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신, 모든 계절의 너에게
익명 B
내가 잘못 본 건가? 하고 두 눈을 문지르며
빤히 쳐다보는 눈앞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너 누구야?”
“보고 싶었어”
“나를?”
“...조금만 기다려줘”
눈앞에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소년을 어떻게든 선명하게 보고자
두 눈을 비비며 앞으로 다가갔다. 귓가에 울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삐-
흐릿한 형태마저 하얗게 사라져 버렸다. 그 아이의 목소리가 아닌 알람 소리가 귓속을 찌를 듯 울려 퍼졌다. 익숙한 듯 알람을 끄고 부스스해진 뒷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기지개를 쭉 켰다. 목을 이리저리 누르며 뭉친 곳을 풀어냈다.
“오랜만에 꾸네”
익숙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와 흐릿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장면. 주기적으로 같은 꿈을 꾸며, 매번 뚜렷하지 않은 채 다가오는 소년과 마주한다. 이미 다 아는 내용임에도 꿈속의 나는, 무엇인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매번 새롭게 그 소년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소년은 마치 잊지 말라는 말이라도 남기듯 흐릿하게 남은 채 사라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꿈을 꾸는 시기가 온 것 같다. 그래봤자 내 방식은 늘 그렇듯이 머릿속에서 가장 깊고 깊은 곳, 시커먼 심해로 밀어 넣은 뒤 털어내는 것이다. 그래봤자, 꿈인데.
“주목”
시끄럽던 교실이 조용해지며 교탁으로 시선들이 모여들자
“이번에 새로 전학 온 친구가 있어요.”
나 또한 턱을 괴고 창밖을 보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간단히 자기소개 해줄래?”
“안녕 나는 곽지석이고, 앞으로 잘 부탁해”
지난주 전학 간 친구로 인해 비어 있던 옆자리엔 새로운 전학생이 앉게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갑작스럽게 전학을 간 내 친구도 놀라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학을 온 전학생 역시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수가 전학생 잘 챙겨줘, 지석이도 모르는 거 있으면 정수에게 물어보고”
“네 알겠습니다. ”
간결하게 끝난 조회 시간, 그리고 새로운 얼굴에 몰리는 아이들로 교실은 금세 북적였다. 그 소란을 뒤로 한 채 발걸음 옮겼다. 아침에 보았던, 갑자기 싸늘하게 시들어버린 화분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전학생보다는 그 화분에 신경이 빼앗겨 있었다. 원래 식물을 좋아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식물에 대한 관심은 없었고, 그저 어릴 때 키워본 다육이 정도였다. 하지만 음악 선생님이 선물로 주시고 간 화분인지라 최대한 잘 키워보고 싶었다. 물을 주고,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니겠지, 잘못 본 거겠지.’ 걱정들을 모두 져버린 채 싸늘하게 시들어버린 화분과 마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런지 이유도 모르겠고, 그것을 마주하자, 심장이 가라앉는 기분이 밀려왔다. 평소 식물에 대해 잘 알면 모를까.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두고 물만 주면 되는 게 아니었나 싶었다.
“학교 끝나면 영양제라도 사야하나...”
심란한 마음을 다잡고 교실로 돌아오니, 전학생에 관한 질문이 끝나 흥미가 식은 것인지 아이들은 이미 다른 주제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저 앉은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지만, 다음 수업은 이동 수업이라 아까 보았던 화분이 있는 음악실로 가야 했다.
“지석이라고 했나? 우리 다음 수업이 음악실이라서 이제 가야 해”
심란한 마음은 뒤로 하고 전학생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먼저 말을 꺼냈다. 낯가림이 있는 편이라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편이 아님에도 그 순간만큼은 그런 성격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잘 챙겨달라던 담임선생님의 조회 시간이 머릿속을 맴돌았기에 결국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김정수야 소개가 좀 늦었지. 미안”
“반가워 난 곽지석이야”
분명 자기소개하는 모습을 봤는데, 이렇게 바로 옆에서 봐서 그런가. 작은 체구와 하얀 피부 단정한 교복. 노란 명찰에는 ‘곽지석’이라는 이름 세글자가 정자로 적혀 있었다. 첫날이라 긴장한 듯한 표정 그리고 나를 담고도 남을 듯한 큰 눈망울이 시야에 들어왔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내가 알려줄게.”
“고마워”
조금 전까지의 긴장은 언제 있었냐는 듯,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 순간, 동기화된 것처럼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었다. 예쁘게 웃네.
