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별통신규약
익명 A
*해당 글은 민감한 소재(자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있잖아, 정수.
너는 왜 그런 거야?
검은 정장. 혹은 단정한 차림을 한 이들이 드나들었다. 인생을 허투루 살진 않았나 봐. 눈 앞에 펼쳐진 음식을 두고도 저 너머에 그저 맘 편히 웃고 있는 사진과 눈싸움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석아. 왜 안 먹고 있어.
당신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으면서도 앞에 둔 음식을 입에 넣지 않는 아들 친구가 더 걱정된 모양인지 피골이 상접한 채로 지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니도 좀 드셔야죠.
아직, 생각이 안 드네.
자식 앞세운 속을 지석이 무슨 수로 헤아릴까. 그는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제 속도 역하면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뜨거운 육개장에 쌀밥을 적셔 욱여넣었다.
정수한테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 말이 돌처럼 식도를 쳐 막는 기분이었다. 나 같은 친구가 뭘까. 다행이라는 걸 보니 그녀에게 지석은 제법 좋은 사람인 것도 같았다.
여기서 드는 의문.
과연 정수에게 지석은 좋은 사람이었을까?
지석은 원망 섞인 눈으로 영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정수.
너는 왜 죽은 거야?
장례식장엔 유독 담배를 피워대는 이들이 많다. 저 속에서도 향이 피어나니, 매캐한 건 매한가지라 그럴까. 장초 하나를 꼬나물었다가 불도 붙이지 못한 채로 멍하니 하늘인지 허공인지 구분도 안 되는 공간에 시선을 던졌다.
사실 실감이 안 났다. 지금도 네가 입에 물린 장초를 거칠게 낚아채어 제발 몸 망치는 짓 좀 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할 것 같았으니까.
조문객은 적지 않았다. 그래, 정수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 관계의 깊이는 알 수 없어도, 분명 그의 비보에 슬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는 신을 믿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언젠가 정수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도 결국 이기적인 존재인지라 선한 존재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고. 정수, 너도 그런 사람이라서일까. 네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 신이 널 탐하고야 말았던 걸까.
푸념이다. 상실에서 오는 회피이자 방어기제. 마치 널 잃은 적 없는 사람처 럼.
상실의 아픔 대신 뱉어지는 담배 연기가 나풀나풀 날으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정수라는 존재가 없어도 지석은 잘만 살았다. 어릴 때처럼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었고, 서로의 영역을 착실히 쌓아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막막할까.
왜 자꾸만 네가 없다는 사실에 잘만 살아오던 일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가 밀려오는 걸까.
다 태우지도 못한 담배를 끄고 돌아왔다. 그녀는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아들 친구를 가엽다는 듯이 안아주었다. 그녀를 마주 안고 생각했다. 네가 안아줬다면 더 따뜻하고 든든했겠지.
내일 또 올게요.
뭐 하러 그래.
자기 전에 꼭 한술 뜨고 주무세요.
어서 가 봐.
나는 내일 다시 올 테고,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잠들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꾸벅 인사하곤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차를 쳐다보면서 처음으로 이 세상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한 번도 인지하고 살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가장 소중한 자식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가족보다도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끝도 없이 재생되는구나. 그 속에 가슴 아픈 이들만 주저앉아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구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이대로 아무렇지 않은 척 정수를 잠시 잊고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살아내면 나는 정말 잘 사는 게 맞는 걸까? 너무 어려웠다. 이게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정신 차려 보니 드물게 버스를 타려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도착 예정 정보 판엔 어떤 숫자도 떠오르지 않았고, 도로에도 차가 많이 줄어있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던 거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냥 택시를 잡아 집으로 가면 될 텐데도 상실이 그런 당연한 사고마저도 마비시키는 건지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걷게 했다.
걷고, 또 걸었다.
“있지. 사실 나 너 되게 귀찮았었어.”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서 중얼거렸다.
“너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 심했어, 알아?”
이렇게라도 게워 내야만 할 것 같아서.
“너 아니었으면 나 연애도 엄청 했을 텐데, 너 때문에 못 한 거야. 우리 매일 붙어있었잖아.”
더는 참아낼 수 없어서.
“너 진짜 짜증 나.”
결국 너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왜, 왜 사라져 버린 거야.
매일은 오던 곳이었다. 어느 날은 너희 집을 두고 왜 맨날 여기로 오냐고 하던, 또 어느 날은 네가 없어 심심하다며 오늘은 안 올 거냐 보채던, 너의 집. 김정수의 흔적이 넘쳐흐르는 곳. 조심스럽게 도어락에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자마자 숨이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시발…….”
이 집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네가 저 방에서 걸어 나올 것만 같이 따뜻했고, 아직도 너의 향으로 가득했다. 이제 김정수는 이 집으로 돌아올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끌린 듯이 너의 방으로 향했다. 반듯하게 정리된 침대에 누웠다.
