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back.jpg
head.png

미랑(美浪)의 인어

연쑤

곽지석은 이상하다.


그것은 김정수가 곽지석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니, 지석을 알게 된 모든 순간에 해당되는 명제였다.


외모부터가 그러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묘하게 물기를 머금은 듯한 동글동글한 눈. 흔한 남자애의 틀을 벗어난, 예쁘게 생긴 애. 첫 만남부터 대뜸 "인간이네?"라고 내뱉던 애. 그때부터 김정수는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곽지석이 '보통'의 인간들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을 거라는 걸.



김정수와 '연애'라는 명목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곽지석은 늘 끝'이라는 단어를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협박도, 투정도 아닌, 그저 곧 다가올 자연스러운 사실을 언급하는 듯한 담담함. 끝을 입에 올릴 때면 곽지석은 늘, "보고 싶다고 하면, 올 거야?"라는 이상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다시 돌아와 줄 거냐'는 애절한 물음이라기보다는, 마치 자신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듯한, 혹은 마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듯한 떠본다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래서 김정수는 종종 생각했다.


그런 이상한 애한테 엮여서는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본인도 어지간히 정상은 아닌 거 같다는 것. 이 모든 비상식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감내하면서도 그에게서 멀어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자신이야말로 어딘가 고장 난 인간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인간이 인어한테 홀렸는데, 빠져나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하는 뻔뻔한 생각을 덧붙여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창백한 피부에 돋아나던 시리도록 푸른 비늘,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감정, 그리고 세상의 이치와는 동떨어진 듯한 기묘한 태도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로이 유영하던 그 몸짓. 곽지석에게는 인간의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물의 흐름처럼 왔다가, 달의 주기에 따라 사라지는 존재. 김정수 자신은 그저 이 세계의 규칙을 벗어난 존재에게 사로잡힌 운명적인 희생양일 뿐이라고. 이 뻔뻔한 합리화는 김정수가 곽지석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으니, 어느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그러니까 이건, 인어에게 홀려버린 18살 김정수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첫사랑 이야기이다.



**



인어.


서울에서 나고 자란 18년 인생 동안, 김정수에게 이 두 글자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김정수에게 인어는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타벅스 로고,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었던 외국 동화책 속의 비현실적인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바다는 커녕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찬 콘크리트 정글에서 살아온 서울깍쟁이 김정수에게, 물고기 꼬리를 가진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발상은 터무니없는 개소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여름마다 뻔질나게 내려오던 이제는 살아야 할 마을의 근간이 인어에 있으며 그 인어를 모시는 마을인 줄 알았다면- 사실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긴 했다- 어린애처럼 드러누워서라도 오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정수의 증조할머니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아득한 옛날. 미랑(美浪)이라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에 자리했던 작은 마을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지독한 역병이 돌았다. 병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생명을 잃은 땅은 메말라 비옥함을 잃었다. 비극이 끝없이 이어지던 그때, 마을 사람들 앞에 푸른 비늘을 가진 인어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죽어가는 인간을 안타깝게 여긴 인어의 축복으로 땅이 비옥해지고, 역병이 퇴치되어 마을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다.”



이것이 미랑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너무나도 흔하고 뻔한 전설의 전부였다. 역병이 사라진 후, 마을 사람들은 그 인어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은 사당을 짓고 '인어 신(神)'으로 모시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마을에는 인어 사당이 존재했으며 매년 마을에선 인어에게 올리는 제사를 지냈다.



한평생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합리적인 사고방식만을 접하며 살아온 김정수에게 이런 마을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18년 동안 익숙했던 힙한 거리나, 밤새 꺼지지 않던 네온사인, 새벽까지 울려 퍼지던 경적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낡은 기와지붕과 고요한 파도 소리, 그리고 해풍에 삭아버린 나무 팻말에 적힌 '미랑 마을'이라는 네 글자뿐이었다.



아주 어릴 적,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배를 쓰다듬을 때 조곤조곤 읊어주던 그 전설은 그저 잠이 오지 않을 때 듣던 자장가처럼 기억의 저편에서 희미해진 지 오래였기에 그저 '미신이겠거니' 하고 무시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김정수는 인어를 모시는 마을. 그 미랑 마을에 처박혔다.



"...괜히 왔네."



김정수는 자신의 인생 계획에 없던 이 이질적인 공간에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 친구 놈들이 그렇게 노래 불러대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이 이는 새파란 바다.



할머니네 내려가서 한 1년 살다 오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을 땐 솔직히 말하자면 좀 절망스러웠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호감을 얻고 모범생 타이틀을 달고 쌓아온 숫제 '커리어'가 있던 김정수에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골 고등학교 생활이 썩 반가울 리가 없었다. 시골 고등학교 생기부가 서울 갓반고 고등학교 생기부보다 좋을 리도 없고.



"할머니, 저 앞에 바다 좀 나갔다 올게요"

"어야, 그 앞에 인어사당 근처만 가지 말그라, 알것제?"

"네- "



마을에 도착한 첫날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당부를 한 귀로 흘리며 대충 발에 슬리퍼를 꿰어신고 대문 밖을 나섰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만 해도 어업을 생업으로 삼으셨기에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항구가 나왔고, 또 조금만 걸어가면 새하얗고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나왔다. 역시나 오늘도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하얀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나온다.



이 마을에 온 이후로 종종 오던 곳이라 길이 그다지 헷갈리지는 않았으나, 이전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와 김정수는 이어가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백사장 모래에 홀로 앉아 있는 한 소년. 새하얀 백사장을 배경으로 한 채 위아래 모두 새카만 옷을 입고 있어 이질감이 들어서인지 소년은 꼭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이 동네에 내 또래의 남자애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정수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미랑 마을은 마을 자체가 워낙 작기도 하거니와 젊은 사람들이 모두 떠난 지 오래라 제 나이 또래의 소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다면 진작에 할머니가 얘기해주셨을 터.