음악실에 도착하자 창가 쪽 화분으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머릿속은 온통 영양제와 시든 화분 살려낼 방법뿐이니까, 음악실을 가득 채운 클래식 소리도 그 생각을 밀어내지 못하는지 변함없었다. 영양제를 넣어주면 살릴 수 있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애정이 부족했던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노트의 귀퉁이엔 클래식 대신, 화분을 생각하다가 이리저리 소용돌이치듯 휘갈겨 놓은 낙서들로 가득했다.
차디찬 바람으로 꾹 닫힌 창문들도 조금씩 열리며 바람이 살랑살랑 느리게 들어오자, 블라인드를 탁-탁 치는 계절이 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하나둘 긴 동복에서 하복으로 바꾸며 무더워질 여름을, 지금의 기분 나쁘지 않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할 준비 하듯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블라인드도, 셔츠 자락도 함께 일렁이게 했다.
영양제의 효과를 본 것인지 조금씩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앞에 서서 화분을 바라봤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으로 옮기고, 전보다 훨씬 더 신경을 바짝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옆을 보니, 나만큼이나 화분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수업을 함께 다니는 동안, 내가 가는 동선에는 늘 곽지석이 있었다. 다만 화분에 물을 주러 갈 때만은 혼자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함께하게 되어 나란히 화분 앞에 서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그 말을 남기고 물을 준 뒤, 교실로 향했다.
나른한 오후 수업, 칠판에 분필 스치는 소리가 느릿느릿 들려왔다. 식곤증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잠과 맞서 싸우고 있을 때, 옆을 바라보니 곽지석은 이미 밀린 싸움처럼 고개를 조금씩 떨구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땐, 아예 포기한 듯 책상에 그대로 엎드린 채 잠에 푹 빠져들었다.
문학작품에 대한 국어 선생님의 이야기는 천천히 귓가로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내 시선을 붙잡은 건 새근새근 잠든 곽지석이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바람에 흔들린 앞 머리칼이 눈을 찌르는지, 미간을 조금씩 찌푸려지면서도, 잠에서 계속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맨 뒷자리여도 선생님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자리인데, 늦게 잔 것인지 아니면 식곤증을 버티지 못한 것인지 누가 업고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르게 잠든 지석을 한참 바라보다가 서서히 머리칼을 넘겨주자,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서서히 풀리며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고는 두 눈은 꼭 감은 채 입만 뻥긋거리기에, 자세히 보니
‘정수’
‘고마워’
그렇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고 있자니, 결국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아이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에 묻히긴 했지만, 수업 시간에 웃음소리를 내다니. 그만 웃기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웃음이 자주 새어 나오던 사람이었나? 곽지석과 같이 다니게 된 이후로, 자꾸만 웃음이 난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하지만 쟤가 너무 웃긴 걸 어떡해.
수업이 끝나자,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지석에게 김정수라는 이름이 수놓인 체육복을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서서히 풀리는 걸 보자, 웃음이 다시 새어 나왔다. 웃긴 게 아니라, 하는 행동이 귀여운 거라고 다시 수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동성에게서 귀여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행동이 웃긴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틀린 답을 빈칸에 채워 넣고 있었다.
비가 많이 왔다. 봄비가 시작된 것인지, 어두워진 채 비는 내리다가도 멈추기를 반복하며
하늘에 먹구름으로 가득 채웠다. 눅눅해진 날씨에 몸은 솜 먹은 듯이 무거웠지만, 가방을 향해 숙여 뒤적거렸다. 어제 산 영양제를 꺼내 음악실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효과가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아 더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 탓인지 이유는 알 수 없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다. 무거운 컨디션으로 매번 챙기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늦었다는 생각에 한 손에 영양제와 물을 채운 컵을 들고, 음악실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곽지석?”
익숙한 뒤통수. 누가 봐도 곽지석이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더니 음악실에 있었던 걸까, 불도 다 꺼져 있는 음악실에 왜 있는 것인지 생각하는 사이, 재촉하던 발걸음은 더욱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니, 손에 들린 곳으로 시선이 꽂히자 당황스러워졌다.
화분을 왜 들고 있는 거지?
문을 여는 순간, 어둡던 음악실이 환하게 밝아지며 지석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지석이 양손으로 감싸고 있는 그 화분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상태가 완전히 좋아지지 않았는데,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기를 되찾은 듯이 파릇파릇해진 모습인 것이다. 비로 인해 어두워진 날씨 속에서, 밝은 빛을 머금고 있는 화분을 보는 순간 영양제와 물이 담긴 컵을 쥔 손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침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주인공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처럼, 지금의 나는 믿기 힘든 광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 잘못 본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나보다 더 놀란 듯 토끼 눈을 뜨고 바라보는 곽지석을 보자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고 싶어졌다.
