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란
깻잎
"겨울이 다가왔다는 걸 언제 느끼시나요? 짧아진 해, 옷, 바뀐 거리 풍경 등으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저는 숨을 들이마시면 텁텁한 공기 대신 코끝이 시려오는 바람이 느껴지면 겨울이 왔다고 느낍니다. 꽃이 피고 식물들이 싱그러워지는 동안 옷장 안에 웅크리고 있던 옷들에게도 바람을 쐬어줄 차례가 온 것 같습니다. 겨울 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오늘 밤도 같이 걸어갈 저는 <같이 걸을 이 밤> 디제이 정현입니다."
매일 밤 00시에 시작하는 심야 라디오 <같이 걸을 이 밤>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거나 새벽에도 왕성히 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라디오이다.
그중에서도 매주 금요일 00시에 진행되는 <쉿, 너한테만 말해줄게...> 코너는 청취자들의 대나무숲, 요즘 단어로 드르르 칵! 이 되어주는 코너이다. 다들 고민 하나로 밤잠을 설치 던 기억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친구나 가족보다는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 붙잡고 터놓고 싶은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을 익명으로 사연함에 보내 청취자들과 해결책을 찾곤 한다. 익명의 힘이 꽤 큰지 심야 라디오인데도 사연 수가 다른 요일들의 코너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매주 다른 주제로 코너의 사연을 받는데 이번 주의 주제는 '겨울'이다.
"3266님이 보내주신 눈오리 군단 사진 너무 멋있는데요? 올해는 눈이 많이 온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눈 집게 한번 사용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네, 그럼 다음 사연 읽어 드리겠습니다."
"현디, 붕어빵 좋아하시나요? 저는 겨 울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추억이 학창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겨울인데 붕어빵은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저를 설득했고, 그 설득에 넘어간 저는 선배와 손이 꽁꽁 얼 정도로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 마침내 붕어빵 가게를 찾아 선배는 슈붕, 저는 팥붕을 사서 먹은 추억이 생각납니다. 요즘도 길가에서 붕어빵 가게를 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평범한 추억 같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인 게 그 선배는 저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인 선배였거든요.
그 선배와는 유독 겨울에 추억이 많은 거 같은데요. 그 선배는 저와 같은 동아리인 방송반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현디와 비슷하게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교내 방송반 아나운서로 보냈구요. 선배와 함께 있는 동안 선배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언제나 웃음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그런 기분 아실까요? 너무 빛나는 사람이라 손에 쥐는 순간 빛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요. 그런 기분 때문인지 몰라도 친한 선후배 사이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런 제가 인생에서 가장 용기를 낸 순간이 있었습니다. 2월임에도 눈이 조금씩 내리던 선배의 졸업식 날, 은연중에 마지막이라고 느꼈던 건지 선배에게 명찰을 주면 안 되냐고 떼를 쓴 일입니다. 그 선배가 대학을 좋은 곳으로 갔거든요. 선배 따라 그 대학에 갈 거라는 핑계로 명찰을 달라며 조금은 뻔뻔하게 선배의 명찰을 쟁취했습니다.
졸업식 날 명찰을 교환하는 의미. 현디는 알고 계신가요? 심장 가장 가까이 있는 것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의미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당장에 보이는 게 노란색인 명찰 하나뿐이었거든요. 아마 당시에 알았어도 선배와 명찰을 교환하거나 두 번째 단추를 주고받는 일은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첫사랑이기도 했지만 짝사랑이었으니깐요. 제가 교환을 하자 했다면 선배는 무슨 의미인지 알았어도 후배와의 추억 정도로 생각했을 겁니다.
선배는 20살이 되었고 저는 여전히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선배에게는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가 펼쳐졌고, 저에게는 수험 생활이 다가왔기에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연락을 못 하고 있습니다. 저를 한 발짝 떠밀어줄 파도가 없었거든요. 이번 주제가 '겨울'이라 겨울에 나눠 먹었던 붕어빵과 눈 오던 날 받은 첫사랑 선배의 이름표가 생각이나 사연을 보내봅니다. 아, 그 대학은 아쉽게도 가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셨는데요."
"오. 이름표 사진도 같이 보내 주셨네요. 와 졸업하신 지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고이 간직을 하고 계시는 걸 보면 첫사랑은 진짜 대단한 거 같아요. 어? 근데 이름표, 이름이? 저희 메인 피디님 성함이랑 동명이 인이시네요? 우와! 이분에게는 저희 피디님이 쏩니다. 치킨 교환권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정현 님."
