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나의 평생
모어
"형, 나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
정수는 그제야 알았다.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마다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지석의 얼굴이 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왜 지석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해 보려고 유난히 노력했는지. 너무 늦은 해답은 가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석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했을 때, 정수는 자신이 지석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늦은 자각은 가끔 미련한 버티기로 이어진다는 걸 그때의 정수는 몰랐다. 물론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찰나의 평생
김정수 곽지석
"작가님, 저 사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 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정수는 익숙하게 펜을 들어 책의 표지를 넘겼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종이 위로 정수의 사인과 간단한 메시지가 적혔다. 사인 요청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래도 익숙해졌다. 직접 책을 사 들고 와서 요청해 주시는 모습이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아직도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정말 익숙하지 않았다.
"작가님, 오늘 식사하고 가시나요?”
"아,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넵, 들어가세요."
정수는 사람 좋은 얼굴로 행사 관계자에게 인사를 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정수가 한숨을 쉬려던 순간,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무음 모드 안 해 뒀었나? 용 케도 강연 시간 동안 울리지 않았구나 싶어 소름이 돋은 채로 미리 보기를 확인한 정수가 미소 지었다.
[정수 비상 비상]
[오늘 큰마음 먹고 와인 사 왔는데 뚜껑 안 따져ㅕ]
[빨리 와...ㅠㅠ]
곽지석과 와인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하며 정수가 답장을 보냈다. 곧 갈 거라는 메시지에 엄지손가락을 올린 손 이모티콘이 따라붙었다.
"정수, 어서 와."
"내 집인데 무슨 본인 집인 것처럼. 와인은?"
"혹시 몰라서 잠깐 냉장고에 넣어뒀어."
신선한 바깥 공기를 가득 안고 들어선 현관문 앞에 보기만 해도 따끈해지는 곽지석이 있다. 이미 한참 전에 집에 도착해 푹 쉬었는지 볼이 반질반질하고 살짝은 붉기까지 한 지석이. 이 사실이 정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와인 오프너가 따로 있다는 건 알고 산 거야?"
"아니, 전혀 몰랐는데?"
"그럴 줄 알았다. 우리 집에 오프너 없으면 어쩔 뻔했어."
"괜찮아. 정수는 있는 거 다 알아."
부러 당당하다는 듯이 배를 내밀고 고개를 드는 지석의 모습에 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래라. 지석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린 정수가 부엌으로 향했다.
"근데, 갑자기 웬 와인? 술도 잘 안 마시면서."
"정수 첫 작가 강연 기념으로 사 왔지."
"어이구, 기특하네."
지석이 정수의 옆을 기웃거리다 선반을 열며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정수도 굳이 뭐라 하지 않았다.
"이게 오프너야?"
"그거 아니야."
"이건가?"
"그것도 아니야."
"정수는 왜 못 찾아?"
"나도 오랜만에 쓰는 거라 위치가 가물가물하네. 근데 너 요즘 자주 놀러 온다? 애인이랑 안 놀아?"
"요즘 바빠. 오늘도 출장 간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부엌을 열심히 뒤지고 다니던 정수가 결국 서랍 안에 파묻혀 있던 오프너를 찾는 데 성공했다. 막 등단했을 때 부모님이 선물해 주셨던 와인을 비우고 난 이후로는 와인을 마신 적이 없어서 한참 안쪽에 처박혀버린 모양이었다. 정수가 오프너를 찾았다고 입을 열려던 찰나에 지석이 신나게 울리는 휴대 전화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어, 형. 도착했어?"