“어...”
“...”
“그게 그러니까..”
양손으로 화분을 들고 있던 지석이는 꽤 놀란 것인지, 아니면 손에 힘이 풀려버린 것인지.
그대로 화분을 놓쳐버렸다. 안된다고 외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지만, 거리상으로 절대 지켜낼 수 없는 위치였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릴 거라는 생각에 이를 꽉 깨물었는데
“.....미친”
화분은 바닥에 거의 닿을 것 같은 높이에서, 둥둥 떠 있었다. 지금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뺨을 때리고 깨어나고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사고의 흐름에 빨간불 켜진 것처럼 그대로 멈춰버 렸다.
아까의 놀람을 잊은 듯, 지석이는 차분하게 몸을 숙여 화분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을 때, 나와 마주친 눈동자가 현실감이 빠져나간 듯 맑고 투명했다.
“정수야 많이 놀랐지. 미안.”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주저앉지만 않았을 뿐. 놀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심리적 행동은 다 나온 것 같았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는 점만 빼고는. 하지만 발밑은 떨어진 컵에서 쏟아진 물이 흥건했고, 머릿속엔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이 떠다녔다. 심장이 이리저리 쿵쿵 뛰기 시작했다.
“너 정체가 뭐야?”
상상력이 풍부했다면 어디 다른 세계에서 온 건 아닌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다 구석으로 밀어놓은 채 물음표 달린 질문 하나. 정체가 무엇인가. 일반 사람과는 분명 달랐다. 화분이 둥둥 떠 있질 않나, 시들시들하던 화분을 다시 되살리지 않나.
“내가 다 설명해 줄게. 그러니까..”
띵-
기막힌 타이밍에 울리는 종소리.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절묘한 순간이었다.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지석이가 들고 있는 화분을 받아,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밀어 넣어 숨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변화가 너무도 컸다. 수업을 나란히 빠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일단 끝나고 우리 집으로 가자.”
“어?”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심란한 마음에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들려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곽지석의 비밀이 알려질까 봐 정신을 부여잡았다. 이 비밀은 나 하나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다 못해, 이미 문제가 되어버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귀신?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식물을 되살리는 건 뭘까. 마법사? 머릿속은 복잡하게 쌓아 올린 서류 더미를 한꺼번에 떨어뜨린 것처럼, 이리저리 뒤죽박죽 뒤엉켜 있었다,
남은 수업 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중간에 지석이가 나를 불러 괜찮냐고 물었던 것 같지만, 나는 괜찮다고 답한 뒤 들어오지도 않는 교과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 고개를 돌려 지석이를 바라보니, 잘못 이라도 저지른 강아지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눈을 마주하니, 정말 괜찮다고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그냥 내가 아침에 영양제를 조금만 더 일찍 주러 갔더라면 보지 못했을까? 그렇게 한 박자씩 타이밍을 놓쳤다면, 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가 영영 모르지 않았을까? 누가 미쳤다고 계속 붙어 다니는 친구를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판단을 내리겠어.
혹여라도 누가 들을까 봐, 결국 집으로 데려왔다. 아무도 집에 없는 시간. 지석이는 처음 자신을 소개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큰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굴러가는 걸 보니, 그때의 긴장은 긴장도 아니었던 것 같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주위를 살피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치를 보 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진 않았다. 죄지은 것도 아니고, 겁을 주려고 데려온 것도 아닌데.
“지석아, 매실차 마실래?”
“어..아니, 괜찮아”
“진짜?”
“마실래..”
탁자에 얼음이 동동 띄워진 매실차가 담긴 유리컵 두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유리컵 표면엔 옆에 있는 곽지석처럼 긴장한 듯 물방울이 삐질삐질 맺히기 시작했다. 분위기 탓에 매실차도, 나도, 지석이도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셋이서 삼자대면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사실 나는 다른 행성에서 왔어.”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지구에서 화 분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이 있다면, <생생 정보통> <세상에 이런 일이> <VJ 특공대> 같은 곳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유튜브에는 [어딘가 모르게 특별한 소년?!] 같은 영상이 몇백 개쯤 쏟아져 나왔겠지. 그러니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게, 가장 그럴듯한 정답이다. 그런데 다른 행성이라니.
“그럼.. 외계인...?”
“..그렇지?”