어린애마냥 제 멋대로 솟구치는 호기심을 꾹 누른 채 천천히 다가가 보니 잔뜩 몸을 웅크리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까지 파묻은 소년의 체구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저기,"



살짝 손을 뻗어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자 무릎에 파묻혀있던 고개가 퍼뜩 들린다. 어우씨 깜짝이야. 제가 건드려놓고도 정수가 놀라 한 발짝 물러날 만큼 고개를 들어 올려 김정수를 마주 본 소년은 예뻤다. 그래, 웬 남자애한테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리란 건 알지만 소년은 정말로 예쁘게 생겼다. 다른 말로는 대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눈썹 밑으로 내려와 눈까지 살짝 덮을 정도로 살랑이는 검은 머리칼, 검은 머리칼이 사르륵 흩어지며 나타나는 크고 둥그런 새카만 눈동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봉긋 솟아오르는 애굣살까지. 음,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예쁘게 생겼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소년의 눈동자는 정말 새카맿다. 이 세상에 이 이상 새카만 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까만 눈동자였다. 왠지 마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색이라고 해야 할까. 한참을 미동도 없이 저를 응시하는 소년의 눈을 저도 모르게 한참 마주 응시하고 있자니 새카만 눈동자에 옅은 푸른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인간이네?"

"어?“



푸른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눈동자에 놀라 몸을 뒤로 빼니 말똥말똥한 눈동자가 묘한 호기심을 품고 깜빡인다. 미소년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치고는 꽤 낮은 목소리에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잠시 멈칫한 소년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정수가 붙잡을 새도 없이 백사장 가까이 있는 낡은 기와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정수야, 거 서서 뭐하누"



트럭을 타고 지나던 어르신이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나서야 제가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백사장의 흰모래와 대조되는 새카만 옷, 그리고 그 옷보다도 더 깊은 어둠을 품고 있던 눈동자에 스며들던, 저 멀리 출렁이는 바다의 색을 닮은 푸른 빛.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그 존재는 정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묘하게 낮은 목소리, 예쁘장하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외모. 정수는 홀린 듯 소년이 사라진 낡은 기와집 쪽을 응시했다. 붙잡았어야 했을까? 왜 그냥 보내버렸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소년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로 김정수는 그 소년의 잔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깨어있는 동안에는 낡은 기와집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눈을 감고 잠이 들 때면 어김없이 소년이 나타났다.



김정수의 꿈은 언제나 새하얀 백사장에서 시작된다. 위아래로 새카만 옷을 입은 소년은 언제나처럼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인간이네?"



소년은 매번 같은 말을 던졌다. 그 약한 호기심이 깔린 새카만 눈동자에 옅은 푸른빛이 스며드는 순간, 소년은 일어나 정수를 향해 걸어왔다. 모래 위를 걷는 소년의 발자국은 희미했다. 소년이 가까워질수록 푸른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너는... 대체 누구야?"



늘 질문을 던졌지만, 소년은 결코 대답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소년이 정수의 코앞에 다다랐을 때, 김정수는 소년의 눈동자 속 깊은 푸른색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심해처럼 깊고, 밤바다처럼 차가운 푸른빛. 그 푸른빛에 홀린 듯 소년을 향해 손을 뻗으면 꿈은 산산조각 난다.



산산조각 난 꿈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면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닌가 싶어 손을 뻗으면 그 손을 잡아 내리며 차가운 느낌이 머릿속에 스며들어온다.



"신경 쓰여."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꿈인가 싶어 다시 눈을 감았다 숨을 헐떡이며 깨어나니 창밖에는 이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절었던 것인지 찐득거린다. 어둠이 걷힌 세상에서 정수는 또렷하게 기억나는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메마른 얼굴을 쓸어올렸다. 대체 뭐에 홀린 건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



김정수가 뭐에 홀렸든 아니든,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고 개학 날이 되었다. 김정수가 다닐 학교는 마을에서 버스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였다. 앞서가는 담임의 뒤를 따라 멍하니 걸음을 옮기니 제가 앞으로 지낼 반이 보인다.


3- 3


원체 사람이 없는 시골 학교여서 그런지 반도 4반까지 밖에 없었고 애초에 학교의 크기도 크지 않았다. 긴장하지 말라는 듯 제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담임을 따라 앞문으로 들어가니 수군대는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느껴진다. 악의고 호의고 재고 따지기에도 애매한 순수한 호기심.



"자자 조용히 하고, 다들 주목."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니 웅성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오늘부터 너희와 함께 공부하게 될 전학생이야. 다들 잘 지내주고. 정수야 인사 한번 할까"



정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늘 불편했다.



"어...안녕. 서울에서 온 김정수라고 하고 잘 부탁해."

"정수는... 저기, 지석이 옆에 앉으면 되겠다. 저기 창가 맨 뒤"



선생님의 말에 정수는 시선을 돌렸다.


창가 맨 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그날 봤던 새카만 옷과는 다른 새하얀 교복이지만 알아 볼 수 있었다. 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꿈에서 매일 같이 마주쳤는데 못 알아 볼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거 같은 느낌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교실과는 동떨어진, 어딘가 차갑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 검은 머리칼은 여전히 눈가를 살짝 덮고 있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자리에 다가갈수록 심장이 쿵쿵 울린다. 주변 아이들의 웅성거림도, 창밖의 풍경도 모두 배경음처럼 희미해졌다. 정수는 그 소년의 옆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제야 고개를 돌려 소년을 마주 보았다.


소년은 여전히 창밖, 푸른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했다.


정수는 숨을 들이켰다. 입이 바싹 마른다. 꿈속에서 매일같이 만나 대답을 갈구하던 존재. 이제 현실에서 마주했다.