흐윽.
내내 참아내었던 울음이 저항도 없이 터져 나왔다.
포근해.
너를 너무 닮아서.
벌써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그러니까 정수, 너는 왜 그래야만 했어?
왜 나를 두고, 내가 아무것도 해볼 수 없게 했어?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적어도 나한테는 네가 벌써부터 가장 큰 흉터가 될 것 같은데 너는 내가 아무 상처도 내지 못했다는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 원망스러웠다.
적어도 너의 가장 큰 상처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작은 다이어리.
홀린 듯이 그 다이어리에 손을 뻗었다.
펼치자마자 떨어지는 종이 하나.
꼬깃꼬깃 접혀있는 걸 조심스럽게 펼쳤다.
[곽지석에게.]
나는 무너졌다. 그 아래로 적힌 수많은 말보다도 가장 앞서 적힌 겨우 다섯 글자에.
[이 편지가 너한테 전해졌으면 하다가도, 끝끝내 전해지지 않길 바라며 이제껏 못다 한 말을 적어보려고 해.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된 게 벌써 몇 년째인지 이제는 바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참 많이 흘렀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 나는 항상 우리 사이가 궁금했다. 너의 말처럼 우린 가장 친한 친구 정도인 걸까? 물론 이제껏 한 번도 물어보진 못했어. 너도 알잖아. 내가 생각보다 겁이 많다는 거.
맞아. 나 너한테 거짓말하고 있었어. 나는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일지 몰라도, 나한테 너는 많이 특별했으니까. 늘 그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어. 너는 늘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빠르니까. 비록 너를 속이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가 가까울 수 있었다고 생각해. 오히려 다행이었지.
그런데 지석아. 나는 그게 조금 미련했다고 생각해. 너는 너인 채로 살아가는데 나는 내가 나이지 못한 채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 너를 원망하는 건 아냐. 너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나는 단지 내가 조금 미울 뿐이야.
너를 그냥 좋은 친구로 여기려는 노력조차도 어려워지기 시작했어. 재채기처럼 너한테 말해버릴 것 같아서, 너한테 연락도 못 하겠더라. 그래서 네가 날 미워하더라도 난 이해할 수 있어. 이게 뭐가 좋은 친구야.
결국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일 수 없었나 봐.
다 내 탓이야. 다 내 잘못이고.
그러니까 지석아,
나는 네가 이 편지를 읽더라도 너무 울진 않았으면 좋겠어.]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렸다. 무수히 쏟아지는 말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했다.
아니었다.
너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비겁한 이는 나였다.
내 고통은 겨우 엄살일 뿐이었던 거다.
내가 너에게 내내 상처였는 줄도 모르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감히 울부짖는 것조차도 너에게 죄스러워서. 네가 보지도 못할 줄 알면서도 무릎 꿇고 웅크린 채로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마치 너라도 된 듯이 품었다.
신을 믿지 않겠다고 했다. 그게 얼마나 나약한 반항이었던가. 빌었다. 구질구질하게. 제발 너를 돌려달라고. 어떤 대가라도 치를 테니 제발 김정수를 이 세상에게로 돌려달라고.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쩌면 신은 나의 염원을 들어준 걸까?
아니.
나는 확신했다.
신은 당신이 사랑한 너를 가여워한 것이 틀림없다고.
*
그 애를 돌려주세요.
내가 그 애를 힘들게 한 거라면, 나 같은 건 다 잊혀도 괜찮으니까. 그 애만은 꼭,
*
“얼른 안 일어나!”
날벼락이다. 말 그대로 날벼락. 분명 의식이 흐려지기 전까지 슬픔에 잠식되어 가는 중이었는데, 어째서 등이 얼얼한 거지?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고통,
“빨리 씻고 밥 먹어!”
이라고 회상하기도 전에 어마무시한 호통이 한 번에 휩쓸고 갔다. 엄마가 대체 정수 집을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걔가 그런 걸 우리 엄마한테까지 알려주진 않았을 텐데. 눈을 비비고 일어났을 땐 그냥 내가 잠에서 덜 깼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독립으로 인해 진작에 사라진 나의 옛 방을 마주하기 전까지 말이다.
어?
아니다. 아무래도 꿈이 맞는 것 같다. 그럼 안 아플 거잖아, 그치?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양 볼을 있는 힘껏 꼬집,
아아악-!
“곽지석!”
학교 갈 준비하라니까 뭐 하는 거야!
아, 꿈 아니구나.
추억이 되었던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몇 대 더 맞고 나서야 이제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을 우물우물 씹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지금 몇 학년이지…?”
“얘가 진짜 왜 이래?”
