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을 배우는 방법
조수
흰 벽 흰 커튼 흰 침대. 그리고 흰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누구 하나 피 볼까 봐 조금이라도 다치면 바로 알아볼 수 있게끔 맞춰진 흰색의 배경들. 전부 곽지석이 5년 동안 봐오던 것들이다. 주로 이곳은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오곤 했는데, 곽지석의 또래가 온다면 그 아이의 상태는 많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자동적으로 곽지석의 상태 또한 최악을 향해 달려간다는 뜻이었고. 곽지석은 이곳에서 숨통 막히게 지내며 몇 가지 배운 사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석아 이거 먹을래?"
"......아니. 너 많이 먹어."
"지석이는 맨날 굶는 거 같아."
첫째, 정 주지 말 것. 그렇기에 무조건적으로 혼자 다닐 것. 제 나이의 또래가 말을 걸어온다면 철저하게 무시했다. 말을 트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또 정들까 봐. 또 혼자만 남을까 봐. 감정이 너무 버거워서 이곳에서 지낸지 2년쯤 지났을 때 다짐했었다. 반년 동안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장례식장을 갔다가 눈물 젖은 얼굴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곳엔 곽지석을 제외한 곽지석의 또래들은 대부분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병이 나아서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있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차라리 이곳을 나가는 친구들이면 다행이었다. 곽지석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고 떠나는 거니까. 근데 그때, 장례식을 나올 때. 곽지석은 공허한 눈으로 제 얼굴에 느껴지는 축축한 눈물을 닦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여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흐릿한 곳인가. 그럼 나는, 나는..... 여태 버틴 이유가 뭐지. 나도 죽으면 안 되는 걸까. 이런 최악의 생각들이 곽지석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정했다. 며칠 간의 숙고 끝에. 일단 살아서 나가보고, 세상 좀 살다가 안되겠으면 그때 죽는걸로. 그래서 웬만한 사람과의 교류는 전부 끊었다. 그랬었다.
"지석이는.... 음."
"......."
"조금 더 있어보자."
"....나아지고 있어요?"
"........좀 더 힘내보자."
그렇게 지낸 지가 벌써 3년이었다. 스스로 자처해서 사람을 끊으니 자연스레 다가오는 사람도 없더라고. 곽지석은 하루에 말을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한탄했다. 누군 지석더러 실어증에 걸렸다고 하더라. 그리고 오늘 같은 날, 또 한번의 치료의 제자리걸음이 반복되는 날이면 힘이 더 빠지는 건 사실이었다. 의사쌤은 직접적으로 나빠지고 있다고 말도 해주지 않으니 내 몸인데도 살지 죽을지 모르는게 참 어이없었다.
"아 지석아."
"네?"
"곧 네 또래 형 한 명 오는데, 만나면 인사 잘해줘."
"...그 사람은 어디가 아픈데요?"
"아니 아파서 오는 건 아니야."
...그럼 뭐지. 이 깡촌에 아픈 사람들 구경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곽지석은 뒷목을 매만지며 의사 선생님께 대충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이런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리는 편이다. 의사쌤도 걱정됐나보지. 내가 이러고 살다가 말하는 법도 까먹을까 봐. 걱정은 고마운데 솔직히 이젠 좀 많이 버겁고 지쳐서. 이 무한한 치료가. 지루한 인생이. 다 지긋지긋했다. 생각으로 머리가 엉망이 된 곽지석은 천천히 걷다가 숨이 차는 기분에 잠시 멈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요즘 자주 이러네. 진정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과호흡이 찾아오자마자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지석을 괴롭혔다. 심장 소리가 너무나 잘 들려 이게 곧 터져버릴까 무서웠다. 소리는 커지다 못해 지석의 뇌를 잠식해 버렸다. 곽지석은 제 가슴 부근 옷깃을 꽉 쥐며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다리를 따 라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끝까지 주저앉고 머리까지 박겠다, 싶을 때.