정체를 알아버렸다. 이런 말은 영화 속 주인공이 해야 할 대사 같지만, 지금 난 영화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짝꿍이 외계인이라니. 다른 행성에서 왔다니. 누굴 붙잡고 얘기하게 된다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부터 하지 그대로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정복이 목적은 아니지?”
“아 무슨 정복이야-”
바짝 마른 입술을 옅게 떨며 말을 잇던 지석이는 그제야 입꼬리에 웃음이 번졌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말 한마디의 효과가 이렇게 컸던가. 나 또한 혼란스러워 요동쳤던 심장이 안정적으로 뛰는 것 같았다.
“너, 나 믿어? 날 뭘 믿고 말해주는 거야?”
“믿어”
“너라서 믿어 정수야”
나라서 믿는다고? 나의 무엇을 믿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고, 정작 나는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알게 되었을 뿐이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 없었다. 내 짝꿍이자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네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사실을. 덥석 믿기엔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수긍이 빠른 사람이 아니기에 무리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네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내일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내일도 우리는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고, 놓친 필기를 적어 내려갈 것이며,
누군가는 뭐가 웃기냐고 묻는 장난에 서로 웃으며 하루를 보낼 테니까.
“다른 행성에서 왔다 해도 내 옆에 앉아 있는 건, 여전히 너잖아. 하고 싶은 것들 있으면 말해. 같이 해줄게.”
“정수..고마워 진짜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왜?”
“용기 내서 말해준 거잖아. 날 믿어줬고”
지석이는 내 말을 곱씹듯 한 번 숨을 고르고는, 입꼬리에 웃음이 번진 채로 눈을 마주쳤다.
그때 마주한 표정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곽지석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시간은 혼자서 성급하게 달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할 시기가 되었다. 우리 학교가 가장 예쁘게 피기로 유명해서 창문 너머로 사진을 찍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바람과 함께 들어왔다. 하지만 벚꽃이 피었다는 건? 학생에게 그 꽃말이 무엇이던가. 중간고사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눈앞에 있는 문제집으로 시선을 옮기면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시험이 끝날 즈음이면, 벚꽃도 다 져 있을 텐데.
벚꽃이 지 는 속도만큼 중간고사도 빠르게 지나갔다. 시험지를 날려버리고 마음껏 쉬려 하였으나, 이번 성적만큼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목표한 점수가 나오지 않자, 시험지보다도 하얀 종이에 검은 숫자들만 적힌 성적표를 갈기갈기 찢어 입안에 넣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석이랑 같이 보러 가기로 한 영화도 결국 기말이 끝난 뒤로 미뤄졌고,
그날 이후로는 모든 게 괜히 싫증이 났다.
필기구 소리와 책장이 넘기는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운 지금은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강제는 아니어도, 되도록 하게 되는 야간자율학습이다. 창밖은 어느새 까만 크레파스로 칠해 놓은 것처럼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옆을 보니 공책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는 지석이가 보였다. 정체는 나만 알고 있지만, 외계인이 야자라니. 외계인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기특한 마음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다시 집중하려는 순간, 공책이 시야에 불쑥 들어왔다. 시선을 옮기자, 공책 위로 가지런한 글씨로 적은 질문이 보였다.
[정수 신기한 거 보여줄까?]
흥미로운 질문에 펜을 들어서 나 역시 답장해 주었다.
[뭔데?]
물음표를 찍는 순간, 지석의 웃음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조용해야 할 이 시간에 까르르 웃는 소리에 다급히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나와 곽지석을 제외한 모두가 영상이 멈춘 것처럼 정지해 있었다. 지석이는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팔랑거리듯 손짓했다.
“따라와 봐”
헤실헤실 웃으며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표정이 괜히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무엇이기에 저렇게, 마치 엄청난 걸 보여주기라도 할 것처럼 신이 나서 방방 거릴까 싶다가도 앞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내 따라가고 있었다. 저런 찰나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그저 사랑...아니, 귀여웠다로 정정한다.
사랑은 무슨 에이 설마.
신나서 따라간 곳에는 벚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5월 초 분명, 바람을 따라 온데간데없이 흩날아가 버리고, 파릇파릇한 잎들만이 빈자리를 채워나갈 시기였다. 그런데 눈앞에는 만개한 벚꽃나무가 있었다. ‘들키면 어떡하려고’라는 말이 나와야 했을 텐데, 그저 눈앞에 흩날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 가로등 아래였기 때문일까. 분홍빛 꽃잎들이 춤을 추듯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은 ‘예쁘다’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었다.
