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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리하모니

  짝사랑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쏟아내는 얄미운 얼굴을 훔쳐본다. 가슴께가 간지러워 괜히 큼- 헛기침을 하자 곧이어 날 쳐다보지도 않고 책상에 있던 새 물병 뚜껑을 우드득 까 내 앞으로 슥 밀어준다. 그 자연스러운 다정에 짜증이 절로 솟구친다. 심지어 물병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있으면 허벅지를 툭툭 치며 천천히 마셔, 지석아- 아니나 다를까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자비 없이 넉다운.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하마터면 머금은 물을 다 뿜을 뻔했지만 공들여 깔아놓은 합주실 흡음 매트를 더럽힐 순 없으니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긴다. 일자 소파 위로 나란히 달라붙은 두 허벅지를 내려다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허벅지를 더 닿아 붙여본다. 쾅쾅 뛰는 심장이 들킬까 자세를 낮춘다..


  자, 이제 다시 한번 묻는다. 짝사랑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떡밥 던진 낚시꾼의 잘못인가, 그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해 덥석 물어낸 물고기의 잘못인가.


  곽지석은 오늘도 내뱉지 못할 말을 애써 씹어 삼킨다..


  …내 모든 원흉. 빌어먹을 김정수.




짝사랑 리하모니




  4개월 전, 메인 건반 형의 돌연 탈퇴와 더불어 들려온 군 입대 소식이 밴드부실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다.

  

“하…이렇게 갑자기…?”


  구건일은 한숨을 쉬었고,


  “형, 이렇게 책임감 없이 나가버리면 어떡해요. 당장 공연이 2주 남았는데….”


  이주연은 울먹거렸으며,


  “…”


  한형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형을 쏘아보았고,


  “…씨발 나도 안 해.”


  오승민은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곽지석은 말없이 기타 가방에 기타를 넣었다. 6개월간 공장 알바 뛰며 아끼고 아껴 모은 돈으로 산 284만 원짜리 펜더 기타. 입맛이 뚝 떨어져 이곳에 1초도 더는 못 앉아있을 것 같았다. 폭탄 던진 건 본인이면서 이마 부여잡은 채 지가 더 곤란한 표정 짓고 있는 그 형을 일부러 어깨빵 치며 지나갔다. 맨날 사기 떨어지는 소리나 해대고 탈퇴 입에 달고 살 때부터 알아봤지. 저 형 그렇게 보긴 했는데, 진짜 뭐 저런 게 다 있냐. 앞길이 캄캄했다.


  터덜터덜 지하에서 올라와 흡연장으로 들어서자 이미 담배 하나 꼬나물고 있는 오승민이 보였다. 누구랑 통화 중인 것 같길래 조용히 가 옆에 앉아 오승민 트랙탑 주머니를 뒤져 익숙하게 담뱃갑을 꺼냈다. 라이터 좀. 건네주는 라이터를 받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존나 독한 거 피네. 난 멘솔이 좋은데. 괜히 말 꺼냈다간 오승민이 죽어라 째려볼 거 같아서 말하진 않았다.



  “형 진짜 안 돼요…? 하… 네, 2주 남았는데. 네… 그쵸… 촉박하긴 하죠.”

  “…”

  “아녜요. 어쩔 수 없죠… 네 알겠습니다…”



  잘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전화를 끊은 오승민이 머리를 쥐어 감싸며 으으으- 신음을 내뱉는다. 미친 새끼 개새끼 좆같은 새끼…중얼중얼 욕을 뱉어내는 오승민 옆에서 가만히 담배만 펴댔다.



  “…네가 메인까지 커버치는 건 좀 어렵,”

  “시발, 말이라고 하냐? FX랑 키체인지 순서까지 다 짜두고 눈 감고도 칠 수 있게 연습 다 해놨는데 이제 와서?”

  “…글킨하지.”

  “아- 아- 진짜 어떡하지. 그냥 저 새끼 죽이고 깜빵 가는 게 맘 편할 거 같아.”

  “시체는 나한테 넘겨.”



  진짜 어떻게 죽이지… 한참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골몰하던 오승민은 곧 아! 하고 무언가 번뜩 생각난 듯 소리를 친다.



  “야 너 김정수 형 기억나지.”

  “? 그게 누군데.”

  “아니, 왜 있잖아. 저번 버스킹 때 그 실음과. 아, 넌 못 봤나? 같이 봤던 게 건일이 형이었나? 아아, 이럴 때가 아님. 야, 나 먼저 간다!”



  우다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쏟아내곤 흡연장을 달려 벗어나는 오승민의 뒷모습을 보다 마지막 한 모금의 담배를 빨아들인다. 김정수? 레알 초면인 이름인데. 머릿속을 뒤집어 김정수라는 이름을 생각해 내려 하던 지석이 곧 아. 작은 감탄사를 뱉어낸다.


  오승민 이 새끼 담배 두고 갔네.



  “개꿀. 이제 내 꺼.”




  그날 밤 그 형은 인사 한마디 없이 밴드 단톡을 나가버렸다.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지만, 또 얼굴을 떠올리면 차오르는 괘씸함에 고개를 저었다. 사과 한번 안 하는 인간 뭐가 예뻐서. 비어 있을 밴드 합주실의 건반 자리를 떠올리자 다시 한번 가슴 한 켠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잡은 기횐데. 대학 아마추어 밴드에게 40분 공연, 8곡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무대는 많지 않다. 심지어 그 무대를 기점으로 여기저기 뻗어나갈 수 있는 가지가 많아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멤버들은 그 시간들이 더욱이 간절했다.


  (알 수 없음)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그 문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아서 핸드폰을 엎었다. 그 형이 떠나간 것보다 음악이 날 떠나갈 것 같은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구건일이 멤버들을 합주실로 급하게 불러 모았다. 새 건반을 구했다 그랬다. 미친 건가? 공연 2주 남았는데 레파토리 어떻게 숙지하려고 이 밴드에 들어온다는 거지? 하루 만에 어떻게 한 거지? 우리 사기당한 거 아냐…?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 겁 없는 인간의 얼굴이 궁금해져 합주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김정수… 입니다.”