".....괜찮으세요?"
그날만큼은 제 머리를 받쳐주는, 목소리가 굉장히 좋았던 사람이 있었다. 받쳐주는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곽지석 본인도 모르게 잠이 들 만큼. 신께서도 내가 불쌍했나 보지. 아니면 이젠 정말 죽을 때가 다 돼서 마지막으로 잠깐 행복하라고 그랬나.
"정신 좀...... 저기요."
"........."
"제 말 들리세요?"
19번째 생일을 맞아 나에게 찾아온 선물 같은 사람.
정수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됐었다.
일어나시면 이거 드세요 날이 추워서 체온이 확 떨어져서 그런 거래요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
지석이 눈을 뜬 건 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을 이른 저녁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린다. 자그마치 5년이다. 이 원인 모를 지병을 앓은 지도. 병에 걸렸을 초반 지석은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절하는 횟수는 잦아들었지만 환경이 조금만 바뀌면 오늘처럼 이렇게 쉽게 픽픽 쓰러졌다. 덕분에 의미 있지도 않은 생일 다 날려버려 체념하고 있을 무렵, 저 멀리에 지석의 눈에 들어온 작은 메모와 누가 봐도 따뜻해 보이는 음료 하나. 지석은 신발을 신지도 않고 맨발로 걸어 책상으로 향했다.
"............"
쪽지가 한 부분씩 진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지석이 고립을 추구한 지도 몇 년째. 사람의 온기가 고플 만한 시기였다. 그래도 쪽지 하나 보고 이렇게 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곽지석은 본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지도 몰랐다. 그저 주변 사람이 아닌 완전한 타인이 자신을 챙겨준다는 이 경험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기에. 그리고 또 나는 이 온기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슬픔에. 그래서 그랬나 보다. 곽지석의 작은 어깨는 조금씩 떨려왔다. 두통과 몸살이 겹친 채 눈물로 인해 열이 올랐기 때문에, 몸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것마저도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신호 같아서. 그래서 더 서러웠다.
".......어 드디어 일어났구나."
"........"
"저기 잠깐...."
지석이 또 한 번 숨이 가빠지려 할 때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나름 한번 들어봤다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석은 부은 눈을 억지로 뜨며 뒤를 쳐다봤다. 자신보다 키가 훨씬 더 큰 남자였다. 나이는 또래 정도. 남자는 지석을 보자마자 본인이 들고 있던 봉지를 내려놓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조심스러운 표정을 하던 얼굴을 사라지고, 눈이 커진 채 지석의 어깨를 붙잡았다.
"또... 또 왜이래요?"
"......."
"내가 준 거 먹었어요? 아닌데 아직.."
"....그냥."
.....그냥 잠깐만 이대로 있어줘.
지석은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조차 소음으로 인식되어 머리가 핑핑 도는 상태였다. 거기다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품은 보기보다 넓직 했기에. 제 머리를 남자의 상체에 기댔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지석의 등을 토닥여줬다. 이런 간호가 익숙한가. 대체 몇살이길래.... 하고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지석의 시야엔 남자의 옷에 적혀있는 이름표가 들어왔다. 김정수. 노란색으로 석 자가 예쁘게 박힌 이름표를. 아, 교복이구나.
"......괜찮아지면 말해. 침대로 옮겨줄 테니까."
"........“
"지금은 이렇게 있는 게 편한거지?"
정수라는 사람은 목소리부터가 다정했다. 사람이 그냥 착함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친절했다. 정수는 지석이 말놓는 것을 듣고 본인도 몇 번 존댓말을 하다가 이내 말을 놔버렸다. 거기에 지석은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하던 모든 말이 지석의 안위를 묻는 내용인 것도 웃겼고. 지석은 정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위를 쳐다봤다. 상당히 가까이에 얼굴이 있었다. 사람한테 기대면 이 정도로 밀착되는구나를 처음 알게 됐다. 생긴 것도 참 바르게 생겼었다. 정수는.