소년이 아주 느리게,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고개를 돌려 김정수를 마주본다. 마주칠 줄 몰랐다는 듯 당황을 가득 담은 채 느릿하게 커지는 눈동자에 김정수가 오롯이 담겨있다.


드디어 마주한 그 아이의 모습에 김정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만났다, 드디어.



**



김정수를 마주친 게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는지 소년은 종이 치자마자 쏠랑 교실을 나가버렸다. 종이 치자마자 제게 다가오는 아이들로 인해 소년을 따라가지 못한 게 불만스러웠으나 소년의 이름을 알았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책상 한 귀퉁이에 붙어있는 시간표 맨 위에 적힌 이름.


곽지석


지석, 지석. 지석이구나. 이름이 곽지석이었어. 조용히 입을 달싹이며 입안에서 이름을 굴려보았다.



"쌤은 왜 하필 너를 곽지석 옆에 앉히셨대?"

"응?"



자못 불만스러운 듯 제 앞에서 투덜대는 아이의 목소리에 정수의 고개가 갸웃 기울여진다. 원래 사람의 호감은 외모에서 나오는 편이며, 곽지석은 그 호감을 쉬이 살 만큼 잘난 얼굴인데 아이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반에서 곽지석의 호감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닌 듯 싶었다.



"왜? 지석이 무슨 일 있어?"

"..있는 건 아닌데"

"있는 건 아닌데?"



우물쭈물하는 아이를 향해 김정수는 대답을 재촉했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민하던 친구는 너도 미랑 마을에서 왔으니 이야기해 주겠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곽지석, 인어 사당 무녀 할매 손주잖아."

"지석이가?"

"응. 거기 무녀 할매 인어님한테 신벌 받아서 사당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대. 신벌 받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정수 너는 모르지?"

"신벌 받은 건 지석이가 아닌데도?"

"원래 신벌은 핏줄에 내려. 대대로 받는 벌인 거지."



신벌, 무녀, 인어. 세 단어가 어지러이 머릿속에서 뒤엉킨다. 대체 이 마을에서 인어란 뭘까. 만나는 게 빠르겠네. 순식간에 결정을 마친 김정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아이들의 의문 섞인 시선이 꽂힌다. 정수야? 저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무작정 교실 밖으로 나서 지나가는 애를 붙잡았다.



"저기, 혹시 지석이? 어디로 갔는지 봤어?"

"어어, 옥상..일걸?"

"고마워."



계단을 뛰어 올라가 옥상 문 앞에 서니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이게 말이 돼? 그니까 지슥 내가 평소에 정신줄 좀 잡고 살라 했지. 이주연 그게 네가 할 소리냐? 정신줄 놓고 있던 건 지석 너지 내가 아닌데? 아니 어떻게 정신 놓고 있었는데 마주친 애가 내 옆에 앉을 수가 있어?


...이거 내 얘긴가.



"저기, 혹시 그거 내 얘기야?"

"으아아악!! 너 너 뭐야!! ㄷ..다 듣고 있었어..???"



문을 벌컥 열며 묻자 돌아오는 반응이 꽤나 격렬하다. 쟤 저런 애였나. 신비롭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경박스러운 반응에 당황스러워 멍청하게 서 있으니 옆에서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석, 그거겠어?"

"뭐?"

"거, 참 둘 일은 알아서 해결하시고. 난 갑니다."

"저 저 미친 이주연 저거"



도와줘도 지랄이야. 간다. 이주연이라고 불린 남자애가 화이팅 하란듯이 정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문을 열고 옥상을 벗어나 버린다. 지나가면서 하는 윙크는 덤. 쟤는 또 뭐야. 인상을 찌푸리기도 잠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까지 했던 모습은 거짓말이라는 듯 그 큰 눈을 도르르 굴리고 있는 지석의 모습에 정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으.. 지석아? 우리 얘기 좀 할까?"



**



"...일단, 미안."



한두 번 있어 본 게 아닌 듯 옥상에 널브러져 있는 의자를 가져온 지석이 정수에게도 의자를 하나 건내주더니 얌전히 앉아 대뜸 사과부터 했다. 응? 갑자기? 두배로 당황스러워졌다.



"아니..그.. 삿대질하고.. 소리지른거. 당황스러웠지 미안."

"어, 괜..찮아."


근데 난 왜 따라왔어? 넌 나 안 불편해? 그날과 같이 새카만 눈동자가 김정수를 마주 본다. 불편할 게 뭐가 있지. 빨려 들어갈 거 같은 눈동자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여보았다. 음, 웃는 거 보고 싶은데. 뜬금없는 생각을 하며 김정수가 느릿하게 답한다.



"딱히. 난 이 마을 출신 아니라 미신 같은 거 안 믿어."

"미신 아닌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곽지석의 눈에 애굣살이 봉싯 올라갔다 내려오더니 이내 입술이 부루퉁하게 내밀린다. 미신이라는 말이 불편했나 싶어 고개를 모로 기울이니 지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신 아니야, 그거. 진짜 신벌 맞고, 내 옆에 있으면 안 좋은 일 생기는 것도 맞고."

"음, 그래?"

"그래 라고 답할 게 아니지 않아?"



곽지석은 황당해했지만, 김정수는 태연했다. 어차피 이 모든 상황 자체가 비정상적인데, 인어 신벌이니 뭐니 하는 미신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럼 내가 ‘오, 신벌 받은 사람 옆에 있으면 재수 없다니, 지금 당장 도망가야겠네!’ 이래야 하는 건가."

"……."