  잠시만.



  염병.



  이건 아니지… 잘생기면 잘생겼다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사람 당황스럽게시리.


  당신은 한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습니까. 어느 날 보았던 영화의 명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꾸만 눈치 없이 벌어지려는 입을 의식적으로 닫아내느라 고 짧은 새 기가 쭉 빨렸다. 셋 리스트 악보랑 합주 녹음본 어제 다 받아서 대충 쳐봤는데 열심히 하면 민폐는 안 될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구요… 일단 어제 거의 밤새서 두 곡 정도 만들어왔거든요. 합주해 보면서 맞춰보면…



  우물우물 말하는 입술이 빨갛고, 통통하다. 하얀 피부와 까만 머리칼. 어색함 때문인지 쉼 없이 깜빡이는 두 눈에 자꾸만 시선이 멈춘다. 흐르는 물방울처럼 지석의 시선이 정수의 얼굴선을 타고 흐른다. 볼에 초코칩 마냥 점이 하나 콕 박혀있다. 그즈음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진짜 좆된다. 나 말랑콩떡순딩두부상 좋아하는 거 어케 알았지. 근데 눈매는 날카로워. 언발란스의 발란스 지렸다. 심지어 개큰피지컬에 떡 벌어진 어깨 뭔데. 어케 알고 어떻게 저렇게 빚어놓은 것 마냥 취향의 남자를 하늘에서 뚝.



  “좆됐네…”

  “어? 뭐라고?”



  아, 아니. 좋다고!! 너무 좋다고! 무의식중에 툭 튀어나온 진심에 허둥지둥 말을 포장했다. 아오, 요놈의 주둥아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김정수의 얼굴에 확 얼굴에 열이 두 배로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실음과 건반 전공 탑이라는 오승민의 말은 그저 주접이 아닌 듯했다. 김정수는 두 번 만에 밴드의 전체 흐름을 간파하며 그 틈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어왔다. 섹션과 그루브 합을 금방 맞춰내는 건 물론, 리듬 기타인 지석과 사소한 코드 보이싱 하나까지 섬세하게 맞춰가며 호흡을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쯤 되면 지석은 비어 있던 가슴 한 켠이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곽지석의 보이싱을 체크하느라 손가락에 머무르는 시선에 열감이 올랐다. 이제 곧 떠나가겠구나 했던 음악이, 다시금 지석에게로 다가왔다. 그것을 끌고 들어온 것은 덧붙일 필요도 없이 명확한 김정수의 손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합주를 끝내자마자 오승민의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수 형 개나이스! 이주연의 외침이 합주실을 가득 채웠다. 지석은 옅은 안도의 미소가 담긴 숨을 뱉어냈다. 부끄러운 듯 숙이고 있던 김정수가 고개를 들어 곽지석의 눈을 마주친다. 시선이 묶인 듯 허공에서 부딪힌다. 김정수가 웃는다. 곽지석은… 그걸 거부할 용기가 생기질 않는다. 그제야 실감한다. 와, 나 진짜 좆됐다…….




  자, 그럼 잠시 곽지석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눈치챘겠지만 뼈 게이 곽지석. 유딩 시절, 생일날 뽀뽀 누구한테 받고 싶냐는 선생님의 말씀에 당당히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쟤요. 라고 말했던 건 물론 남녀 짝지어 하는 전통 춤 배우기 시간엔 여자랑 하기 싫다며 울고불고 떼쓰던… 떡잎부터 달랐던 게이의신,게이의환생,게이의지존,게이의마스터피스… 뭐 어쨌든 그런 거다.



  정말 잠시의 디나이얼 기간도 없이 자연스레 본인의 성 정체성을 인정했고, 본능적으로 티 내며 살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유딩 시절 이야기는 묻어두기로 하자…) 성인이 되고 나서야 몇 번 어플로 만남을 시도해 보려 했지만 만남은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았다. 뭘 믿고 낯선 사람한테 덜컥 날 보여줘? 그래, 곽지석은 게이 주제에 자만추 선호하는 오만한 벽장 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밴드 멤버 중에 유일하게 곽지석의 취향을 아는 건 오승민뿐이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전화 한 통 빌려줬다가 깔려있던 것도 까먹고 있었던 게이 매칭 앱 들켜서. 앱 숨기기라도 좀 해놔라… 오승민의 감상은 간단했고 곽지석은 허겁지겁 아이콘을 꾹 눌러 앱을 삭제했다.


  넌 연애 안 하냐? 어느 날 곽지석 자취방에 누워 실실대며 썸녀랑 카톡 하던 오승민이 질문을 던졌을 때 곽지석은 뭐랬더라.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 있으면 하지…아직 본 적 없는 게 문제지만.’



  그 대답에 배부른 소리 쩌네. 얼굴값 미친아- 하며 오승민한테 뒤통수를 처맞았던 기억.



  왜 그때 그 기억이 다시금 나는 걸까.



  신이시여…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헤테로일 거란 말은 없으셨잖아요…



  정수 형? 여자친구 데려다주고 바로 온다던데요.



  공연 전에 단합 겸 김정수 환영식을 하자며 모였던 그 회식 자리에서 곽지석은 0고백 1차임을 거하게 당하고 만다. 아니, 뭐래. 저 고백 할 생각 없었거든요? 곽지석은 이렇게 말하겠지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끊임없이 김정수를 쫓던 눈을 부정할 순 없을 테지.


  그 말 듣자마자 사시나무 떨리듯 진동을 시작한 손을 애써 잡아 누르느라 전완근에 쥐 난 건 아무도 모를 거다. 뭘 놀라고 난리.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잖아. 누가 봐도 내 과(?)는 아니잖아. 후- 잘잘 떨리는 한숨을 애써 내쉬었다.



  “아 미안해. 늦을 생각은 없었는데.”