"...고마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석이 기댄 머리를 떼어내며 비틀거리는 상태로 약을 찾으러 갈 때, 정수는 또 한 번 놀란 표정으로 지석을 부축한다. 야아 너 아직 안 괜찮으면서... 당황한 듯한 말은 덤으로. 지석이 약을 까고 입에 털어 넣는 시간 내내 지석의 옆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물 떠줄까? 내가 뭐해주면 돼? 계속해서 물었지만 지석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름이 정수야?"
"어? 아 어... 봤구나."
"난 곽지석이야."
"........"
"오늘 나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방금도. 그리고 아까도. 네가 해준 거 다 알아. 이 음료도.
지석은 한결 나아진 컨디션을 느낀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며 정수를 쳐다봤다. 그리곤 말한다. 근데 여기까지만 해줘. 나 이제 안 도와줘도 돼. 너도 바쁠 거 아냐. 정수는 지석의 말에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했다. 지석은 안 떨어지는 입을 꾸역꾸역 떼서 이제 나가달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정수가 말을 가로챘다.
".....내가 너 도와주면 안되는 거야?"
"...날 왜 도와주는데?"
"세상엔 이유 없는 호의도 많아. 난 그걸 좋아하고."
".........."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너 힘들게 안 해."
지석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태 사람을 불신하고도 잘 살아왔는데.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스스로 학대하며 살았는데. 마음이 자꾸만 기울어진다. 어느 쪽인지는 지석도 확신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불쌍해?"
"...뭐?"
정수가 약간 인상을 찌푸렸을까. 지석은 애꿎은 손톱만 뜯으며 말한다. 난 너처럼 교복을 입어본 적도 없고 사람을 많이 만나본 적도, 남을 도와준 적도 잘 없어. 진짜 나 하나만 생각하고 살았어. 그래서 도움받는 것도 안 익숙해. 오히려 불편하고. 진짜 내가 불편해서 그래. 미안해. 지석의 시야는 점점 바닥으로 향했다. 정수는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는 말을 뱉는 지석을 보며 그 순간에도 많은 생각을 했다. 몇 년 전,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아버지의 병원.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환멸 나서. 서울 친구들이고 뭐고 사회생활 안에 갇혀 사는 게. 극도의 개인주의에다가 사람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냉혹한 사회라고 판단했었다. 한 번쯤 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택한 게 이곳이었다.
"나도 알거든. 나 지금 되게 불쌍한 거."
그런 정수의 눈에 들어온 게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가진 지석이었다. 누가 봐도 나 좀 도와주세요 하는 얼굴을 하고 혼자 막 벽에 기대서 걷는데, 그게 정수의 마음을 자꾸 찌르더라고. 동정이라면 동정이었을까. 그렇지만 김정수는 필요했거든. 극심한 이기주의에 지쳐서, 본인만 생각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서.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길 꼭 바랐거든.
"원래 불쌍하면 도와주고 싶어져. 내가 잘 알아."
".........."
"근데 그거 다 한순간이야. 한두 번 도와주고 말 거면 그냥 하지마."
".........."
"그게 정수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해."
이건 곽지석 이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님을 김정수는 잘 알았다. 본인에게도 필요한 일이라는 걸. 어쩌면 지석보다 정수에게 더 필요로 되는 일이었거든. 그렇지만 김정수는 그걸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시선으로 대체했다. 그저 이 아이가 자신의 지금 눈빛을 읽어주기만을 바랐다.
"너도 기다렸던 거 같은데 지석아."
".......대체 뭐를,"
"아까 우는 거 봤어."
"........"
"난 한 번만 도와주고 그런 짓 안 해. 계속 옆에 있어 줄게."
"........"
"이 겨울이 가기 전까지는."
