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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회신(作別回信)

도트

2025.08.xx

곽지석이 사라졌다.



김정수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한형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전부.


그날은 유독 날씨가 좋았고,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밀린 집안일을 해치웠고, 꽉 찬 쓰레기봉투를 양손 가득 들고 기꺼이 집 밖으로 나섰다. 미루던 일을 끝내 개운한 기분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가 문득, 현실에 찌들어 오랫동안 방치해왔던 우편함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 별것 아니었다. 다만,


“이건 뭐지?”


대수롭지 않게 우편함 속에서 꺼낸 쿠폰을 빙자한 스팸들을 가볍게 훑어내리다, 사이에 껴있던 이질적인 편지봉투 하나를 발견했을 뿐.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지지 않은 채 김정수의 우편함 속에 자리했을 편지 하나. 날짜도 그 어느 것도 밝히지 않은. 그 때문에 스팸으로 분류되어 버려질 수도 혹은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어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아무 정보도 없는 하얀 외관을 앞뒤로 확인해 보던 김정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평소였다면 의심 가득한 눈초리와 함께 쓰레기로 분류되어 버려졌을 편지를 열었고, 그 선택으로 마주하게 된 몇 장의 편지 속 낯익은 누군가의 말투에 평화롭던 김정수의 여름은 단숨에 진창으로 처박혔다.



정수 안녕.

 


아, 정수 생일 지났으니까 형이라고 해야겠다.


물론 형은 네가 언제 그런 거 꼬박꼬박 따졌냐고 말해주며 웃을 테지만 그래도 이건 편지니까 조금 격식을 차려서 해볼게.



.


.


.


 

근데 안 되겠다. 역시 정수라고 하는 게 낫겠어. 안 하던 짓 하려니까 막 몸에 소름도 돋고 오타도 나잖아. 그냥 하던 대로 할게, 이번만 이해해 줘라.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누구를 닮아 하얗고 조그마한 편지봉투 하나.

그 안에 담겨있던 처절할 정도로 애틋한 고백.




그 하나가 김정수를 한형준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발견되고 한 달이 지난 어느 가을의 초입으로.


아직 여름의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월의 어느 날로.




“...잠깐만 형준아.”


“...”


“지금 내가 정신이 없어서 잘못 들은 것 같거든? 다시 말해줄래? 걔가 뭘...했다고?”


“..기억 절제술이요.”


“...”


 


형, 지석이가 기억 절제술을 받았어요.




/


2025.09.xx



지석아 안녕.


 


아. 안녕이 아니려나?


사실 나는 좀 아닌 것 같아. 네가 그렇게 사라진 이후로 나한테 안녕한 날이 딱히 없었거든. 밖에 나다니는 거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애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너 형이 그렇게 꼴 보기 싫었냐?


..근데 있잖아, 단순한 인사말 하나 적었더니 그 언젠가 ‘안녕’과 ‘안녕’이 같은 말인 것 같냐고 엉뚱하게 물어보던 네가 갑자기 떠오르는 거 있지?



정수, 정수는 ‘안녕’이랑 ‘안녕’이 같은 말 같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이... 생각을 좀 해봐. 내가 정수 만났을 때 하는 ‘안녕’이랑 헤어질 때 하는 ‘안녕’은 다른 거잖아.

 

? 둘 다 인사잖아.

 

..형 지금 너무 대충 대답했어. 좀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

 

생각은 네가 많아서 내가 더 안 해도 괜찮아. 우리 둘 섞으면 딱 적절해.

 

아ㅋㅋ 김정수 뭐래 진짜-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대충 넘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만남의 안녕과 이별의 안녕은 다른 게 맞잖아. 내가 이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어. 그래서 그런 거야?


네 인사가 이별을 말하는 줄도 모르고 섣부르게 대답해서, 

그래서 그걸 네가 헤어짐으로 안고 떠난 거야? 


그런 게 어딨냐 지석아... 우리가 함께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아니다.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응?


 


·  ·  ·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질병은 약물이나 수술과 같은 명확한 치료행위를 동반하지만, 기억과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고통은 오랫동안 치료의 영역 밖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기억이 뇌에 저장된다는 사실과 별개로, 문제의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억은 단일한 정보가 아니라 사건과 감정, 그리고 연상 작용이 얽힌 복합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기억을 제거하는 행위는 그와 연결된 정서 전반을 훼손할 위험을 동반했고,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에 대한 치료는 오랫동안 약물과 상담에 의존해 왔다.



