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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히로인 시점

꼴악

첫 만남 0/0


전국에 이상 게이트 수가 늘었다.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이상 생물체를 몬스터, 괴물 등 다양한 칭호로 불렀으나 그다지 신경을 두지 않는 시민들이 더 많았다. 현대 문명의 시대, 그리고 센티넬. 이 두 가지면 모든 상황이 30분 내로 처리됐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참 빨리 빨리의 나라다운 대처였다.


이런 속도감의 나라에서.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지석이 있었다. 하나둘 자휴를 때리기 시작하는 4주 차의 공강. 지석은 도서관에 전공책 하나를 덜렁 들고 4시간을 허비하는 중이었다. 지난 학기에는 간당간당하게 순위에 밀려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분했다거나 더 열심히 할 걸... 이라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해보면 되겠는데? 라는 마음. 마음의 소리를 듣고자 공강 날까지 도서관에 출두했거늘... 마음과 몸의 의견이 썩 일치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반틈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지석의 팔을 훑고 갔다. 추워지려나. 아직은 가을보다 여름에 더 가까운 시월이었다. 등받이에 걸어둔 셔츠를 걸치려 몸을 돌렸다.


셔츠에 한 팔을 꿰어 넣던 순간 지석의 몸이 짓눌렸다. 뭐지. 짧은 생각과 동시에 허공으로 떠올라지는 서늘한 감각이 위험을 예고하기라도 하는 듯 머릿속 사이렌이 울린다. 요즘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정부의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스치듯 뉴스로 본 적이 있다. 일반인, 개중에도 학생 신분인 이들을 물어 국가로부터의 인질극을 열고 있다... 라는. 아, 공강은 공강인 이유가 있는데. 주마등이 스친다는 게 이런 걸까. 이상하게도 그 찰나의 순간 지석의 머리는 여러 정보값들이 얽혀 사태에 대한 이유를 보여준다. 몸이 중력에 의해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지석이 반응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 본능이었다.



“...괜찮아요?”



앳된 얼굴 밑으로 지석의 몸을 단단하게 받쳐주던 누군가의 몸. 그리고 조심스럽던 걱정서린 목소리. 그건 약간... 사고 같은 거였다. 예상할 수도 없고, 상상으로 예방할 수도 없는 재해 같은 것. 정수와의 첫 만남을 지석은 그렇게 해석했다.




서두에 말했듯 빨리 빨리가 정서인 나라인지라. 한국 대학교 반정부 테러 사건은 25분 만에 정리가 되었다. 지석은 구급 대원들의 사이에서 간단한 찰과상을 소독 받았다. 사람이 붐비는 날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부상자가 열셋이라는 숫자에서 그쳤으니. 지석은 건물 밖 대피 공간에 앉아 생각했다.


아까 그 사람 김정수네.


기사를 봤다. 며칠 전 일어난 여대 테러 사건을 앞서 진압했다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포털 사이트에 센티넬이라고 치면 상단에 뜨는 이름이 정수였다. 강남 대로변 세 개의 게이트가 열렸던 대형 참사에도, 진압까지 역대 최장 시간을 기록했던 반정부군과의 사투에도 정수의 이름이 있었다. 지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민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오롯이 쥐여준다는 것에 대한 미약한 부채감이 있었으나 그건 솔직히... 일상에 있어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지석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자책했다. 사고는 피해자를 지정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언젠가 정수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또래일 텐데, 분명 나이 차가 크지 않을 거다.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지석은 집에 돌아가는 순간까지 정수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관계의 시작 1/1


그런 사고가 있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양 시간은 흘러간다. 지석은 출입 금지가 된 본관 도서관 건물을 바라볼 때야 아,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알아차렸다. 이제는 보도도 잘되지 않는, 인명 사고가 드물게 되기까지의 몇 명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을까. 지석은 이 일을 겪기 전과 겪은 후로 사고 체계가 아예 달라진 것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저 텍스트로만 느껴졌던 사고들이 영상으로 움직여 보이는 것만 같은 느낌. 그 이상한 지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와.”

“뭐가?”

“니 와 그러냐고. 뭐가 문젠데 자꾸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날 별로 안 다쳤다고 했었잖아. 아니야?”



넌지시 묻는 주연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아서, 지석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대꾸했다. 이런 얘기해 봤자 걱정이나 살 게 뻔하지, 뭐.


주연은 지석이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같은 과는 아니었는데 자취하는 건물이 같았다. 말 걸면 인상 찌푸리게 생겨서는 사실은 그냥 실없고 마음 여린 애여서 정이 갔다. 가끔 락스타가 되겠다고 쳐대는 기타 소리가 잠 못 들게 했지만. 어쨌든 지석에게는 든든한 친구였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문 쾅쾅 두드리고 쳐들어와 상태를 확인하기까지 해주는.



“너 김정수 알아?”

“21이야? 그럼 알 만도 하고.”

“아니... 됐다.”