약속해. 내가 네 옆에 있을게. 종이쪽지 보고 사람의 온정을 느꼈다면 그런 거 몇천 개라도 적어줄게. 그럴 수 있어 나는. 정수는 지석의 하얀 손을 붙잡는다. 어차피 나 여기 계속 있으니까, 친구 하면 좋잖아. 나 심심하거든 진짜로. 미소를 지으며 지석을 쳐다본다. 지석의 눈시울은 이미 진작부터 붉어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두드린 사람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이번 생일엔 진짜 뭐가 껴서 이런 선물을 주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근데 그 유효기간이 겨울이라니.
".....약속 지켜야 돼."
"ㅋㅋㅋㅋ그래. 나 한번 뱉은 말은 다 지켜."
"겨울엔 계속 있어야 돼. 어디 아프거나 죽으면 안돼."
"안 아파 절대."
"근데 지석아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줄까."
"뭔데?"
"내가 너보다 형이야."
"........몇 살?"
참 칼 같기도 하지. 딱 정해진 시간만큼만 행복하라니.
"그냥 정수라고 불러. 나도 그게 편해."
"........"
"맞아 너 오늘 생일이라며. 아빠한테 들었어."
"........"
"그래서 나 케이크도 사왔는데... 헐 저기 있는데."
어떡해... 다 뭉개졌겠다. 아 아까 너 때문에 놀라서 진짜. 정수는 웃으며 아까 내던진 비닐에서 편의점에서 파는 조각 케이크를 꺼낸다. 속상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이 좀 귀여웠다. 지석은 그제야 웃음이 난다. 생일날 케이크를 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억지로 다시 형태를 갖춘 케이크는 촛불과 함께 지석의 손에 들어온다. 소원 빌어야지. 앞에서 정수가 말한다. 그때 정수를 다시 봤는데, 유독 교복 차림이 잘 보이더라. 형인데 왜 교복을 입고 있을까. 한번 꿇었나... 지석은 코를 머쓱하게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소원은... 내 소원은 말야.
내 앞에 있는 정수가 아프지 않기.
절대... 절대로 아프지 않기.
죽지 않기.
이제 남이 죽는 건 더 이상 보기가 싫었거든. 그래서 곽지석은 소원조차 본인 것이 아닌 남의 건강을 빌었다. 제발 이뤄졌으면 좋겠어. 그러겠지만. 그래도 꼭 이뤄졌으면. 지석은 염원을 담아 빌었다. 여태 5년이 넘는 세월에서 소원을 빌어본 적 없으니 한 번에 그 소원권 다 몰아 쓴다고 생각하면서.
생일 축하해 지석아 |
그런 지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수는 지석이 자는 틈을 타 또 하나의 쪽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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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는 정말 본인이 한 말을 착실하게 지켰다. 24시간 중 정수와 함께 있는 시간이 20시간을 넘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수는 지석의 곁에서 함께 자기도 하고 지석이 밥 먹는 걸 보기도 했고 둘이 함께 산책 나가는 일도 잦았다. 곽지석에겐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일상을 매일 같이 보냈다. 이제 밖으로 나갈 때면 정수가 맨날 하는 말인 겉옷 입고 목도리 챙기고 장갑도 얼른. 그 소리가 지석에게 자동적으로 들렸다. 정수 근데 나 몸 점점 괜찮아지고 있나 봐. 너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안 쓰러졌어. 그 말에 정수는 우리 지석이 기특하네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스킨십을 곽지석은 싫은 척했지만 내심 좋은 걸 표정으로 보여줬다. 진짜 말과 행동 따로 놀았다.
"넌 항상 좋으면서 싫은 척하더라."
"언제 봤다고 항상이야. 이제 겨우 한 달 봤으면서."
"야아 한 달이면 어? 얼마나 긴데."
"아 알겠어ㅋㅋㅋㅋㅋㅋ 걷자 얼른."