  뒤늦게 고깃집으로 들어온 김정수가 자연스럽게 곽지석의 옆자리에 앉는다. 물티슈 꺼내 손바닥 슥슥 닦고선 쓰레기통에 그걸 버리며 곽지석이 썼던 물티슈까지 같이 버려준다. 지석이도 술 마셔? 네… 뭐 그럴려구요. 그래, 대신 물 많이 마셔. 그러면서 곽지석 컵에 물 한 잔 가득 따라준다.


  김정수는 고기 먹는 내내 곽지석 쪽으로 반찬을 먹기 좋게 밀어준다거나 곽지석이 탄 고기를 집어 먹으려고 하면 안 돼! (이주연이 강아지냐고 놀렸다) 하며 고기를 뺏어 탄 부분을 가위로 잘라 앞 접시에 올려준다거나 하는 미친 행태를 보여줬다.



  “지석이 술 먹으면 얼굴 빨개지는 편이구나.”



  심지어 발개진 곽지석 두 뺨에 자기 두 손을 올리고는 오오. 뜨끈하다- 하면서 실실 웃는 개미친놈끝판왕의 면모까지 보여주면.



  “아, 형. 뭐해요오…”



  불가항력. 최종 붕괴. 네네, 제가 졌어요. 그냥 헤테로 짝사랑하고 지옥 가겠습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마음과는 달리 속으로 피눈물 쏟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때 고깃집에선 익숙한 멜로디의 어떤 가요가 울려 퍼졌다.


  더 깊이 빠져 죽어도 되니까… 다시 한번만…



  “지석아-”

  “지석아, 카페 같이 다녀오자.”

  “지석아, 이걸로 땀 닦아.”



  저 형은 맨날 지석이만 예뻐하더라. 정수 지석이 덕후잖아. 웅성웅성 합주실을 채운 말 들을 뒤로 한 채 김정수가 건네준 물티슈로 지석이 얼굴에 작게 맺힌 땀을 꾹꾹 눌러 닦아낸다. 아아 토할 거 같애. 슬쩍 옮긴 시선 끝엔 개노답이라고 쓰인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오승민이 걸친다. 미친놈 나라고 좋겠냐고. 사실 좋다. 좋아 죽을 거 같다. 좋아서 죽고 싶다. 시벌…



  한 주 동안 거의 매일 밤새듯이 합주하며 호흡을 맞춰가니 김정수는 어느새 이 밴드의 원년 멤버였던 것처럼 빈자리를 아낌없이 채워냈다. 아니 오히려 플러스가 됐지. 실음과답게 예리한 통찰력과 좋은 귀로 합주의 퀄리티를 몇 배 더 올려놓았다. 한형준은 기타 솔로 라인의 짜임새를 더 디테일하게 잘 살리게 되었고, 오승민은 밤새가며 찾던 사운드 메이킹에 투자하는 시간을 덜 수 있었다. 구건일과 이주연도 리듬이 더 꽉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며 매번 김정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곽지석은 합주실에 그 누구보다 몇 시간 더 일찍 와 연습을 하던 김정수의 뒷모습을 안다. 그 아름다운 뒤태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기특하고 고마워 곽지석도 가끔은 일찍 합주실에 가 기꺼이 김정수의 건반 피드백을 도왔다. 함께 연습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김정수는 다정한 말투로 곽지석을 보며 기타에 재능이 있다고, 좀만 더 일찍 시작했으면 내 후배였을 수도 있었겠다며 오바 섞인 칭찬을 자주 하곤 했다. 연습하다 쉴 때면 은근히 김정수 옆에 가 괜히 건반을 두들겨 본다던가 피드백을 물어본다든가 하며 서슴지 않고 거리를 좁혀갔다. 사심이 아예 없었다면 구라고. 그렇게 둘은 누구보다 빠르게 또 깊게 친해졌다.


  김정수는 곽지석을 유독 예뻐한다. 귀여워한다. 오승민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워낙에 배려가 몸에 배고 다정을 표출하는 게 익숙한 사람 같아 보이긴 했지만 곽지석에게만 유난스레 구는 때가 자주 있었다. 이주연한테는 툭툭 장난스런 시비도 곧잘 걸고 구건일은 하루가 멀다하고 놀려먹으면서. 곽지석은 만지면 깨질까 쓰다듬으면 흩어질까. 이건 좀 오반가. 여튼 어딘가 조심스레 대하는 게 느껴졌다. 웃기게도 곽지석은 양심 엿 바꿔먹은 게이 새끼라 그런 다정 주면 주는 대로 잘도 받아먹었다. 또 김정수는 곽지석 한정으로 웃음이 헤퍼서 곽지석은 자주 오바 떨며 김정수를 웃겨주기도 했다. 솔직히 김정수가 웃으면서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봐주는 게 너무 달고 좋았다. 영원히 그의 광대가 되어줄 자신이 있음… 김정수가 까르륵 웃다가 곽지석 머리라도 쓰다듬고 턱이라도 긁어오면, 아아 형 제발 이러지 마세요. 울부짖는 곽지석과 아니? 더 줘. 더 해. 나만 봐. 헤헤거리는 곽지석이 매번 싸웠다. 일단 받아먹고 쓰면 뱉자 했지만 열이면 열 다 달콤해 혀끝이 아릴 지경이었다.


  남들은 볼 생각도 없고 보지도 못하는 곽지석 얼굴에 붙은 작은 먼지 조각을 떼어내 준다든지, 삘 타서 이주연 한형준이랑 장단 맞춰 헤드뱅잉 난리를 치고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수 정리해 준다든지, 회의한다고 합주실 책상에 모여 앉아 얘기 나누고 있으면 어느새 곽지석 손가락은 김정수에게 잡혀 흔들흔들 장난질 당하고 있었다.


  혹시 이 형 알고 이러나? 진짜 혹시나 해서 오승민 떠봤는데 욕만 한 사발 처먹고 끝났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 형은 곽지석 이렇게 위아래위위아래로 롤러코스터 태워놓고 합주 끝나면 슝 여자친구 만나러 가버리니까… 씨발 인생 씁다. 그 뒷모습 보면서 오승민이랑 눈물 젖은 담배만 태워댔다.