변화는 특정 기억을 유지한 채로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환자들이 급증하면서 시작되었다. 반복되는 회상과 현실을 침식하는 감정의 잔재는 기존 치료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기억 자체보다 그것에 결박된 감정과 연상 구조가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치료법이 기억 절제술이었다. 


기억 절제술은 사건을 단순히 삭제하는 수술이 아니라, 특정 기억과 결합된 감정 반응과 연상 연결을 선택적으로 절제함으로써 환자의 현실 기능 회복을 목표로 하는 고위험 수술이었다. 기억 절제술은 국가의 엄격한 기준 아래 제한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장기간의 전문 상담과 평가를 거친 경우에만 허가되었다. 그럼에도 일부 환자에게 이 수술은, 살아가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연결을 끊어내는 마지막 선택지로···



“...”


칼럼을 읽으며 스크롤을 내리던 김정수는 물밀듯 닥쳐오는 감정에 참던 숨을 내쉬곤 버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 한글로 쓰여있는데 뭐 하나 제대로 알아먹질 못하겠네. 곽지석이 그런 상태였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 아이의 기억 속 우리가 모두 도려졌다는 것도.





다시 8월의 그 날. 



어떻게 도어락을 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편지를 모두 읽고 난 뒤 김정수는 한동안 멍하니 굳은 채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좋았던 날씨는 거짓말처럼 흐려져 어느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김정수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준비도 없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곽지석의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 잡고 있던 편지 귀퉁이가 살짝 구겨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황급히 힘을 풀었다. 이렇게 막 다루고 싶지 않았다. 김정수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종이 한 장이 아니라 곽지석의 마음 한 조각인 것만 같아서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 마음이 이미 넝마가 된 채로 본인 앞에 펼쳐졌을지라도. 



예고 없이 맞닥뜨린 고백은 그동안 김정수가 우정이라는 영역 안에서 회피해온 순간들에 복수라도 하듯 온 감각을 뒤흔들어놨다. 편지 속 지석의 말마따나 사실 알고 있었다. 


눈. 지석의 눈을 보고 있으면 김정수는 때론 본인이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졌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던데 얘는 눈도 크고 예쁘고 반짝거려서 투명하게 온 마음이 다 비춰 보이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서 더 깊이 생각하거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정도가 좋다고 생각했다. 


안정적인 직업, 오래 사귄 연인, 약속 없는 주말에 여지없이 행해지는 루틴 등 김정수는 안정적인 것들을 선호했다. 예측할 수 없거나 틀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지양했다. 세워둔 플랜이 어긋나는 건 좀처럼 참을 수 없었다. 계획에 없던 일탈 같은 건 밴드로 학창 시절을 불태우던 어린 날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웬만하면 튀지 않고 때로는 조금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것들, 나이가 들어가며 김정수는 그런 것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런 김정수에게도 곽지석의 존재 자체는 예외였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좋아한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 아이를 뻔히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선 안에 들여놓고, 세워둔 자리에서 더 가까이 오면 밀어냈지만 그렇다고 선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붙잡았다.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건지 본인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덥석 지석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면 곧, 그 맑은 눈으로 김정수를 잠시 응시하던 지석은 순순히 자신이 내미는 손을 잡고 다시 그에게 걸어 들어왔고 그러면 또 김정수는 깊이 생각하는 걸 멈췄다. 지석이 그 애매한 관계를 용인했으니까. 처음엔 눈치가 보였고 혼자서 고뇌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고민과 망설임의 순간들이 점점 더 짧아졌다. 그러다 이내, 모든 게 당연해졌다. 


김정수에겐 자신의 곁에 있는 곽지석 그 자체가 면죄부였다.





난 너에게 뭐였을까. 편지를 읽은 지금, 김정수의 머릿속을 채운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장난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우편함에 있었던 걸까. 이걸 지석이 쓴 게 맞는지 부정하기엔 지석의 글씨체를 본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김정수에게 발견되길 바란 것이 맞을까.




영영 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 지석이 한 번쯤은 자신에게 고백할 거라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아이는 본인에 대한 마음을 하나도 숨기지 못하고 눈으로 외쳐대면서 한 번도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지석의 묵인이 어쩌면 지석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 여겼다. 이 또한 착각이었지만.



끝내 들키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던 것도 모두 나를 위한 거였을까. 이기적인 김정수를 너무 잘 알아서. 의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어느 것 하나 도무지 해답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큰 소득 없이 시간만 흐른 뒤에야 김정수는 결론 같지도 않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지석을 만나보자.

