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나의 평생
모어
"형, 나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
정수는 그제야 알았다.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마다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지석의 얼굴이 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왜 지석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해 보려고 유난히 노력했는지. 너무 늦은 해답은 가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석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했을 때, 정수는 자신이 지석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늦은 자각은 가끔 미련한 버티기로 이어진다는 걸 그때의 정수는 몰랐다. 물론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찰나의 평생
김정수 곽지석
"작가님, 저 사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 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정수는 익숙하게 펜을 들어 책의 표지를 넘겼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종이 위로 정수의 사인과 간단한 메시지가 적혔다. 사인 요청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래도 익숙해졌다. 직접 책을 사 들고 와서 요청해 주시는 모습이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아직도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정말 익숙하지 않았다.
"작가님, 오늘 식사하고 가시나요?”
"아,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넵, 들어가세요."
정수는 사람 좋은 얼굴로 행사 관계자에게 인사를 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정수가 한숨을 쉬려던 순간,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무음 모드 안 해 뒀었나? 용케도 강연 시간 동안 울리지 않았구나 싶어 소름이 돋은 채로 미리 보기를 확인한 정수가 미소 지었다.
[정수 비상 비상]
[오늘 큰마음 먹고 와인 사 왔는데 뚜껑 안 따져ㅕ]
[빨리 와...ㅠㅠ]
곽지석과 와인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하며 정수가 답장을 보냈다. 곧 갈 거라는 메시지에 엄지손가락을 올린 손 이모티콘이 따라붙었다.
"정수, 어서 와."
"내 집인데 무슨 본인 집인 것처럼. 와인은?"
"혹시 몰라서 잠깐 냉장고에 넣어뒀어."
신선한 바깥 공기를 가득 안고 들어선 현관문 앞에 보기만 해도 따끈해지는 곽지석이 있다. 이미 한참 전에 집에 도착해 푹 쉬었는지 볼이 반질반질하고 살짝은 붉기까지 한 지석이. 이 사실이 정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와인 오프너가 따로 있다는 건 알고 산 거야?"
"아니, 전혀 몰랐는데?"
"그럴 줄 알았다. 우리 집에 오프너 없으면 어쩔 뻔했어."
"괜찮아. 정수는 있는 거 다 알아."
부러 당당하다는 듯이 배를 내밀고 고개를 드는 지석의 모습에 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래라. 지석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린 정수가 부엌으로 향했다.
"근데, 갑자기 웬 와인? 술도 잘 안 마시면서."
"정수 첫 작가 강연 기념으로 사 왔지."
"어이구, 기특하네."
지석이 정수의 옆을 기웃거리다 선반을 열며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정수도 굳이 뭐라 하지 않았다.
"이게 오프너야?"
"그거 아니야."
"이건가?"
"그것도 아니야."
"정수는 왜 못 찾아?"
"나도 오랜만에 쓰는 거라 위치가 가물가물하네. 근데 너 요즘 자주 놀러 온다? 애인이랑 안 놀아?"
"요즘 바빠. 오늘도 출장 간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부엌을 열심히 뒤지고 다니던 정수가 결국 서랍 안에 파묻혀 있던 오프너를 찾는 데 성공했다. 막 등단했을 때 부모님이 선물해 주셨던 와인을 비우고 난 이후로는 와인을 마신 적이 없어서 한참 안쪽에 처박혀버린 모양이었다. 정수가 오프너를 찾았다고 입을 열려던 찰나에 지석이 신나게 울리는 휴대 전화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어, 형. 도착했어?"
베란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석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누구인지 아는 정수는 잠시 착잡해진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오프너를 이용해 와인을 따고, 미리 배달시켰던 음식을 세팅하는 동안 지석의 전화는 멈출 줄 몰랐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떨구다가, 실실 웃으며 조잘조잘 떠들기도 하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부끄럽다는 듯 배배 꼬다가. 그런 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을 끊기가 어려웠다. 한참 베란다에서 전화를 이어가는 지석을 바라보던 정수는 결국 숟가락을 드는 대신 TV를 켰다. 조금은 식은 음식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지석과 정수가 처음 만난 계기는 고등학교 도서부였다. 정수는 문예창작과로 진로를 정하고 난 후 생기부를 채우기 위해 지원했고, 지석이 들어온 해에는 부장도 맡았다. 지석은 중학생 때 도서부를 했던 기억이 나쁘지 않아 지원한 케이스였다. 정수가 지석에게 가졌던 첫인상은 잘생겼다, 성실할 것 같다. 워낙 단정하고 똘똘하게 생긴 얼굴이라 믿음이 갔다. 반대로 지석이 정수를 보고 처음 했던 생각은 무섭다, 였다. 정수에게는 말한 적 없다. 알면 서운해할 것 같아서.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선배가 날카롭게 생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고 있으면 당연히 무서운 거 아닌가. 구색일 뿐이라지만 처음 보는 면접에 안 그래도 긴장한 상태였는데, 덩치 크고 무섭게 생긴 선배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딱 죽을 맛이었다. 그 기억이 강렬해 도서부 활동 초반에는 정수와 마주치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었다. 정수는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이야기.
도서부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 봉사를 하고 봉사 시간을 채웠다. 대출, 반납 도서를 정리하고 책을 찾는 학생에게 위치를 안내하는 간단한 일. 가끔 책장을 순회하며 위치가 잘못 꽂힌 책을 다시 꽂기도 했다. 정수는 부장이라는 이유로 거의 매일 같이 도서관으로 내려갔다. 다른 신입 부원들은 봉사가 있는 하루만 얼굴을 비췄는데, 지석은 일주일에 두 번씩 도서관을 찾아왔다. 하루는 봉사 때문에, 하루는 개인적으로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대출하기 위해. 그래서 정수는 1학년 중에서 지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지석아, 너는 원래 책 읽는 거 좋아해?"
"네? 네, 책 편식이 좀 있긴 한데요. 그래도 좋아해요!"
책 편식이라는 표현은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책 편식은 나도 심한데. 정수는 좋아하는 책의 장르나 요소가 분명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모두 읽어야 직성이 풀렸고, 재독도 자주 했다. 실기 준비를 핑계로 문학을 많이 읽었고, 가끔 다른 책을 읽고 싶으면 에세이나 동화를 읽었다. 평화롭고, 크게 어렵지 않아서 공부나 실기 때문에 과열된 머리를 식히기 좋은 책. 더 잘하고, 해내고 싶어지는 동기를 유발하거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책.