얼음이 다 녹은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휘 저었다. 컵 아래로 물이 고여 손이 축축했다. 과제나 해야지... 가방을 열려다 아침에 대강 챙겨나온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김정수가 쥐었던 셔츠. 하루에 몇 명을 구하는데 내가 기억이나 나려나. 정수를 한 번 정도는 더 보고 싶었다. 그런 사고의 형태 말고, 사적인 자리에서.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살면서 더 이상은 마주칠 일이 없겠지만. 음표를 죽죽 그리던 주연이 그만하고 가자... 할 때까지 깜박이는 노트북 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유증이 길다.




집에 돌아온 후로도 마음이 영 답답해 편의점으로 나왔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더 이상 반팔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밖에서 술 마시는 것도 괜히 가오잡는 것 같아서 싫었는데. 오늘만큼은 노상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적당한 취기가 생각을 붕 뜨게 만든다. 살짝 눈가를 비볐다.



“괜찮아요?”



그때랑 똑같은 목소리. 취했나. 헛것이 막 들리네, 고작 두 캔인데. 지석은 테이블을 바라보다 자신의 쪽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을 쫓았다. 가로등 빛 때문에 후드 아래 그림자가 짙었다. 지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취했어요?”

“아뇨... 아닌가. 취한 것 같기도 해요.”

“위험하게 혼자 이러면 어떡해요. 밤인데.”

“다 큰 성인 남자 뭐가 위험하다고...”

“위험에 성별이 어디 있어요. 조심하면서 살아야지. 가뜩이나 그런 사고도 있었는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석의 앞에 앉았다. 합석하자고 한 적은 없는데... 남자를 가만 바라보다 지석이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그게 웃긴지 남자는 살짝 어깨를 흔들며 입가를 가렸다.



“김정수?”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알던 사이라는 듯 이름 석 자 불러놓고 지석은 제가 더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헙... 생각만 한다는 게.... 정수는 더는 못 참겠는지 소리 내서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네, 정수예요. 저 아시네요. 웃음기가 가득 묻어있는 목소리. 술이 깸과 동시에 다른 이유로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귀가 뜨거웠다. 이게 지금 진짜라고? 지석은 자기가 며칠 바랐다고 뇌가 만든 환영을 보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아. 막 스토킹, 그런 건 아니에요. 잠깐 파견 나왔다가 숙소가 이쪽으로 잡혀서. 이 근처 편의점 여기 하나잖아요.”

“그쵸... 근데 저 기억 하시네요? 스치듯 지나쳐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억하죠. 체크 셔츠 입었던 것도 기억하는데.”



사실... 또 뵙고 싶기는 했어요. 저 이런 말 진짜 안 하는데, 자기 전에 좀 생각나서. 우리 눈 마주쳤잖아요. 다시 가면 마주치려나 싶어서 찾아봤는데, 그 도서관 공사한다고 해서 찾아갈 수가 없겠다 싶더라고요. 근데 이렇게 만나네. 운명 같다.


자기를 바라보면서 눈웃음을 짓는 남자.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 둘 다 너무 현실감이 없는 것들이어서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지석은 바보처럼 네... 그러네요... 하다가도 입을 앙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진짜 바보같았어... 그러면 정수는 더 크게 웃었다. 정말 꿈같은 밤이었다.




썸 ?/2


정수는 지석의 연락처를 가져갔다. 갈취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다. 번호 줄 거죠? 줬으면 좋겠다. 하는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더니 연락처에는 ‘정수’라고 적힌 번호가 추가되어 있었다. 원체 바운더리가 좁은 편이라 연락처에는 서른 명 남짓한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저 새로운 ‘정수’는 지석에게 본관의 도서관 같았다. 잊힌 듯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연락처에서 마주칠 때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 하게 되는. 현실감이라고는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 정수는 지석에게 자꾸만 이질감을 안겨주었다. 본인이 원하든 아니든을 떠나서. 


이틀 간은 연락처를 껴안고 살았다. 먼저 하자니... 뭐라고 보내야 할지 모르겠고. 안녕하세요. 잘 들어가셨어요? 하자니 이미 이틀이 지나버렸다.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본 이후에 무얼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석의 세계는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아날로그한 인간인 걸 떠나서, 애초에 글보다는 숫자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컴퓨터 공학과에 다니게 된 이유 또한 그랬고. 지석은 자꾸만 3, 또는 7 같은 숫자가 되려는 정수가 어려웠다.


장학금 타 먹자고 호기롭게 생각한 곽지석은 어디에 갔는가.

  멍때리다 마주친 전공 교수님의 인자한 웃음에 머쓱하게 마주 웃음 지었다.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하나도.




썸 1/2


본관 도서관은 여전히 봉쇄. 어쩔 수 없이 별관 도서관으로 향했다. 낡고, 좁지만 사람이 적어 이용하는 사람들만 쓰는 곳. 공부하기엔 적합하지 않으나 그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좋아했다. 핸드폰의 진동에 약간은 방해를 받은 듯 눈을 찌푸렸다. 주연인가.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들었다.