아니, 만나야만 한다.




만나야 한다. 편지를 들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그보단 지석을 눈앞에 두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제대로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손은 이미 휴대폰을 집어 들었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뒤, 김정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낯선 음성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는 삐- 소리를 듣고도 한참을 굳어있었다. 자신이 전화를 끊기도 전에 통화가 종료되자 마치 끊어진 선을 붙잡기라도 하듯 급하게 전화를 붙들었지만, 아무리 다시 발신 버튼을 눌러도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황급히 메신저 창을 열었다. 몇 번의 터치 끝에 열린 화면을 응시하던 김정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바빴던 지난 몇 달 사이, 지석에게서 온 연락이 단 한 통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그 부재를 자신이 얼마나 무심히 지나쳐왔는지를.




지석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아직 바람이 차갑던 3월, 프로포즈 이야기로 함께 밥을 먹었던 날이었다. 그 이후로는 간간이 연락만 주고받았고 그러다 5월의 어느 날, 김정수는 애인에게 청혼했다. 결혼 날짜를 잡고 이런저런 준비에 들어가면서 더 바빠졌으며 그와 비례하게 둘의 대화텀도 길어졌다. 그러다 정확히 6월 26일,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문자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그마저도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채 대화는 흐지부지 끝나 있었다. 


자그마치 약 두 달 동안 김정수는 곽지석의 부재를 깨닫지 못했다. 변명을 좀 해보자면 당장 곽지석을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을뿐더러 정말 너무 바빴다. 그나마 양쪽의 일정을 생각해서 결혼식을 여유롭게 내년 가을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정신없이 바빴을 것이다. 어쩌면 편지도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나는, 



내가 곽지석이 없어진 걸 모르고 있었을 수가 있지?




하지만 더 상념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차를 몰고 빗길을 달려 급히 지석이 살던 집으로 향했지만 당연하게 집주인은 바뀌어있었고 지석의 행방에 대해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곽지석 없이 홀로 현관을 나서려던 김정수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제야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하필이면 일요일이었다. 내일 당장 출근을 앞둔 때에 더 무리하게 움직이기 너무 애매한 시간과 날씨에 급한 대로 지석을 함께 알고 지내던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혹시 지금 지석이랑 연락되는 사람 있어?’



그러나 지석은 정말로 증발한 사람처럼 누구와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낭패였다. 이 일이 단순한 잠수나 거리두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머리가 차게 식어 갔다.



그날 이후, 김정수는 조금씩 뒤엉키기 시작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아졌고, 어떤 날엔 사소한 대화를 하다가 엉뚱하게 입 밖으로 지석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결혼 준비는 더디게 흘러갔고 주변에서는 김정수가 겪는 이유 모를 피로와 예민함을 걱정했다. 자그마치 한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김정수의 일상은 점점 무너져 갔다. 


일도, 사랑도, 인간관계도. 모두 점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일상과의 균열이 크게 벌어지던 어느 날, 급히 잡힌 회식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학창 시절 이야기에 문득 지석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대화에 거론되었던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 활동과 몇몇 얼굴을 기억해 냈다. 


고교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모인 멤버치고는 끈끈했던 사이 탓에 오랫동안 만남을 지속했었지만, 근 몇 년간 각자 일로 너무 바빠 따로 보지 못했고, 간신히 이어지던 연말모임 역시 해외 파견으로 미국에 나가게 된 건일을 시작으로 통 만나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지금 한국에 없을 구건일을 제외한 이주연, 오승민, 한형준.



그 중, 취미로 기타를 붙잡고 살던 곽지석의 입에서 꽤 자주 언급됐던 형준이 생각났고 왜 그동안 생각을 못 했는지의 자책 따윈 뒤로한 채 양해를 구하고 급히 자리를 피한 정수는 큰 고민 없이 오래전에 멈춰있던 형준과의 카톡방을 찾아내 메시지를 보냈다.


 


형준아 오랜만이다.


갑작스러운 거 아는데 너 혹시 지석이랑 연락되니?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번호도 없는 번호라 나오고 집도 비웠어. 주변에 알만한 지인들도 모두 연락이 안 된다고 하는데 이게 벌써 한 달이라 너무 걱정된다. 어디 물어볼 사람이 없는데 일전에 지석이한테 너랑 따로 많이 만났다고 들었던 게 생각나서 메시지 보내봐.


늦은 시간에 하는 연락이 이래서 미안하다. 


일어나서 확인하면 연락 부탁해.