지석의 입술이 더욱 부루퉁하게 튀어나온다. 안 그래도 통통한 입술이 댓 발 튀어나오니 생각보다 그 모양새가 우스웠다. 좀 귀여운 거 같기도. 무심코 스쳐 지나간 생각에 정수는 멈칫했다. 자신이 곽지석에게 느끼는 감정은 확실히 또래 남자아이에게서 느끼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조차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너 진짜 이상해."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지석이 김정수를 빤히 바라보다 툭 내뱉는다.



"너 아니고 김정수. 내 이름 김정수야."



그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알려주니 고운 미간이 설핏 찡그려진다. 여전히 삐죽이 내밀려있는 통통한 입술과 저를 빤히 쳐다보는 반질반질한 까만 눈. 너 이상해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모습에 김정수는 결국 와하학 웃음 터뜨렸다.



"정수는 왜 이렇게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무모한 거야?"

"둘 다일지도. 그러니까 지석아, 나랑 친하게 지내자."



정수의 뻔뻔한 제안에 지석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정수 진짜 이상해..."



지석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더 이상 정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옥상 위로 들이치는 바닷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김정수는 예감했다. 이 기묘한 소년과 엮이는 순간, 제 인생의 평범했던 궤도는 영원히 수정될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



친해지고 나서의 곽지석은 여전히 이상했지만 꽤나 친밀하게 굴었다. 제게 다정히 구는 김정수가 이상하지도 않은지 아무렇지도 않게 손길을 받고, 또 예상치도 못하게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지석아, 너 숙제 했어?"

"응? 무슨 숙제"

"교과서."

"당연히 했지!"



우쭐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지석의 모습에 김정수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니 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루퉁해진다. 뭐야 왜 웃어!! 아니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자연스러운 것처럼 약간의 사심을 담아 손을 뻗어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을 복복 쓰다듬어 주니 강아지 쓰다듬듯 하는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안 그래도 부루퉁하던 얼굴이 더 찡그려진다. 알았어, 알았어.



"근데 지석아, 너 숙제 되게 빨리한다"

"응? 내가?"

"어. 나도 서울에서 구르다 왔지만 너만큼 문제 빨리 푸는 애는 처음봤어."

"....정수가 교과서만 10년 넘게 풀어봐, 빨리 안 풀리나."



교과서를 10년 넘게 풀었다는 말에 김정수가 멀뚱히 눈을 끔뻑인다. 교과서를 10번씩 푸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10번도 아닌 10년. 멀뚱히 저를 보는 정수의 모습에 눈을 도르르 굴리던 지석이 제가 한 말을 깨닫곤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마루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에 김정수도 그저, 10번이라 할걸 10년이라고 잘못 말했겠거니, 싶었다.


제가 말을 내뱉고도 멈칫하는 지석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정수도 딱히 이상함을 느끼진 않았다.



"...정수, 그 말 기억해?"

"무슨 말?"

"우리 할머니 신벌 받아서, 내 옆에 있으면 안 좋은 일 많이 생길 거라는거."

"기억하지? 갑자기 그건 왜?"

"할머니 신벌, 왜 받았는지 안 궁금해?" 



지석이 고개는 여전히 하늘로 고정한 채 묻는 질문에 김정수의 고개가 갸웃 기울여진다. 딱히? 궁금해한 적은 없는데. 그래? 다들 묻는 사람이 많길래 정수는 왜 안 묻나 궁금해서. 애초에 서울깍쟁이 김정수는 인어의 존재를 믿는 편도 아니었기에 신벌이고 뭐고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지석의 옆에 있으며 안 좋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믿을 이유가 없었다. 알지도 못할 존재가 내린 벌이라는 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고등학생 김정수에게 그다지 중요한게 되지 못했다.


김정수에겐 그거 궁금해할 시간에 입시 준비하고 곽지석 옆에 붙어있는 게 더 중요했으니 궁금해할 틈도 없었다.



"....얘기해줄까."

"안 궁금한데?"

"안 궁금해하니까 얘기해주고 싶어."

"뭐냐 진짜."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정수를 마주 보며 지석이 배시시 웃었다. 애굣살이 봉긋 솟아오르며 곱게 휘어지는 눈이 퍽 예뻤다. 그래서, 얘기해줄 거야? 정수가 못 이기는 척 질문을 던지면 지석의 눈동자가 정수를 보았다 이내 다시 하늘을 본다. 아랫입술을 톡톡 치며 한참 동안 말을 않는 지석의 눈동자는 하늘 저 어딘가를 훑고 있었다.



"우리 마을 전설은 알아?"

"알지. 할머니한테 어릴 때부터 들었으니까."

"음, 그러면 마을에서 인어 신을 모신다는 것도 알겠네?" 



당연히 알지. 김정수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지석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간단히 말하자면 마을에 축복을 내린 인어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마을을 돌보지 않고 도망가 버렸고, 인어의 아버지라는 신이 인어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벌로 인어를 모시는 무녀인 지석의 할머니가 신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거 아버지라는 사람... 꽤나,



"쫌생이 같네."

"뭐?"

"어? 내가 방금 말로 했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김정수가 당황해 눈을 도르르 굴렸다. 아들이 죄졌다고 아들을 모시는 이에게 대신 벌을 내린다는 건 신이고 뭐고 하나도 믿지 않고 살던 김정수에겐 꽤나, 쫌생이처럼 느껴졌고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었다.


정수가 내뱉은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던 지석이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몸까지 뒤로 젖혀가며 큭큭 대고 웃는 게 제대로 웃음이 터진 듯한 모습이라 황당했다. 내 말 어디가 웃겼던 거지?



"쫌생이.. 쫌생이 맞는 거 같아. 정수 방금 되게 정확했어."

"아니 그 말이 그렇게 웃겨?"

"어, 완전." 



큭큭대며 웃느라 부드럽게 휜 지석의 눈은 애굣살이 솟아올라 눈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휘어지는 눈에 자취를 감췄다 드러난 눈동자는 검은 밤바다 같던 평소와 달리 햇살 아래 반짝이는 푸른빛을 담고 있었다.