‘정수’


덜그럭. 소음에 사서가 주의를 주듯 지석을 쳐다보았다. 대충 죄송하다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이고 별관을 빠져나왔다. 뭐지. 갑자기 웬 전화를.... 지석이 받지 않자 휴대폰은 까무룩 잠잠해졌다. 아... 받았어야 됐는데. 바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고민이 무색하게 ‘정수’는 지석의 폰을 한 번 더 울렸다. 지석은 침을 꿀꺽 삼키고 비장하게 전화를 받았다.



‘바쁜데 괜히 전화 걸었나. 미안해요, 말도 없이 걸어서.’

“아, 아니에요. 수업 다 끝나서... 근데 왜, 무슨... 뭐 용건이라도 있으셔서....”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걸었어요. 문자 한 통도 없길래.’



나도 안 하긴 했지만. 아, 못했다고 할게요. 보내고 싶었는데, 보내려고 할 때마다 자꾸 일이 생겨서...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있어서 지석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진짜 바쁜 사람은 여기 있는데. 내가 뭐라고. 동시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근데 우리 언제 그렇게 봤다고, 제 목소리가 막 듣고 싶으세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 울고 싶은 기분. 지석은 더 이상 끌려다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0이든 1이든 결론을 짓고 싶었다. 어떻게 되든, 저 만인의 히어로 김정수 씨가 대학생 곽지석에게 왜 이러는지. 무슨 의도인지를.



“그럼... 안 바쁘시면 만날래요? 시간 안 되시면....”

‘좋아요. 시간 돼요. 그때 그 편의점에서 볼까요? 만나서 밥 먹으러 가요.’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이 성사돼도 괜찮은 건가.


두 시간을 앞둔 약속을 두고 지석은 이게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그래도 만나면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시작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후드티에 운동화를 신고 나간 편안한 차림새인 지석과 다르게 어쩐지 정수는 제법 신경 쓴 모양이라 조금 민망해졌다. 셔츠에 가디건, 베이지색 슬랙스. 잘 빠진 몸에 차려입으니 꼭 모델 같았다. 지석은 괜히 애꿎은 신발 코로 툭툭 땅을 찼다. 정작 정수는 별생각 없다는 듯 근처 고가의 레스토랑으로 지석을 이끌었다.


들어가서 밥을 먹는 순간도 지석은 이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떤 음식이 디쉬에 올라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정수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서 지석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런 거 많이 해보셨나 봐요. 하는 질문을 속으로 삼켰다. 많이 해봤으면 뭐, 뭐 어쩔 건데. 무슨 상관이 있는데. 곽지석 0과 곽지석 1이 사투를 벌였다. 그냥 시원하게 질러! 애매하게 구는 건 저쪽이잖아! 아니지 지석아, 그래도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냥 또래 남자애라 반가운 걸 수도 있잖아. 속이 시끄러워 죽을 맛이다, 아주.



“입에 안 맞아요? 여기가 제일 유명하대서 데려온 건데.”

“아니에요. 맛있어요. 근데...”

“근데?”



이걸 말해, 말어. 지석은 눈을 꽉 감고 생각했다. 곽지석 0, 네 편 한 번 들어보자.



“이런 데 많이 와보셨죠...”

“...누구요? 저요?”



정수는 벙찐 듯 가만히 있다가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그리고 지석이 눈을 맞춰주기까지 기다렸다. 눈을 맞추자 따라오는 미소. 지석은 평생 살면서 저렇게 예쁜 미소를 가진 사람을 본 적 없다. 중고등학생 시절 뭣 모르고 사귀었던 친구들에게서도, 나름 첫사랑을 떠올리면 생각나던 유치원 선생님에게서도. 짜증나. 좋아할 거 같아. 그런 생각을 했던가. 정수가 입을 열었다.



“처음 와봤어요. 거의 센터에서만 식사해서. 그냥 지석 씨 맛있는 거 먹여주고 싶었어요, 저는.”

“아...”

“지금 하는 거 전부 다 지석 씨한테 관심 있어서 하는 건데.”



정수의 눈이 마치 헷갈리게 하지 않을게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포크로 잘 구워진 고기를 툭툭 건드렸다. 지석 씨는요? 뭐가... 저한테 관심 있어요? 어... 없었으면 안 나왔겠지? 대신 대답하고 그렇게 웃으면 반칙이죠....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서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마감 시간까지 대화하는 바람에 처음 만났던 편의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석은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확신 있게 얘기해주니까 떨리다가도 편안해진 게. 해가 뜰 때쯤에는 둘은 말을 놓았고, 내일 연락하자는 약속을 했고, 또 보자고 해도 되냔 물음에 웃었다. 이상한 아침이었다.