메시지를 보내고 안에서 본인을 찾는 목소리에 잠시 돌아간 회식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다음 날이 주말임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김정수는 알코올에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고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하며 남은 피로와 술기운을 조금 털어낸 뒤 연락을 기다리며 버텨보았지만 쏟아지는 졸음과 장시간 회식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형준의 연락을 확인한 건 토요일 오후였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화면 속에 한형준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저도 지금 지석이가 어딨는지는 모르는데 


제가 형한테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으시면 만나서 들으실래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내용을 뒤로하고 오늘도 가능하다는 짧은 답을 보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형준에게서 시간과 장소가 적힌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한 뒤,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애써 접어두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지석의 행방을 모른다는 건 거짓말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한형준을 최대한 설득하자. 형준이 지금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일단은 지석을 만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다시 지금.


그렇게 마음을 먹고 도착한 카페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김정수는 한형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다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정수가 한형준의 이야기에 충격으로 굳어버린 사이, 한형준은 그런 김정수를 한번 버석하게 훑어보다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저는 솔직히 형이 이제야 저한테 연락한 것도 좀 웃기긴 해요.”

“...”


“문자로 이미 말하긴 했지만, 지금 지석이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걔랑 마지막 대화가 이제 곧 수술 들어간다는 거였거든요. 사실 저는 끝까지 반대했었어요. 형이 이 수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진 모르겠어요. 그 수술, 현재로서는 많이 상용화가 되었고 희박한 경우를 제외하곤 몸에 큰 무리가 없다고 알려졌지만, 인위적으로 뇌를 건드려서 기억 일부분을 절제한다는 건 리스크가 큰 일이잖아요. 그래서 더 반대했었는데..”


“...말렸어야지, 어떻게든 못 하게 막았어야지. 하다못해 나라도...!”



갈 곳을 잃은 분노가 끝내 터져 나왔다. 답지 않게 격앙된 김정수를 마주한 형준의 얼굴에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경멸이 스쳤다. 처음이었다. 



“...곽지석이 자기 수술할 거라고 말할 때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형준,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그럼 더 안되지. 수술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때? 다른 기억이 삭제될 수도 있고... 실제로 그거 말고 다른 부작용 사례들도 간간이 나오잖아.’


‘...’



부작용을 언급하며 수술을 만류하는 대화에 말없이 시선을 피하는 지석을 보던 형준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자세하겐 말 못 하지만 사실 승민이가 그거랑 관련 있는 일을 해. 그래서 알기 싫어도 알게 된 내용이 있어. 수술하다 뇌사상태에 빠진 환자나 모든 기억을 잃고 백치가 된 케이스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거.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들이 아니라 내가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지석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작 사람 한 명 기억에서 지우려고 죽음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해야지 어떡해. 그리고 고작 아니야.’


‘야 곽지석.’


‘형준아.’

 

‘...’


‘한형준아-’


‘...왜’


‘나 말야, 정수를 사랑하다 보면 순간순간, 내가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어.’


 

정수는 햇살 같아. 


나는 그 따뜻함 속에 살 수 없는 눈. 그냥 녹아내리는 눈덩이 같았어. 아무리 몸을 웅크리고 단단하게 마음을 뭉쳐놔도 미약한 햇빛에도 결국 녹아 사라지는 눈. 웃기지? 


내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써봐도 정수 시선에, 손짓에, 찡긋거리며 웃는 얼굴 하나에 형체도 없이 다 녹아내렸어. 그게 내가 되거나 내 신념이 될 때도 있었고, 어떨 땐 자존심이거나 욕심까지.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다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었어. 



‘나 이제 더는 그럴 자신이 없다. 하도 녹아 없어졌다가 뭉쳐졌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나도 내가 뭐였는지 모르겠어.’


‘...’


‘근데 정수 결혼하면... 내가 이 기억을 가지고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김정수 없이..?’


‘..야’


‘형준아, 나 너무 무섭다...’

 

‘...’




무서워...



그 순간, 김정수의 세상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편지의 문장들, 연락이 끊긴 시점, 번호가 없는 번호로 바뀐 이유까지. 모든 퍼즐이 너무 잔인하게 맞아떨어졌다. 


곽지석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스스로 지워진 것이었다. 지워지고 지워낸 것이었다. 그리고 김정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편지가 정말 지석의 마지막 인사였다는 것을, 모든 사실을 자신이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것을, 곽지석이 김정수에게 남기고 간 하나가 아무것도 몰랐던 그를 향한 마지막 배려임을. 