베란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석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누구인지 아는 정수는 잠시 착잡해진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오프너를 이용해 와인을 따고, 미리 배달시켰던 음식을 세팅하는 동안 지석의 전화는 멈출 줄 몰랐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떨구다가, 실실 웃으며 조잘조잘 떠들기도 하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부끄럽다는 듯 배배 꼬다가. 그런 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을 끊기가 어려웠다. 한참 베란다에서 전화를 이어가는 지석을 바라보던 정수는 결국 숟가락을 드는 대신 TV를 켰다. 조금은 식은 음식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지석과 정수가 처음 만난 계기는 고등학교 도서부였다. 정수는 문예창작과로 진로를 정하고 난 후 생기부를 채우기 위해 지원했고, 지석이 들어온 해에는 부장도 맡았다. 지석은 중학생 때 도서부를 했던 기억이 나쁘지 않아 지원한 케이스였다. 정수가 지석에게 가졌던 첫인상은 잘생겼다, 성실할 것 같다. 워낙 단정하고 똘똘하게 생긴 얼굴이라 믿음이 갔다. 반대로 지석이 정수를 보 고 처음 했던 생각은 무섭다, 였다. 정수에게는 말한 적 없다. 알면 서운해할 것 같아서.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선배가 날카롭게 생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고 있으면 당연히 무서운 거 아닌가. 구색일 뿐이라지만 처음 보는 면접에 안 그래도 긴장한 상태였는데, 덩치 크고 무섭게 생긴 선배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딱 죽을 맛이었다. 그 기억이 강렬해 도서부 활동 초반에는 정수와 마주치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었다. 정수는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이야기.
도서부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 봉사를 하고 봉사 시간을 채웠다. 대출, 반납 도서를 정리하고 책을 찾는 학생에게 위치를 안내하는 간단한 일. 가끔 책장을 순회하며 위치가 잘못 꽂힌 책을 다시 꽂기도 했다. 정수는 부장이라는 이유로 거의 매일 같이 도서관으로 내려갔다. 다른 신입 부원들은 봉사가 있는 하루만 얼굴을 비췄는데, 지석은 일주일에 두 번씩 도서관을 찾아왔다. 하루는 봉사 때문에, 하루는 개인적으로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대출하기 위해. 그래서 정수는 1학년 중에서 지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지석아, 너는 원래 책 읽는 거 좋아해?"
"네? 네, 책 편식이 좀 있긴 한데요. 그래도 좋아해요!"
책 편식이라는 표현은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책 편식은 나도 심한데. 정수는 좋아하는 책의 장르나 요소가 분명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모두 읽어야 직성이 풀렸고, 재독도 자주 했다. 실기 준비를 핑계로 문학을 많이 읽었고, 가끔 다른 책을 읽고 싶으면 에세이나 동화를 읽었다. 평화롭고, 크게 어렵지 않아서 공부나 실기 때문에 과열된 머리를 식히기 좋은 책. 더 잘하고, 해내고 싶어지는 동기를 유발하거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책.
지석은 문학보다 비문학을 많이 읽었다. 모르고 있던 지식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좋았다. 소설도 SF나 추리 소설 위주라 평소의 정수라면 시도조차 안 해 볼 것 같은 책이 많았다. 그래도 지석이 읽는다니까 궁금해서 정수는 종종 빌려 가는 책의 제목을 눈여겨보았다가 나중에 따라 읽었다. 취향에 안 맞아서 다는 못 읽었고, 1부 정도만 억지로. 따라 읽어보면서 알게 된 건 지석 본인의 말과는 달리 생각보다 다양한 책을 읽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지석을 따라 하면서 정수가 읽는 책의 분야가 넓어져 갔다.
"지석아, 너 저번에 읽었다고 한 책 있잖아. 타나토노트? 그거 나도 읽어봤는데."
"어, 진짜요? 그거 재미있지 않아요?"
사실 재미는 없었다. 그래도 읽을 만 했다. 그래서 정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추천해 줄래? 네가 읽는 책 다 새로워서 좋더라."
"아, 영광이죠. 필요하시면 제 책도 빌려드릴게요. 선배는 어디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저는 그 주인공이..."
"형."
"네?"
"선배 말고 형이라 하라고."
"엇, 어. 네, 그래요!"