썸 2/2


이후로 연락의 빈도가 늘었다. 자기 전에는 종종 전화로 목소리를 들었고, 지석이 공강이거나 짬이 날 때 정수가 찾아왔다. 너 나한테 이렇게 시간 써도 돼? 이상해. 너 만날 때는 호출이 없더라.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정수는 그걸 듣고 있으면 불면증 같은 건 없었던 사람처럼 잠에 들었다. 정수의 일정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잘 자, 정수야. 그리고 좋아해... 하고 끊는 것은 지석의 비밀스러운 취미가 되었다.


주연은 가자미눈을 뜨고 물었다. 너 요즘 뭐 하고 다니냐. 얼굴이 너무 좋은데. 애인 생겼어? 그러면 지석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어우 징그러워. 하는 핀잔은 뒤로 한 채.


이상하다. 누구랑 이렇게 빨리 가까워질 수 있나. 지석은 좋으면서도 약간의 불안감이 밴 것처럼 고요해졌다. 너무 좋아할까 봐 무섭다. 정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냥 인간 김정수 자체가. 작은 것에 행복해할 줄 알았고, 자주 웃었다. 평범한 동기 애들처럼. 지석은 종종 생각한다. 내가 저런 상황에 있었더라면 저렇게 잘 웃을 수 있었을까?


센티넬은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저승사자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무력한. 하나의 죽음에 슬퍼하는, 그걸 당연하게 여길 수 없는. 지석은 정수가 제게 보여주지 않은 마음 그 아래 붙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가장 뜨겁고, 축축하고, 끈적한 것.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할 것에 대해. 지석은 가만 눈을 감았다.



‘속보입니다. 성수 인근에 돌연 게이트가 발생해 시민들이 대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해당 게이트가 열린 것이 반정부군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상하게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면 꼭 그게 예감이었다는 듯 현실이 다가오곤 한다. 지석은 불안해졌다. 저 소식 안에 있을 정수가 보여서. 잠잠한 휴대폰 카톡 창을 열었다. ‘정수’ 이름 밑으로 조용한 대화창. 필요할 때만 신을 찾으면 외면당할까? 지석은 고요한 대화창과 소음들 사이 동떨어진 감각을 느꼈다.


싫어...


뭐가? 태연하게 돌아오는 주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묻었다. 당황해하는 주연을 애써 모른 척하며 정수의 인터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센티넬 김정수 씨, 이번 사건의 주요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요즘 들어 늘어나고 있는 게이트 건과 관련해... 상상의 대본을 읊었다. 이러지 않으면 견디기 괴로웠다.




저녁 뉴스에서는 정수의 뒷모습이 비쳤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피범벅을 한 채. 센티넬 김정수 군의 활약으로... 지석은 티비를 켠 채 이불로 몸을 꼭 감쌌다. 다행이다. 다행? 뭐가? 어차피 센티넬은 멀쩡하게 돌아오니까? 어느덧 11월이었다. 밤이 빨랐다. 빠른 밤은 금방 어둠이 찾아온다는 것. 지석의 밤이 길어진다.


느닷없이 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으려나. 정신없겠지. 끊으려던 찰나 전화기 너머 이제는 익숙해진,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지석아?’

“나 있지, 정수야...”



응. 차분한 목소리. 지석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티 나지 않게 꾹꾹 삼켰다.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다 안아주고 싶어. 대단하다, 역시 김정수다 이런 말 말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물어보고 싶어. 해도 될까?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그래 줄래?


응.



담백한 고백이었다. 절절 끓지 않는. 지석은 통화를 끝내고 많이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정수가 지석의 자취방 문을 두드렸고, 어떤 말 한마디 끼어들지 않은 채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말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정수의 세계에 지석이라는 큰 위로가 그를 구하러 왔다.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는 일상을 버리고서.




연애의 시작 1/5


정수는 숙소보다 지석의 자취방으로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다. 거의 반동거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2교시 수업을 들을 때 정신없이 걸친 옷이 정수의 것인 날이 늘어가고, 서로 귀가할 때면 입맞춤으로 맞이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지석은 정수가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걸 함께 지내며 알았다. 강의 시간에 유튜브를 뒤져보다 정수가 출동한 날에는 따뜻한 우유에 꿀을 타서 기다렸다. 그러고도 잠에 들지 못하는 날에는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하나씩 틀었다.


지석은 음악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주연이 이것저것 추천을 해줘도 늘 듣는 음악이나 클래식을 고집했다. 코드 짤 때 안 거슬리는 게 좋아. 주연은 항상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지석을 꺾을 수 없어서 아쉬워했다. 지석은 그런 주연에게 조금은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수가 들려주는 음악을 감상했다. 가끔은 팝이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90년대의 한국 음악이기도 했다. 둘이 처음 들었던 노래는 If I Ain’t Got You였다. 정수가 나지막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마치 지석에게는 송가처럼 들렸다.


정수 너는 가수 해도 됐을 것 같아. 피아노 치면서 무대에 서는 거지.