어... 정수. 눈 온다. 투닥거리던 둘이 걷다 말고 지석의 눈앞에 하얀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정수는 지석의 얼굴에 묻은 눈을 닦아주며 말한다. 그러네. 예쁘게 오네. 적게 오지도 많이 오지도 않고 딱 적당하게. 웃으며 지석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지석과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지석의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펴줬다. 장갑을 낀 지석의 손에 눈이 소복하게 모인다. 지석은 모인 눈덩이를 작게 손으로 눌러 정수에게 보여준다. 귀엽지.
"귀엽네. 근데 손 안 차가워?"
"정수가 맨날 장갑 끼라고 하는데 어떻게 차가워."
"그래도. 그거 나 줘. 간직하게."
"무슨 소리야. 눈을 어떻게 간직해ㅋㅋㅋㅋㅋ"
정수는 지석의 말에 대답한다. 지석의 눈을 진득하게 쳐다보면서. 좀 오그라드는 말을 하려나, 싶을 찰나 지석의 볼을 콕 찌른다. 바보네 너 완전.
"찰나도 영원이 되는 순간이 분명히 있어 지석아."
"........."
"나는 되게 지금을 안 잊고 싶네."
"......정수 너 왜.."
너랑 있는 게 좋아서 한 말이야.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런 것도 있고. 에이 불안하라고 하는 말 아닌데. 겨울은 길어 지석아. 정수는 한순간에 눈시울이 붉어진 지석을 보며 당황하더니 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아 내가 미안해. 미안.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석의 머리통을 다정하게 감싸 제 품으로 지석을 꽉 안아준다. 불안해하지 마. 네가 좋아해서 나도 좋았던 거야.
"근데 지석아 웃긴 거 하 나 알려줄까."
"....뭔데. 또 이상한 소리 하지마 진짜."
"이건 다른 의미로 이상할 수도 있는데...."
...음. 말해도 도망가지 않기. 나 지금 꽉 안고 있어서 어차피 도망 못가 너. 안고 있는 지석의 머리 위로 눈이 조금씩 쌓인다. 정수는 지석의 귀에만 들리게 작게 얘기한다. 처음에 곽지석 네가 물었었지. 너 불쌍하냐고. 근데 내가 아니라 했잖아. 그래서 나도 그때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거든. 항상 널 보면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이 있었어. 너랑 눈 마주치면 막 이상하고 그러더라.
"사실 나 지금도 심장 터질 거 같거든."
"........."
"내가 너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믿을래?"
순간 지석은 본인의 얼굴에 열기가 오른 것을 느꼈다. 오래 아파봐서 안다. 이건 절대 병 때문이 아니라는 걸. 순수 내 감정 하나로 이렇게 열이 오른 것이라는 걸. 지석은 들켜도 상관없을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정수에게 더욱더 기댔다. 정수의 품을 파고들수록 따뜻했거든. 넓고 깊기도 했고. 아 빨리 대답해줘어 나 지금 너 얼굴 못보겠다고. 정수는 투덜거리며 지석의 머리에 있는 눈을 털어줬다.
"....정수."
"응?"
"정수는 나한테 선물이야."
솔직히 한 달 전에 나랑 지금 나랑 같다고 하는 게 안 믿길 정도로 많이 바뀌었거든 나. 그거 다 정수 덕이야. 정수 덕분에 내가 살아가고 있고 살고 싶어졌고 더 같이 있고 싶어. 선물의 동의어가 사랑인 거야? 그렇게 해석해도 돼?
"확실한 건 그거야."
"......"
"난 이제 정수 없으면 안 돼."
이게 첫눈에 반한 거보다 더 깊은 거 아니야? 이게 사랑이면 나 사랑할래 그냥. 나 정수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계속 옆에 있어 줘. 계속 내 겉옷 챙겨주고 내 약 챙겨주고 밥 먹을 때 같이 있어 줘. 나 한 달 전 소원도 정수 거 빌었단 말이야. 지석은 감정이 벅찬지 또 한번 눈물이 날 거 같은 느낌에 눈을 세게 감았다. 그와 동시에 김정수가 곽지석의 얼굴을 제 양손으로 잡아 마주했다.