"피디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아! 아까 그 이름표 너무 신기했지 않아요? 진짜 피디님이신 거 아니에요?"
이 말을 들은 메인 피디 정수는 그저 웃음으로만 답하며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본인의 소중한 디제이를 부스 밖으로 밀어내기 바빴다. 디제이와 작가진들 덕에 소란스러웠던 조정실에 드디어 정수 혼자 남겨졌다. 심야 라디오의 이점이라면 이점일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조정실을 비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어두운 조정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던 정수는 마우스를 움직여 아까의 사연을 클릭했다. 화면 가득 떠오르는 글자들과 이름표는 정수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파란
"-이상 청야고 방송반 아나운서 곽지석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소년은 바로 앞 조정실에 보이는 소년, 정수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수는 그 웃음에 보답하듯 엄지를 치켜들고 마주 웃어줬다. 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은 다급하게 조정실로 향했다.
"지석아, 오늘은 한 번밖에 안 틀렸네?"
"아. 정수! 그건 정수가 앞에서 계속 웃어서 그런 거잖아. 아, 무효야!"
"알겠어, 알겠어. 이번판은 무효! 예비 종 쳤다. 얼른 올라가, 지석아."
웃음기를 띈 정수의 말에 억울하지만, 다음 교시가 이동수업인 지석에게는 따질 시간이 없었기에 좀 이따 봐 정수!! 라는 선전포고만을 남기며 뛰어갔다. 익숙한 광경에 다른 부원들 역시 본인들의 반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방송반에 혼자 남은 정수는 뛰어가는 지석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본인의 반으로 향했다.
어디에서나 유독 친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정수와 지석은 한 학년 차이가 나지만 지석이의 신입생 시절 동아리 오디션을 볼 때부터 둘은 이름의 초성이 둘 다 ㄱㅈㅅ이라는 것과 취미가 없다는 공통점, 노래 취향 등으로 N극과 S극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급속도로 친해졌다. 서로의 생일을 알게 된 후로는 반 살 차이를 핑계로 지석은 정수에게 은근하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수는 친한 후배가 불러오는 이름이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처음이었고 지석이 발음하는 정수우 — 꼭 수를 길게 늘려 발음했다. — 는 듣기가 좋았기에 한두 번 봐주던 것이 이제는 친구처럼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아나운서와 피디라는 관계성과 말이 잘 통한다는 핑계로 둘은 친구들이 아닌 서로를 찾기 바빴다.
그러한 이유로 방송반 당번에 둘이 붙어있는 건 당연지사였다. 청야 고등학교 방송반은 화요일마다 다음날 방송을 위해 방과 후에 돌아가면서 짧은 대본을 쓴다. 고등학교 방송부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정수와 지석의 당번 날이었다. 정수는 오프닝의 멘트를 쓰고 지석은 사연함에 있는 사연들을 골라 정리하기로 했다. —청야고등학교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사연함에 모인 사연을 읽어주는 코너가 있다. 이번 주의 주제는 '첫사랑'이었다.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첫사랑이라는 주제는 너무 아찔한 주제 같아 미루고 미뤘지만 또 이것만큼 사연함을 가득 채우는 주제는 또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채택된 주제였다. —
풀리지 않는 문제를 바라보듯이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던 정수는 답을 찾겠다는 듯이 지석에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사연들을 읽던 지석은 종이를 쥔 채 '사랑'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정수의 예상과는 다르게 빠른 시간 내로 답변이 돌아왔다.
"매일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거 그게 사랑 아닐까?"
지석의 대답에 빤히 지석을 쳐다보던 정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웃음과 함께 고맙다는 말을 하며 타이핑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정수를 보던 지석은 그러면 정수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라는 질문을 되돌려줬다. 치던 타이핑을 멈추고 지석을 돌아본 정수는 고민을 하다 말했다.
"아무래도 잘 잤으면 하는 게 사랑 아닐까? 밤은 너무 외롭잖아."
라는 대답을 하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정수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던 지석은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다시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이건 패스. 사연 보내라니까 중앙현관 왜 쓰면 안 되냐는 뭐야... 라고 중얼거리던 지석은 쌓여있는 종이들 중 접혀있던 종이 하나를 펼치고 조용히 정수의 눈치를 보며 확정된 사연들 사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은 사연을 읽으며 정수를 기다렸다. 지석의 도움 덕분인지 빠르게 끝낸 정수는 지석에게 다했으면 이제 가자고 말을 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평소 같았으면 입이 쉬지 않고 떠들었을 둘이지만 오늘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조용히 길을 걸었고 갈림길에서야 서로에게 내일 보자는 인사를 건네며 헤어졌다.