  마음은 곽지석도 모르게 자꾸만 커져갔고, 질투는 불쑥 날을 세웠으며, 욕심은 지독하게 몸집을 부풀려갔다. 헤테로를 짝사랑하는 게이는 정말 최악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매일이었다.




  그리고 현재.



  “형”

  “응?”

  “…요즘은 여자친구분 안 만나세요?”



  카페에서 과제하고 있는 곽지석 맞은편엔 휘핑 두 번 추가한 아이스 초코 쪽쪽 빨아 마시는 김정수가 있다. 그리고 곽지석은 최근 들어 736190번째 하고 싶었던 질문을 참다 참다 겨우 던진 찰나였다.


  원래도 열심인 형이긴 했지만, 요즘은 붙박이처럼 합주실을 벗어나지 않는 김정수였다. 한 달 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세하게 어딘가 얼이 빠진 김정수의 얼굴을 곽지석은 기억한다. 그날 합주 끝나고 오승민이랑 담타 가지면서 오늘 정수형 좀 이상하지 않았냐…? 하고 물었지만 엥? 그래? 모르겠는데. 라는 대답만 들었다. 괜히 김정수 신경 쓰는 거 티 내고 싶지 않아 더 물고 늘어지진 않았지만…



  “…나 헤어졌는데.”

  “에, 예? 네? 아…아아 진짜…요…”

  “엉, 한 달 됐나.”



  그렇게 말하는 눈빛에선 정말 단 한 톨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곽지석은 괜히 조금 더 파고들고 싶어지는 욕심이라는 게 생기는 거다.



  “왜 헤어졌는데요?”

  “음…”



  운을 띄워놓고는 한참을 말이 없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아이스 초코는 빨대를 말아 쥔 김정수의 의미 없는 손짓을 따라 얼음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내고 있다. 김정수는 몇 번을 입을 달싹이다 말고를 반복했다. 그런 그를 잠자코 기다렸다. 찡그린 얼굴 존나 좋네... 제발 저요. 이딴 생각 처하면서.



  “…그 전에 지석아 나 할 말 있는데.”

  “예? 네, 뭔데…요…?”

  “놀라지 않기로 약속해.”



  김정수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곽지석도 손가락을 걸어본다. 아- 남자 둘이서 간지럽게. 네, 좋단 뜻이에요. 뭔 얘기를 해주려고 이렇게나 밑밥을 까시나. 두려움 반 궁금함 반의 심정으로 아메리카노를 쪼록 마시는데.



  “사실 나… 그 전 애인이 남자거든.”



  푸훕- 턱 밑으로 줄줄 새는 아메리카노에 허겁지겁 티슈를 들어 옷에 떨어진 물방울을 닦아냈다. 아 검은 옷이라 다행이다. 미친. 근데 방금 너 뭐라고 한…? 정신없던 시선을 들어맞은 편의 김정수와 눈을 맞춘다. 미소인지 썩소인지 모를 표정이 걸려있다.



  “야아- 놀라지 않기로 했잖아-.”

  “아, 아. 아냐. 나 놀란 거 아니에요. 진짜로.”

  “…아냐. 안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알면서 괜히 던져봤어.”



  바이… 라고 해야 하나. 양성애자 그런 거… 어쨌든. 그거 걔가 알게 돼서… 원래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쉽게 안 떨어지더라고. 내가 나쁜 놈이지 뭐. 그렇게 말하는 김정수는 아주 조금 민망해 보였다. 와중에 곽지석 머릿속은 뒤죽박죽 난리가 났다.


  형, 저도. 저도 남자 좋아해요. 남자만 좋아해요. 아니 형만 좋아해요. 저 형 좋아해요.



  “나 손절해도 할 말 없어. 그냥 너한테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

  “아뇨? 제가 왜요? 저 아무 생각 없는데요. 괜찮은데요?”



  하하- 정말? 다행이다. 사실은 너가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김정수 얼굴이 금세 환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오마이선샤인… 그 황홀한 자태에 곽지석은 커밍아웃할 타이밍을 그대로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곽지석 일생일대의 실수가 되고 만다. 건반에 잔뜩 집중해 있는 동그란 머리를 바라본다. 하나…둘…셋… 속으로 셋을 세면 어김없이 김정수는 눈을 맞춰온다. 맹한 곽지석 표정이 웃기기라도 한 건지 사르르 미소를 짓는다. 김정수 씨. 그렇게 굴면 유죄예요. 근데 김정수는 지가 죄짓는중인 지도 모르겠지. 왜냐면 김정수는 곽지석이 게이인 거 모르니까… 아아, 심정이 처참하다. 저 형은 지금 내가 당신에게 미친 듯이 설레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를 테지. 오히려 김정수를 헤테로라고 알고 있었던 때가 나았던 것 같다. 가슴께가 답답하다.


  그날 이후로 김정수는 더욱이 곽지석을 애착 인형 마냥 끼고 다니길 시작했다. 비밀을 오픈하고 나니 마음의 문이 열린 건지 뭔지… 그러니까 곽지석이 타고 있는 롤러코스터 또한 청룡 열차에서 티익스프레스로 업그레이드됐다는 말이다. 감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요동쳤다.


  공강 시간에 굳이 곽지석이 강의 듣는 미래관까지 내려와 밥 같이 먹고 커피같이 사 마시고 곽지석을 또 미래관까지 데려다주고 (오승민 : 걍 평소랑 똑같은 거 같은데?)