지석은 문학보다 비문학을 많이 읽었다. 모르고 있던 지식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좋았다. 소설도 SF나 추리 소설 위주라 평소의 정수라면 시도조차 안 해 볼 것 같은 책이 많았다. 그래도 지석이 읽는다니까 궁금해서 정수는 종종 빌려 가는 책의 제목을 눈여겨보았다가 나중에 따라 읽었다. 취향에 안 맞아서 다는 못 읽었고, 1부 정도만 억지로. 따라 읽어보면서 알게 된 건 지석 본인의 말과는 달리 생각보다 다양한 책을 읽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지석을 따라 하면서 정수가 읽는 책의 분야가 넓어져 갔다.
"지석아, 너 저번에 읽었다고 한 책 있잖아. 타나토노트? 그거 나도 읽어봤는데."
"어, 진짜요? 그거 재미있지 않아요?"
사실 재미는 없었다. 그래도 읽을 만 했다. 그래서 정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추천해 줄래? 네가 읽는 책 다 새로워서 좋더라."
"아, 영광이죠. 필요하시면 제 책도 빌려드릴게요. 선배는 어디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저는 그 주인공이..."
"형."
"네?"
"선배 말고 형이라 하라고."
"엇, 어. 네, 그래요!"
지석이 그때 참 귀여웠는데. 정수는 문득 소파에 기대 잠을 자는 지석을 돌아봤다. 별로 먹지도 않아놓고 식곤증인 것 같다며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새 잠들었다. 저렇게 자면 나중에 목 아플 텐데. 정수는 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석을 안아 들었다. 어째 해가 갈수록 몸이 마르는 것 같았다. 남자가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저번에 말했던 그 학생이 아직도 속 많이 썩이나? 같은 잡다한 생각이 스쳤다. 소파 위에 편하게 지석을 눕혀놓고, 방에서 이불 하나 가져다 덮어 주니 따뜻해서 기분이 좋은지 조금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풀어졌다. 그 옆에 앉아 정수는 자는 지석의 얼굴을 구경했다. 언제 이렇게 컸지, 얘.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분내라도 날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땐 나한테 꼬박 형이라고 부르고, 존댓말도 했는데. 그리고 요즘은 학교에서 종일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런지 정수와 있을 때는 많이 줄었지만, 그때는 틈만 나면 입에 과학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지석아, 너는 과학책이 재미있어?"
"네, 완전! 혹시 이 책 읽어봤어요? 이 책에 진짜 신기한 내용 많이 나와요."
지석은 주변 누군가가 과학 이야기를 꺼내면 곧바로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태양계가 어쩌고, 원자가 어쩌구, 새와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유는 양력이 저쩌구. 도서부에 들어오는 친구들은 전형적인 문과생이 많아서, 지 석의 이야기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정수는 가끔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을 주제로 지석에게 말을 걸 때가 많았다. 정수는 지석이 쏟아내는 이야기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걸 말하는 지석이 즐거워 보여서 어떻게든 리액션을 했다.
"아, 그리고 형. 지구가 탄생한 걸 하루로 치면 인간은 마지막 3초에 나타났다는 거 알아요?"
"오, 몰랐어."
"우리는 모두 3초처럼 진짜 짧은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알고 나서부터는 인생이 짧은 만큼 더 유의미하게 살아가야 할 것 같단 생각을 자주 해요."
"그거 되게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왜 굳이 지구 나이를 한 살로 쳐야 하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어쨌든 자기 삶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려는 지석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지석은 그 3초 이야기를 꺼냈다.
"지구 나이를 한 살로 따지면 3초도 안 되는 게 인생인데,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죽는 건 너무 슬픈 일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오 늘은 치킨 먹자, 정수."
같은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분명 처음엔 멋있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정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석이 정수에게 말을 놓은 건 대학생 때부터였다. 고3은 원래 동아리에 이름만 올려두는 경우가 많은데, 정수는 점심시간마다 꼬박 도서관에 들러서 다음 부장을 맡은 지석을 도와줬다. 그 시간이 아니면 지석을 보기가 어려우니까. 가끔 지석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꼭 대학에 합격해야겠다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잠도 줄여가며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실기 준비를 했다. 그 덕분에 정수는 본인이 원하는 학교를 골라 갈 수 있었다.
"형 맨날 도서관 오길래 대학 포기하신 줄 알았는데..."
"너는 좀 덜 솔직할 필요가 있어, 지석아."
그때 지석이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던 대학교를 도박하듯 골라잡은 덕분에 다음 해에 신입생으로 들어오는 지석과 다시 선후배로 만날 수 있었다. 지석을 데리고 학교 곳곳을 구경 시켜 주니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정수를 올려다보는 게 무척 귀여웠다.
"대학까지 같이 왔으니까 이제는 말 놔도 되지 않을까?"
"어, 그래도 돼요?"
"그럴 때 됐지."
"으음, 천천히 시도해 볼게요."
천천히 시도해 보겠다더니, 지석은 1학기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반말에 익숙해졌다. 정수는 그 변화가 기꺼웠다.
"반말 잘하면서 그동안 왜 내숭 부렸어?"
"나 원래 진짜 형들한테 말 잘 못 놔. 놓는 사람 없어."
"나한테는 잘만 하잖아?"
"형은 좀 다르지."
"뭐가 다른데?"
"으음... 몰라. 그냥 형은 나한테 좀 달라."
"만만한 건 아니지?"
"아니거든. 그냥, 이유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달라."
이런 말에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 때부 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냥 아끼는 후배가 하는 '다르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귀에 맴돌았는지를. 그걸 알았더라면 좀 덜 고생했을까? 정수는 가끔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면 부끄러워졌다. 작가가 되겠다는 애가, 여러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시켜야 할 애가 제 마음 하나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이 사람을 참 민망하게 했다.
지석이 정수를 '정수'라고 부르게 된 계기는 두 사람 모두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을 앞둔 지석의 생일 때였다. 이제 막 민간인이 된 정수는 지석의 생일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생일이었단 걸 깨달은 건 밤 10시쯤. 뒤늦게 생일 축하한다고 메시지라도 남겨봤지만, 지석은 확인하지 않았다. 삐쳤나? 어쩔 줄 모르며 지석의 집 앞으로 달려가니 친구들에게 받은 것인지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막 집으로 들어가려는 지석과 마주칠 수 있었다. 아마 메시지를 확인할 손이 없었던 것 같아 정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레, 형이 여기는 웬일이야?"