형준에게 건네려던 편지가 수신인을 잃은 채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리고 이내 곽지석에게 끝도 없이 잔인했을 둘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와, 정수 노래 실력 아직 안 죽었더라? 열여덟 김정수 보는 줄..

이 상태면 프로포즈 완전 성공한다. 내가 보장함.




내 성공을 빌어주던 네 얼굴이 어땠더라.


 


아이 뭘 또 그렇게까지 띄워주냐. 

그리고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무슨 열여덟? 


...그냥 그때 정수 멋있었잖아. 우리 밴드 메인보컬. 

무대에서 얼마나 든든했었는데.


뭐야, 갑자기 추억이 떠올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감성적인 곽지석을 다보고ㅋㅋㅋ

무튼 오늘 정말 고마웠어. 데려다줄까?


내가 무슨 애냐? 정수가 데려다주게... 됐어.


 

 

아득한 지난날을 떠올리던 네 표정이 어땠더라.



 

참나, 이제 다 컸다 이거냐? 

알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 조심히 가고.


...형 


응?


...


지석아?


형, 사실 나 할 말이..

 

Rrrrr-


지석아 형 전화 온다, 잠시만-

 

어 xx아, 나? 잠깐 지석이 만나고 있었어. 

너는 어디ㅇ... 아 맞다. 그렇다고 했지.

왜? 말해봐, 뭔데... 아ㅋㅋㅋ 웬일이래? 

알았어, 내가 거기로 갈게. 

추우니까 밖에 나와 있지 말고, 카페라도 들어가 있고.

알았어, 금방 갈게. 응, 이따 봐.



 

너를 앞에 두고 한참 떠들던 나를 보던 네 얼굴이,



미안, 하려던 말이 뭐였어?


...

 

지석아?

 

..아무것도 아니야. xx누나?


아, 응. 네가 나랑 더 안 놀아주니까 별 수 있냐.


..정수


응?

 

... 


왜 그래,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지금이라도..


형, 행복해?


갑자기? 뭔데, 이거 뭐 테스트야?

 

아 빨리이... 대답해 봐. 행복해?

 

...응, 행복해. 나 행복해 지석아.

 

...그래, 그럼 됐어.


 


행복하다고 대답하던 내 얼굴을 보던 네 모습이,


 


뭐야, 싱겁긴...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없어, 없어. 붙잡아서 미안. 

얼른 가, 누나 기다리겠다.


아, 곽지석 이상한데 지금... 

뭔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내가 그냥 넘어간다. 

조심히 가고, 나중에 보자. 


...응 안녕. 


잘 있어 정수.


 


네 마지막 인사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 내가, 

우리가 어땠더라.


그때 네가 하려던 말을 들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이젠 의미 없어진 자책을 이어가던 김정수의 위로 날카롭게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말 하는 거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는데.. 형 결혼한다면서요. 솔직히 저 그동안 형이랑 곽지석 사이 이상한 거 알았지만 둘이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참견 안 했어요. 그냥 좀 많이 돌아가는구나, 했다고요. 근데 프로포즈를 곽지석한테 봐달라고 해요?”


“...”


“형은 진짜 지석이가 형 좋아하는 거 몰랐어요?”


“...”


“그리고 형은 단 한 번도 걔에 대한 마음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얼어붙은 정수를 올곧게 마주하던 형준은 잠깐의 정적 끝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없이 떨어지는 김정수의 머리 위로 형준의 말이 이어졌다.



“몰랐든 모르는 척했든 이젠 아무 소용 없지만요, 그냥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미련한 자식 대신해서라도.

 



·  ·  ·




김정수의 계절이 여름에서 도무지 흐르지 않았다.