  합주실로 향하는 오르막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는 건반이라 짐이 없잖아~ 이펙터 나 줘. 하며 곽지석 짐 빼앗아 대신 들어주고 (오승민 : 아니 평소랑 다를 게 없다니까?;)


  종일 카톡 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잠들기 직전까지 전화로 수다 떨다 자는 경우도 잦았다. 헉 이 형도 혹시 나를…? 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구라겠지만 김정수는 곽지석을 게이라고는 단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슬프게도 곽지석은 인생의 전부를 게이라는 사실 숨기기 챌린지하며 살아왔기에 자연스레 티 내는 방법 이딴 것도 몰랐다. (오승민 : 등신…)


  곽지석의 사전에 김정수 거부하기 같은 건 없기에 바보 곽지석은 기꺼이 그의 생활반경의 일부 아니 전부가 되어주었다. 그래요… 솔직히 좋긴 해요…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김정수로 인해 완성도가 몇 배 이상으로 높아져 그 이상을 해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무대 위의 음악에 취해 미소를 띄운 채 서로의 눈을 마주 보던 순간이 지석에게는 셔터로 누른 것처럼 한 장 한 장 가슴 속의 사진첩에 새겨졌다. 엔딩으로 피아노 독주를 끝낸 뒤 고개를 들곤 지석과 눈을 마주치며 눈가를 찡긋하던 김정수의 반짝임에 곽지석은 결국 구원을 느낀다. 더 깊어질 것도 없어 보이던 마음은 한 층을 더 뚫고 내려간다..


  무대를 내려와 장비를 정리하던 지석에게 다가온 김정수가 수고했어, 지석아. 너무 고생했어. 하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달콤함에 질끈 두 눈을 또 감고 말았다.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는 함락이었다.


  지석아 미래관에서 과제 중이라며? 승민이가 말해줬어. 저녁 안 먹었지? 늦은 시간까지 실험 보고서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 날이었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미래관을 나설 수 있었던 지석은 확인하지 못했던 핸드폰 화면 맨 위에 떠 있는 김정수의 알람에 허겁지겁 전화를 걸었다. 김정수도 앙상블 수업 합주가 이제 끝나 짐을 정리 중이라 했다.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그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하고 대답했다. 힘들었고 배고팠고 김정수가 보고 싶었고. 고민 같은 거 할 에너지도 없었다. 예술관으로 걸음을 옮기자 저 멀리 건물을 나서는 김정수가 보였다. 지석아! 손을 흔들며 이름을 부르는 김정수에게 달려갔다. 함께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학교 앞 가성비 호프집으로 향했다. 라볶이에 치즈돈가스를 시켜 정신없이 입으로 집어넣었다.



  “배 많이 고팠어?”

  “아 좀… 많이여. 진심 할 거 너무 많아 가지구… 형은 합주 잘했어요?”

  “응, 뭐…아 근데 확실히 우리 밴드 합주할 때가 더 재밌는 거 같애.”

  “엥 진짜요? 왜요? 우리 학교 실음과 알아주잖아요. 다 우리보다 백배 천배는 잘할 텐데.”

  “그렇긴 한데, 난 재즈보단 락, 펑크가 좋아서. 재즈 노잼.”

  “와 난 재즈 잘하는 사람 멋있던데… 그래서 전에 한형준이랑 화성학 공부하려고 했었는데 한형준이 먼저 포기해서 저도 포기했어요.”

  “ㅋㅋㅋㅋ 아니 너까지 포기하면 어떡해.”



  한참 큭큭대는 하얀 얼굴을 보다 언젠가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형 근데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곽지석의 말에 김정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데?



  “형은 저희 밴드에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어요?”

  “응?”

  “아, 다른 뜻이 아니라요. 솔직히 공연 2주 전인 밴드에 선뜻 메인 건반으로 들어오는 게 쉽진 않잖아요. 심지어 8곡을 준비해야 했던 상황인데… 오승민이랑 직접 아는 사이도 아니고 건너서 아는 사이였다면서요. 오승민이 간절하긴 했지만, 무리인 거 알아서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물어봤는데 형이 너무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지도 엄청 놀랐대요.”

  “…”

  “…형 진짜 우리 구세주인 거 알아요? 이미 많이 들은 말이겠지만… 저는 한 번도 말 한 적 없는 것 같아서요.”

  “뭘?”

  “와줘서 고마워요. 형.”



  김정수는 곽지석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음…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나 사실 그때 너랑 초면 아니야.”

  “예?”



  처음 듣는 말에 두 눈만 껌뻑껌뻑.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나 전에 너네 홍대에서 버스킹 할 때 구경 간 적 있었어. 같이 갔던 형이 승민이랑 아는 사이래서 그때 건일이 형이랑도 인사하고… 생각해 보니 너를 나만 봤던 것 같기도 하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인사를 못 했었나.”

  “…형을 봤으면 제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는…”

  “ㅋㅋㅋㅋ진짜? 그때 너랑도 인사하고 싶었는데. 여튼 승민이한테 밴드 연락 왔을 때 내가 물어봤지. 그때 기타 치던 애는 아직 있냐고. 너 이름을 몰라서 형준인지 지석인지 묻길래 모른다고 했더니 기타 치는 애 둘 있는데 둘 다 고대로 있다길래 한다고 했어.”

  “…엥?”

  “그냥- 같이 하면 재밌을 거 같아서-.”



  지석은 여전히 바보처럼 두 눈만 껌뻑였다. 지금 제가 정확히 들은 게 맞을까요…? 동시에 수많은 정보가 어지럽게 들어와 뇌를 마비시켰다. 그니까 지금… 곽지석이 김정수를 알기 전부터 김정수는 곽지석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밴드에 들어온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거임…?


  …나 지금 고백받은 거 아냐? (오승민 : 잠깐 지석아) 어쩐지 그제야 김정수의 행보가 아주 조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곽지석이랑 유독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둘 다 서로 친해지고 싶어 했던 거잖아. 나만의 일방적인 관심이 아니었다는 거잖아. 리액션 조절 못 하고 입 틀어막을 뻔한 거 겨우 참았다.



  “형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응?”

  “노빠꾸 무대뽀네요…”

  “ㅋㅋㅋㅋㅋ네가 봐도 그래? 나도 친구들한테 미친놈 소리 엄청 들었어.”

  “…와 대박.”