정수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푸른빛은 맑고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빛나며 정수의 시선을 붙잡았다. 웃음이 잦아들었음에도 그 미소의 잔상이 지석의 얼굴에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더, 보고 싶다.

더 웃었으면 좋겠다.



그제서야 김정수는 제 감정이 향하는 방향을 알아차린다.


나, 곽지석 좋아하네.



**



감정을 자각한 뒤 정수가 가장 먼저 선택한 행동은 도망이었다. 홀린 듯 바라보았던 그 눈동자의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김정수는 참 열심히도 곽지석을 피해 다녔다. 스스로 생각해도 비겁한 방식이었지만, 밀려오는 생경한 감정이 찝찝한 얼룩처럼 느껴져 일단은 거리를 두고 싶었다. 잠시 눈앞에서 치우고 보지 않으면, 이 울렁거림도 금세 휘발되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니까, 곽지석이 학교를 안 나오고 김정수를 마주하지 않는다는 건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라는 것이다.



"선생님, 오늘 혹시 지석이 안 와요?"

"응? 지석이한테 얘기 못 들었어?"

"네? 무슨 얘기요?"

"지석이 아마 일주일 동안 학교 안 나올거야. 지석이랑 친해서 연락받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아, 네. 감사합니다." 



원래도 지석의 할머니는 그 신벌인가 뭔가를 받아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였기에, 지석이 곁을 잘 비우지 않았다. 할머니가 주무실 때만 잠깐씩 자리를 비우고 정수와 시간을 보내던 것이었기에, 크게 의문점을 갖진 않았다.



- 지석아, 너 평상에 가디건 두고 갔다.

- 잉? 그래? 내일 가지러 갈게!!



가디건을 찾으러 오겠다는 연락 이후로 감감무소식인 채팅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도, 연락하나 안주냐. 스멀스멀 서운함이 올라오기도 잠시 지석을 먼저 피해 다닌 건 본인이었다는 걸 깨달은 정수는 고개를 들려하는 서운함을 다시 밀어 넣어버렸다.


우중충한 제 기분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시커머니 죽죽한 하늘에선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을씨년스럽게 부는 바람과 쏟아부어지는 굵은 빗줄기. 자연스럽게 또다시 곽지석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곽지석은 정말이지, 취향도 특이한 애였다. 물에 닿는 건 싫어하면서도 물을 어찌나 그리 좋아하는지 우중충한 날씨면 정수, 비 오려나 봐! 하며 기대감에 가득 찬 채 말간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막상 비가 오면 비를 맞으려 들지도 않으면서 지석은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이면 두꺼운 애굣살을 접어가며 눈을 휘어 웃는 지석의 모습이 좋아 보지도 않던 일기예보까지 매일 같이 확인하곤 했다.


한참을 대답 없는 채팅창을 의미 없이 훑다 통화 목록으로 들어가니 최근 통화 목록에 떠 있는 곽지석 이름 석 자와 이름을 누르자 뜨는 통화 버튼.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시선을 돌리니 종이 가방 안에 들어있는 잘 개어진 아이보리색 가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제 집에 놀러 와 평상에서 놀다가 두고 가놓곤 찾아가래도 벌써 며칠째 안 찾아가고 있는 가디건이었다. 저거 줘야하는데...


엄지손가락 하나만 내리면 통화 버튼인데 이상하게 누르기가 어려웠다. 애꿎은 통화 버튼만 노려보고 있으니 상단에 뜨는 통화 알림에 적힌 이름 지석....

응? 곽지석?


다급하게 초록색 버튼을 왼쪽으로 밀어 전화를 받았다.



"...지석아?"

"....." 



조심히 불러본 이름에도 들려오는 답이 없었다. 느릿하게 내뱉는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전화기를 대고 있는거같긴한데 들려오는 답이 없으니 불안해진 정수가 다급히 곽지석을 불렀다.



"지석아, 곽지석.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내가 지금 갈까? 너 지금 사당이야?"

"....정수."

"응, 지석아. 왜 그래. 무슨 일 있..."

"보고 싶어."

"....어?" 



보고 싶어 정수. 작게 내뱉어진 말. 그 토해내듯 내뱉어지는 소리에 김정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당이지? 기다려, 금방 갈게. 대충 가방을 챙기고 가디건이 든 종이 가방까지 챙겨 일어나니 반장의 의문 어린 시선이 따라왔다. 반장, 나 조퇴할 건데 쌤한테 말 좀 해줄 수 있을까? 어, 어어.. 알았어. 떨떠름하게 답하는 반장의 대답을 뒤로한 채 미친 듯이 달려 학교를 벗어났다.


다급하게 오는 버스를 잡아타고 내려서도 우산을 쓰는 둥 마는 둥 하며 바닷가로 내달리니 늘 가던 해변가가 금세 눈에 들어왔다. 거세게 치는 파도. 그 앞에 있는 인어 사당.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인어 사당 앞으로 다가가니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곽지석이 보인다.



"지석아!" 



서둘러 다가가니 곽지석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김정수가 곽지석을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그래, 마치 그날과 다를 바가 없다는 듯이 미동도 없이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지석아? 조심스레 부르자 들어 올려지는 고개. 그리고 마주한 얼굴에 김정수는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멈췄다.