한형준을 만나고 김정수는 잠 못 드는 밤들이 더 늘어났다. 일상의 붕괴는 곧 모든 곳에서 나타났고 김정수는 아무것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본인이 낯설었지만, 동시에 무엇도 원 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었다. 나사 하나 빠진 로봇처럼 모든 게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안정적인 삶이 무엇인지도, 심지어 본인에게 그런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버티던 김정수는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직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사직서는 곧 휴직계로 바뀌어 처리되었다. 그를 붙잡아 퇴사를 막은 사람은 새 프로젝트를 함께 맡았던 팀장이었다. 이미 지석의 부재가 만든 일상의 균열 속에서 마음을 놓아버린 김정수는, 그 제안이 진심 어린 배려인지조차 헤아릴 여력이 없어 무심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합법적으로 집안에 처박히게 된 김정수는 점점 더 고립됐다. 그나마 지석의 행방을 알게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에 한형준에게 연락하곤 했지만, 형준 또한 정말로 지석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불면증은 더욱 심해졌다. 가혹하게도 현실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지석은 김정수가 간신히 잠에 드는 날이면 어김없이 꿈에 나왔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흐릿한 형체의 곽지석은 김정수가 곽지석을 붙잡고 소리치고 때론 울면서 빌기도 하는 모든 순간 동안 예의 그 말간 눈으로 정수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김정수는 어김없이 곽지석이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여주지, 목소리라도 들려주지,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면 형준의 이야기가 김정수를 괴롭혔다. 준비 없이 읽었던 곽지석의 편지를 다시 열어볼 용기도 나지 않아 그저 현실을 회피하는 시간만 길어졌다. 


대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하얀 봉투를 응시하던 김정수는 일전에 문자도, 전화도 무엇도 닿지 않을 때 형준을 통해 지석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곤 혹시 전해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적어두었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리곤 불현듯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언젠가 우연히 지석을 만나게 된다면 그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내보인 것처럼 본인도 최대한 다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지금 널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편지인지 일기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변질되어 갔지만, 지석아, 세글자로 시작되는 글을 쓰는 순간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곽지석을 향한 편지를 쓰는 일이, 모든 일상이 무너진 김정수의 세상에 유일한 루틴이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불면증에 시달리며 늦게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김정수와 제대로 연락이 닿지 않자 그의 애인이 집으로 찾아왔다. 평소와 달리 엉망이 되어있는 집과 잔뜩 상한 얼굴로 변해버린 자신의 애인을 마주한 여자는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눌러 담으며 입을 열었다.


 


“...김정수,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걔가 애도 아니고 성인인데 그게 지석이 선택이었으면 존중해줄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럼 나는? 나는 뭔데? 결혼하자며, 같이 살자며. 근데 지금 내가 이러는 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화를 내는 애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김정수는 미안함보다 저 얼굴이 지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순간 스스로가 끝도 없이 역겨워졌다. 


본인 때문에 수술을 선택한 지석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결혼을 약속한 애인에게 느끼는 부채감 같은 것들이 본인을 힘들게 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냥 곽지석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일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행동해야 했다. 그게 모두를 위한 선택일 거라 믿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겁한 변명으로 보일지라도, 




“,,,xx야,”

 

“...”

 

“...”


“...”


“미안해.”


“야 너 지금-”


“정말 미안해. 내가 미친놈이야. 맞아 나 지금 제정신 아니야. 이런 모습 보이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하는 것도 다 너한테도 못 할 짓인 거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제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하지마. 너 한마디만 더 꺼내면...”

 


이 감정을 붙잡은 채 더 많은 시간을 끌기보다는 지금의 관계를 끝내야만 했다. 



“우리 헤어지자.”


“...”



긴 정적 속에서 김정수는 그녀에게서 쏟아질 원망과 분노를 맞닥뜨릴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김정수는 힘없이 그녀를 마주 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슬픔과 원망이 어렸다가 이내 체념이 비쳤다. 한때 영원을 약속하던 사람의 고통 어린 얼굴을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내렸다. 그 머리 위로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슬픔이 묻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한숨처럼 떨어졌다. 그녀는 곧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김정수를 떠났다.

 



/


2025.10.18


지석아 나 결혼 안 했어. 아니 못했어.


내가 준 적도 없는 걸 감당도 못 할 만큼 크게 키워놓고 그걸 우리 집 우편함에 몰래 두고 간 바람에. 근데 그게 너무 커서, 네가 나한테 두고 간 게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이걸 안고 다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겠다 내뱉을 수 없었어.


웃기지? 네가 사라진 지 고작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내 인생에 너 하나 없다고 결혼도 행복도 누군가와 그리던 미래도 무의미해졌어. 


나한테 너는 뭐였을까.

그리고 나는 너한테 뭐였을까.

 

지석아, 나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도대체 뭐였길래 너는 그 힘든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 거였어? 나 정말... 내가 도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


2025.10.19


지석아

내가 너무 늦었어?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곽지석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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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5


지석아, 나 네 목소리가 잘 기억나지 않아.



너 알지? 형 절대음감이잖아.


소리에 진짜 예민한 사람인데 네가 정수- 하던 목소리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 나.

이럴 줄 알았으면 영상이라도 많이 찍어둘걸. 