  “뭐, 덕분에 이렇게 지석이랑 둘이서 놀러도 다니고- 얼마나 좋아.”



  곽지석이 하고 싶은 말들 겁도 없이 훅훅 내뱉는 김정수를 보며 지석은 어째 조금 울고 싶어졌다. 아 나 진짜 이 형 좋아하나 봐… 이 형은 그냥 나랑 인간 대 인간으로 친해지고 싶었던 건데… 나는… 나는 시방 한 마리의 짐승처럼 맨날 김정수보고 침이나 뚝뚝 흘리고… 시발 죄책감…


  김정수는 울망거리는 곽지석 눈망울 보고는 부담스러워하지 말아 달라며 민망한 웃음 발사했다. 바부야… 김정수는 왕바부야… 사람 속도 모르고…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나…? 아 좀 아쉬운데… 슬쩍 맞은 편의 김정수 눈치를 슥 보는데.



  “…맥주 한 잔씩 할까?”



  나이스.


  그래, 오늘은 좀 먹어줘야겠다. 어차피 낼 토욜이자나용. 밴드부 합주도 없고- 그렇게 생맥을 시켰고, 두 잔째 들이키던 김정수가 자연스레 소주를 시켰으며… 한 병은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될 때쯤에.



  “지서가… 이제 가까…?”

  “어… 어엉… 그르자 그르자. 가자요…”



  김정수 취해따 ㅋㅋ 우웅… 나 좀 치하네… 휘청이며 자취방으로 향하는 곽지석의 몸뚱아리를 김정수가 감싼다. 새벽의 길거리엔 고요만이 가득하다. 차가운 밤공기 위로 김정수의 따뜻한 체온이 겹쳐온다. 알딸딸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몽롱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김정수의 널찍한 가슴팍. 살짝 고개를 들면 곽지석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눈이 있다. 눈빛이 스친다. 삐용삐용- 위험 신호가 감지된다. 그 사실을 알아채자 갑작스레 긴장감이 몰려와 곽지석은 숨을 참았다. 잠만 잠만 이거 좀 가깝-



  “읍…”



  어느새 곽지석의 허리를 팔 하나로 가득 감싼 김정수의 얼굴이 내려앉고, 천천히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겹쳐오는 말캉한 감촉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지금 우리가 입을 맞추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살짝 벌려진 지석의 입술 틈새로 김정수의 말랑한 혀가 밀려들어 온다. 따스한 온도가 입안을 휘젓는다. 머릿속에 뭉게구름이 잔뜩 낀 듯 모든 사고가 멈춰버린다. 다른 손으로 곽지석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안은 김정수가 고개를 꺾어오며 더 깊게 마주 들어온다. 갈 곳을 잃은 지석의 손이 허공을 맴돌고 있으니 김정수가 어느새 그 손을 잡아채 본인의 허리에 자연스레 올려놓는다. 가쁜 숨을 고르며 흐름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터질 것 같은 박동 소리에 곧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아…!”

  “아… 아. 아니요. 아니요. 형 그게…”



  막혀오는 숨에 본능적으로 살짝 밀어낸 것일 뿐인데 맥아리 없이 김정수가 나가떨어진다. 당황한 곽지석의 두 손이 정처 없이 맴돈다. 김정수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치면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뭔가, 뭔가 수습을… 멈춰버린 사고회로는 제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결국 곽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취방 빌라 건물로 뛰어 들어가 버리기를 택한다.


  현관문을 쿵 닫고 나서야 제정신이 드는 듯하다. 꿈에서도 아까워 그려보지 못했던 입술의 감촉이 여전히 생생하다. 손끝을 들어 김정수가 닿았던 곳을 매만져본다. 미친… 미친 거 아냐? 미친 거야. 미친 거지… 중얼중얼 감상을 뱉어내던 지석이 갑자기 드는 생각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내… 내 첫 키스…”



  그리고 김정수 홀랑 남겨두고 도망쳐오기까지. 아아 미친… 존나 최악… 머리를 부여잡은 채 쓰러지듯 현관에 널브러진 지석이 으아아악 괴로운 소리를 질러댔다. 어 너 좆됐어 지석아…


  언제 까무룩 잠이 든 건지, 눈을 떠보면 어제의 옷차림 그대로 현관에 쪼그려 누워있었다. 오싹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으슬거리는 몸이 겨울의 현관 찬 바람을 직통으로 맞은 후유증인 듯했다. 누가 날 두들겨 패기라도 했나. 그 순간 어제 기억의 잔상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김정수… 그 이름 입에 머금다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데 비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아 아니 컨디션 왜 이래. 손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 되어 방전된 지 오래인 듯했다. 일단 충전부터… 물을 잔뜩 머금은 솜뭉치마냥 무거워 죽겠는 몸뚱아리를 이끌고 침대로 향했다. 아 머리 아파… 속 안 좋아… 나 열나는 것 같아… 내일 합주 못 간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보다 정수… 정수 형은 어떡하지. 식은땀이 흘러 뜨끈해진 이마 아래로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핸드폰 충전…해야… 지석은 그대로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쾅쾅- 부서질 듯 현관 철문을 두들겨대는 소리에 지석이 흐릿하게 눈을 떴다. 얼마나 정신을 잃은 채 있었던 건지 식은땀이 온몸을 덮어 찝찝했다. 여전히 집 안이 컴컴하다. 지금 몇 시지…?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잡으려는데 다시 한번 쾅쾅- 하고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섬주섬 일어나는데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몸뚱아리에 하마터면 바닥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와 씨 죽을 뻔… 책상 모서리에 놓여 있는 모자를 뒤집어쓴 지석이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이중 잠금 걸쇠를 착실히 건 뒤 현관문을 열면 보이는 얼굴은.



  “정수 형?”

  “…야, 너 왜 전화가 꺼져있어…!”