"답장을 안 하길래. 늦어서 미안. 생일 축하해."
"에이, 생일 지나기 전에만 말하면 됐지. 미안할 게 뭐 있어."
"까먹고 있어서 선물 못 샀어. 갖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없는데? 마음만이라도 고맙다."
"아, 뭐라도 말해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곽지석의 생일을 까먹었다니. 달려오는 내내 혹시나 서운했던 건 아닐까? 걱정했고, 지금 선물이 필요 없다는 말도 생일을 잊고 있던 내게 속상해서 괜히 툴툴거리는 건 아닌가? 싶어 열심히 표정을 살폈다. 막상 지석의 얼굴에는 한 점 서운함이 없어서 그게 괜히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정수는 그게 이상한 줄도 몰랐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할래?"
"어?"
"한국도 이제 만 나이 쓴다잖아. 앞으로 나랑 친구 해. 형이라고 안 하고 이름 부를게."
"...그걸로 선물이 돼?"
"응, 말고는 딱히 생각도 안 나고. 아무튼 정수, 선물 잘 받을게?"
얼른 집에 가, 정수. 감기 걸려. 정수는 그날, 본인의 이름이 정수라서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 이름을 발음하며 쭉 내미는 지석의 입술이 귀여워서.
*
"곽지석, 너 또 우리 집에 옷,"
- 아, 내 폰 내놓으라고!
정수는 순간 폰을 귀에서 멀리 떼어냈다. 지석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잘 없는데. 당혹스러운 마음에 다시 폰을 귀에 가져다 대니 가벼운 몸싸움이 일어난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낚아채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 미안, 정수.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 야, 곽지석. 나 다 들었...
뚝.
정수는 이미 끊겨버린 화면을 찝찝하게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다시 전화를 해야 하나, 곽지석 집에 찾아가기라도 해야 하나. 다 들었다고? 뭘? 남의 커플 싸움에 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그 상대가 지석이라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석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에휴 진짜 미안 ㅠㅠ]
[오늘 형이 기분 안 좋았나 봐 ㅏㅠㅠㅠ]
[옷은 다음에 찾으러 갈게 좋은 하루 보내!!]
그 화난 음성이 귀에서 사라지질 않는데 지석은 대충 주제를 마무리 지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말해 달라고 할까. 정수는 걱정이 되는데도, 더 물어볼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이 싫었다. 잘 풀었으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났다. 걔한테 언성 높일 게 뭐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연인끼리의 다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정수는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툴툴거렸다. 그런 애랑 왜 계속 사귀는 건지, 곽지석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지석이 고백한다고 할 때 말릴걸. 처음 지석이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털어놨을 때, 그날 억지라도 써볼걸. 정수는 또 후회했다.
"형."
"닭살 돋게 갑자기 왜 형이야."
"오늘은 동갑 친구 말고 형의 관점에서 조언이 필요해."
그날은 어쩐지 기분이 뒤숭숭했다. 아침부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고 달려 나갔음에도 딱 1분 차이로 버스를 놓쳐 결국 지각했고, 정수가 좋아하는 편의점 빵의 재고가 들어오지 않아 빈속에 아메리카노나 들이부어야 했다. 하필 전날 비가 와서 생긴 웅덩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해 바지가 젖기도 했다. 그래서 정수는 오늘 될 수 있는 대로 집에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지석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때쯤 벌써 집에 들어갔을 텐데. 굳이 거절하지 않고 나왔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정수는 회상했다.
"그... 혹시 기억해?"
"뭘?"
"저번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내 번호 따갔다는 사람 있잖아."
"어... 너무 많지 않나, 그런 사람."
"아, 왜. 알고 보니까 우리 학과 선배였다는 사람 있잖아. 그, 잘생기고."
"...어. 기억해."
"그 사람이랑 연락 좀 해봤는데, 잘 통하는 부분이 엄청 많더라고."
적어도 불안함을 느낀 그 시점에는 억지를 써서라도 자리를 벗어났어야 했다고.
"형, 나 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
"..."
"그래서 말인데, 그, 고백은 어떻게 해야 돼? 형 연애해 본 적 있다며."
사랑에 빠진 지석이는 이런 얼굴이구나.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았을걸. 이렇게 예쁘고, 반짝거리고, 다정한 얼굴인 줄 몰랐다면 더 좋았을걸. 몰랐다면, 적어도 이 순간에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지 않았다면.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후 그 사람이랑 사귀게 됐다는 지석의 말에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축하한다고나 말해야 했다.
지석은 사랑도 참 성실하게 했다. 몇 해가 지나도록 변함이 없었다. 그걸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런 거 할 줄 아는 애였나? 먼저 고백하고 사귀게 된 거라 그런지, 아니면 첫 연애라 그런지. 지석은 기념일도 꼬박 챙겼고, 1주년이 되는 시점에는 연인과 여행도 다녀왔고, 데이트 코스를 직접 짜는 모습도 보였다. 너 나랑 놀러 갈 때는 나한테 다 맡겼잖아. 너 P라며. 유치한 질투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걸 느낄 때마다 정수는 착잡해졌다.
@kwak0114 님이 새 스토리를 올리셨습니다.
인스타그램이라고는 계정 생성만 해 뒀던 애가 사진을 찍어 올리는 변화가 나 때문이 아니란 사실은 정수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남겼다. 지석의 모든 처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게 싫었다. 내가 먼저 그 애한테 더 많은 걸 알려줬더라면. 그래서 걔가 그 사람과 하는 모든 경험이 새롭지 않았더라면 이 분한 마음이 조금은 덜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 이었다.
본격적으로 취준 시작하면 헤어지지 않을까, 취업하면 헤어지지 않을까, 지금쯤 권태기 오지 않을까. 그렇게 희망을 가지는 시간이 쌓일수록 두 사람은 더 견고해지는 것 같았다. 내 저주가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단단하게 만드는 주문이라도 되는 건가. 그렇게 단단한 사랑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끊어내지 못하고 커지기만 하는 사랑이 싫었다. 정수는 가끔 울었다. 언젠가 혹시나 찾아올, 그 사람과 헤어진 다음을 기다리는 스스로가 멍청해서. 그런데도 정수는 또 버텼다. 시간은 제 편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정수, 나 헤어졌다?"
"어?"
"흐흐, 정수한테만 먼저 말함."
잘 먹지도 않는 술이 당긴다며 술집으로 이끌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정수는 복잡해진 머리로 끙끙 앓으면서도 지석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되 나?"