"나 사랑하는 거야 곽지석?"
"....그럼 이게 뭔데. 설명이 안 돼 난."
"눈은 왜 감고 있는데."
"지금 정수 얼굴 못보겠으니까아.... 그런 거 일일이 묻지마."
"진짜 그 이유 때문이야?"
...그럼 내가 무슨. 곽지석이 입을 떼며 눈을 뜨려한 순간, 김정수의 숨결이 훅 다가온 게 느껴졌다. 곧이어 김정수의 입술이 곽지석의 입술과 맞물렸다. 정수는 아끼는 보물이라도 된 듯 곽지석의 볼을 제 손으로 살살 쓸며 지석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리드했다. 입술 사이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 너무 따뜻해서, 그리고 정수가 지금 온 힘을 다해 제 감정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곽지석은 그저 늘 그랬듯이 정수만 믿고 제 몸을 맡겼다. 숨이 조금 차려 하면 잠시 입술을 떼고 숨 쉬라고 말하더니, 곧장 다시 다가왔다. 지석은 그런 정수가 살짝은 버거웠지만 제 감정이 흘러넘쳐 터질 거 같음을 알았기에 정수의 목에 제 팔을 감아 첫 키스에 최대한을 다 쏟아냈다. 김정수는 지석과 키스하는 도중 잠깐 눈을 뜬 채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지석을 쳐다봤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런 거 혼자 다 했다.
"입술 부은 것 봐. 뭐 얼마나 했다고."
"....놀리지 마."
"너 귀여워서 그렇지."
"다 정수가 이렇게 만든거야."
"응 나도 알지. 내가 다 책임질게."
이제 추운데 들어갈까? 너 귀 다 얼었어 지석아. ...언 게 아니고 부끄러워서 빨개진 거야. 정수가 하도 만지작대니까.
"근데 정수."
"응?"
"정수도 나 사랑해?"
사실 둘에게 영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걸, 서로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말로라도 확신을 받고 싶었다. 말뿐이라도. 그게 영원히 남을 수도 있는 거니까. 첫사랑과 첫 키스에 취해버린 곽지석은 김정수에게 제 모든 마음을 주기로 이미 맘 먹었기에. 정수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했다. 형도 나만큼 원하기를. 우리가 서로를 원했으면 좋겠어서. 그에 답하는 정수는 붉어진 지석의 볼에 입을 한번 짧게 맞췄다 떼면서 말한다.
"첫눈에 반했잖아."
"......"
"너보다 먼저 널 사랑했어 난."
"......"
"사랑해 지석아."
잘 자고 사랑해. 미리 사랑한다고 못했던 게 좀 후회되네. 앞으로 많이 해줄게 사랑해 곽지석. |
그날은 그저, 뭣도 모르고 행복했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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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석의 병세는 눈에 보이게 나아졌다. 이제 정말 퇴원이라는 게 눈앞에 보일 정도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죽음 말곤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의사쌤과 면담을 하고 지석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해맑게 웃었다. 정수와 함께 지내면서 웃음도 많이 생겼지만 정말 정신적인 치료가 정답이었던 건가 싶기도 했다.
"이게 다 쌤이 소개해주신 그 형 덕분이에요."
"......."
"전 똑같이 살았는데. 그 형이 다 했어요."
의사쌤은 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뭐가 됐든 지석이 네가 낫는 게 우선이니까, 그것만 생각하자. 매일 듣던 소리도 오늘은 다정하게 들렸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오니 2층 끝자락 지석의 병실 앞에는 정수가 벽에 기대서 있었다. 지석이 웃으며 뛰어오자 정수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들다 이내 지석을 안을 준비를 하는 것이 웃겼다.
"이제 최선을 다해 안기네 아주."
"그럼 정수가 받아주는데 뛰어야지."
"ㅋㅋㅋㅋ오늘은 몸 상태 괜찮대?"
"응 완전. 나 진짜 곧 퇴원하나 봐."