나 이러다가 네 얼굴도, 네 이름도 잊으면 어떡하지?



근데 생각해 보면 넌 이미 나를 다 잊은 거잖아. 와, 이건 좀 아프다...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김정수.




·  ·  ·




절제된 기억은 환자의 동의에 따라 폐기되거나, ‘기억보관소’에 저장될 수 있다. 보관된 기억은 원칙적으로 외부 열람이 금지되었으나, 법적으로 인정된 ‘기억의 당사자’에 한해 제한적인 접근이 허용된다. 다만 당사자성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경우, 심의 절차를 거쳐 예외적으로 열람이 승인되기도 한다. 그리고 제도의 그늘에는 언제나 불법적인 접근 경로가 존재하기 마련···




기억보관소에 곽지석의 기억이 남아있다. 


수술 후 기억을 폐기하지 않기로 선택했었다. 떼어내기로 마음먹었던 기억을 보관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결정인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지, 그 누구도—어쩌면 지석조차—알 수 없겠지만 지금의 김정수에게는 지석의 실마리라도 잡고 싶은 마음을 구원받는 듯한 소식이었다. 김정수는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곽지석이 부재한 지금의 김정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


2025.11.01

 

지석아, 오늘 네가 남겨놓은 기억 속에서 너를 오랜만에 봤어. 다른 사람의 기억을 동의 없이 열람하는 건 불법이긴 한데, 우리가 남이냐?


...미안. 내가 더 못 버티겠어서 승민이한테 힘 좀 써달라고 했다. 나는 걔가 그런 쪽에서 일하는지 진짜 몰랐다? 원래 걔가 우리 같이 밴드 연습할 때도 편법 같은 건 절대 몰랐었잖아. 세월이 무서운 건가, 내가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몰랐던 건가. 무튼, 그래도 덕분에 네 얼굴 볼 생각하니까 좋더라. 와 내 눈앞에 있는 곽지석 얼마 만이야...



너무 오랜만이라 진짜 반가웠는데,

근데 네가 너무 아픈 얼굴로 엉엉 울고 있었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 예쁜 눈이 다 퉁퉁 부어서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다 넘어진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서 너무 아프게 울고 있었어. 


눈물을 닦아주고 젖은 채 덜덜 떠는 너를 꽉 안아 다독여주고 싶었는데 닿질 않았어.



아파하는 너를 쳐다볼 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지고 비참해서 죽고 싶었는데, 

그러면서 너무 확실하게 알아버렸어. 



너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내 뒤에서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아파했었구나.



지석아, 너 어떻게 나를 사랑했어?



이거 정말 사랑이 맞아? 왜 이렇게 아프게 사랑했어. 그렇게 아프다가도 어떻게 꼭꼭 숨겨두곤 또 환하게 웃어줬어, 나한테. 내가 밉지 않았어?


 

나 네가 도려낸 그 기억이 너무 아파서 깨어나고도 한참 울었어.


네가 옆에서 봤으면 정수 울어? 우냐? 하면서 또 몇 년은 놀려댔을 텐데, 그럴 네가 없어서 걱정 없이 계속 울었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지석아. 


나 반성 많이 했는데, 진짜 많이 했는데. 너 정말 많이 보고 싶은데 네가 나 한 번만 더 봐주면 안 돼? 알잖아 형 겁쟁인 거. 네가 한평생 나한테 져주는 바람에 바보처럼 착각하고 있었잖아. 응? 



대신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져주면 내가 너 평생 이기면서 살게 할 수 있는데. 




정말, 다 줄 수 있는데




/


2025.11.15


지석아 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헤어지던 순간의 꿈을 꿨어.


너,

나한테 잘 있으라고 하더라.


 

분명 ‘잘 있어’였어.


 


/


2025.11.29


지석아, 벌써 겨울이야. 이맘때쯤이면 감기에 잘 걸리던 넌데. 

혼자서 괜찮으려나, 걱정된다.


맞다. 

오늘 우연히 네가 좋아하던 노래를 듣게 됐어. 근데 그 노래에서 그러더라.

 


남겨지는 게 쉬우니까



무슨 말인지 조금 생각해 봤어. 내가 생각해 보라고 할 땐 안 했으면서- 같은 소리 할 것 같기도 한데 너무 뭐라 하지 말아주라. 네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필연적인 이별 앞에서 헤어짐의 상처와 남겨둔 사람의 원망까지 다 안고 떠나는 건 더 괴롭고 힘드니까, 그래서 남겨지는 게 쉬운 거라고 했을까? 본인이 먼저 놓는 게 배려라고 생각한 걸까?