엄마는 그러면서 내 이마에 손을 올려두었다. 열은 없는데. 그럼 잠이 덜 깬 거야? 너 3학년이잖아. 공부가 많이 힘들어? 그래도 정신을 단단히 잡아야지. 엄마는 너 믿지만 그래도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기니까-. 아, 알겠어 엄마. 내가 좀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하하하.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도망이었다.
지석아, 한 숟갈만 더 먹어! 애절한 외침을 뒤로 하고 방문을 닫았다.
3학년.
우연일까, 운명일까. 하필 돌아와도 딱 이 시기로 돌아왔다.
우리는 3년을 내내 붙어있었다. 나는 정수가 좋았다. 재밌고, 다정했으니까. 너도 그랬던 것 같다. 같은 학교, 같은 학원, 같은 동네. 내가 너한테 우린 평생 같이 함께하자는 말을 자주 했었던 때. 갑자기 네가 먼저 군대로 떠나 버려 한동안 만나지 못하기 전, 네가 아주 미묘하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전, 왜인지 내가 오기로 우리의 관계로 붙잡고 버티는 것 같다고 느끼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였던 그 해.
내가 굳이 이 시기로 돌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때쯤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럼 나는 그걸 알아내야 한다. 그걸 알아내야 현재의 네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다녀올게!”
다급하게 집을 나섰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나는 그걸 기꺼이 해낼 생각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김정수를 위한 일이라는 일념 하나로.
숨을 헉헉거리며 뛰다 보면 늘 만나던 곳에 이어폰을 꽂은 채 서 있는 이가 보였다. 사라지지 않은 김정수였다. 시간이 흘러 현재가 되어 돌아올 그 어떤 미래에 나를 버리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김정수. 행동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출력되는 바람에 그 커다란 애를 있는 힘껏 껴안아 버렸다.
“야, 뭐해, 놀랐잖아!”
안간힘을 썼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쩌면 아무것도 모를 네게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말이다. 네 존재가 이 세상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일었다.
나를 떼어내려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데도 너를 꼭 붙들었다.
“뭔데, 또 뭔 일인데.”
한쪽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돌리는 그 얼굴을 피하며 답했다.
“정수, 나 오늘 진짜 이상한 꿈 꿨다?”
“또 이상한 꿈 꿨겠지.”
“사라졌어. 나한테서 네가.”
네가 편지 한 통만 덜렁 남긴 채로 죽어버렸다고, 그래서 나는 너를 잃은 상실감에 우느라 그 편지를 열어보지도 못하고 깨어났다고. 그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진짜 이상한 꿈이네.”
그러니까. 진짜 이상하잖아. 네가 날 두고 사라질 리가 없는데. 라고, 어릴 때였다면 뻔뻔하게 조잘거렸을 테지만 이제 와서 뜸이 늘어난 대답을 들으니 왜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너는 어쩌면 이때쯤부터 떠나고 싶었던 걸까?
“나 안 떠날 거지?”
“뭔 소리야.”
“약속해. 나 안 떠난다고.”
“너 오늘 진짜 좀 이상하다?”
“아, 빨리!”
알겠어. 빨리 학교나 가. 이러다가 늦겠어. 보채는 말에 지는 척 답하며 건넨 이어폰 한쪽. 내가 이상하다고 말하면서 하는 행동이 다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그러게 언제부턴가 이런 게 다 자연스러워졌다. 누구 하나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된 지가 얼마인지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노래는 언제나 정수의 취향대로 흘러나왔다.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노래도 끼워 넣더니 이젠 그러지도 않았다. 그게 불만이었다기보단 이젠 딱 김정수의 취향으로 범벅된 노래를 듣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쪽이 맞았다.
노래가 네 곡쯤 흘렀을 때쯤이면 교문이 보였다. 흘깃 시선을 옮기면 너는 평상시처럼 귀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 얼거리고만 있었다. 그 편지를 읽어버린 나는 이제 정수의 모든 행동을 무의식으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김정수에 대해서라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단 한 가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말 너를 내가 제일 몰랐던 거야?
다급히 시선을 거뒀다. 마치 네가 날 고장 낸 것처럼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중에 봐.
복도를 사이에 끼고 너는 조심스레 내게 끼워져있던 이어폰을 뺐다. 맞다, 우리 다른 반이었지. 2학년 땐 멀쩡히 잘만 듣더니 갑자기 이과는 자기랑 안 맞는 것 같다며 문과로 바꿔버린 것이 이제야 기억이 났다.
두고 봐.
내가 쉬는 시간마다 찾아가서 귀찮게 굴 거야.
“지석아.”
“뭐!”
“거기 내 자린데…….”
“아, 아 맞다, 미안.”
어쨌든.
*
“오늘 너 진짜 이상해, 알아?”
“뭐가아-.”
“내가 오라고 할 땐 귀찮다고 안 오더니, 너 지금 쉬는 시간마다 오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너 이상하다고.”
