이 두리번 주위를 살피며 정수에게 몸을 가까이 붙여 작게 속삭였다.


 

“정수…! 이러면 나 필기 어떻게 해?”

“하지 마.”

“어라, 오늘 진짜 이상하네. 무슨 일 있어?”


 

정수의 막무가내 고집에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무슨 일인데. 나한테 말하기 힘든 일이야?”

“그냥…. 잠을 좀 설쳤어.”


 

너도 나한테 비밀 있잖아. 목 끝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삼켰다. 괜히 유치해 보일 것 같았다. 잠깐, 정말 잠깐. 지석이가 좋아하는 게 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정수는 그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아야, 아야.”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답답했는지 지석이 장난스럽게 아픈 척을 했다. 정수는 그제야 손을 풀어줬다.


 

“아파?”

“아냐, 안 아파. 정수, 내가 필기해야 정수도 보여주지.”

 


알겠어. 정수는 손을 놓아주고, 다시 필기에 집중하는 지석을 바라봤다. 만약 지석이 입장에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캐묻는다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속이 더 뒤틀렸다. 정수가 충동적으로 붉어진 지석의 귓바퀴를 툭 건드리자 지석이 놀라 손으로 귀를 가렸다. 알겠어. 안 괴롭힐게. 수업 들어.

 

 

-

 

 

강의 시간 내내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정수가 강의가 끝나고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방까지 다 멘 지석이 그런 정수를 기다리기 위해 다시 의자에 앉아 멀뚱멀뚱 기다렸다.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넓은 강의실을 가득 채웠던 학생들이 하나둘 다 빠져나가고서야 정수의 팔을 흔들었다. 


 

“안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