"으음,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네."
지석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정수는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바라왔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냥,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뭐가?"
"형이랑 연애를 더 하는 게."
"..."
"너무 깊이 알면 다치니까 여기까지! 그냥 그 핑계로 고기 먹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그렇게 보지 말고 얼른 먹어."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먹냐. 나 체한다."
"아, 안 돼. 천천히 꼭꼭 씹어서 많이 먹어."
지석이 해맑게 웃으며 정수의 집게를 뺏어 고기를 잘랐다. 엉성한 가위질로 고기가 난도질당하는 걸 잠깐 지켜보던 정수가 한숨을 쉬며 지석의 손에서 가위를 뺏었다. 너덜거리는 고기를 다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면서 정수는 표정을 잔뜩 굳혔다. 남의 이별 소식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사이코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으니까.
지석은 제법 술을 많이 마셨다. 나름 주량도 센 편인데 그렇게까지 인사불성이 된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이러려고 자기 집 근처로 불렀구나. 예상은 했지만 정말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결말이었다. 계산은 정수가 했다. 원래 이런 건 친구가 위로 겸 쏘는 거니까. 바빠서인지, 이별 후폭풍 때문인지 어깨 앞으로 축 처진 지석의 손목이 예전보다 더 얇은 것 같아서 정수는 속이 좀 쓰렸다. 축 늘어져서 목도 제 대로 못 잡고 있는 애를 떨어뜨릴까 봐, 다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석은 계속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그게 자신을 업고 있는 정수에게 하는 말인지, 전 애인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041114. 아직 비밀번호도 안 바꿨네. 전 애인과 본인 생일을 합쳐서 만들었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지석이 떠올랐다. 이제 막 헤어진 애라는 게 실감이 좀 났다. 너무 오래 아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정수는 지석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주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지석의 집에 아직 남아있는 전 애인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당장이라도 그 모든 흔적을 내 손으로 치워버리고 싶어질까 봐 정수는 고집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
헤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 마음이 약해진 틈을 파고드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 정수는 지석이 외로워서, 괴로워서, 지금 당장 기댈 곳이 필요해서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오길 바라진 않았다. 지석 스스로 정수를 정말 좋아한다고 느낄 때,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느낄 때 자신을 받아 주길 원했다. 그래서 정수는 지석이 어느 정도 이별을 마무리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까지 참아왔는데 그거 좀 기다린다고 다를까.
그러면서도 이미 마음은 급해져서, 또 어리바리하고 있는 동안 또 누군가가 지석을 채갈까 걱정돼서. 지석에게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디에서 하지? 레스토랑? 아니면 경치 좋은 명소라도 가야 하나? 고백할 때는 뭐라고 하지. 선물은 뭘 들고 가지. 꽃? 너무 식상한가. 고백할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가 말로 잘 전달할 자신은 있나. 편지라도 쓸까? 그래도 나름 글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정수는 어느새 책장 한 칸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책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수많은 글이 곽지석한테 전하지 못한 편지나 다름없는데, 편지는 무슨 편지.
정수의 영감은 주로 지석에게서 나왔다. 정수는 지석에게 하고 싶은 말, 그중에서 전달할 수 없는 말을 이야기와 엮어 적어 내려갔다. 인물의 설정, 관계, 배경, 주제까지. 모든 게 바뀌어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시작점에는 늘 지석이 있었다. 달라지는 이야기 속에서 달라지지 않는 한 가지.
"대체 이런 문장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문창과는 다르네, 진짜?"
"뭐래. 그냥 네 눈에 콩깍지 낀 거야."
"아니지, 아니지. 나 말고도 형 책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독자들이 눈에 콩깍지 끼운 거야? 그냥 정수가 잘 쓰는 거지."
정수의 소설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첫 소설집부터 SNS에서 입소문을 타서 신인의 데뷔작치고는 제법 많이 팔렸고, 처음 집필한 장편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팟캐스트나 유튜브 채널 같은 곳에서 섭외 요청도 많이 들어왔고, 인터뷰도 자주 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작가라는 타이틀로 독서 좀 한다 싶은 사람 사이에서 김정수라는 이름이 유명해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특히 정수가 표현하는 사랑의 문장을 좋아했다. 정수의 글은 주로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편이었고, 어쩌면 투박할 수 있었을 표현들이 호소력 있는 문장이 되어 독자의 마음을 울렸다. 지석 또한 정수의 문장을 좋아했다. 그 낱말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개인적인 의미는 읽지 못하면서.
"정수는 좋겠다. 이런 문장이 머리로 파바박, 떠오른다니."
지석은 자주 정수의 글솜씨를 부러워했다. 지석이 자신의 글을 칭찬할 때마다 정수는 그냥 웃었다. 가끔 네가 없이도 내가 글을 쓸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말은 삼킨 채로.
글을 다루는 건 분명 정수에게 쉬운 일이었다. 정수가 쓴 글에 울고 웃었던 사람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게 많았다. 정수가 쓴 편지도 언제나 백발백중이었다. 러브레터든, 감사 편지든, 축하 편지든 정수에게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해했다. 그래서 정수는 상대가 누가 됐든 내 글로 울리고, 웃길 수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감은 정수에게 작가라는 꿈을 가져다준 놈이기도 했다. 근데 그 상대가 곽지석이 되면, 그 자신감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정수는 지석에게 도통 어떤 사랑의 언어를 읊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수신된 편지가 책이라는 형태로 쌓여갈수록 정수의 자신감은 더 약해졌다.
정수는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지석은 어떤 말에 심장이 뛰고, 어떤 말에 사랑을 자각하고, 어떤 말에 얼굴을 붉히는지. 그걸 직접 물어볼 순 없으니까 그냥 빈 페이지 위에 계속 썼다.
해맑게 웃고 있는 수영의 얼굴을 보면서 정현은 생각했다.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어떤 문장으로, 어떤 단어로 네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알고 싶어.'
*
- 정수, 오늘도 작업 중?
"어, 무슨 일 있어?"
- 작업만 들어가면 잠수 타는 정수 기다리다 심심해서.
"친구 많잖아. 걔네랑 놀아."
- 섭섭하게 말하네. 내가 무슨 친구가 많아.