정수와 지석은 청야고등학교 방송반의 가장 큰 특혜인 급식 프리패스권으로 줄을 서지 않고 급식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급식을 받고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오늘의 방송 주제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지석아. 오늘 오프닝 멘트 잘 부탁해? 나 어제 진짜 쓰는데 머리가 아프더라."
"어엉? 어어... 어, 오프닝... 응..."
오늘따라 어색하게 행동하는 지석이에 의아했지만 급식을 빨리 먹고 가야 하는 방송반 특성상 정수는 생각을 지우며 경주하듯 다급히 급식을 먹고 같이 방송반으로 향했다.
"지석아 시작 10초 전! 5. 4. 3. 2. 1!"
정수의 손이 내려가고 지석은 정수의 신호에 맞춰 익숙한 멘트로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청야고등학교 학생 여러분들. 점심은 맛있게 드셨나요? 이번 주도 인사드리겠습니다. 방송반 아나운서 곽지석입니다."
"이번 주도 돌아온 사연함 털이 시간! 이번주 주제 기억하시나요? 바로 '첫사랑'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려울 겁니다. 그게 사랑이라면 더더욱이요. 여러분들, 혹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매일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곁에 있어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게 사랑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은 상대방의 밤이 외롭지 않고, 무섭지 않게, 잘 잤으면 하는 게 사랑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본인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동안 신청 곡 한 곡 듣고 바로 친구, 선배, 후배님들의 사연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달달한 사랑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잠시 조정실로 시선을 돌린 지석의 눈에 오늘 오프닝을 머리 아프게 썼다는 정수가 진지하게 대본과 후배들을 번갈아 보며 바쁘게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달달한 노래 듣고 왔습니다. 다들 양치 꼼꼼히 하시구요. 이제 사연함에 온 사연들을 읽어 볼 시간입니다. 오늘은 역시 주제가 주제인지라 제일 먼저 잡히는 사연은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데 진짜인가요?'라는 사연인데요. 이건 아무래도 본인 하기 나름인 거 같네요. 언제나 예외는 있으니깐요! 다음 사연으로는 '방송반 곽지석 선배님 사랑합니다!'라고 써주셨는데요. 하핳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 사연은 '나의 첫사랑인 초코야, 오래오래 나랑 같이 살자! 초코는 저희 집 강아지입니다!'라고 보내주셨네요 아 저 이런 거 너무 좋아요. 여러분, 사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거 다들 아시죠? 네 다음은..."
막힘없이 사연을 읽어가던 지석이 머뭇거리며 종이를 쥐고 있었다. 방송에서는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공백이 3초가 되면 방송사고다. 방송반 모두가 지석을 쳐다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찰나 지석이 다시 맑은 목소리로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네. 마지막 사연은 앞선 사연들에 비해 조금 기네요."
"비겁하지만 이렇게 편지로나마 마음을 고백해 봅니다. 당신이 알려준 웃음과 새겨준 추억이 너무 많아 하루하루를 붙잡고 싶지만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걸 보며 무기력해집니다. 그럼에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으며 저에게 남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기억하려고 합니다. 제 마 음이 닿지 않겠지만 꾹꾹 눌러 참아오던 마음이 손 틈새로 삐져나오는 걸 이번 한 번만 눈 감아볼까 합니다."
"라고 사연을 써주셨네요. 글을 보면 짝사랑 중인 거 같은데 부디 그 사랑이 상대방에게 닿아 물결처럼 퍼지기를 바랍니다. 잔물결과 큰 물결이 모여 파도가 되는 것처럼 사연자분의 사랑에도 파란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신청곡 들으면서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이상 청야고 방송반 아나운서 곽지석이었습니다."
마무리 멘트를 읽고 애써 웃음을 짓고 있는 지석의 표정을 정수는 보지 못했다. 조금은 씁쓸한 발걸음으로 조정실로 가니 대본에는 적혀 있지 않은 마지막 애드립 이 꽤나 좋았다는 칭찬만이 쏟아졌다. 스튜디오 안에서의 표정은 찾지 못하게 숨긴 채 장난스럽게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지석만이 남아있었다. 가면을 쓴 지석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방송을 마무리하며 각자의 반으로 흩어졌다.