“안 싫으면 됐어-.”
먹을래?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내밀면 너는 약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와서 하는 짓은 딱히 없다. 김정수의 책상 위에 걸터앉아 사탕이나 물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나 줄줄 늘어놓는 게 다였다.
“좀 있음 종 쳐.”
“알아.”
“안 가냐?”
“가기 싫어.”
너 왜 문과로 바꿨냐. 나 심심하게. 일부러 푸념하듯 말했다. 예전엔 이런 말 한 적이 없었다. 김정수도 나름대로 고민하고 한 선택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의 배려가 어쩌면 너에겐 무관심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도 같아서였다.
“지석아. 나는 네가 심심하면 놀아주는 사람이야?”
몸이 굳었다.
“어?”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웃어만 주던 김정수가 얼굴에서 온기를 지운 게.
지금까지 몰랐었는데, 김정수는 안 웃으면 생각보다 무섭게 생겼구나.
무어라 해명을 하기도 전에 종이 울렸다.
“됐어. 빨리 가기나 해.”
“어, 어…. 갈게.”
뻘쭘하게 반으로 돌아왔다.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특별했다면, 너는 방금 내게 왜 화가 난 것일까. 나는 단지 정수와 같은 반이지 않은 사실이 아쉬웠을 뿐인데. 너무 어려웠다. 정수, 나 갑자기 네가 너무 어려워.
수업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너의 의중이 지금은 더 중요했다. 내가 여기는 정수와 정수가 여기는 내가 무엇이 다른지를 알려면 아직 한참을 멀었다.
그러게. 김정수가 화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에서야 생각해 본다. 친구로 지내는 그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너는 너그러웠고, 나는 고집스러웠지만, 그냥 그랬다. 아니, 그건 내가 그렇게 생각해 온 거다. 어쩌면 너는 너그러웠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는 늘 나를 봐주고 있었던 걸까?
수업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른 채로 점심시간이 됐다. 버릇처럼 네가 있는 반으로 가려다 순간 멈칫했다. 화가 난 김정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였다. 그렇다고 피할 순 없잖아.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순간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겼다.
“뭐해!”
김정수다.
“부딪힐 뻔했잖아!”
아. 그렇구나. 아니 뭐 그래봤자 급식실로 향하던 애들일 뿐인데, 김정수는 또 잔뜩 헝클어진 표정을 했다.
“누가 보면 차에 치인 줄 알겠다.”
“조심 좀 해.”
“너 때문이잖아.”
“뭐?”
“몰라.”
“야, 똑바로 말해.”
“화났잖아.”
“뭐라고?”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너 나한테 화났잖아.”
“내가 언제.”
“아니라고? 그럼 아까 왜 그랬는데?”
“화 안 났어.”
“거짓말하지 마. 너 아까 분명 나한테 화났어.”
“아니라고.”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되려 내가 화가 났다.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을 했잖아. 그래서 내가 어쩔 줄도 모르게 만들어놓고 자꾸만 발뺌하는 게 답답했다.
“그럼 왜 그랬냐고. 그렇게 정색까지 해놓고 화가 안 났다 그러면 나는 그냥 그렇구나 해야 해?”
“야, 넌 말을 뭐 그렇게 하냐.”
“네가 봐줘.”
“어?”
“정수. 나는 머리가 안 좋아서 네가 말 안 해주면 몰라. 그러니까 네가 봐달라고.”
유치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나는 이런 쪽으론 영 잼병이었고, 너와 어색해지는 건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한동안 대치 상태였다. 나는 널 올려다봤고, 너는 날 내려다보는 아주 일방적인 구도에도 나는 조금도 널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뻔뻔하게라도 굴어야 너는 네 본심을 털어놓을 테니까.
“하-.”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네 쪽이었다. 긴 한숨이 동반되는, 이제야 내게 져줄 의지가 생겼다는 신호.
“진짜 화난 거 아니야.”
“그럼?”
“그냥.”
너는 멋쩍은 듯이 머리나 긁적였다.
“그런 말을 하고 보니까 너무 유치해서.”
그래서 그랬어. 진심인지, 또 둘러대는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너는 또 날 봐줬다는 사실이 내겐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너는 왜 이렇게 날 봐주는 건데. 또 네 탓으로 돌리면서까지 말이야.
“너는 나한테 왜 화를 안 내?”
“내가 화내길 바라?”
“그런 건 아니지.”
“그럼 굳이 그런 걸 따져서 뭐 해.”
“궁금하잖아.”
“너한테 화 안 내.”
예전의 나였다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을 대목이다. 미묘한 차이. 화 안 내. 그 세 글자는 네가 날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안 나는 것과 안 내는 것은 그런 차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이게 네가 말했던 네가 날 특별히 여기는 부분 중 하나인 거야?
“내가 너한테 화내서 뭐 해.”