  미친 이 형이 왜 여기에. 다시 문을 당겨 이중 잠금을 해제한 지석이 문을 활짝 열었다. 아니, 지석이 열기도 전에 김정수가 거친 손으로 문을 잡아당겼다. 어어- 그 반동으로 지석이 휘청이자 김정수가 팔을 뻗어 허리를 한숨에 감싸 잡는다. 확- 얼굴에 오르는 열기가 느껴져 고개를 급하게 숙이자 아 놀래라… 김정수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울린다..



  “지석아 너 아파?”

  “형 여길 어떻게…”

  “폰 꺼둔 채로 계속 잔 거야?”



  약은. 약 먹었어? 우다다 쏟아지는 김정수의 말에 지석이 천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약도 안 먹고… 지석아, 너 열 나. 모자 아래로 훅 들어온 김정수의 커다란 손바닥이 지석의 볼을 감쌌다. 아 시원해… 와중에 본능적으로 그 시원한 손에 기댔다. 아, 몽롱함이 가시질 않는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수준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고, 지석아. 잠시만.”



  돌아선 김정수가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곽지석이 아…? 멍청한 감탄사를 뱉어낸다. 잠만, 지금 김정수가 왔다 간 거…? 고개를 들어 현관 벽면의 거울을 봤다. 식은땀을 잔뜩 흘리는 바람에 말라붙은 머리카락이 볼캡 밑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불쌍할 정도로 퀭한 두 눈과 고새 폭 패여버린 볼까지. 지석이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기를 켰다.


  감은 머리를 털며 나오자 띠딕- 하고 현관문이 열리며 김정수가 들어온다. 뭘 사 온 건지 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비번 어떻게… 하고 지석이 중얼이면.



  “승민이가 알려줬어. 아까는 혹시나 해서 문 두드린 거고.”

  “…아, 오승민…”

  “일로 와 지석아. 일단 죽부터 좀 먹고 약 먹자.”



  김정수 손에 질질 끌려온 지석이 원룸 한가운데 앉으면 김정수는 마치 집주인 마냥 벽 한쪽에 세워져 있던 앉은뱅이 의자를 척척 펴 바닥에 세운다. 묶여있던 비닐봉지를 풀어 레토르트 죽을 꺼낸 정수가 척척 걸음을 옮겨 전자레인지에 죽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그 몸짓을 지석은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현실감 1도 없네…


  너 하루 넘게 연락 안 된 거 알아? 김정수의 목소리엔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꾹꾹 담겨 눌린 듯했다.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슬픈 것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루? 화들짝 놀란 지석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핸드폰을 주워 급하게 충전기에 연결한다. 잠시 후 켜진 핸드폰 배경 화면엔 일요일이라는 글자와 04:17이라는 숫자가 뜬다. 나 분명 토요일 새벽에 집에 들어왔… 헉. 꼬박 하루를 넘게 잔 거야? (실제로는 기절에 가까웠다) 헙. 하고 입을 틀어막은 지석이 스크롤을 내려 핸드폰 알람을 확인하면 수 없이 쌓여있는 카톡과 문자 알람들이 보인다. 건일이 형, 이주연, 한형준, 오승민 줄줄이 다 부재중과 문자를 남겨놨다. 그 중엔 김정수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석아 오늘 합주 안 와? 지석아 어디야. 폰도 꺼져있고… 집이야?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지석아 연락 좀 봐라… 지석아. 지석아…


  금방 갈게.


  그게 김정수의 1시간 전 도착해 있는 마지막 카톡이었다. 그 아래로는 오승민의 문자가 와 있다. 뭔 일 있냐? 내가 가는 거보단 정수형이 가는게 낫겠지 나중에 밥 사셈ㅋㅋ 아아… 타임라인이 대충 머릿속으로 정리되자 결국 이마까지 부여잡은 지석이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형 죄송해요….”

  “…너 때문에 진짜… 별별 생각을 다 했는지 모른다….”

  “아픈 줄도 모르고 잤어요….”



  어느새 다 데워진 죽을 꺼내 온 정수가 지석의 눈앞에 뚜껑을 열어 내민다. 이 시간엔 편의점 죽 밖에 없더라. 집 앞 편의점은 또 닫혀 있길래 좀 멀리 다녀오느라 시간이 걸렸어. 손에 숟가락까지 쥐여주면 형 고마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쥐어짜듯이 대답한 지석이 죽을 삼킨다. 하루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더니 배가 고프긴 했는지 쑥쑥 잘 넘어간다. 죽을 삼킬 때마다 목이 따가웠다. 그런 곽지석 가만히 바라보던 김정수가 그저께도 컨디션 안 좋았던 거야? 괜히 술 마셨나… 피곤한데 무리했던 걸 수도 있어. 과제도 많았었다며. 아프긴 아픈지 김정수 다정한 걱정 한 마디에 울컥 감정이 샘솟는다. 어느새 마지막 한 숟갈을 떠 삼킨 지석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그게 아니라….”

  “…”

  “그날 현관에서 취해서 뻗어 자는 바람에………….”



  잠깐 벙쪄 있던 김정수가 풋- 결국 못 참고 와하하 웃음을 쏟아냈다. 아 씨 민망해. 어이없죠… 저도 어이가 없습니다… 곽지석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와…나 참…하… 영문 모를 감탄사를 연달아 뱉던 김정수가 이내 자세를 다시 한번 고쳐 앉는다.



  “난 또.”

  “…?”

  “내가 키스해서 도망간 줄 알고.”



  컥- 이번엔 곽지석 차례. 와 씨 다 게워 낼 뻔. 가슴께를 붙잡은 지석이 캑캑대자 김정수는 옆에 널브러져 있던 물티슈 하나 북 뽑아서 곽지석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거 뺏어 든 곽지석은 입 주변을 벅벅 닦았다. 형 기억나요…? 곽지석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눈을 껌뻑껌뻑. 잊길 바란 건가… 희미하게 말을 뱉은 김정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씁쓸한 온도로 변했다.



  “…미안해 지석아.”

  “…뭐가요?”

  “…맘대로 군 거.”