그러면 지석이가 기타 쳐주고?

음... 원한다면 노력은 해볼게.

노력만 하지 말고 꼭 해주겠다고 약속해.



그런 실없는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대화를 했다.


근데 센티넬 중에서는 왜 중년이 없어? 가이딩으로 노화도 방지되나...

글쎄. 아마도... 폭주 탓도 있고. 현장 뛰니까. 음... 35세 이상인 분을 본 적이 없네.

그러면, 정수가 처음으로 할아버지 센티넬 하면 되겠다.

뭐?

50까지 현역으로 뛰고, 은퇴하면 나랑 내기하는 거지. 노화 온다, 안 온다로.

와... 그래. 나는 안 온다는 쪽에 걸게.

그러면 나만 할아버지 되고 너는 이 얼굴로 계속 사는 거야?

그렇지.

치사해.

괜찮아. 지석이 너는 나이 먹어도 제일 예쁜 할아버지일 테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할아버진데.

나중에 두고 봐. 내가 너 100살 넘어도 제일 예쁘다고 할 거야.

해봐라. 할 수 있으면.

어, 꼭 확인해 줘.



실속 없는 대화들. 둘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굳이 네가 센티넬이 아니었더라면, 같은 서두는 붙이지 않았다. 그저 김정수와 곽지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먼 미래에, 나중에, 나이 들어서, 같은 가정을 앞에 두고. 둘이 논한 수많은 미래 중 한 가지가 오기를 바라면서.




히어로 김정수 2/5


정수는 국내를 넘어 세계에 손꼽히는 센티넬이다. 기본적으로 좋은 체격, 그에 맞는 능력. 냉철한 판단력과 결정은 그를 대한민국의 히어로로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김정수가 왔으니 해결되겠네’라고 이야기하는, 죽음에 가까운 위협을 받고 나서도 미소 지으며 카메라 앞에서 시민들에게 안정감을 선물하는 히어로. 자로 잰 듯한 영웅의 등장에 국가는 미소를 지었다. 센티넬 사업의 모든 얼굴에는 정수가 붙었고, 국가의 비상사태에는 반드시 그의 이름을 포함한 작전서가 올라갔다.



그러나 센티넬 본부가 안고 있는 하나의 비밀.


생명과 대의의 저울질을 해야 하는 사건에서 김정수를 리더로 두지 않을 것.


정수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앞에 국가의 대의를 둘 수가 없었다. 정부에게 있어 정수는 최고의 인재이나 국가의 최선이 될 수 없는 이유. 그가 가진 다정함이 발목을 잡았다. 어릴 적 뺨을 맞아가며 들었던 정신 나간 새끼, 네가 이러는 건 국가 말고 아무도 몰라줘, 하는 가시 돋친 말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던 것. 더 많은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폭주의 위험을 참더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전장에 뛰어드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1순위에 생명을 두었기 때문이다.


처음 사상자를 냈던 날, 정수는 동시에 처음으로 폭주 위협 단계에 도달했다. 대로변에 불기둥이 일었고 같은 센티넬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폭주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센티넬의 치기이기도 했다. 가까스로 동료가 그를 기절시키는 데 성공했기에 해당 사건은 ‘시민을 구하다 능력의 폭주를 맞을 뻔한 센티넬...’ 정도로 포장되어 세간에 나돌았다.


정수는 자주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구하지 못한 이들은 당연, 구한 이들의 원망 섞인 한마디에 정수는 그 어떤 게이트, 반정부를 상대하는 일보다 괴로움을 느꼈다. 조금 더 완벽했더라면... 인간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센티넬은? 센티넬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인간에게는 벌이 주어져야만 하는 것인가?


정수는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한 정답을 태어난 평생에 걸쳐 찾고 싶었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지석이 정수에게 왔다.


반정부군의 낌새가 수상하다는 이야기가 돌던 와중,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출동했다. 대학가 근처에 센티넬들이 잠복해 있었고, 제일 가능성이 높았던 한국 대학교에는 정수가 차출됐다. 학교 같은 걸 다녀본 적 없으니, 지도를 봐도 길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헤매던 와중 가장 큰 건물의 창문 너머로 보였던 말갛던 얼굴. 앞에 붙은 모든 계급장 떼고 가서 말 한마디 걸어보고 싶었던 충동.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첫사랑인가.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 작전에도 대학 근방이라면 반드시 자처했다. 언젠가 또 만날지 모르니까. 살면서 인생의 큰 욕심을 부렸던 적 없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은 신이 돕기를 빌었다. 센티넬 김정수, 히어로 김정수가 아닌 인간 김정수의 의지로. 정답 같은 거 평생 몰라도 되니까 하나만, 한 자락의 욕심을 쥐어보고 싶다고.