지석이 그때 참 귀여웠는데. 정수는 문득 소파에 기대 잠을 자는 지석을 돌아봤다. 별로 먹지도 않아놓고 식곤증인 것 같다며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새 잠들었다. 저렇게 자면 나중에 목 아플 텐데. 정수는 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석을 안아 들었다. 어째 해가 갈수록 몸이 마르는 것 같았다. 남자가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저번에 말했던 그 학생이 아직도 속 많이 썩이나? 같은 잡다한 생각이 스쳤다. 소파 위에 편하게 지석을 눕혀놓고, 방에서 이불 하나 가져다 덮어 주니 따뜻해서 기분이 좋은지 조금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풀어졌다. 그 옆에 앉아 정수는 자는 지석의 얼굴을 구경했다. 언제 이렇게 컸지, 얘.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분내라도 날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땐 나한테 꼬박 형이라고 부르고, 존댓말도 했는데. 그리고 요즘은 학교에서 종일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런지 정수와 있을 때는 많이 줄었지만, 그때는 틈만 나면 입에 과학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지석아, 너는 과학책이 재미있어?"
"네, 완전! 혹시 이 책 읽어봤어요? 이 책에 진짜 신기한 내용 많이 나와요."
지석은 주변 누군가가 과학 이야기를 꺼내면 곧바로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태양계가 어쩌고, 원자가 어쩌구, 새와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유는 양력이 저쩌구. 도서부에 들어오는 친구들은 전형적인 문과생이 많아서, 지석의 이야기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정수는 가끔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을 주제로 지석에게 말을 걸 때가 많았다. 정수는 지석이 쏟아내는 이야기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걸 말하는 지석이 즐거워 보여서 어떻게든 리액션을 했다.
"아, 그리고 형. 지구가 탄생한 걸 하루로 치면 인간은 마지막 3초에 나타났다는 거 알아요?"
"오, 몰랐어."
"우리는 모두 3초처럼 진짜 짧은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알고 나서부터는 인생이 짧은 만큼 더 유의미하게 살아가야 할 것 같단 생각을 자주 해요."
"그거 되게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왜 굳이 지구 나이를 한 살로 쳐야 하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어쨌든 자기 삶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려는 지석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지석은 그 3초 이야기를 꺼냈다.
"지구 나이를 한 살로 따지면 3초도 안 되는 게 인생인데,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죽는 건 너무 슬픈 일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오늘은 치킨 먹자, 정수."
같은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분명 처음엔 멋있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정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석이 정수에게 말을 놓은 건 대학생 때부터였다. 고3은 원래 동아리에 이름만 올려두는 경우가 많은데, 정수는 점심시간마다 꼬박 도서관에 들러서 다음 부장을 맡은 지석을 도와줬다. 그 시간이 아니면 지석을 보기가 어려우니까. 가끔 지석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꼭 대학에 합격해야겠다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잠도 줄여가며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실기 준비를 했다. 그 덕분에 정수는 본인이 원하는 학교를 골라 갈 수 있었다.
"형 맨날 도서관 오길래 대학 포기하신 줄 알았는데..."
"너는 좀 덜 솔직할 필요가 있어, 지석아."
그때 지석이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던 대학교를 도박하듯 골라잡은 덕분에 다음 해에 신입생으로 들어오는 지석과 다시 선후배로 만날 수 있었다. 지석을 데리고 학교 곳곳을 구경 시켜 주니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정수를 올려다보는 게 무척 귀여웠다.
"대학까지 같이 왔으니까 이제는 말 놔도 되지 않을까?"
"어, 그래도 돼요?"
"그럴 때 됐지."
"으음, 천천히 시도해 볼게요."
천천히 시도해 보겠다더니, 지석은 1학기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반말에 익숙해졌다. 정수는 그 변화가 기꺼웠다.
"반말 잘하면서 그동안 왜 내숭 부렸어?"
"나 원래 진짜 형들한테 말 잘 못 놔. 놓는 사람 없어."
"나한테는 잘만 하잖아?"
"형은 좀 다르지."
"뭐가 다른데?"