“정수 벚꽃 보고 싶어 한 것 같아서”
좋아하는 꽃을 마음껏 피워내는 것 또한, 얼마나 신기한 능력인가. 나는 좋아하는 마음조차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채 외면해 왔는데, 잔뜩 피어난 벚꽃나무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 그리고 생글거리며 눈꼬리가 잔뜩 휘어진 채 웃고 있는 너를 보니 생각을 고쳐야 할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제 피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좋아서,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만큼 행복했다.
흩날리는 벚꽃잎을 이리저리 잡아보려 애쓰는 지석을 보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뤄진대.” 정말일까? 그런 걸 잡는다고 내 사랑이 이루어지겠어. 그런데도 눈앞에서 폴짝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양손을 뻗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 심이 간절함으로 바뀌는 순간이, 이렇게 조용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잡았다”
“오 빠른데? 너 능력 쓴 거 아니야?”
“아니야!! ㅋㅋ 내가 잡았다니까?”
그렇게 한참을 웃던 지석은 신기한 듯 손바닥 위에 있는 벚꽃잎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것을 신기해하듯이 그저 벚꽃잎 하나일 뿐인데도 그걸 자세히 보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그거 먹는 거 아니야!”
말릴 틈도 없이 벚꽃잎은 곧장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황당한 외계인을 봤나. 갑작스럽게 입속으로 넣어 버릴 줄은 몰랐는데, 이미 삼켜 놓고서 놀란 표정을 지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이미 삼 켰는데. 그럼에도 잘못한 강아지처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이미 사라진 걸 어쩌겠어. 손에 쥐고 있던 벚꽃잎은 주머니에 넣고, 지석이 머리 위로 내려앉은 꽃잎을 하나씩 떼어주었다.
“무슨 맛이 나?”
“아무 맛도 안 나네 ㅎㅎ ”
“맛이 궁금해서 먹은 거야?”
“응 그냥 궁금했거든 달콤할까? 이런 생각?”
이 바보 외계인 어떡하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벚꽃잎을 삼켜 놓고서 바보 같은 얼굴로 웃고만 있었다.
“지석아 눈 감아봐”
“뭔데?”
“일단 감아봐”
그렇게 눈을 감은 채 기다리는 지석에게 조용히 다가가 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을 꺼내서 포장지를 뜯었다.
“지석아”
“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 모양이 동그랗게 벌어지는 순간. 입안에 사탕을 넣어주었다.
“지석아 이게 벚꽃 맛이야.”
안 그래도 큰 눈을 잔뜩 키운 채 나와 마주했다. 갑작스럽게 굴러온 동그란 사탕에 놀란 것은 당연할 것이다. 놀람도 잠시였는지 입꼬리를 쭉 잡아당기며 눈꼬리를 잔뜩 휘었다.
“정수”
“응?”
그 순간 입술이 맞닿으며 사탕이 다시 입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이제 벚꽃이 무슨 맛인지 알 것 같아”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또 잊지 못할 장면 하나를 머릿속에 담아냈다. 왼쪽 볼이 동그랗게 늘어나서는 눈에 별이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지석이의 눈동자에는 별 대신 사랑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사랑을 몽땅 담아가고 싶을 만큼. 입안에 넣어준 사탕은 비 싼 수제 사탕도 아닌 그저 ‘체리블라썸’이라 적힌 체리 맛 사탕 하나였다. 처음 먹어본 것도 아니고 자주 먹던 맛이었는데도, 오늘의 달콤함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하게 달콤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흩날리는 벚꽃잎과 그 사이로 섞여 드는 지석의 웃음소리에, 마치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 행복해서 이 모든 것들이 자고 일어나면 전부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갔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목표한 점수를 받겠다고 다짐하며 기말고사 준비를 하였다. 잠을 줄여서라도 지난번 같은 충격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지석이랑 미뤄 두었던 영화도 보고 새로 생긴 맛집도 함께 가기로 했기에 더 열심히 문제들을 풀어나가며 동그라미들로 채워나갔다. 이번 기말을 준비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나보다 지석의 과학 점수가 훨씬 높다는 것이다. 문제의 정답을 바로 아는 초능력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해 보고 싶었지만, 지구과학이나 화학 시간의 지석이를 떠올리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구보다 집중하여 눈을 반짝거리며 수업을 듣고 있었으니까.
지석이는 쪽지 하나를 건네더니
끝나고 음악실로 와!