연애 중기 3/5


정수가 돌아오지 않는 날이 제법 길어졌다. 이상 게이트의 수가 너무 많았다. 자려고 몸을 뉘면 명령이 떨어졌고, 씻으러 들어가는 순간에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나가야 했다. 지석은 걱정 어린 마음으로 배웅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반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정수를 마지막으로 본 게 5일 전이다. 길거리에 연말 분위기를 즐기는 시민들은 점차 사라졌고, 두려움이 얼굴에 자리 잡았다. 지석은 기다리는 것만 제 몫으로 둘 수 있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매일 같이 티브이 앞에 앉아 족족 들려오는 뉴스와 소식들을 기다렸다. 제게 오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다치지 않았기를, 조금이라도 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정수가 지석에게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금은 살이 내린 얼굴이었고, 전만큼 환하게 웃지 못했다.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심적인 휴식. 정신적인 해방. 정수는 느지막이 돌아온 새벽 지석의 옆에 누워 그를 꼭 끌어안았다. 가끔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사상자의 수가 다섯이 넘어간 날부터. 아는 체를 하면 무너질까 애써 잠든 척을 했던 날들을 지나 지석이 정수를 마주 안았던 날, 이후로 정수는 흐느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지석은 정수를 조금 덜 좋아하고 싶었다. 차마 기대지도 못하는 바보 같고 멍청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뜨거운 불을 껴안는 것 같아서. 그런데 저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화상을 입을 걸 알고서도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질지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살아있는 것 같기라도 했으니까.


지석은 자신이 정수를 사랑하는 건 절댓값과 같다고 생각했다. 정수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버튼이 없는 기계처럼. 전기밥솥에 ‘취사하지 않음’ 버튼이 없는 것과 같이,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


사랑이 불가항력이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에. 지석은 자신의 세계에 당연한 진리 하나를 추가했다.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 속 앞으로 늘어날 +들. 지석은 그 예측 불가함을 사랑하기로 했다. 예측이 불가한 인생을 달고 태어난 남자를 위해서.




히로인 곽지석 4/5


어느덧 12월의 초입이었다.


뉴스에는 정수가 사람을 또 구했다거나 나라를 지켜냈다는 희망차고 보기 좋은 사실만 나왔다. 정수가 87명을 구하고 2명의 사상자를 냈을 때. 그 둘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는, 오롯이 지석만 안고 묻을 비밀이 된다. 히어로의 애인이라는 건 참 달콤한 허상이다. 사람들 시선을 피해 데이트를 한다거나 그 많은 인파 속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구해낸다거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히어로의 애인은 그들의 두려움과 괴로움이 히어로라는 이름 앞에 얼마나 지워지는지를 관찰하는 자리다. 그의 애인은 그의 업적에 마음껏 박수치고 응원할 수 없다. 그만두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쩌면 팬보다 더 무력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히로인은. 지석은 그걸 모르는 채로 택했다. 정수의 애인이 된 걸 후회하지 않는다. 센티넬의 애인이 된 것은 조금... 후회로 남는다. 그러나 센티넬이 아닌 정수는 세상에 없다. 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에게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부채감을 지울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정수를 보지 못한 지 2주가 흘렀다.


지석은... 마음의 공허함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다. 뉴스를 틀면 각기 다른 사건이 나온다. 그야말로 국가 비상사태였다. 그 사건들 가운데에는 모두 정수가 있었다. 어느 날에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가이딩을 받고 있기도 했고, 주삿바늘을 서너 개 달고 헬기를 타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저 그가 해결해 낸 일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결과, 그의 성공 여부만을. 지석은 이런 시민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슈퍼 히어로의 히로인들은 다 이랬을까?


인터넷 유저들에게 정수는 한 인간이기보다 캐릭터에 가까웠다. 절대 안 지는 소년 만화 속 주인공. 그럼 나는 뭘까. 스파이더 맨의 엠제이는 될 수 있나. 지석은 남중 남고 공대 루트를 타고 체크 셔츠를 입는 학생. 여자주인공의 역할도 지석의 것이 아니다. 그럼 나는 뭘까. 살갗에 닿는 이불의 감촉에 몸을 웅크렸다. 정수의 밤도 나처럼 길까? 지석의 새벽은 어둠과 질문의 무대다. 정수의 무대가 카메라 앞인 것과 달리.




연애의 종말 5/5


그날은 겨우 얻은 정수의 휴일이었다. 동시에 크리스마스이기도 했다. 빨간날을 앞두고 반정부군의 테러가 잠잠해졌고, 지역의 사건들이 일단락 맺어지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반정부군도 연말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는 값싼 농담들이 나뒹굴었다. 아무쪼록 쉴 틈 없이 달리다가 맞이한 쉬어가는 코스처럼, 길게 뱉고 들이쉬는 숨 같은 여유였다. 멀리 나가지는 못해도 지석의 자취방 근처 카페에서 포장한 케이크를 먹고, 오랜만에 늘어지는 대화를 하자고 약속했다.


문제는 그 전날 일어났다.