"으음... 몰라. 그냥 형은 나한테 좀 달라."
"만만한 건 아니지?"
"아니거든. 그냥, 이유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달라."
이런 말에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냥 아끼는 후배가 하는 '다르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귀에 맴돌았는지를. 그걸 알았더라면 좀 덜 고생했을까? 정수는 가끔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면 부끄러워졌다. 작가가 되겠다는 애가, 여러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시켜야 할 애가 제 마음 하나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이 사람을 참 민망하게 했다.
지석이 정수를 '정수'라고 부르게 된 계기는 두 사람 모두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을 앞둔 지석의 생일 때였다. 이제 막 민간인이 된 정수는 지석의 생일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생일이었단 걸 깨달은 건 밤 10시쯤. 뒤늦게 생일 축하한다고 메시지라도 남겨봤지만, 지석은 확인하지 않았다. 삐쳤나? 어쩔 줄 모르며 지석의 집 앞으로 달려가니 친구들에게 받은 것인지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막 집으로 들어가려는 지석과 마주칠 수 있었다. 아마 메시지를 확인할 손이 없었던 것 같아 정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레, 형이 여기는 웬일이야?"
"답장을 안 하길래. 늦어서 미안. 생일 축하해."
"에이, 생일 지나기 전에만 말하면 됐지. 미안할 게 뭐 있어."
"까먹고 있어서 선물 못 샀어. 갖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없는데? 마음만이라도 고맙다."
"아, 뭐라도 말해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곽지석의 생일을 까먹었다니. 달려오는 내내 혹시나 서운했던 건 아닐까? 걱정했고, 지금 선물이 필요 없다는 말도 생일을 잊고 있던 내게 속상해서 괜히 툴툴거리는 건 아닌가? 싶어 열심히 표정을 살폈다. 막상 지석의 얼굴에는 한 점 서운함이 없어서 그게 괜히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정수는 그게 이상한 줄도 몰랐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할래?"
"어?"
"한국도 이제 만 나이 쓴다잖아. 앞으로 나랑 친구 해. 형이라고 안 하고 이름 부를게."
"...그걸로 선물이 돼?"
"응, 말고는 딱히 생각도 안 나고. 아무튼 정수, 선물 잘 받을게?"
얼른 집에 가, 정수. 감기 걸려. 정수는 그날, 본인의 이름이 정수라서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 이름을 발음하며 쭉 내미는 지석의 입술이 귀여워서.
*
"곽지석, 너 또 우리 집에 옷,"
- 아, 내 폰 내놓으라고!
정수는 순간 폰을 귀에서 멀리 떼어냈다. 지석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잘 없는데. 당혹스러운 마음에 다시 폰을 귀에 가져다 대니 가벼운 몸싸움이 일어난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낚아채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 미안, 정수.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 야, 곽지석. 나 다 들었...
뚝.
정수는 이미 끊겨버린 화면을 찝찝하게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다시 전화를 해야 하나, 곽지석 집에 찾아가기라도 해야 하나. 다 들었다고? 뭘? 남의 커플 싸움에 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그 상대가 지석이라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석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에휴 진짜 미안 ㅠㅠ]
[오늘 형이 기분 안 좋았나 봐 ㅏㅠㅠㅠ]
[옷은 다음에 찾으러 갈게 좋은 하루 보내!!]
그 화난 음성이 귀에서 사라지질 않는데 지석은 대충 주제를 마무리 지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말해 달라고 할까. 정수는 걱정이 되는데도, 더 물어볼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이 싫었다. 잘 풀었으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났다. 걔한테 언성 높일 게 뭐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연인끼리의 다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정수는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툴툴거렸다. 그런 애랑 왜 계속 사귀는 건지, 곽지석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지석이 고백한다고 할 때 말릴걸. 처음 지석이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털어놨을 때, 그날 억지라도 써볼걸. 정수는 또 후회했다.
"형."
"닭살 돋게 갑자기 왜 형이야."
"오늘은 동갑 친구 말고 형의 관점에서 조언이 필요해."