이 말만 적혀 있는 쪽지를 보고 있을 즈음, 수업이 끝나 종이 울렸다. 지석이는 곧바로 교실 밖으로 나갔고, 나는 쪽지인지 초대장인지를 모를 종이를 쥔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이가 남긴 발자국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신난 뒷모습은 내 입가에 웃음을 번지게 했다.
암막 커튼을 쳐놓은 것처럼 캄캄한 음악실에 들어서자, 환하게 빛나는 불빛이 시선을 붙잡았다. 그 빛을 꽂은 조각 케이크를 들고 있는 지석이가 나를 마주한 채 서 있었다. 촛불 때문이었을까? 눈에 별 하나를 담은 채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보자, 발걸음은 예전에 무언가 홀렸던 그날처럼 자 연스레 지석에게 향했다. 이곳은 음악실이 아니라 광활한 우주 한가운데에서 단둘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정수 생일 축하해”
일렁이는 촛불에 반사되어 같이 흔들리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양손을 맞잡고 소원을 빌었다.
“소원 빌었어?”
“응 다 빌었어.”
너는 영원을 믿을까. 요즘의 나는 이 순간들 하나하나가 멈춰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영원을 믿게 되었다. 유한한 것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는 자꾸만 무한한 것을 찾고 있었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고 있기를 바라며 소원을 빌었다. 너의 행복을 바라며, 네 밝은 미소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길 바랐다. 이제 내 세상은 온통 너뿐인 것 같아.
“내년 네 생일에는, 우리 같이 촛불 켜자.”
매미 소리 울음이 울려 퍼지는 무더운 여름, 방학을 앞둔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지석이와
함께 맞이하는 두 번째 계절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른다는 걸, 또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지석이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더 빠 르게 지나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될지도 모른다. 매번 내게 선물 같은 순간들을 보여준 지석에게, 이번만큼은 내가 그런 순간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지석이와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자, 나도 모르게 지석이보다 더 신이 나 손을 잡고 학교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양손으로 지석이의 두 눈을 가린 채, 문을 천천히 열었다. 여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치며, 가빠진 호흡을 고르게 했다. 탁 트인 옥상을 천천히 걸어 나오며, 서서히 양손을 걷어 올렸다.
지석이는 마치 밤하늘의 별을 처음 마주한 사람처럼, 반짝이는 야경을 신기한 눈빛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어때?”
“너무 예쁘다.”
“나도 보여주고 싶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거든.”
“정수”
“응?”
“이거 봐봐”
깜깜한 옥상, 지석의 손끝에서 작은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작게 팡팡 터지는 불꽃들이 옥상을 밝히며 색색의 빛을 터뜨렸다. 하나하나 터지는 불꽃을 눈에 담기에도 벅찰 만큼 예뻤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은 채, 말없이 감탄사만 흘러나왔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다른 말들은 입술 끝에서 머물렀다.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행성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서 있는 옥상은 어느새 우리만의 세계가 되었고, 지금 내 세상은 오직 너와 나, 둘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후덥지근한 여름, 태양이 내리쬐어 아스팔트의 열이 식지도 않았는데 개학이 찾아왔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방학을 맞아 지석이랑 함께 영화를 보고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히며 지냈던 것 같은데 벌써 개학이라니, 시간이 새삼 빠르다는 걸 또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아침이라 아직은 미친 듯이 내리쬐지는 않지만, 곧 무시무시하게 뜨거워질 날씨를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버스정류장에서 몇 분을 기다려도 곽지석은 나오지 않았고, 근처에서 지내는 길냥이만 다가와 손길을 받았다,
“나비야 빨리 지석이한테 가서 일어나라고 해 주라.”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양이는 지석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즘 고양이들 진짜 똑똑하다니까. 가끔 늦은 날들도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늦은 적은 없었는데 개학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놀릴 생각에 웃음이 났다. 오늘 아이스크림은 지석이가 사는 걸로 해야겠다.
교실에 들어온 뒤로 한참 시간이 흘렀지만 지석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점점 시계의 초침만 바라보게 됐다. 이렇게까지 늦을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 핸드폰이 필요하다니까. 그렇게 시그널로 다 알 수 있다며 굳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이런 경우 내가 먼저 시그널을 보낼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렇게 멍하니 창문으로 바깥만 바라보고 있던 사이, 종이 울리고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온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출석 끝. 다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마지막에 불려야 할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는데 출석이 끝났다니, 오랜만에 출석을 부르시더니 전학생을 까먹으신 건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당황스러움이 감춰지지 않았다.
“지석이가 아직 안 왔는데요?”
“지석이? 지석이가 누구니?”