정수에게 휴식을 쥐여주기엔 국가의 불안이 컸다. 정확히는 시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 나라를 대표하는 히어로가 어떻게 쉴 수가 있냐,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지낼 수가 있겠느냐는... 어디서 정수에게 휴일이 쥐어졌다는 소식이 유포된 건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지금 돌아다녀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센티넬 본부에서 정수에게 주어진 휴일을 거두어 가지는 않았다. 다만 제한을 뒀다. 본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 정수는 차마 반발할 수가 없었다. 사회가 가진 두려움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수 또한 마음 한구석에서 이번만큼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전에는 두려움보다는 걱정과 다가올 죄책감을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정수가 지켜야 하는 세상에 지석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평생을 살아오며 되뇌던 하나의 다짐, 생명을 모든 가치 앞에 둔다는 신념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편치 않은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전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니까. 지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으나 동시에 지석을 위험하게 만드는 상황이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정수는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다. 약속을 깨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지고 있는 짐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너만큼은 비난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지석을 위하면서도 지석이 원하는 일을 하나조차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무력해서. 지석은 한참 말이 없다가 알았다는 한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맥없던 알았다는 말이 정수에게 꽂혔다.

휴대폰을 쥔 채 두 시간을 가만히 있었던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석은 별다른 말 없이 더 할 말이 있냐고 물었고, 정수는 염치없다고 생각했지만... 지석이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알았다는 말이 정말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인지, 내가 너에게 후회만 주는 것이 아닌지를 지석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괜찮아? 내가... 그날 못 가는 거.”

‘정수야.’

“응. 듣고 있어.”

‘너는 국가의 남자잖아. 너한테 나를 최고로 두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어, 내가.’



난 그걸 받아들일 수만 있는 입장이잖아... 지석의 말이 흐려진다. 정수는 이런 걸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애인이 자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진 이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지금이 밤이던가, 새벽이던가. 어두운 방 안에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통화 이후 지석은 한참을 울다 해가 떴다는 걸 알았다.


정수가 밉다거나 후회스러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너무 무능해서. 그런 주제에 애인에게 한다는 게 푸념이라서.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후회를 오백 번도 더 넘게 했다. 진심이 아니었다.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서운함을 너무 다정하게 알아주는 한 영웅 때문에, 지석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고, 내가 서운해서. 정수 너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연인인 것 같아서 부린 투정이었다고. 너의 사랑이 내 세계를 지켜주고 싶어서임을 안다고 바로 잡고 싶었다. 눈물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정수에게 이런 휴일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석은 케이크 픽업 시간을 맞추어 발을 옮겼다. 카페 또한 삼주만의 영업 개시였다. 크리스마스만큼은 꼭 달콤함을 나눠주고 싶다는 사장님의 철학이었다. 단 30개의 케이크 중 지석은 단골 전형으로 예약을 뚫는 데 성공했다. 비록 둘이 먹는 케이크는 아닐지라도, 정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영상 통화 걸어서 사과해야지. 그리고 케이크도 보여줄 거야. 네가 없어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내 걱정은 넣어두라고.


패딩을 걸치고 문 앞을 나섰다. 매일같이 걸었던 길이지만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런 고요함은 너무 오랜만의 것이었다. 근래에는 거의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 영상만 볼 수 있었는데. 지석은 사장님께 안부 인사를 전하고 초까지 받아 씩씩하게 걸어왔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지석은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본관 도서관에 있던 날 같은.


너무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케이크가 대로변에 엎어졌고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지금 벌받는 건가. 세계를 구하는 애인에게 투정 부려서. 이런 날 신은 운동화 끈이 느슨했다니, 정말 싸구려 신파 영화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넘어진 지석은 손과 얼굴이 모두 갈렸다. 고통에 생리적인 눈물이 따라왔다.


바보, 어제 그냥 사랑한다고 말할걸.


뒤로 느껴지는 압박감과 기운. 인간은 왜 죽음을 앞두고 후회라는 감정이 먼저 떠오를까. 지석은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이 세계에서 떠나게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었으니까.



“김정수... 정수야....”



희미해지는 의식. 흐릿해지는 시야. 눈물 탓인지 생명이 꺼져가고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지막, 정신을 잃기 직전 몸을 누르고 있던 중압감이 사라졌다는 것. 그것 하나만이 지석이 느낀 감각이었다.




히어로가 히로인에게


지석은 그로부터 사흘 후 눈을 떴다. 병실에서. 옆에는 주연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이 상황이 너무나 평화로워서 지금 천국에 있는 건지, 죽기 전 주마등을 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목이 잠겨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주연을 불렀다. 주연은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소리를 지르고 의사! 의사! 하는 단말마와 함께 병실을 빠져나갔다.