그날은 어쩐지 기분이 뒤숭숭했다. 아침부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고 달려 나갔음에도 딱 1분 차이로 버스를 놓쳐 결국 지각했고, 정수가 좋아하는 편의점 빵의 재고가 들어오지 않아 빈속에 아메리카노나 들이부어야 했다. 하필 전날 비가 와서 생긴 웅덩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해 바지가 젖기도 했다. 그래서 정수는 오늘 될 수 있는 대로 집에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지석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때쯤 벌써 집에 들어갔을 텐데. 굳이 거절하지 않고 나왔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정수는 회상했다.
"그... 혹시 기억해?"
"뭘?"
"저번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내 번호 따갔다는 사람 있잖아."
"어... 너무 많 지 않나, 그런 사람."
"아, 왜. 알고 보니까 우리 학과 선배였다는 사람 있잖아. 그, 잘생기고."
"...어. 기억해."
"그 사람이랑 연락 좀 해봤는데, 잘 통하는 부분이 엄청 많더라고."
적어도 불안함을 느낀 그 시점에는 억지를 써서라도 자리를 벗어났어야 했다고.
"형, 나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
"..."
"그래서 말인데, 그, 고백은 어떻게 해야 돼? 형 연애해 본 적 있다며."
사랑에 빠진 지석이는 이런 얼굴이구나.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았을걸. 이렇게 예쁘고, 반짝거리고, 다정한 얼굴인 줄 몰랐다면 더 좋았을걸. 몰랐다면, 적어도 이 순간에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지 않았다면.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후 그 사람이랑 사귀게 됐다는 지석의 말에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축하한다고나 말해야 했다.
지석은 사랑도 참 성실하게 했다. 몇 해가 지나도록 변함이 없었다. 그걸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런 거 할 줄 아는 애였나? 먼저 고백하고 사귀게 된 거라 그런지, 아니면 첫 연애라 그런지. 지석은 기념일도 꼬박 챙겼고, 1주년이 되는 시점에는 연인과 여행도 다녀왔고, 데이트 코스를 직접 짜는 모습도 보였다. 너 나랑 놀러 갈 때는 나한테 다 맡겼잖아. 너 P라며. 유치한 질투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걸 느낄 때마다 정수는 착잡해졌다.
@kwak0114 님이 새 스토리를 올리셨습니다.
인스타그램이라고는 계정 생성만 해 뒀던 애가 사진을 찍어 올리는 변화가 나 때문이 아니란 사실은 정수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남겼다. 지석의 모든 처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게 싫었다. 내가 먼저 그 애한테 더 많은 걸 알려줬더라면. 그래서 걔가 그 사람과 하는 모든 경험이 새롭지 않았더라면 이 분한 마음이 조금은 덜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취준 시작하면 헤어지지 않을까, 취업하면 헤어지지 않을까, 지금쯤 권태기 오지 않을까. 그렇게 희망을 가지는 시간이 쌓일수록 두 사람은 더 견고해지는 것 같았다. 내 저주가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단단하게 만드는 주문이라도 되는 건가. 그렇게 단단한 사랑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끊어내지 못하고 커지기만 하는 사랑이 싫었다. 정수는 가끔 울었다. 언젠가 혹시나 찾아올, 그 사람과 헤어진 다음을 기다리는 스스로가 멍청해서. 그런데도 정수는 또 버텼다. 시간은 제 편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정수, 나 헤어졌다?"
"어?"
"흐흐, 정수한테만 먼저 말함."
잘 먹지도 않는 술이 당긴다며 술집으로 이끌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정수는 복잡해진 머리로 끙끙 앓으면서도 지석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되나?"
"으음,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네."
지석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정수는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바라왔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냥,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뭐가?"
"형이랑 연애를 더 하는 게."
"..."
"너무 깊이 알면 다치니까 여기까지! 그냥 그 핑계로 고기 먹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그렇게 보지 말고 얼른 먹어."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먹냐. 나 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