하교를 위해 신발장 문을 연 정수는 신발 위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누가 장난친 건가 싶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종이를 집어 들었고 접혀있던 종이를 펼쳐보았다. 펼친 종이에는 익숙한 문장들이 프린트 되어있었다. 비겁하지만 이렇게 편지로나마 마음을 고백해 봅니다. 로 시작하는 문장이. 사람이 붐비는 걸 싫어하는 정수라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내려왔기에 주위를 둘러봐도 정수 본인뿐이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비겁하지만 이렇게 편지로나마 마음을 고백해 봅니다. 당신이 알려준 웃음과 새겨준 추억이 너무 많아 하루하루를 붙잡고 싶지만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걸 보며 무기력해집니다. 그럼에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으로 삼으며 저에게 남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기억하려고 합니다. 제 마음이 닿지 않겠지만 꾹꾹 눌러 참아오던 마음이 손 틈새로 삐져나오는 걸 이번 한 번만 눈 감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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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줄이 벅벅 그어진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짙게 칠해진 마지막 줄은 잘 보이지가 않았고 옅게 그어진 초성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ㄱㅈㅅ' 자연스럽게 정수는 본인의 이름을 대입했다. 수신인을 마지막에 적나? 싶었지만 보다 중요한 건 편지를 누가 정수의 신발장에 넣었는지였다. 이 편지가 사연함에 있던 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지 속 당신이 김정수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방송반은 화요일 말고는 방과 후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정수는 가방에 편지를 넣어놨고 밀려오는 공부 거리들과 휘몰아치는 모의고사, 수능이 코앞인 정신없는 고3 정수에게 출처 불분명한 사랑은 모의고사 시험지들에 둘러싸여 잊혀졌다.
일명 같.이.밤 라디오의 메인 pd인 정수는 피디를 꿈꿨을 때부터 새벽이 무섭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심야 라디오를 만들고자 했다. 황금 시간대의 방송이 아닌 심야 라디오인 것에는 정수가 보내온 지독한 불면의 밤이 선택의 이유 중 8할이었고 2할은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정수가 가진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었고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통한 것인지 심야 라디오에서 꽤나 성공적인 청취율을 뽑아내고 있었다.
"시작 10초 전입니다!"
정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정수의 다섯 손가락이 다 접힌 후 방송은 시작됐다. 라디오의 공식 인트로 음악이 흘러나오며 디제이의 목소리가 시작을 알린다.
"만우절, 고백데이, 빼빼로데이 등등 수많은 데이의 공통점을 아시나요? 수많은 데이의 공통점에는 결국 고백이라는 종착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백에는 여러 가지의 형태가 있는 거 같습니다. 사랑의 고백, 거짓의 고백, 합격의 고백, 수많은 고백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받는 사람도 있겠죠.
여러 의미로 가슴 떨리는 고백들을 품고 사는 오늘 여러분들의 고백을 들려줄 수 있나요?
고백들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도 같이 걸어갈 저는 <같이 걸을 이 밤> 디제이 정현입니다."
인트로의 멘트로 알겠지만, 오늘 <쉿, 너한테만 말해줄께...> 코너의 주제는 '고백'이다. 작가진들이 말로는 이번 주제가 가장 사연 고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작가진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연들에는 엄마에게 혼날걸 각오하고 타투를 한 사실을 고백했으나 알고 보니 엄마에게도 타투가 있었다는 사연, 용기를 내 고백했는데 하필 만우절이라 장난이었다고 넘어간 사연, 대학 합격을 비밀로 했다가 온 집안에 위로를 받은 사연 등등이 올라왔으나 작가진의 원픽은 따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의 고백은 사랑의 고백이자 거짓말의 고백일 거 같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방송반 첫사랑 선배의 사연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10년간 눌러놨던 마음이라 한번 흘려보내니 막으려고 해도 둑이 무너진 것처럼 흘러나오네요.
제가 방송반 아나운서를 할 때 그 당시에도 사연을 읽는 코너가 있었는데 어느 날 주제가 첫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첫사랑을 지독하게도 짝사랑으로 하고 있었고요. 그날따라 돌려받지 못할 마음인 거 알지만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을 쓰고 다른 이의 사연인 것처럼 읽었습니다. 저 자신을 속여가면서요. 종국에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을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방송을 마치고는 괜히 씁쓸해지더라구요. 그치만 눈앞에는 짝사랑 선배가 있어서 제 표정을 숨기기 급급했습니다. 그런 스스로에 대한 동정이었을까요? 그날의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편지를 선배의 신발장에 숨겨두고 도망쳤습니다. 글씨체를 알아볼까 프린트한 편지를요.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낸 셈이죠. 비겁하게도요. 그걸 선배가 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어보면 당연히 저인 게 티가 날 테니깐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고백해 봅니다. 그때 선배 신발장에 있던 편지 제가 보냈어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보고 싶네요."