모니터만 바라보느라 굳어있던 정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별 이후로 한동안 연락도 잘 없더니, 이제 괜찮아진 건지 지석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지석은 그동안 밀린 숙제를 해치우듯 자신의 근황을 보고했다. 정수가 추천했던 책 읽어봤는데 너무 슬퍼서 울었고, 요즘 학생들이 자꾸 지석을 놀려서 선생으로서 기강을 좀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다음 주에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나기로 했다는 것까지. 정수는 전화기를 든 채 뻐근해진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반나절을 꼬박 글만 썼다. 지석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마 자기 전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거였다. 굳은 몸을 스트레칭하면서 재잘거리는 지석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제법 힐링이 되는 일이었다.
- 아무튼 그래서 정수, 두 달 뒤에는 시간 괜찮아?
"어, 아마? 그때쯤이면 원고 넘겼을 때라."
- 흠, 그럼 그때 마감 기념 파티 열어 줄게. 다른 사람이랑 약속 잡지 말고 나랑 먼저 만나.
"어, 그래봤자 또 곽지석 집 근처에서 고기 먹거나 우리 집에서 배달시킬 거 아니야?"
- 아니거든. 내가 진짜 완벽한 플랜 짜서 갈 테니까 25일에 약속 하나도 잡지 말고 비우기나 해.
"왜 하필 25일이야?"
- 기왕 하는 파티, 크리스마스까지 한 번에 즐길 거야.
"낭만이 없네. 어떻게 파티를 합쳐서 즐기지. 두 개 따로 행복하게 즐겨도 모자랄 판에."
- 내 낭만을 우습게 보지 마라, 정수. 그러다 큰코다친다.
"어이구, 무서워라."
- 아무튼 정수, 크리스마스에 봐. 마감 파이팅.
딱 퇴근할 때 걸어서 집 도착할 때 끊었네. 정수는 화면에 뜬 통화 시간을 잠시 바라보다 커피를 내려서 방으로 들어왔다. 곽지석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를 놓칠 수는 없으니, 작업에 속도를 내야 할 때였다.
*
"정수!"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타난 지석이 손을 흔들었다. 평소보다 좀 신경 써서 입은 듯한 옷매무새에 정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곽지석이 후드를 안 입었다고?
"뭐야? 나 만나기 전에 약속 있었어?"
"아니? 왜?"
"평소랑 너무 다른데."
"크리스마스에 내가 그만큼 진심이란 소리지."
"크리스마스가 먼저야? 마감 기념이 먼저가 아니야?"
"아무래도 그렇지?"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에 정수도 헛웃음을 쳤다. 평소 같았으면 서운 하다고 장난 쳐볼 텐데 지석의 얼굴을 보면 말문이 막혔다. 오늘 진짜 왜 이렇게 예쁘지. 그냥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그래서 오늘 어디 가는데?"
"비밀. 따라만 와."
정수에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석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정수와 둘이 만났을 때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정해오 는 건 보통 정수였다. 당연히 정수가 길을 안내하고 그 뒤를 지석이 쫓아오는 게 자연스러웠는데, 그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고 신기했다.
"여기 가보고 싶다며."
지석이 멈춰 선 건물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낯익었다. 작업이 풀리지 않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마주쳤던 전시회 포스터였다. 그때 지석에게 링크를 보내며 가보고 싶다고 떠봤다가, 지석의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다고 느껴 나중에 혼자 방문해 볼 생각이었다.
"언제 예매했어?"
"정수가 링크 보낸 날 바로."
한 달 전부터. 정수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얘가 계획이란 걸 짜왔다고? 나랑 만나면서? 정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지석이 정수를 재촉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전시를 보는 내내 지석은 정수에게 가까이 붙어서 걸었다. 정수가 멈추면 따라 멈추고, 정수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였다. 어떤 작품은 그냥 지나치자 아쉬운지 뒤를 돌아보면서도 꿋꿋하게 정수와 걷는 속도를 맞췄다. 작품을 보다가 정수가 뭔가 말하려고 고개를 돌리면, 지석도 마침 정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지석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전시장 안은 덥다며 손부채질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집중해서 작품을 보다, 다시 정수를 돌아보고, 눈이 마주치면 슬쩍 또 피하고. 어느 순간부터 정수는 전시보다 지석을 더 많이 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던 전시였는데, 기억에 남는 건 전시를 감상하는 지석의 모습이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왔을 때는 이미 많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추워?"
정수가 고개를 저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덜덜 떠는 어깨를 잠시 바라보던 지석이 자기 목도리를 풀어 정수의 목에 걸쳤다.
"너 추위 잘 타잖아."
"괜찮아. 나 오늘 내복 입었어."
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목도리를 꽉 묶었다. 살짝 갑갑할 정도로 꽉 묶인 목도리에 정수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야, 야. 너 사실 나를 죽이려고."
"아니이, 예쁘게 못 묶겠길래 그냥 풀리지만 말라고."
머쓱한 표정을 지은 지석이 목도리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이내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수는 잠시 지석의 체온이 남아있는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이거 내가 예전에 생일 선물로 줬던 목도리 같은데. 그 사실을 깨닫자 묘하게 기분이 붕 뜨기 시작했다.
"너 진짜 오늘 뭐야?"
"왜?"
"네가 식당을 미리 예약했다고?"
"크리스마스에는 어딜 가나 사람 많잖아. 예약은 필수지."
내가 오늘은 나만 믿으라고 했지? 뿌듯하다는 듯이 웃는 지석에 정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애인이랑 놀 때만 계획 세우던 애가 진짜 웬일이지.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의식이 됐다. 하필 크리스마스라 그렇다. 너무 사람을 들뜨게 하는 날이라. 정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체할 것 같았다.
"너 혹시 나한테 뭐 잘못했어?"
"나를 뭐로 보는 거지?"
"곽지석으로 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단 말이야."
"아직 놀랄 거 더 남았는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
식당을 빠져나오며 수상하게 웃어 보이는 지석에 정수는 잠시 오싹해졌다. 오늘의 지석은 그동안 정수가 알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낯설었다. 정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앞서 걸어가는 지석의 옆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신난 건 알겠는데, 같이 가."
지석은 정수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이 마지막으로 데리고 간 곳은 와인 바였다. 적당히 분위기 있고, 음악도 재즈가 흘러나오는 곳. 정수는 이쯤 되니 이 상황이 꿈은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지석은 정수의 표정이 웃기다며 소리를 내어 웃더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확인했다.
"와봤던 곳이야?"
"저번에 정 선생님한테 추천받아서 와봤었는데, 괜찮더라고? 정수랑 같이 오고 싶었어."