이제 밥 좀 먹으러 가면 안 될까? 나 배고파, 지석아. 무언가 더 따지려는 내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운 너는 그대로 나를 밀어 급식실로 향했다. 뭐가 또 불리해서 말을 돌리는 건데. 버둥거려봤자 의미가 없다. 짜증 나.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
아, 그만 밀어. 내가 알아서 가. 투덜거리면 뭐가 웃겨서 또 너털거리며 웃었다. 내 어깨 위로 둘러지는 팔은 덤이었다. 이런 거 보면 진짜 화가 안 난 건가 싶기도 했다. 모르겠다. 정말 갈수록 모르겠다.
두 번째로 얻은 삶은, 내가 살아왔던 세상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했다. 내가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는 계기라는 말이었다.
돌아온 과거에서의 하루하루가 쌓여갈수록 나는 내가 알던 김정수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던 김정수는 듣는 걸 좋아하는 애였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은 애였다. 맞춰주는 게 편하다는 말을 달고 살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짝이 맞지 않은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워놓고 다 완성된 그림이라서 우긴 격이 되었다.
나는 이제껏 너에게 얼마나 이기적으로 굴었던 걸까.
“곽지석.”
“어?”
“안 가?”
“정수.”
“왜, 또 하고 싶은 거 생각났어? 어딘데?”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너무 쉬운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김정수는 나를 다 맞춰줬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두 번째 삶은 지난 과오를 돌이켜보고 반복되지 않게 하라는 신의 배려일 테니 사실 나는 이제 너에게 날 맞추면 되는 게 아닌가.
“너는?”
“뭐가?”
“나랑 놀면 매일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잖아.”
너는 뭐 하고 싶냐고.
이게 사실상 내가 뻗은 첫걸음이었다. 노력도 없이 너를 돌려받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너네 집 가자.”
“갑자기?”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네-.”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얼굴에 과하게 웃는 척이나 했다. 너 우리 집 오면 맨날 심심하다 그러잖아. 그러면서 뭘. 김정수는 투덜거린다. 그러나 그건 분명 거절은 아니다. 그럼 나는 씨익 웃어주기만 하면 됐다.
참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된다.
몇 걸음 잘 걷다 멈추고, 또 몇 걸음 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의미 없지만 의미 없지 않은 짓거리가 몇 번이나 반복될 동안 너는 별말이 없다. 내가 뒤돌기 전까지는.
“근데, 정수.”
“또 왜.”
자각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자연스러워지는 바람에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 걸까. 다른 데에선 안 그러면서 꼭 집에 가는 길엔 나란히 걷지 않는다. 한 걸음 뒤에서 마치 나를 따르는 사람처럼 졸졸.
실은 나도 이제껏 몰랐다. 그렇게 가더라도 내가 떠들면 너는 꼬박꼬박 답했고, 약간 경사진 그 길을 걸으며 밭은 숨을 연신 내뱉다 보면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야 했으니까.
그러게.
“옆으로 좀 와.”
“길 좁잖아.”
“이게 뭐가 좁냐.”
“됐어, 빨리 가기나 해.”
부러 네 팔을 잡아당겼다. 나보다 힘도 세면서 또 별말 없이 옆에 나란히 서는 걸 보면 역시나 싫지 않구나. 그게 좀 웃겼다. 덩치도 큰 게 이런 면은 또 귀여웠다. 너는 모르겠지. 내가 귀엽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면서 너도 그렇다는 걸.
엄마한테 정수랑 공부하다 간다는 연락을 남겼다. 그러면 그런 줄 알더라고. 평소처럼 문이 열리자마자 어무니! 하고 소리쳤다가 김정수의 비웃음을 좀 사긴 했다. 알고 보니 여행을 가셨다나. 그럼 그렇다고 일찍 말이나 해주면 될 텐데 꼭 사람 뻘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너를 따라 들어간 방.
당연하게도 온통 김정수로 가득 차 있는 그 공간을 마주하니 숨이 턱 막혀왔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괜히 감성에 잘 젖게 되더라고. 서른의 정신으로 열아홉을 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
이곳의 너는 분명 존재하고 있으나, 내가 있던 곳의 너는 사라지고 없으니까. 네가 실재한다는 증거를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무너지려고 하는 내 마음을 억지로 붙잡는 게 힘들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듣고 따로 살던 너의 집이 아닌, 이 집으로 달려왔을 때. 이미 서른이 넘은 아들의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 겨우 버리지 못한 교복을 끌어안고 울던 어머니가 자꾸만 떠올라서, 차마 말 한마디 내밀지 못하고 그 야윈 몸을 안아주는 것밖엔 할 수 없던 내가 자꾸만 역겨워서, 그래서 지금의 너에겐 다소 당혹스러울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도망치듯이 나를 지나쳤다. 또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내 눈이 조금이라도 붉어진 걸 보면 무슨 일이냐고 대답할 때까지 물을 게 뻔하니까.