"아- 이분 기억 나시는 분들 꽤나 많을 거 같은데요? 지금 청취자분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게 현실이라니 내가 봐온 사랑 다 거짓이다'라는 반응도 올라오고 있구요. '너무 씁쓸한 사랑이라 사탕 먹는 중입니다.'라는 반응도 있구요. '누가 카카오 99% 사랑 주문했냐' 하시는 분도 계시네요. 저희 라디오를 통해 꼭 이분의 사랑이 닿길 바랍니다."
사랑이 닿았다. 사연을 들은 정수는 웃음이 자꾸 나와 고개를 숙였다. 긴가민가했던 사랑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름표까지는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진짜 혹시나 동명이인일까 봐. 그 추억들이 누군가에게도 일어난 일일까 봐. 그러나 두 사연을 충족할 수 있는 건 김정수 단 한 명 아닐까 신발장 속 편지와 이름표, 붕어빵, 방송반 모든 게 김정수를 향하고 있었다. 수신인인지 발신인인지 확신이 가지 않던 'ㄱㅈㅅ' 초성은 수신자와 발신자인 김정수와 곽지석 둘 다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곽지석이 분명했다. 곽지석이 보고 싶었다. 아, 이게 곽지석이 말한 사랑일까? 정수를 덮친 사랑의 영향 때문일까 라디오의 후반부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어영부영 라디오를 끝내고 디제이와 작가진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정수는 지석의 사연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아, 내가 그 파도가 되어줘야겠다. 라고 그렇게 정수는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대본은 작가들에게 맡기곤 하는데 파도가 되겠다고 생각한 이상 정수는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정수에게 파도가 서 있는 자리까지 닿을지 모르는 상태로 시작한 도박이었다. 떠나가는 파도가 발에 닿는 순간을 그리며 한자씩 써 내려갔다.
다음 회의에서 정수의 대본은 작가진들의 만장일치로 통과가 됐다.
"첫걸음마, 처음으로 100점 맞은 받아쓰기, 손 놓지 말라고 하던 첫 자전거 등등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려울 겁니다. 그게 사랑이라면 더더욱이요. 여러분들, 혹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방의 밤이 외롭지 않고, 무섭지 않게, 잘 잤으면 하는 게 사랑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은 매일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곁에 있어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게 사랑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던 지석은 익숙한 문장들에 라디오 소리를 높였다.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방송반 시절 지석이 읽었던 문장들이 순서만 바뀐 채로 흘러나왔다.
밀려오는 문장들이 지석의 발끝에 닿았다.
"보고 싶은 사람이 문득 생각나는 밤입니다. 오늘은 보고 싶은 사람에게 연락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여러분과 오늘 밤도 발맞춰 걸어갈 저는 <같이 걸을 이 밤> 디제이 정현입니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광고가 흘러나온다. 홀린 듯 열 어본 휴대폰에는 메시지 하나가 와있었다.
- 토요일 오후 1시 청야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지석아.
늦어서 미안해. 그리고 우리 라디오 잘 들어줘서 고마워.
정수의 번호였다. 10년 전 보낸 편지의 답장이 되돌아왔다. 지 석은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휴대폰을 놓고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블루 아워였다. 세상이 푸른빛으로 빛나는 시간이었다. 하늘의 색이 짙어질수록 지석의 마음에 파도가 들이닥쳤다가 밀려나기를 반복한다.
잠을 설쳤다. 이걸 가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에 일어나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끝은 결국 정수가 보고 싶다. 라는 생각으로 끝이 났다.
가는 발걸음이 젖은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듯 푹푹 젖어간다. 그리고 파도에 쓸려간다. 하얀 입김과 같은 색인 목도리를 한 뒷모습이 보인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마음속 파도는 거세게 지석의 발끝을 두드렸다. 두 발자국 남은 거리에서 지석은 멈췄다. 지석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상대가 돌아보았다.
".........안녕. 정수우."
"..........."
"보고 싶었어."
"지석아, 잘 잤어?"
두사람만의 언어로 만든 사랑이 파도친다. 하얀 포말이 두 사람의 발끝에 쌓인다.
첫사랑은 안 이뤄진다는 법칙에 늘 예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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