정수는 메뉴판에 있는 와인의 이름이 다 낯설어서 그냥 지석에게 주문을 맡겼다. 곽지석이 와인에 관심을 가진다고. 다음 소설 주인공은 소믈리에로 설정해 볼까? 그런 생각이나 들었다. 정수는 지석 덕분에 처음 와본 장소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와인이 나오고 난 뒤, 정수는 지석과 건배하자마자 곧바로 한 모금을 들이켰다. 지난번에 마셨던 와인보다 훨씬 달달한 맛이었다. 지석은 나름 배운 게 있다며 와인의 향을 맡고, 그럴듯하게 와인잔을 돌려본 이후에야 마셨다.
"이렇게 해야 와인을 다 즐길 수 있는 거래."
"와인 애호가 다 됐네."
"놀리지 마라."
"놀리는 거 아닌데. 그래서 좀 달라?"
"솔직히 뭐가 다른지 하나도 모르겠어."
멋쩍게 웃는 지석의 모습에 정수가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정수는 지석이 가르쳐준 대로 와인의 향을 먼저 맡아보면서 잠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봤다. 전시, 식당, 와인 바. 평소 지석과 함께 다니던 곳들은 아니었다. 좀 지나치게 데이트 코스 같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정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라, 김정수야. 희망 사항 떠올리지 말라고.
"뭐야, 왜 그래? 벌써 취했어?"
"어, 아니. 그냥 머리에 뭐 묻었나 해서."
"아하. 나 할 말 있는데 벌써 취하면 안 돼."
"할 말?"
정수의 반문에 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만, 나 한 모금만 더 마시고. 와인을 핑계로 말을 미루는 지석의 모습을 보며 정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지석이 나에게 할 말, 하고 싶은 말, 크리스 마스. 키워드가 머리에서 굴러다닐수록 점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정수, 사실 나 차였어."
"엉?"
"그 사람한테 차인 거야, 나."
정수는 급격하게 심장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또 듣고 싶었던 이야기.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 그 와중에 지석이 차였다는 말이 또 짜증 났다. 고백도 본인이 받았으면서. 정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관계의 시작은 지석에게 맡겨놓고, 그 끝은 본인이 원할 때 했다니.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 사람이 그러더라. 너, 이제 나 안 사랑한다고."
"그걸 왜 본인이 판단해?"
"나도 그렇게 말했거든, 딱. 그러니까 뭐라는 줄 알아?"
"뭔데?"
"내가 형이 아니라 정수를 사랑한대."
정수는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잠시 굳어버렸다. 지석은 그런 정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저 웃고만 있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정수는 좋은 형이고, 좋은 친구고... 그렇게만 생각했으니까."
지석은 문득, 그 이야기를 하던 윤호가 떠올랐다. 오랜 기간 연애하면서 윤호에 대해 모르는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날만큼 차가운 표정의 윤호를 본 적이 없었다. 겨우 뺏어 든 핸드폰의 전화를 급하게 종료하고 돌아보았을 때, 윤호의 표정이 무서워서 지석은 짧게 몸을 떨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무척 황당했다. 이게 내가 나의 연인에게 듣는 말이 맞나. 이건 내가 형을 사랑해 온 모든 순간에 대한 모욕 아닌가. 윤호는 어딘가 평이하고, 평소에 말하던 톤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그 말을 했었다. 그래서 더 현실감 없게 들렸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 사람 좋아한 거라곤 생각 안 해. 나도 네가 나한테 하는 행동에서 진심을 봤고, 서로 사랑하는 걸 느껴왔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변했으니까."
"내가?"
"너 초반에는 나한테 오해할 짓 알아서 안 했어. 거리 유지 잘했다고. 그래서 그 사람이 널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안 썼어."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꼭 그 사람이 엮이면 내가 오해할 일이 생겨. 나 아니면 그 사람이랑만 있고, 내가 선물한 옷도 그 사람 집에 놓고 오고, 나한테 연락도 없이 그 사람 집에서 놀고, 자고. 그 사람한테 좋은 일이 생겼다며 며칠 전부터 신나 하고, 나랑 있을 때도 그 사람 이야기만 하고."
"..."
"단순한 친구 사이라기에는 네가 그 사람 너무 신경 쓰는 게 보여."
"..."
"마음이 움직였으면 그만 노력하고 가. 안 잡을게."
그래 놓고 본인이 나가버렸다. 지석은 윤호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다가 한참을 울었다. 우리가 이렇게 끝날 관계인가? 내가 무슨 오해할 짓을 했지. 친구들끼리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서로 독립한 집에 놀러 가고, 자고 오고. 그냥 친한 사이에 할 수 있을 법한 것들로 뭐라 하는 거면, 그건 그냥 나한테 식은 거 아니야? 지석은 한동안 자신의 사랑을 멋대로 의심하는 윤호에게 화를 내며 울었다.
그러다 문득 정수를 떠올렸다. 나한테 정수는 어떤 사람이지. 윤호가 의심하던 정수는, 나에게 어떤 의미지. 정말 마냥 좋은 친구이기만 한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긴 했다. 원래 선배라는 존재는 후배에게 늘 멋있게 보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나보다 잘 알고, 잘하는 사람들은 쉽게 사람들의 동경을 받게 되니까. 게다가 정수는 부장이었고, 착하기까지 했다. 활동할 때마다 귀찮아하는 부원을 달래고, 어려워하는 후배를 챙기는 건 정수의 몫이었다. 모든 게 완벽한 선배는 만인의 첫사랑이 될 수밖에 없다. 도서부에서는 정수가 그런 존재였다.
"지석아, 너 예전에 재미있다고 했던 영화 있잖아."
"인셉션?"
"어. 그거 재개봉하던데, 같이 보러 갈래?"
정수는 다정해서 지석이 좋아하는 것들에 먼저 관심을 가져주기도 했다. 지석의 말이 길어지면 지루해하는 모습이 보이는데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투명하게 비치는데도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줬다. 주변에 과학을 잘하는 친구는 많지만, 좋아하는 친구는 별로 없었던 지석에게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정수는 무척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게 다정하고 멋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지 않나?
"아, 진짜. 이상한 소리를 들었더니 이상한 생각도 하게 되잖아."
지석은 머리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아니다, 이건 윤호가 이상한 말을 한 영향이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정수 좋아하지 않아.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우정으로 좋아한다는 말이지, 내 말은. 지석은 어지러워진 머리를 붙잡고 윤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가지 않고 연결음이 끊어졌다. 두 번 더 걸어봐도 같은 결과였다. 벌써 차단했나. 지석은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힘없이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이별이었다.