그 순간, 당황스러움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마저 헛소리하는 사람을 보듯 쳐다보자, 심장이 더 빠르게 요동쳤다.
“정수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네. 수면 패턴 이제 맞춰야지”
교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곽지석은 어딜 갔는지 오지도 않았다. 반 전체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니면 동시에 기억을 잃은 사람들처럼, 곽지석이라는 존재를 지워내고 있었다.
“자 주목. 그것보다 오늘 새로운 전학생 친구가 왔어.”
“정수가 짝꿍이니까 잘 챙겨주고, 알겠지?”
선생님이 소개한 전학생의 이름은 내가 알고 있던 이름과 단 한 글자도 일치하지 않았다.
에이. 꿈이지? 꿈이잖아. 나는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서 급하게 찬물을 틀어 세수했다. 깨어나려고. 이런 기분 나쁜 꿈은 당장 끝내야 했다. 그래야 곽지석한테 가서 말할 수 있고, 지석이가 듣고 웃으며 “악몽이네” 하고 넘겨주는 모습을 봐야 안정될 것만 같았다. 세수를 끝내고 다시 거울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턱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얼빠진 표정으로 서서, 종이 울린 줄도 모른 채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정수 종 쳤어 뭐해 ㅋㅋ
손짓하며 웃고 있는 지석의 모습이 눈앞에 너무나도 선명했는데, 그마저도 잔상처럼 이내 사라져 버렸다.
날 두고 가면 어떡해. 당장 내일 네가 없는 이 행성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같이 놀러 가자고 했잖아. 눈 오는 것도 보고 싶다며. 대학교도 가보고 싶다면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그걸 누구랑 보라는 거야. 네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데 나는 아직도 네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너의 잔상이 눈앞을 아른거리는데 나 혼자 남은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야.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의 우주이자 전부가 되어버린 네가,
사라진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나 혼자 본 영화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결말이 아니길 바랐다. ‘긴 꿈을 꾼 것 같다.’라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프레임과 웃음소리, 그리고 너의 잔상이 너무도 선명했으니까.
곽지석이 지구에서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찾아다녔다. 경찰서에 신고할 수 없는 답답함과, 그 근처 사람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곽지석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더 미치게 했다. 둘이 자주 가던 곳을 돌아다니며 혹시라도 오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늦게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네에서 몇 시간을 붙잡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나는 나사 하나 빠져버린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세상의 다른 것들에는 전혀 초점이 맞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단 하나. 책 한 권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정수 선물이야”
“책?”
“내가 읽어본 책 중에 제일 재밌더라고”
“진짜? 고마워”
“꼭 읽어야 해”
“당연하지 내가 꼭 읽고 독후감까지 써줄게. ㅎㅎ”
책을 펼치자, 첫 장에 적힌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수 생일 축하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책을 붙잡고 있던 손끝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익숙한 필체를 절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글씨들을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지석에게 선물 받은 이후, 내용이 궁금해 틈만 나면 책을 붙잡고 읽었다.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옆에서 얼음을 볼에 가득 문 채로 재밌지 않냐며 웃던 너를 보고, 더 빨리 읽고 싶어 괜히 속도를 내기도 했다. 이 책이 좋아진 이유도, 어느 문장이 좋았는지도, 밤새 너와 얘기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나 혼자 남아 책을 쥐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지막 장의 문장이 끝나자, 마른세수 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지 게 웃던 너의 흔적들로 알록달록해진 곳에서, 나는 홀로 슬픔에 질식하듯 무너져 있었다. 웃음들이 남긴 색들은 흔적이 사라지는 듯했고, 그 한가운데서 나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명왕성에 와버린 것만 같았다. 빛조차 늦게 도착하는 곳. 나는 네 기억만 붙잡은 채 몇 번이고 불러봐도 대답 없는 이곳에서, 나 또한 잊힌 채 슬픔에 천천히 잠식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감싸고 있던 양손을 천천히 내렸다. 답답하게 창문을 막고 있던 커튼을 젖히자,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이 방 안 깊숙이 스며들더니, 펼쳐진 책 위에서 글씨가 하나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잉크를 머금은 종이가 스스로 숨을 쉬듯, 글자들이 이리저리 까맣게 피어나는 것이다. 시들했던 화분이 되살아났던 그날처럼, 벚꽃나무를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글씨들에 시선이 붙잡혀, 한순간도 놓을 수 없었다.
To. 정수
결국 다시 피워내는 것은 너였구나.