아... 어떤 예감이 스쳤다. 적중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러나 대체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정답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예감. 4인 병실에는 작은 티브이가 놓여있었고 그 뒤로는 아나운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대 대학가에서 일어난 ’골목길 사건‘ 을 일으킨 반정부군의 수령, 이른바 게이트 메이커 최 모 씨가 수감됐다는 속보를 알립니다. 해당 사건으로 센티넬 김정수 군이 사망하였고, 같이 발견된 곽 모 씨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밝혀져....’



지석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겨우 일어난 몸이 정신을 받쳐주지 못했다. 지석은 의사로부터 빠른 구조 덕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은 후 사흘 뒤 퇴원했다.




퇴원 이후로 약간은 폐인처럼 지냈다. 종강한 상태였고 지석이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간간이 주연이 얼굴을 비추고 갔으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정수가 세상에 없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건 자그마치 3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목소리를 들은 것도 이제는... 며칠이 지났으니까. 뉴스에는 정수의 소식이 드문드문 전해졌다. 후처리에 관한 이야기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주일 뒤 휴대폰으로 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흘렀고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정수보다 약간은 나이 있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곽지석 씨 되시냐고, 물었고 맞다고 대답하니 며칠 후 편지 한 통과 함께 건일이라는 남자가 찾아왔다.



“저희는 작전 나가기 전에 꼭 유서 쓰거든요. 전해줄 사람이 있든, 없든을 떠나서. 정수는 늘 센터에만 쓰다가 어느 순간 지석 씨 이름으로 한 부 더 적었어요. 오늘은 그걸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유서. 애인한테 처음 받는 편지가 유서라니. 실소가 나왔다. 제 눈치를 살피는 앞의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차마 거짓말로라도 가식이 나오지 않았다. 이걸 무슨 심정으로 쓰게 하는지, 또 썼을지 가늠이 안 가서. 



“이건 개인적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남자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별다른 말 없이 담백한 사람이었다. 왜 정수의 편지를 전하러 온 지 알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주는 사람.



정수가 그날 센터 뒤엎고 나갔어요. 걔 한 번도 그러는 거 본 적 없는데.

징계 줄 거면 그냥 받겠다고, 자기는 명예 높은 센티넬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서...

그래서 동료들끼리 얘기했죠. 아, 그 분인가 보다.

이 원칙주의자를 보기 좋게 바꿔놓은 게 그분이구나, 하고.

건강하세요. 정수는 그거밖에 안 바랐어요.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센터를 뒤엎고 나갔다니. 그 히어로 김정수가.

지석은 정수를 닮은 새하얗고 빳빳한 편지지를 열었다.




지석에게


너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해


내가 구해야 하는 세상에 구하고 싶은 네가 있구나

그러면 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어

이걸 읽게 되더라도 많이 슬퍼하지 마

내 죽음은 너의 세계를 구하기 위한 것일 거야


사실은 나도 보고 싶었어

할아버지가 된 너의 모습

내가 늙게 될지 아닐지도 같이 보고 싶었어


사랑해

영원히 내가 구하고 싶을 지석아



바보, 이건 유서가 아니라



러브레터잖아...


지석의 혼잣말이 흩어졌다.

세상에 단 한 명만 아는, 한 명만 알고 있을 러브레터를 쥔 채.

지석의 시간이 흐른다.

영원히 멈춘 정수의 시간과는 다른 형태를 띠며.




히로인의 보직 해제 이후


사건 이후 지석의 일상에 큰 변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우느라 식음 전폐를 한다든지, 인생을 반쯤 포기하고 폐인이 된다든지 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신의 인생을 놓아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전히 지석은 대학에 다녔고, 새 학기 수강 신청 때 하루의 공강을 만들기 위해 힘썼으며,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했다.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지석은 주연이 운영하는 밴드 동아리에 들었다. 그곳에서 기타를 배웠다. 가끔은 노래도 불렀다. 앞선 두 개는 제법 품이 났으나 가사를 쓰는 일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정수는 이런 거 잘하던데. 한 문장을 쓰고 정수 생각을 했다. 다음 문장이 이어지지 않아도 정수 생각을 했다. 지석은 이 습관을 언제까지 안고 갈지 생각하다 이내 그만뒀다. 의지로 고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는 걸 안다.



지석이 처음 배워 불렀던 노래는 If I Ain’t Got You.


내가 바랐던 건...


아니다.


정수는 지석의 바람을 들어줬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의 최후에서. 그의 다정이 지석의 눈을 가려주며.



그래도 인간 김정수가 좋았어. 내가 너의 애인이라 알 수 있었던 네 순수함이 좋았어. 외로움과 두려움, 싸워야만 했던 것들까지도. 너의 히로인이 되었던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정수에게 닿을 수 있을지 평생 모르는 말. 이제 지석은 정수의 히로인이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정수는 지석의 세계에 영원한 +일 테니까.





이건 지석의 히어로 관찰일기.


이 모든 내용은,


정수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추신]

히어로와 히로인이 픽션에만 존재한다는 말 취소할게. 그래도 넌 히어로보다 내 남자 친구라는 수식이 더 잘 어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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