빨려 들어갈 것 같던 새카만 눈동자 대신 두 눈 가득 들어찬 바다의 빛깔. 그 새파란 빛깔의 눈동자가 저를 응시 해오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파란 눈동자에서 간신히 시선을 돌리면 또다시 낯선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뺨 군데군데 돋아난 반짝이는 푸른빛의 무언가. 누가 봐도 비늘이었지만 당황한 머리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새파란 눈동자와 푸른 비늘. 김정수는 굳어버렸다. 머릿속에서는 합리적인 사고와 비현실적인 목격이 날카롭게 충돌했다. 분장이라기엔 너무나 정교하고, 병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푸른 비늘. 그것은 지석의 창백한 뺨 위에서 차가운 바다의 파편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곽지석 너,"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닫아버린 정수가 다가가려 발을 떼자 뒤로 물러나려는 건 줄 알았는지 평소보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정수의 셔츠 끝자락을 붙잡았다. 빗물에 젖어 평소보다 더 창백해진 지석의 얼굴 위로, 푸른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인간의 망막에 맺힐 수 없는, 저 깊은 심해의 압력을 견디고 올라온 태고의 색이었다.


그제서야 김정수는 깨닫는다. 지석에게서 느꼈던 그 기묘함의 정체를. 물을 그렇게도 좋아하면서 남들 앞에선 물에 닿는 걸 꺼리던 그 이유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곽지석은, 인어였던 것이다. 



"정수, 무서워? 내가 괴물 같아?" 



내뱉는 목소리엔 삐죽삐죽 가시가 돋쳐있으면서도 저를 올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인다. 미련하긴 진짜. 정수는 대답 대신 지석의 손을 꽉 맞잡았다. 지석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비에 젖어 차가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온혈 동물의 온기를 잃어버린 존재의 체온이었다. 정수는 가방에서 꺼낸 아이보리색 가디건을 지석의 어깨에 두르고, 가만히 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 바보야?" 



정수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지석의 귓가에 박혔다.



"괴물은 무슨…. 어울려. 괜찮아." 



김정수가 손을 뻗어 지석의 뺨에 손을 얹자 지석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손끝에 닿는 비늘의 감촉은 매끄럽고 서늘했지만, 그 밑으로 느껴지는 지석의 맥박은 분명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었다. 보고 싶다며, 그래서 왔어. 정수는 지석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덧붙였다.


 

"좋아해 지석아." 



머리를 살살 넘겨주며 담담하게 내뱉으니 지석의 푸른 눈동자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힌다. 그 눈물은 빗물과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려, 푸른 비늘 위에서 보석처럼 부서졌다. 지석은 정수의 품에 얼굴 목을 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을의 저주이자 비밀이었던 소년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순간, 18살 김정수의 세계는 완벽하게 궤도를 이탈했다.


과학도 논리도 통하지 않는 이 기묘한 어촌 마을에서, 정수는 기꺼이 인어의 포로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설령 신이 내린 벌을 함께 짊어지는 길이라 할지라도.



"일어나 지석아, 감기 걸리겠다. 응?" 



정수는 지석을 부축해 일으켰다. 거센 파도가 사당 앞 바다를 집어삼킬 듯 들이쳤지만, 소년을 꽉 쥔 정수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인어에게 홀려버린 서울깍쟁이의 첫사랑은, 이제 막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해로 잠겨 들기 시작했다.



**



지석과의 연애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행복했다.


정말, 정말이지 예측할 수 없었고 또, 저만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아이가 사랑스럽기도 했다. 중증이네 김정수. 스스로를 자조하면서도 막상 배시시 웃는 그 얼굴을 마주하면 사랑이 뭐 별건가 싶기도 했다.



정수, 학교 끝나고 뭐 해?



수업을 듣던 김정수의 책 귀퉁이에 자그마한 글씨가 적고는 뿌듯하다는 듯이 턱을 괸 채로 눈을 휘어 웃는 모습은 귀여웠고 애정 표현에 서툴어 좋아해, 라는 말을 할 때면 저도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그 통통한 입술을 움찔대는 건 사랑스러웠다.



"아, 진짜 지석아. 너 왜 이렇게 귀엽냐아.." 



그 모습이 참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워 정수가 지석을 와락 껴안은 채 볼을 부벼대면, 지석은 아, 정수 나 불편해애... 하고 웅얼거리면서도 절대 먼저 밀어내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 애정을 가만히 받아내며 정수의 온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정수에게 스스로가 인어라는 걸 드러내고 난 이후로 둘만 있는 하굣길 바닷가나 사당 뒷마당에서, 지석은 종종 작은 대야에 담긴 물이나 바닷물에 손을 담가 보이곤 했다. 맑은 물속으로 하얀 손이 잠기면, 잠시 후 지석의 손등 위로 시리도록 푸른 비늘이 돋아났다.



"정수, 이것 봐. 신기하지?" 



지석이 기대감에 부푼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으면, 정수는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 끝으로 닿아오는 차가운 물을 느끼며 비늘이 돋아난 지석의 차가운 손등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간질이면, 지석은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며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정수, 우리 헤어지면..."

"너 나랑 헤어질거야? 왜 벌써 그런말을 하고 그러냐"

"아니이, 일단 들어봐봐 헤어진다는 게 아니구."

"그러면?"

"헤어지고 나서 내가 보고 싶다 그러면 올 거야?" 



무슨 질문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지석을 바라보니 가만히 저를 응시하는 새카만 눈이 보였다. 종종 그 새카만 눈에 스미곤 하던 푸른빛을 생각하며 가만히 손을 뻗어 뺨을 쥔 채 눈가를 쓸어내리니 큰 눈이 느릿하게 깜빡인다. 갑자기 그건 왜? 의아하게 물으면 아 얼르은 대답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은 머리통으로 어찌나 생각이 많은지, 새카만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봐도 그 속내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대뜸 묻는 질문이었으니,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 기울이던 정수는 저를 툭툭 치며 재촉하는 지석의 손길에 선선히 대답을 내놓았다.



"응, 갈 거야."

"진짜?"

"당연하지. 네가 보고 싶다는데 가야지." 