한 구절을 읽는 순간, 기억은 나를 단숨에 그 여름으로 데려갔다. 책을 들고 있던 열여덟,
노란 명찰을 달고 교실로 들어오던, 특별하고 신비한 그 아이를 좇던 여름 한가운데로.
햇빛은 지나치게 밝았고, 프레임 속의 모든 장면은 이유 없이 반짝이던 계절이었다.
정수가 이걸 볼 때는 책을 다 읽은 거겠지?
어때? 내용은 조금 깊었지만, 그래도 재밌었을 거야.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나의 귓속에, 글자들이 두둥실 떠올라 천천히 스며들었다.
까만 잉크였던 문장들은 어느새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당장 고개를 돌리면 옆에서 환하게 웃는 네 모습이 떠오를 것만 같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마 지금은 내가 네 옆에 없을 거야.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이유를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많이 놀랐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더라.
지구라는 낯설기만 한 행성에서 보냈던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했어.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나에게는 꿈속에 사는 것 같았거든.
지구라는 행성에 지내는 동안,
나는 너를 만나고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내가 다시 지구로 돌아갈게.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잠도 잘 자고, 화분에 물도 잘 주고.
아프지 말고, 잘 지내 줘.
많이 사랑해.
참고 있던 것들이 끝내 무너졌다. 울음은 소리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깨는 미세하게 떨렸고, 눈물이 책 위로 떨어졌다. 글자들 사이로 스며드는 슬픔을 도무지 말릴 수 없었다. 돌아온다는 기약 없는 약속에, 나는 숨죽여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약속을 믿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책을 끌어안고, 나는 억지로라도 숨을 들이쉬었다. 네가 돌아오기까지 이 약속 하나로 나를 붙잡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언제나 우리가 있었던 그곳에서, 다시 돌아올 너를 웃으며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너 없이도 기다리며, 사랑할 것이다.
어김없이 기약 없는 약속을 기다리는 나는, 신호등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차들이 얼마나 스쳐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매번 이날만 되면 어김없이 이곳에 섰다. 지석이 집 앞에 있던 버스 정류장. 어쩌면 여기서 다시 마주칠 수 있을까 봐. 네가 다시 찾아온다면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그대로 위로 두둥실 떠오르다가 흩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기라도 하듯 손을 뻗어 흔들며 입김을 길게 내뱉었다.
기다리다 말고 괜히 반대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오늘은 아닌가 보다 싶어 넋을 놓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더 늦게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반대편 정류장,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내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얼굴을.
곽지석이었다.
내가 알아보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너는 그저 천천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그대로 마주치는 순간, 숨이 차는지도 모르게 달려갔다. 놓쳐버릴까 봐. 나는 괜찮은 줄 알았다. 편지 속 너의 말을 믿으며 기다려 온 기약 없는 시간이 정말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나 보다. 너를 보자마자 눌러 두었던 슬픔이 심장을 짓누르며 숨을 턱턱 막아왔다.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계속 너에게로 달려갔다.
내 눈으로 마주하자 끌어안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꿈이 절대 아니어야만 했다.
혹시 신기루일까 봐, 숨조차 조심스러웠다.
나의 일기장은 온통 너로 가득했다. 어쩌면 외계인 관찰일지라 불러도 될 만큼.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관찰일지라기엔 슬픔이 너무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구에서 사라진 너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일기장을 펼쳤다. 내가 본 장면들의 프레임을 문장으로 옮겨 한 글자씩 눌러썼다. 이미 여러 번 써 내려간 익숙한 문구들임에도, 다시 같은 말을 적으며 새 페이지를 채워 나갔다. 가끔은 일기장을 붙잡고 그대로 무너지는 날들도 있었다. 기록에는 한계가 있듯, 붙잡고 있던 기억마저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저 불안했다. 나까지 기억을 잃어버리면, 이 지구에 네가 나에게 남겨주고 간 흔적들이 전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에 나는 그 흔적을 부둥켜안은 채 기다렸다. 네가 오기 전까지 단 하나라도 놓칠까 봐, 품 안에 있는 것들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보자마자, 너를 끌어안았다. 다시 놓칠까 봐.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혹여라도 추울까 주머니 속 핫팩을 쥐여 주고, 목도리를 감싸주었다. 내 코와 손끝이 빨개지는 건 상관없다는 듯, 나는 오로지 지석이만 감싸고 있었다. 혹시라도 사라질까 봐 손을 꼭 잡았다. 놓칠까 봐, 이미 잡은 손을 다시 붙들고 손가락 사이를 더 갚게 얽어맸다.
“보고 싶었어”
1월 14일 지구에 곽지석이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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