혹시나 네가 들어올까 문까지 걸어 잠갔다. 스르륵 그 앞에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참아지지 않는 눈물을 혼자서 삼킬 수밖에 없었다. 행여나 울음 하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마음을 졸이면서 말이다.
두려웠다.
거대한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지금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겨 깨어나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현실은 그게 당연한 거다. 미래는 바꿀 수 없고 과거로는 더욱이 돌아갈 수 없다. 그게 맞는 건데, 내가 이 상황을 너무 순진하게 믿고 있는 걸까?
있잖아, 정수.
내가 이 꿈에서 깨고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현재로 버려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그런 삶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렇게 살 바엔 이 꿈에 갇히고 싶다고 말하면 너는 내가 무서울까?
그치만 나는,
똑똑-.
“너 괜찮아?”
“어?”
“아니 한참을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아, 미안. 못 들었어.”
“너 괜찮은 거 맞아?”
“괜찮지 그럼.”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눈물범벅.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정신 차리자, 곽지석.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절망을 조금이라도 씻어 내려보고자.
문을 열고 나오니 거실에 네가 앉아 있었다. 티 나지 않게 너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네가 따라 들어오겠지만, 대충 침대에 몸을 던져두곤 얼굴을 묻었다. 이러면 잠깐이나마 너의 눈을 피할 수 있겠지.
“야, 내가 침대에는 눕지 말랬잖아!”
“그치만 침대가 너무 포근한 걸?”
“빨리 나와 그냥 소파에 있으면 되잖아.”
“어차피 누웠는데 더 누워 있을래.”
내가 안 씻고 눕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면서 왜 이러냐 진짜! 저항할 틈도 없었다. 몸이 돌려졌고 기어이 마주 보고야 만다. 다소 미묘한 자세로. 마치 네가 날 가두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된 채로 나는 너를 본다. 의식하지 않아도 눈물이 고이는 감각이 선연했고, 너는 그런 나를 보며 혼란스러워하겠지.
이제 네가 물어올 차례였다. 왜 우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슨 맥락에서 이렇게 울어버리는 건지. 그럼 나는 무슨 답을 내어놓아야 할까. 네가 화내는 게 무서웠다는 터무니 없는 말을 네가 믿을 리는 없을 테고, 그럼 나는 사실 미래에서 온 서른 먹은 곽지석인데 그 미래에 네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너를 돌려받으러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을 미친 새끼처럼 해버려야 하는 걸까?
어느 쪽도 올바른 답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너의 의문을 풀기엔 개연성이 부족할 테니까.
어?
그러나 나는 또 너를 틀렸다.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너의 품에 나를 묻을 뿐.
너무 놀란 나머지 나오던 눈물도 멎었다. 네가 날 안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세세한 온기까지 전해지는 건 처음이어서. 늘 낯간지럽기만 했다. 남자끼리 뭘 끌어안기까지 하냐며 멋쩍게 벗어난 게 몇 번인지.
부수적인 부스럼을 다 제하고 온전히 닿은 품이 왜 이렇게 날 안심하게 했을까.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너의 목에 둘렀다. 무슨 의도가 담겼다기보단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
너스레를 떠는 얇은 커튼 너머로는 주황빛의 노을이 범람했고, 빼지 않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미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영화적인 연출 같았다. 이 다음은 반드시 감독의 의도가 한가득 담긴 장면이어야 하겠지.
네가 말한 특별함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특별함과 같은 값을 가지는가?
서서히 가까워진다.
이 이상 더 가까워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바 없지만, 피하지 않았다. 왜인지 피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으니까.
기어코 서로의 숨이 가깝게 닿았을 때,
“너는 진짜 어쩌려고 이래.”
몸이 겹쳐졌다.
두근, 두근.
서로 다른 박동의 심장이 맞닿은 느낌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그런 장면으로 닿진 못했다. 네가 날 그냥 안아버리는 바람에.
충분히 따뜻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게 못내 아쉬웠을까?
정수, 너는 왜 그런지 알아?
*
그 일이 있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김정수와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양 굴었다.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서 만나 각자 한 쪽씩 이어폰을 사이좋게 나눠 끼고 점심을 같이 먹고, 아무튼 하루 종일 붙어 지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삐걱거리긴 했다. 조금 스쳐버린 손에 지나치게 놀란다던가, 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며 어두운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에 묘한 분위기가 잡히면 파드득 내일 보자며 흩어지는 식이었다.
너도 그럴 테지만, 나는 혼란 속에 살았다.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그런데 나는 그날 내게 진하게 남았던 아쉬움과 며칠 동안 계속된 혼란으로 어쩌면 친구라는 말로 우리의 관계를 가둬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도 남자고, 걔도 남잔데?