정수에게 윤호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말할 때까지만 해도 지석은 진심으로 윤호가 오해한 거라고 생각했다. 윤호와의 헤어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건, 정수를 사랑하는 게 진실이라고 판단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잘못이니까, 그래서 윤호를 붙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연인 사이에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오해를 하게 해서 미안했다. 그날, 정수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이상하게 떨리는 가슴이 아니었더라면 지석은 줄곧 그렇게 생각했을 거였다. 정수가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급하게 눈을 뜨고,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고 물을 따라 마시는 그때에서야 지석은 설마? 했다.
그 이후로 지석은 틈만 나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정말 내 마음에, 정수를 향한 애정에 담긴 것이 순도 백 퍼센트의 우정이기만 한가? 내가 정수에게 달려갈 때 정말 조금의 사심도 없었던가.
"쌤, 쌤."
"응?"
"이건 제 이야기 아니고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꼬는 학생의 태도에 지석이 순식간에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눈썹을 들썩였다. 뭐야아, 누구 이야기인데? 누가 봐도 놀리는 듯한 지석의 태도에 학생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이고, 어릴 때다.
"그,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왜? 상대방이 헷갈리게 굴어?"
"아니요, 아니요. 상대방 말고 제가요. 아니, 그러니까 친구가요! 분명 좋긴 좋은데, 이게 사귈 정도로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요."
"좋으면 그냥 좋은 거 아니야? 사귈 정도가 따로 있어...?"
"그럼요. 좋다고 무턱대고 사귈 나이가 아니잖아요, 저희도."
"그런 나이가... 또 따로 있나..."
요즘 학생들은 참... 감성이 예민하구나. 지석은 자신이 꼰대 같은 건지, 장기 연애를 통해 감을 좀 잃은 건지 고민하게 됐다. 학생은 자신이 바라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조금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지석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연애 상담이란 걸 잘하지 못하는 지석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 우선 그 친구가 좋다고 느낄 때는 언제야?"
"저요? 음... 일단 걔 만나러 갈 때마다 옷 자주 갈아입을 때? 예쁘게 보이고 싶잖아요. 그리고 제 연락 씹으면 괜히 불안해지고요. 아, 걔가 좋아하는 건 다 찾아보게 될 때가 진짜인 것 같아요."
"걔가 좋아하는 걸 다?"
"네. 좋아하는 노래 말해주면 들어보고, 영화 이야기해 주면 보게 될 때? 아, 그 제 이야기 아니고요. 저는 평소에 그렇단 거예요. 알죠, 쌤?"
학생의 말에 지석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 모든 게 다 좋아해서 그러는 거구나.
지석도 정수가 전화를 안 받으면 불안했다. 사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어차피 작업하느라 바쁘거나, 작업을 마치고 곯아떨어져 있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뻔히 알면서도 굳이 확인하면 연락하라는 메시지를 하나 더 남겨놓았다. 우리는 신뢰가 있는 사이니까, 라며 윤호에겐 하지 않던 짓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정수와 약속이 잡히면 꼭 두세 번 옷을 갈아입었다. 정수와의 약속에 신이 나서 옷을 입었다가 너무 추레한 것 같아서 한 번, 너무 꾸민 것 같아서 또 한 번. 마치 윤호와 연애하던 초반처럼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시간이 훌쩍 지나는 바람에 대충 아무거나 걸쳐 입고 나가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불현듯 정수가 좋아한다는 책은 다 읽어보고 싶어져서, 인터뷰에 언급했던 책들을 사 와서 읽었던 적도 있다. 그때 새삼 정수가 지석에게 정말 다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읽던 책과 전혀 다른 책이라 그런지 읽는 내내 잠이 쏟아졌다. 정수도 분명 그랬을 텐데. 지석이 읽던 책을 찾아 읽고, 말을 붙여오던 정수는 이 졸음을 어떻게 이겨낸 거지. 그런 다정함을 자신도 되돌려 주고 싶어서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열심히 읽었다.
정수가 쓴 소설이 나오면 선물해 주겠다는 걸 마다하고 직접 사서 밤새 읽었다. 지금까지 정수의 글 중 지석이 놓친 글은 하나도 없었다. 단행본은 물론이고 출판사 웹진이나 이벤트성으로 참여한 뉴스레터 글까지. 모두 지석의 메일에, 책장에, 인터넷 창 즐겨찾기에 보관되어 있었다. 정수가 쓰는 글 곳곳에 녹아있는 사랑의 가치관을 엿볼 때마다 괜히 설레기도 하고. 이런 말은 민망해서 하지 못했지만, 유독 정수를 닮은 글의 주인공이 사랑에 실패했을 때는 지석이 더 속상해하기도 했다.
지석은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윤호가 한 말에 거짓은 없었다는 걸. 그제야 지석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본인이 정수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처음엔 진짜 인정하기 싫었거든. 아득바득 부정해 보려고 했어. 근데 생각해 볼수록 형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
"..."
"그래서 미안하다 그랬어. 내 마음도 내가 모르는 바보라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답장은 못 받았네."
지석은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급하게 와인을 삼켰다. 지석은 지난 몇 달간 정말 수도 없이 고민했다. 윤호와 헤어지고, 정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고 난 이후의 단계는 정수의 마음을 따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정수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지석 본인의 마음을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그도 그럴 게 이미 너무 많은 힌트가 존재했다. 그냥 친한 동생의 생일을 잊었다는 이유로 숨을 헐떡이며 집 앞에 찾아왔던 정수, 관심이 없는 게 티가 나는데도 꾸준히 지석에게 과학에 관해 물어봤던 정수, 윤호와 싸운 날이면 언제나 지석의 편을 먼저 들어주던 정수, 깜빡 잠이 들면 굳이 깨우지 않고 편하게 누워 잘 수 있게 이불을 찾아다 주는 정수.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역시 도서부 시절부터 지석이 읽는 책을 모두 찾아 읽고 감상을 전해주던 정수였다. 어쩌면 정수는 한참 전부터 지석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있잖아, 정수."
"응."
"나 진짜 나쁜 사람이잖아, 그치."
"어?"
"몇 년이나 사귄 남자 친구한테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거 걸려서 차인 거, 진짜 나쁘잖아."
"..."
"그래서 사실 고백 안 하려고 했거든. 형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상처받을까 봐. 상처 주기 싫어서."