지석이 보고 싶다 하는 말엔 단순히 얼굴을 보고 싶다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았기에 정수는 그다지 망설이지 않았다.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식의 직설적인 애정 표현에 유독 서툰 지석이었으니 어쩌다 마음을 먹고 '좋아해'라는 말을 뱉을 때면, 하얀 얼굴을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겨우 내뱉곤 했다. 그런 지석이 하루에도 몇 번씩 보내는 보고 싶어라는 말의 무게를 알기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도, 지석은 강박증처럼 이 관계의 끝을 입에 올렸다. 우리가 헤어지면, 헤어지고 나서, 다 끝나고 나서, 끝이 나면. 참 다양한 형태로 끝을 입에 올리는 지석의 물음에도 정수는 늘 망설임 없이 답했다. 대개는 지석의 물음에 긍정을 표하는 답이었고, 때로는 부정이기도 했으나 늘 결론은 단 하나였다. 김정수는 곽지석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


김정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을 때마다 지석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정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배시시 웃고 있었지만, 지석의 눈에는 어쩐지 알 수 없는 일렁임이 스쳤다. 마치 넘쳐흐르는 마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사람처럼.


그 대답이 지석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그때의 김정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대답이 지석의 마음에 들었길 바라며, 저를 바라보던 그 눈을 사랑이라 이름 붙였을 뿐이었다.



곽지석과 보내는 시간들은 너무나도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물거품처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위태로운 구석이 있었다.


제게 끝을 입에 올리던 그 순간부터 지석은 종종 넋을 잃고 제 손등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 손등에 물이 묻어 비늘이라도 돋아날 적엔 한참을 미동도 없이 멍하니 손등만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버릇처럼 방싯방싯 웃고 다니던 아이가, 가끔은 정수가 닿는 곳마다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지석아, 어디 아파?" 



걱정스레 물으며 손을 뻗으면, 지석은 제 손을 뒤로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까만 눈동자에는 정수가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종류의 슬픔이 눅진하게 고여 있었다. 그게 단순히 몸이 좋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균열은 김정수의 생각보다 더 깊었다. 비가 오던 쏟아지던 어느 날, 정수는 지석의 낯선 뒷모습을 보았다. 지석은 쏟아지는 빗물을 정면으로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김정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익숙한 뒷모습이었으나, 지석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지독하리만큼 생경했다. 김정수가 알던 곽지석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정수가 결코 발 들일 수 없는 세계에 사는 낯선 이가 서 있었다.



그 순간 이후, 지석은 정수의 애정 표현을 가만히 받아내면서도 결코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 마치 넘어선 안 될 선이 있다는 듯이 굴었다. 아무리 애정 표현을 하고 좋아한다 해도 지석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정수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할 뿐, 꽉 다물린 입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김정수는 막연한 불안감에 지석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지석의 마음이 어떤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마음 그 한 자락조차 내 보이지 않는 지석에게 정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김정수가 곽지석에게 제 마음을 꺼내 보였던 그날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창밖을 보던 지석이 마치 오랫동안 참아온 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앞뒤 맥락 없이 뜬금없이 내뱉는 소리에 김정수는 멀뚱하게 곽지석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비가 오는 하늘을 바라보던 지석이 멍하게 처마 밖으로 손을 뻗어 손끝에 빗물이 닿으니 푸른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고요히 하늘을 바라보는 지석이 순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정수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잠시만 지석,"

"그래, 이건 위험한 건데. 그치?"

"뭐?"

"응 이게 맞는 거야." 



곽지석 너 지금 무슨.... 정수의 말끝이 흐려지자 창밖을 향해있던 지석이 정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고개를 돌려 어느 순간 마주한 지석의 얼굴에서 갑자기 지독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늘 저를 응시하던 반질반질한 까만 눈에 옅은 푸른 기가 돌기 시작해 정수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니 지석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긍정보단 그래, 씁쓸함에 가까운 게 맞았을 것이다. 무어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지석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절대 긍정적인 방향이 아님을 알았기에 정수의 손이 다급하게 지석의 손목을 잡아챈다.



"그러니까, 정수." 



지석의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이는 순간, 김정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늘 지석이 입에 올리던 끝이 기어코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는 것을 짐작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워서, 그래서 더 잔인했다.



"우리 헤어지자." 



이별이었다.



**



기어코, 이별을 고하던 날, 멍청하게 서 있던 김정수를 뒤로한 채 곽지석은 미련 한 조각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잠시 발을 디뎠던 방문객처럼,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모두가 지석을 기억하지 못했다. 인어 사당 무녀에게 손주가 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곽지석이 사라진 그날부터 김정수는 매일 같이 인어 사당을 찾아갔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김정수는 미련하리만치 매일같이 서 있었다. 혹시라도 그 애가 다시 문을 열어주지는 않을까,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을 반복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석의 존재가 흐릿해지고 무녀에게 손주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워져 갈 때, 오직 김정수만이 그 텅 빈 공간을 지키며 지석의 흔적을 붙들고 있었다. 김정수가 인어 사당 앞을 찾는 걸 멈춘 것은, 이주연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래, 이주연. 지석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던 어쩌면 지석처럼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그 존재.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김정수는 인어 사당을 찾았다.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고, 파도가 거세고. 위험하다며 모두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던 그날에도 김정수는 인어 사당으로 찾아갔다. 비가 오는 날이니 더더욱 가야만 했다. 비 오는 날을 특히 좋아하던 지석이니 올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그거 하나만을 바라보고 인어 사당 앞에 우산 하나 없이 멍하니 서있었다.



"...뭐야, 진짜 있네." 



헛웃음과 함께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시선 끝에 누군가 걸린다. 뒷목께에서 찰랑거리는 익숙한 검은 머리. 이 세상의 흔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도 단 하나도 젖지 않은 채로 김정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주연."