그런데 왜 싫지가 않을까.
그냥 김정수라면 다 괜찮을 것도 같아서.
그럼에도 너에게 만큼은 털어놓을 수 없었다. 너의 마음과 내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널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이대로 너에게 쭉 특별한 사람이고 싶은데, 내 마음이 그걸 다 망쳐버릴까 봐. 그럼 또 다른 방식으로 나는 너를 잃는 꼴이잖아.
그런데 말이야.
정말 만약에.
이 관계가 겨우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면, 너는 어떨까?
미래에 네가 할 결정에 조금의 변화를 주기나 할까? 내 탓으로 만들기 싫어서 미룬 이 마음이 결국 다시 널 갉아먹게 되지 않을까?
마음의 잔병이 점점 쌓이니 결국 몸이 주저앉았다.
축축한 물수건이 이마 위에 올려졌다. 연차를 쓰고 옆에 있겠다는 엄마를 겨우 말려 보내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거울로 본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그 모습이 널 잃었던 그날과 다를 바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찬물로 아무리 씻어내려 해도 더 짙어지기만 하는 초췌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수, 나는 네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싶었고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 이유에게서 널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자꾸 내가 혼란스러워지고 널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만 자꾸 드는 걸까?
내가 진짜 널 구할 수 있는 건 맞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내가 너무 자만하는 거야?
무 기력하게 침대에 누웠다.
‘♪-.’
잠들려고 하던 차에 벨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엄마가 죽이라도 시킨 건가. 아, 나가기 귀찮은데. 무거운 몸을 겨우 다시 일으켜 힘겹게 현관문을 손잡이를 밀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 도어락이 다급하게 당겨졌다. 그 힘이 너무 세서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놓지도 못하고 끌려 나가니 놀란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김정수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또 너에게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내가 안기자마자 너는 놀라며 내 몸을 부축했다.
“야, 괜찮아?”
“아니…….”
너의 부축을 받아 겨우 침대로 돌아왔다.
“학교는?”
“지금 그게 중요해?”
“뭐 하러 왔어.”
“너 혼자 있을 거잖아.”
이렇게 불덩이가 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거 뻔하니까. 그 말을 하면서 너는 가방에 주섬주섬 약 봉투를 꺼내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몰라서 일단 다 사 왔어.”
열 많이 나니까 이것부터 먹자. 약은 먹을 수 있어? 아니다, 너 밥도 안 먹었지. 죽 끓여줄까? 아니면 일단 좀 잘래? 시간 걸릴 거 같은데.
되게 조급했다. 나는 그냥 열이 조금 나는 것일 뿐인데, 내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구는 널 가만히 보고 있자니 또 가슴께가 뭉클했다. 열이 펄펄 끓어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나를 걱정하는 널 붙잡고 이렇게 걱정할 거면서 왜 날 두고 죽어버렸냐고 미친 사람처럼 물어버릴 만큼 말이다.
“누가 보면 나 죽는 줄 알겠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정수.”
“왜, 뭐 필요해?”
“그냥. 고마워서.”
뭐래, 얘가 아프더니 별말을 다 하네. 잠깐만 기다려 죽 끓여줄 테니까. 너는 내가 무슨 애라도 되듯 이불을 잘 덮어주곤 방을 나섰다. 나가자마자 부엌에서 무언가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이렇게 익숙해, 낯간지러워할 틈도 없게.
기다리고 싶었는데, 약간의 소음이 졸음을 불렀다. 점점 닫히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잡지도 못하고 수마에 빠지는 동안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이 상태로 멎어서 네가 사라질 미래도, 내가 널 잃을 미래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까만 무의식을 한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몸이 조금씩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에 묻은 다정에 살며시 눈을 떴다. 어느새 바깥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때와 비슷한 색채였다.
“죽 먹고, 약 좀 먹자. 너 열이 너무 안 떨어져.”
침대맡에 등을 기대어 앉으니, 너는 곧장 죽 한술을 내게 내밀었다. 식혀 왔어, 뜨거우면 먹기 힘들 거 같아서. 그러니까 너는 이런 게 대체 왜 자연스러운 거냐고. 받아먹는 게 민망해서 내가 먹겠다고 했더니 아픈 사람은 가만히 먹기만 하라는 말에 더 반기를 들 힘도 없어서 네 말대로 얌전히 입을 벌렸다.
한 술.
두 술.
어느새 그릇은 바닥을 보였다.
마지막까지 다 받아먹으니 너는 또 당연하게 잘했다며 내 머릴 쓰다듬었다.
“약이랑 물 가지고 올게.”
다 비운 그릇을 가지고 나가려는 네 팔을 붙잡았다.
“정수.”
“왜?”
“나 진짜 미쳤나 봐.”
“어?”
그대로 너를 당겼다. 열병에 이성이 마비된 사람처럼 내게로 쏟아지는 네 얼굴을 붙잡았다.