만약 대학 동기가 전해 준 소식이 아니었더라면 지석은 혼자 마음을 접었을 거였다. 제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윤호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낸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이었다. 지석은 그날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눈앞이 하얘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근데 형 곧 결혼한대."
"엥?"
"맞지? 정수도 엥 소리 나오지? 솔직히?"
"걔 뭐야? 또라이야?"
"아, 내 말이! 심지어 결혼식 지난주였어. 언제부터 준비한 건데."
지석이 짜증과 웃음이 함께 섞인 목소리를 냈다. 정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결혼? 이 짧은 사이에? 그러면 뭔데? 지석이랑 헤어지려고 꼬투리 잡은 거야? 결혼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보통 1년은 준비하지 않아? 그러면 뭐야, 양다리도 걸친 건가? 정수의 머리에서 온갖 생각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지석은 잠시 화가 난 정수의 얼굴을 가만 지켜보다 툭툭 팔을 건드렸다. 정수는 그제야 다른 쪽으로 튀어버린 정신을 붙잡았다.
"아니야. 사실 형도 많이 참았겠지, 뭐. 얼마나 힘들었겠어."
"..."
"자기 마음이 움직인 줄도 모르는 애인 참아 주기 힘들었겠지. 그러니까 자기를 더 좋아해 주는 예쁘고 착하고 마음씨 좋은 여자 만나서 위로도 좀 받고? 새로운 사랑도 좀 하고?"
"그래도 바람피운 게 더 나쁘지 않냐. 결혼 약속 다잡고 나서야 헤어진 것까지 따지면 나빠도 훨씬 나빴는데."
"흐음, 그런가?"
정수의 옹호에 지석의 기분이 좋아졌다. 동기가 전달해 준 청첩장 문구를 보면서 얼마나 열이 뻗쳤던지. 아무것도 모르는 동기는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지석은 이게 전화가 아닌 메신저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대충 호응하는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아무튼, 뭐. 어차피 서로한테 최악의 이별 선물해 준 사이에 더 눈치 볼 게 있나 싶더라고."
"..."
"그리고 더 기다리게 하기 싫어서."
지석이 거기까지 말한 채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정수는 이 뒤에 나올 말을 알았다.
"정수, 나랑 사귈래?"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 어쩌면 지금 너무 현실감 있게 꾸는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풀려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에 정수는 하체에 힘을 줬다.
"알겠지만 나 진짜 바보라, 정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연애하기 더 힘들지도 몰라."
"..."
"그리고 솔직히 엄청 낯간지러워서, 연애한다고 지금이랑 다르게 행동할 것 같지도 않아. 사귀기 전후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
"..."
"근데 그래도, 나는 정수랑 연인이 되고 싶어."
분명 엄청 떨릴 텐데도 눈 한 번 피하지 않고, 목소리 한 번 떨리지 않고 그렇게 고백하는 지석의 얼굴을 보면서 정수는 묘하게 현실감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어떤 비싼 선물보다도, 예쁘게 포장하려 애쓴 편지보다도, 서툴게 뱉은 말 하나가 더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법이다. 누구나 알지만 그걸 해내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데, 곽지석은 그게 주특기라. 정수는 그걸 당해낼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진실한 마음을 담을 줄 아는 사람이 그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건네는 고백의 힘은 너무 강력했다.
"대답 안 해 주면 밤새 여기서 나랑 이러고 있어야 돼."
장난스러운 지석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정수는 지금 제 얼굴 이 얼마나 형편없을지를 생각했다. 심장은 두근거렸고, 손은 떨렸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석의 얼굴이 흐릿했다.
"나도 좋아, 지석아. 나도 너 좋아해."
목소리마저 너무 떨려버려서,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멋이 없는 대답이라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좋아, 지석아. 자꾸만 좋다는 말이 튀어나와서 정수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말아 물며 울음을 참는 정수의 얼굴 옆으로 지석의 얼굴이 따라붙었다. 지석이 웃으며 정수의 흐르는 눈물을 조심히 닦아주었다.
"다행이다. 연속으로 차일까 봐 엄청 걱정했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알지."
지석은 굳이 말을 더 보태지 않고 정수의 손에 슬며시 깍지를 껴왔다. 그동안 못 잡아본 손도 아니고, 따지자면 수도 없이 잡아 왔을 손인데 이상하게 전보다 더 놓치기 싫어서 정수가 더 손을 꽉 잡았다.
"지석아, 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너는 네가 나 좋아한다는 거, 어떻게 확신하게 됐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도, 너 스스로 확신하지 않았으면 무시했을 거잖아."
그 말에 지석은 잠시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 반응에 정수는 살짝 긴장했다.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한 지석이 말없이 기다리는 정수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자주 하는 말 있잖아, 정수. 지구가 살아온 시간을 하루로 치면 인간이 존재한 시간은 고작 3초라고. 우리는 정말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거라고."
"응."
"그래서 나는 그 짧은 3초를 누구랑 어떻게 쓰는지가 정말, 정말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
"응, 알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한테 주어진 3초 전부를 정수한테 쓰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았어. 그래서 아, 내가 진짜 정수를 사랑하는구나, 싶었어."
그러니까 정수가 한껏 머리를 굴려서 셰익스피어 뺨을 때릴 만큼 엄청난 문장을 떠올렸더라도, 그건 진심을 무기로 쓰는 지석의 앞에서는 무력했을 터였다. 한껏 꾸민 문장보다 그냥 좋아한다는 한마디가 지석의 마음을 더 흔들 수 있었을 텐데, 정수는 그걸 몰랐다. 지석은 어떻게 해야 정수를 흔들 수 있을지보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에 집중했다. 최대한 솔직하게 내비친 지석의 진심은 정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정수는 의미 없이 고민해 왔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그냥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했어."
"그냥 뭐어, 사랑하니까 하게 되던데. 자연스레."
해맑게 웃는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정수는 충동을 굳이 억누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맞붙은 입술 위 온기에 지석이 화들짝 놀라 뒤로 빠지려 했으나 곧 정수의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떨 어졌다가, 다시 붙었다가. 쪽쪽 소리를 내며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니 지석이 눈을 꼭 감았다. 눈이 이모티콘처럼 한껏 찡그려져 있어서 정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수, 사귄 지 이제 첫날인데 진도가 너무 빨라."
"참아온 시간이 있는데 좀 봐주라."
그거 지구 나이를 한 살로 치 면 찰나 중의 찰나...
시끄럽고 눈이나 감아.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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