"기특하네 곽지석."
지석이 고개를 들어 정수를 쳐다본다. 흑발에 매끈한 피부를 가진 김정수. 얼굴 끝부분에 보이는 오동통한 입술은 늘 곽지석을 설레게 만들었다. 정수는 지석이 원하는 게 뭔지 당연히 알았다. 그에 응답하여 정수보다 통통한 지석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러 붙였다. 지석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곤 롱패딩 안에 보이는 교복에 지석은 묻는다.
"오늘도 학교 갔다왔어?"
"응. 학생회라고 자주 부르네."
"졸업식 안 해?"
"곧 하겠지 이제."
"그래도 교복 자주 입었으면 좋겠다. 잘 어울리는데."
"나 이제 스무 살인데?ㅋㅋㅋㅋㅋ"
"....그래도. 좀 더 보고 싶네."
김정수는 곽지석의 코 끝부분을 제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한다. 여기 나가면 젤 먼저 교복부터 입어보자 지석아. 이제 학교 갈 수 있잖아. 일 년 만이라도. 입으면 예쁠 거 같은데. 정수의 말에 지석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 교복 맞출 때 정수가 옆에서 봐줘 그럼. 정수 대학교 입학식은 내가 가줄 테니까. 정수는 알겠다는 듯 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도 사랑해 지석아."
".....나도."
정수가 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 남들에겐 고작일 수 있지만 거의 하루 종일을 붙어있던 둘에겐 사랑한다는 한마디로 또 한 번의 영원을 약속하는 주문을 만들어낼 정도의 기간이었다. 이제 눈빛만 봐도 뭘 할지 알았고, 또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며 끝없는 설렘을 느꼈다. 나 진짜 설레. 정수랑 같이 갈 수 있어 나도.
"우리 오늘 뭐 할까 지석아."
"음... 바다 보러 갈까?"
바다? 정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정수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좀만 버스 타고 가면 되거든. 근데 너 나갈 수 있어? 정수의 말에 지석은 입을 앙다문다. ...안되겠지? 나도 그냥 해본 말이었어. 눈 구경이나 하자.
"너 퇴원하면."
"응?"
"그때 바다 실컷 보자. 원없이."
정수는 지석의 겉옷을 챙겨온다. 나가자. 기분이라도 내야지. 지석은 본인의 옷을 입혀주는 정수의 머리통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오늘따라... 정수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분명 웃고 있는데 미소가 씁쓸하달까. 기분 탓이려나. 둘은 언제나처럼 산책을 하고 병실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날들과는 다르게 곽지석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날이다. 정수는 늘 병실을 떠나기 전에 작은 메모, 혹은 장문의 편지를 매일 남기고 갔지만 정작 지석은 한 번도 적어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정수와 약속했다. 오늘은 서로 편지를 쓰고, 다음 만남 때 교환하기로.
"은근 낭만파야 정수가. 그치?"
"나도 너 글씨체 궁금한 걸 어떡해."
"못생겼어."
"거짓말. 엄청 신경 써서 쓸 거면서."
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그래도 글씨 못생겼을 수도 있잖아. 실망하지 마. 기대하지도 말고. 지석은 입을 삐죽 내밀곤 눈 사이에 제 발자국을 남긴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정수는 앞으로 걸어가는 지석을 멍하니 서서 눈으로 담는다. 예쁘다. 살짝 목을 덮은 긴 기장의 머리칼과 하얀 목도리. 검정 패딩. 그리고 또 하얀 병원복. 흰 눈속에 담겨있는 지석의 모습이 마냥 예뻤다. 날씨는 영하를 달려간다는데 정수의 입에선 입김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치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하라는 듯이. 정수우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와 나 손 추워. 약간 얼어서 붉어진 볼을 가진 지석이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지석의 시야에서는 정수의 교복에 적힌 노란색 명찰이 너무나 잘 보였다.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김정수. 지석을 치유해 준 사람의 이름 석 자가.