쪽-.
그냥 지금인 것 같았다. 열기가 정상적인 사고를 몽롱하게 만들었고, 들어차는 햇빛도 몽환적이었다.
그랬는데, 너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역시, 너와 나의 마음은 조금 달랐던 걸까.
“미안.”
미안해. 내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아파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진짜 미안해. 중얼거리듯이 사과를 내뱉는 내내 너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
명백히 고의적인 행위였다. 나처럼 충동적이지도 않은 다분히 쌓여온 행위. 가벼이 닿는 거로 끝나지 않았다. 두 입술이 맞닿았고, 여실 없이 너는 나를 가르고 들어왔다.
숨이 차게,
벅찼다.
“좋아해.”
많이.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미안해. 너는 되려 내게 사과했다.
나는 너의 고백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모든 게 홀가분해 보이는 너의 표정과는 다르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려버렸다. 나는 너에게 그런 의미로 특별했구나. 너는 그 짧은 말 마디가 겁나서 그렇게나 긴말들로 편지를 써 내리고, 그 속에서도 차마 그 말을 못 해서 겨우 너무 울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염려나 덧붙인 거였구나.
나도 좋아해.
우리가 작별하지 않고, 영원했으면 하는 이 마음에도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래, 나도 널 좋아하고 있는 거였다. 너와 나의 마음이 같은 무게는 아닐지라도. 이건 분명,
“---.”
아.
내 바람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걸까.
김정수가 내 대답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와서 다급하게 구는 신의 변덕에 세상은 이미 검게 물들고 있었으니까. 보내줄 땐 날벼락처럼 보내더니 데려갈 땐 이렇게나 애간장을 다 태우는구나.
깨어나면 나는 어디에서 깨어날까.
네가 죽지 않았다면 당연히 내가 살던 집, 마음먹고 산 비싼 매트리스 위에서 눈 뜰까? 아니면 내가 잠들었던 너의 침대 위일 수도 있을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나는 널 살리는 대신 너에게서 가장 힘든 기억이었을 나를 지울 거니까. 그게 내가 세상에 널 되돌려 놓은 대가일 테니.
아득해진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못 하고.
그래도,
참 다행이야.
*
돌아왔다. 서른의 곽지석으로.
내가 살던 자취방이었다. 그래도 아주 약간의 희망을 품었던 것이 무색하게 내 집엔 너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급하게 휴대폰을 들어 너의 이름 석 자를 검색했다. 어렵지 않게 너의 얼굴이 걸린 계정을 찾을 수 있었다.
스토리가 올라와 있다. 방금까지 좋은 곳을 산책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김정수가 죽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흐느꼈다.
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지만, 결국 너의 세상에서 내가 지워졌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어서 이 야속한 신을 원망하며 울었다.
내 죄라지만, 나 또한 당신의 우매한 자식일 텐데, 어째서 제게만 이렇게 가혹하시나요.
저는 이 쓰라린 상처를 다 안고 견뎌내야만 하는 건가요.
그렇게 나는 이 생을 지나쳐야만 하는 걸까요.
“씨발, 뭐가 이래.”
나한테 어떻게 이래.
하루를 꼬박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더는 울 힘도 없을 때까지 울다 지쳐 잠들어서야 그칠 수 있었다.
내일 눈을 뜨면 아무렇지 않게 내가 살던 삶을 살아내야겠지. 차라리 나도 잊게나 해주지.
‘좋아해.’
그 진심 가득 담긴 고백이라도 못 듣게 하지. 다 보고, 다 듣게 했으면서 나는 정말 어떻게 살라고.
그래, 지금만 우는 거다. 다 울고 내일 견디자. 어쩌면 네가 죽었던 그 시간 선에서 너의 매일이 이런 나날들이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나는 이 시간 선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우리가 사랑을 확인한 그 계절을 동앗줄 삼아 살아가면 될 것이다.
정수.
우리가 만약 정말 운명 같은 거라면, 언젠가 다시 사랑을 하게 되지 않을까?
편지 한 장을 썼다. 그 언젠가 네가 그랬을 것처럼.
지금은 네가 어디에 사는 줄도 몰라 부칠 수도 없을 편지에 아주 짧은 안녕을 담았다.
정수.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날이 올 때까지 너무 울지 않을게.
네가 너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으니까. 나 그 말 지켜볼게.
안녕.
안녕, 김정수.
*
또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할 당신께.
당신은 저를 모를 테고, 어쩌면 이제는 저도 당신을 모른다고 해야 하겠죠.
그럼에도 이 세상을 당신이 보다 더 즐겁게 버텨갔으면 합니다. 그 속에 이제는 제가 함께할 순 없겠지만요.
더 거창한 진심도 낯선 이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저 오지랖일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살아주어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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