 

근데 지석아, 그거 다 개소리야.


 

남겨진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빈자리와 함께 한 채로 버려진 거잖아. 그 빈자리를 두고두고 마주하면서 누군가 분명 여기 있었다는 걸 너무 잘 아는데, 다 기억하는데, 결국 혼자인 거잖아.



아,

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네가 그 말도 안 되는 수술을 선택한 이유.


 

나를 남겨두고 떠난 이유.

우리를 지우기로 한 이유.

그런데도 한 번 더, 나를 붙잡았던 이유.


김정수가 곽지석에게 대체 뭐였는지도 나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리고 네가 편지에서 나한테 물어본 것들 말야, 답을 찾았어.




근데 이젠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


2025.12.21


지석아,


이 편지들은 모두 부치지 않을 거야. 

네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부탁이 그거였잖아.



정수, 

역시 우리 되도록 평생 보지 말자.

 


그래서 나는 너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놓고 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서 그 말 들어주려고. 널 더 이상 찾지 않으려고.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나 말 잘 듣지.




/


2025.12.24



이 편지를 쓰기 전에 네가 남기고 간 편지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어.


그걸 다시 읽는데, 

나 처음으로 네가 수술을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너 나한테 다 줬다고 했잖아. 

나한테 다 줘서 남은 게 하나도 없다고 했잖아.


네가 그 기억을 다 버려서 다행이다. 나한테 다 줬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이제 네가 다시 다 가지고 있을 테니까. 대신 지석아, 네가 나한테 준 건 다 내 거니까 이것만큼은 내가 가질게.


네가 버리고 간 거든 남겨둔 거든 이것만큼은 내가 간직할게. 나는 그 어느 날, 영원한 게 있다고 말해준 너를 믿으려고. 그냥 그 기억에 묻혀 살려고. 돌려달라고 찾아와서 괴롭혀도 나 절대 안 줄 거다. 너라도 이건 양보 못 하겠다.




너 돌아왔으면 하고 말한 거 너무 티 났으려나. 


그럼 뭐하냐. 어차피 이제 평생 곽지석 못 볼 텐데 




아, 나 왜 이렇게 병신같지.




/


2025.12.25


지석아,

우리가 처음 만난 계절을 기억하냐고 물었지? 


응. 다 기억났어.


근데 이것도 말하지 않을게. 네가 어떤 마음으로 우리 추억들을 묻었던 건지 이제 너무 잘 알 것 같으니까. 네 말대로 내가 바보라서, 그래서 네가 얼마나 힘들고 아팠는지 알지 못해서 너 혼자 다 떠안고 아파했던 시간을 이젠 내가 대신 다 끌어안고 살아볼게.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너를 혼자 둬서 미안해.


긴 시간 동안 너를 비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가 너를 만난 계절을 너무 늦게 떠올려버린 바보라서,

결국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서 미안해.



근데 지석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편지도 너에게 보내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선물 대신 나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욕심내면 안 될까?


 



사랑해 지석아.





사랑해.





네가 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손으로 우리 첫 합주에서 한 곡을 힘겹게 완주하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에 밟혀서.


기타 실수해서 연습이 늘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속상해하는 얼굴이 너무 잘 보여서.


삐약거리는 네가 하루라도 동방에서 안 보이면 그날따라 괜히 더 연주가 잘 안돼서.


내가 잘했다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귀까지 빨갛게 물들여 놓고 바보처럼 굴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어넘기던 네가 너무 귀여워서.





사실 나도,

처음 본 순간 너에게 반해서.


그래서 웃었나 봐, 널 보고.


 

 네 웃는 모습이 좋다면서 혼자 그렇게 아프게 울고 있었던 걸 병신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미안.


이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친 멍청이라서.


네가 날 사랑하는 걸 모르는 척하던 겁쟁이라서.


감히 네가 평생 내 곁에 있어 줄 거라고 자만해서.




내가 우리의 모든 계절을 망쳐놔서.




그래 놓고 나는 네가 다신 오지 않을 계절에서 미련하게 너를 기다릴 것 같아서, 

그래서 미안.





쓸데없이 말이 길었다, 그치.

 


사실은 나 아직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그래서 답을 다 알아버린 이별을 한 번 더 꺼내긴 싫은데 

그래도 너를 위해, 너무 늦었겠지만 네가 남겨둔 마지막 인사에 답을 해볼게.





지석아,





잘 가.





잘 가, 지석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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