"정수, 그러고 있는다고 지석이 돌아오진 않아"

"넌 알고 있지." 



질문도 아닌 확신에 가득 찬 그 말투. 그 말투에 이주연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아니, 넌 알고 있어. 그 완성되지 못한 문장에도 제게 대뜸 건네지는 말의 부사어를 알아차린 이주연이 가만히 김정수를 응시한다. 어느새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김정수의 의도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천천히 훑어내리다 하,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곽지석도 대단해, 이런 애를 잘도 두고 갔네.



"응, 알아. 곽지석 어디있는지" 



지석을 육지로 끌고 나온 게 나니까, 어딨는지도 당연히 알지. 느릿하게 내뱉어지는 대답 뒤에 따라붙는 말에 김정수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찡그려지는 얼굴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보던 주연이 어깨를 으쓱한다. 



"무녀가 신벌 받은 얘기는 들었어?"

"...어. 들었어."

"인간하고 사랑에 빠져서 도망간 그 인어, 그거 곽지석네 형이거든." 



전혀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존재에 정수는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석이 몇 번 언급하지 않았던 그 존재. 언급할 때면 껄끄럽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던 존재. 그게 지석의 형이었다.



".....그게, 정말이야?"

"내가 정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잖아? 아무튼, 정수도 곽지석 성격 알잖아. 쓸데없이 정 많고 가여운 걸 잘 지나치지 못하는 그 성격. 곽지석은 형 대신 분노한 제 아버지의 화를 받아내어 신벌을 받게된 그 무녀아이가 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어."

"그래서, 네가 곽지석 보고 육지로 올라오라고 한 거야?"

"어. 그 무녀 아이가 그렇게 가여우면, 네가 직접 올라와서 돌보라고." 



....그럼, 지금 곽지석은 어디에 있어?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묻는 정수를 향해 주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완곡한 거절의 표현. 지석의 행방을 알려 줄 수 없다는 그 표현에 김정수는 다급하게 이주연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제발, 주연아.



"정수, 지석이 육지로 올라오면서 스스로 결심했던 게 뭔지 알아?" 



나직하게 묻는 주연의 목소리에 정수의 입이 벌어진다. 제발, 정수는 제 머릿속에 불현듯 스치는 불길한 예감을 놓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니어야 해. 거세게 주연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내리꽂힌다.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정수를 꿰뚫는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신은 정수를 돕지 않았다.



"인간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그게, 지석이 스스로에게 건 족쇄였어.



**



이주연이 저를 만나고 돌아가고 난 이후로 괜찮았냐 묻는다면, 빈말이라고 그렇다라는 대답은 나오지 못했다. 나올 수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이별을 고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곽지석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으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세상은 곽지석이라는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심하게도 잘 돌아갔다. 김정수의 삶 또한 보란 듯이 매끄러운 궤도를 그렸다. 시골 마을에서도 늘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던 김정수는, 곽지석의 부재와는 상관없이 목표했던 대학에 안착했고 남들만큼의 성실함으로 대학 생활을 채워 나갔다. 모두가 김정수를 '갓생'을 사는 모범생이라 칭했으나, 정작 김정수의 시계는 지석이 증발해 버린 그날,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단 한 칸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김정수의 시간은 18살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었고, 눈을 뜨면 스스로가 서울이 아닌 여전히 미랑 마을에 있다는 착각까지 하곤 했었다. 살아 있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숨 쉬고 걸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덧없이 이어지던 삭막한 나날 속, 앞뒤 다 잘라먹은 한 문장이 적힌 엽서가 도착하고 나서야, 김정수는 그 멈춰버린 시간에서 움직였다.



보고 싶어.


앞뒤 다 잘라먹고 딸랑 적어 보낸 네 글자가 적힌 바다가 그려진 엽서 한 장이 김정수의 앞으로 도착했다. 발신인에 주소조차 없던 그 엽서. 마치 파도에 실려 온 것처럼, 혹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김정수가 확인하리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 현관문에 꽂혀있었다. 곽지석이 처음 김정수를 만났던 그날처럼. 정말 우연히도.


엽서를 뒤집자마자 보이는 네 글자에 김정수는 헛웃음을 터뜨린다. 제게 보고 싶다고 할 사람은 오로지 단 한 명뿐이었으니. 이게 곽지석이 아닐 리 없었다.



뻔뻔함을 넘어선 무신경함.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린 주제에, 마치 잠시 외출이라도 했던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김정수는 이 모든 것이 곽지석답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이기적이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와, 곽지석...."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를 끝으로 홀연히 사라져 놓곤, 단지 '보고 싶다'라는 부름 하나 보내 자길 찾아오라는 그 뻔뻔함. 그 무책임함이 우습게도 김정수를 끌어올렸다. 그 뻔뻔함마저도 사랑스러워 김정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이내 그 짧은 문장 안에 담긴 곽지석의 사랑을 멋대로 짐작해 본다.


곽지석은 '사랑한다'라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서투르다는 것에 가깝다는걸, 김정수는 알았다. 지석에게 '보고 싶다'라는 말은 '곁에 있고 싶다' '좋아한다'라는 의미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 곽지석의 방식으로 표현된 러브레터임을 김정수는 알고 있었다.


엽서를 든 김정수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 보고 싶어 네 글자의 적힌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곽지석은 '돌아올 거야?'가 아니라, '올 거야?'라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 김정수는 대답한다.



"받아들이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했어 지석아." 



인어에게 홀린 인간은, 결국 인어가 머무는 깊은 물 속을 향해 기꺼이 발을 들일 준비를 마쳤으니, 비정상적 사랑 이야기의 귀결이었다.


로고(화이트).png

2025 jungsu jiseok 1st collaboration : Love letter all right reserved.

© 2035 by Joel Brown. Powered and secured by Wix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