"......"
그때, 지석은 정수를 보고 있어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정수의 시야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꽃이었다. 노랗고 밝은색이라 보통 사람들은 민들레라 오해하기 쉽지만 김정수는 저 꽃이 무엇인지 안다. 한번 본 게 아니니까. 몇 년이고 반복해서 봤으니까. 밝고 예뻐서 메리골드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었다. 그것은 지석의 근처로 몇 송이나 화려하게 펴있었다. 아직 2월 중순인데. 정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아..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그렇네.
"정수우우 나 춥다고 진짜."
"....."
"거기 서서 뭘 보는 거야 대체."
지석은 저 꽃을 닮았다. 겉은 밝아 보이지만 슬픈 내면을 지녔으니까. 또한 우리의 상황도. 지금은 행복해 보이지만 언젠간 이별이 정해져 있다는 게. 애석하게도 참 닮았다. 우리가 그저 민들레 같은 사랑을 했었으면 좋았을걸. 정말 행복만 바라보고 사랑을 했다면. 그랬다면 좀 달랐을까. 슬플 일이 없었을까.
"지석아."
"......"
"난 너 평생 좋아해."
"......"
"네가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
나는 그럴 수 없더라도, 넌 나의 행복을 전부 앗아갔기를.
지석이 불안을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함께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 그리고 병실로 들어오면서 정수는 지석을 그저 바라봤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너무 벅차서, 지석은 불안한 와중에도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병실에 들어오는 햇살이 살을 따스하게 감싼다. 정수는 그늘진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지석은 창문을 연다. 몇 개월 만에 연 창문은 뻑뻑했지만 지석의 노고를 인정해 주듯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는 정수에게까지 닿는다. 정수. 진짜 곧 봄이 오나 봐. 나 병원에서 나갈 수 있겠지?
"자꾸 당연한 소리를 해."
"......"
"넌 무조건 나가."
그날 정수는 본인이 쓴 편지를 두고 갔다. 분명 다음에 교환하기로 했는데 말이야. 지석은 정수가 나간 빈 병실에서 정수의 편지만을 만지작거리며 서랍장에 고이 모셔놨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그랬기에 지석의 서랍장엔 지석과 정수의 편지, 그리고 정수가 여태 적었던 작은 쪽지까지 전부 모여있었다.
봄은 무조건 찾아와 지석아. |
그리고 아무리 해석을 해보려 해도, 그날 정수의 쪽지는 해독이 불가능했다.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퇴원을 곧 할 거니까 축하의 멘트를 남겨준 건지. 그 어떤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 날 이후 김정수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매일 지석을 찾아온 정수를 하루이틀 못 본 걸로 엄살 피우는 게 아니었다. 정말 정수는 자취를 감추고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수와 마지막 산책을 한 그날로부터 이틀 뒤였나, 지석은 퇴원 판정을 받았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5년 동안 끙끙 앓았던 원인 불명의 병이 이렇게 한 달 만에 낫는 게.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기적이라는 게 진짜 있구나.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됐다. 19년 인생을 살아온 곽지석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알려준 김정수가 한순간에 다가온 것도 기적이었고. 지석은 기쁜 마음으로 퇴원을 준비하며 하나둘씩 물건들을 정리하곤 정수를 기다렸다. 누구보다 이 소식을 좋아할 거 같아서.
"지석아 누구 기다리니?"
"....아...... 아니에요."
정수와의 우정을, 사랑을 그 누구에도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어서 정수는 지석만 기억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세상이 흘러갔다. 정수가 안 온 지 5일째 되는 날, 지석은 정수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보며 의사쌤을 찾아갔다. 분명 아빠라 그랬는데. 그래서 내 생일도 안 거였잖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설마 나한테 말도 없이 서울로 돌아간 건가. 그런 거면 나 진짜 서운한데 김정수.
"....정수?"
"네. 정수가 저 많이 도와줬는데..."
"지석이 네가 정수를 어떻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