  김정수의 대답에 공기가 답답해졌다. 숨이 막혀왔다. 입술을 잇새로 꾹 씹었다. 건조해 터 있던 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뭐가 미안한데? 아니 애초에… 왜 미안한데. 나는… 나는 존나 좋았는데. 그냥 좀 놀랬을 뿐인데. 도망간 거 내 잘못 이긴 한데. 이러면 내가 뭐가 돼. 속이 복잡해졌다. 내뱉지 못할 말들이 목 끝까지 턱턱 차올랐다. 이쯤 되면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민망한 손장난이나 치고 있는 김정수가 너무 얄밉고 싫고 미워서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었다.



  “…형 저한테 왜 그래요?”

  “어?”

  “형은 제가 바본 줄 알아요? 저 왜 챙겨줘요? 기타 가방 왜 자꾸 들어줘요? 왜 자꾸 커피 사다 줘요? 밥 챙겨 먹었냐고 왜 물어봐요? 귀엽다고 왜 자꾸 그래요? 자꾸 머리 쓰다듬고 막… 턱 간질이고, 웃어주고, 날 보고 있을까 싶어서 고개 돌려보면 어김없이 날 보고 있고… 왜… 왜….”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서글픈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 우는 남자 최악인데.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감기 기운으로 인해 달아오른 얼굴에 감정까지 배로 예민해진 듯했다. 손을 들어 눈가를 벅벅 닦았다. 선명해진 시야는 금세 흐릿해진다. 김정수의 표정이 보이질 않는다.



  “지석아, 왜 울어. 미안해. 내가 미안….”

  “형 저 좋아해요?”

  “…어?”

  “아니, 아니. 대답하지 마요. 대답하면 죽일 거야. 형 제가 형 좋아해요. 형 좋아하는 것 같아요. 형이 자꾸 다정하게 구니까 형을 너무 좋아하게 됐어요.”

  “…”

  “형 제가 말 못 한 거 있는데요. 저 처음에 형 봤을 때부터 형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형이 다정하게 굴면 정말 단 하나도 거부 못 했어요. 형은 저 그냥 좋은 동생…이었겠지만 나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날 밤에도 너무 좋았는데 놀래서 도망간 거예요. 형이 사과할 필요 없어요. 다 내 탓이에요. 내가 형 이용한 거예요.”



  곽지석은 뇌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내어지는 본인의 말들에 또 한 번 깨닫는다. 나 진짜 김정수 많이 좋아하네. 너무 사랑하네. 사랑받고 싶어 했네, 나. 쏟아낸 말끝에는 오랜 정적이 찾아왔다.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한 편으론 막상 다 뱉어내고 나니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끝이다… 이제 나는 밴드 탈퇴하고 학교 휴학하고 자취방 짐 빼고 본가 집구석에서 쓸쓸하게 고독을 씹다가 죽음을 맞이하겠지… 사고는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흐른다.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닥만 바라봤다.


  그때 턱 밑으로 불쑥 들어오는 손이 있다. 천천히 볼을 감싸오며 지석의 턱끝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는다. 고개를 들어본다. 알 수 없는 표정의 김정수가 눈을 맞춰온다.



  “누가 그래.”

  “…”

  “내가 너 그냥 좋은 동생으로만 본다고.”

  “…네?”

  “미쳤다고 아무 관심도 없는데 그렇게 굴었을까.”

  “…”

  “입 맞춘 거 실수 아니야….”



  근데 지석아… 너 남자 좋아해? …네… 언제부터? …태어났을 때부터요…? 하… 김정수가 헛웃음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한다. 곽지석의 얼굴엔 온통 물음표가 가득하다.



  “뭘 한 거냐. 지금까지…”

  “…”

  “약 먹어, 지석아. 물 가져다줄게.”



  자리에서 일어난 김정수가 가져다준 알약과 물을 힘겹게 삼켰다. 일어나 지석아. 눈앞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맞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곽지석을 침대에 눕히곤 꼼꼼히 이불을 덮어준 김정수가 침대 옆에 풀썩 앉았다.



  “너 몸 안 좋으니까 한숨 자자.”



  빠르게 올라오는 약기운이 느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입안이 썼는데, 김정수가 머리를 쓰담아 내리는 손길 한 번에 스르르 녹아 없어진다. 이상하지. 분명 풀리지 않은 것들이 한가득인데, 왠지 모든 것이 다 잘 된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몸을 감싼다. 손을 뻗어 김정수의 손등 위에 얹었다. 그럼 김정수는 손을 뒤집어 곽지석의 손을 마주 잡아 온다. 조심스레 손깍지를 껴온다. 곽지석이 한 번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형, 어디 가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는 곽지석을 조용히 보던 김정수가 몸을 움직여 곽지석의 옆자리에 등을 붙여 눕는다. 팔을 들어 곽지석의 가슴 위에 얹으면 곽지석은 눈을 감고 조심스레 김정수의 품에 안겨보기로 한다. 등을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떡해, 나 또 눈물 날 것 같아. 가빠오는 숨소리를 들은 건지 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천천히 토닥임으로 바뀌었다.



  “지석아.”

  “…”

  “지석아…지석아, 지석아.”

  “…네….”

  “해줄 말도 너무 많고 들을 말도 너무 많은데….”

  “…”

  “일단 숨 좀 돌리고 하자. 푹 자자.”

  “…형.”

  “응?”

  “오늘 다 해요… 우리.”



  어느새 곽지석의 머리 위로 턱을 올려 기댄 김정수의 입가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 오늘 다 하자. 그 말에 곽지석은 정말 뭐든 다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가슴팍에 이마를 콩 대어본다. 몸을 힘주어 안는 팔이 느껴진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새롭고 신기하다. 이제서야 드는 안정감에 무거워진 눈꺼풀이 내린다. 이 롤러코스터의 종착지는 김정수였구나. 그 레일을 이어놓은 것도 김정수였구나. 나는 이곳에 도착할 운명이었구나. 편안한 옅은 숨을 내쉰다.


  자고 일어나면 남김 없는 마음을 고백해야지.


  다시 눈을 떠도 형을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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