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리크리스마스
사바
근데, 웬 반지?
그냥. 손가락은 항상 비어있길래? 또 뭐라고 했더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날은 추운 겨울인데도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었고. 너는 검지에 반지를 끼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나는 끝내 그 반지를 우정반지라고 우기다 ... 괜히 술도 잘 못하는 너에게 생일주를 말아줬었다. 막걸리에 맥주를 섞었더니, 거품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잔을 보곤 둘다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걸 어떻게 마셔요. 불평하는 척 하면서도 한 입에 잔을 털어 넣던 너를 보며 끝내는 한마디 했다. 야, 너 진짜 애가 왜 이렇게 무식해. 뭘 또 다 마셔 이거를. 술 한 잔 마셨다고 목까지 벌게진 너는 내 말에 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그랬다. 뭐야, 먹으라고 준 거 아냐?!
생일 축하해 지석아. 지겹다... 몇 년 째야?
지겹긴 무슨. 맘에도 없는 말을 하고. 익숙하다는 듯이 웃고. 정해진 순서처럼 초를 불고 두 손 모아 소원을 빌었다. 뭐라고 빌었어? 안 돼. 말하면 안 이뤄진대. 예쁘게 눈꼬리 접어 웃는 곽지석 얼굴을 마주보고 따라 작게 웃는다. 바보같다 진짜. 아, 이번엔 또 뭐가.
그 짧은 사이에도 나는 몰래 니 소원에 내 이름 세글자를 욱여 넣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인 너를 따라서 그냥 웃고만 있다. 아니, 너 말고 내가 바보같다고. 정수가 작게 중얼거렸더니 지석은 또 그런 제 속도 모르고 웃었다. 김 정수 바보같은 거 하루 이틀인 줄 아나. 야 죽을래? 아, 장난이잖아.
다음 생일 선물 기대해. 지석은 자연스럽게 또 다음을 기약한다. 응. 나 진짜 기대한다. 정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실은 두 사람으로 엮인 기념일이 앞으로 몇 번이고 남아있다는 생각에 속으론 무지 기뻤으면서. 김정수는 매사에 솔직하지 못했다.
3학년 2학기. 김정수는 미루고 미루던 군입대를 택했다.
김정수는 훈련소에서 사격훈련 1등 먹고 전화 3분 따내자마자 곽지석한테 전화를 걸었다. 기억하는게 맞다면 아마 지석은 수화음 두 번 만에 전화를 받았었고.
'김정수?'
처음보는 번호로 갔을텐데도 다짜고짜 제 이름을 불러왔다. 진심 살짝 눈물 날 뻔. 그래서 그때 내가 제일 처음 했던 말이 뭐더라. 아.
"보고싶어."
지석이 매일 같이 세 통씩 보냈던 인터넷 편지. 정수는 훈련소 2주차에 처음으로 답장으로 손편지를 썼다. 너 진짜 군면제인 거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 너 몸이 어디가 안 좋다고 했었지? 너 아픈 거 다 구라지... 진심 8월에 입대한 건 실수야. 너무 더워... 내가 이런 미친 실수를 하다니. 주말에 교회가면 싸이버거 줌. 나 사격 1등 먹었다. 포상으로 전화 할 수 있대. 다음주에 전화 걸 게. 안 받으면 죽임. 그리고 또 주저리 주저리... 하루 일과를 빼곡하게 기록하고 나서 늘 마지막엔 이렇게 적었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진 않은데 ... ...
그래도 여기에 니가 오진 않아서 다행이야.
처음으로 백일 휴가 받자마자 만난것도 곽지석. 진짜 지겹게도 봤다. 일주일을 꼬박 보고 부대로 복귀하던 날 버스터미널 2층 엔제리너스에서. 지석이 할 말이 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조금 갑작스러운데.
나 잠깐 미국 다녀오려고.
응? 뜬금없이 미국을?
어쩐일로? 갑자기 미국은 왜. 베레모 고쳐쓰면서 물었더니 지석이 크게 박장대소 했다. 와 방금 그거 완전 군인같애. 군인 같은 게 아니라 군인인데... 그런 시덥잖은 말도 했었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했었더라.
얼마나 그 순간을 곱씹었는지 대사 하나하나가 잔상이 아니라 이젠 영상처럼 머리에 박혔다. 한번 따라 해봐. 눈 끝에 손을 대고, 손바닥이 보이면 안 돼. 자, 이렇게 ... 충성. 그러면 좋다고 웃으면서 넘어가는 곽지석을 떠올리는 일은 아직도 조금 괴롭다. 아무튼 간에...
"그냥... 요즘 준비하는 거 안 풀려서 여행 좀 다녀오게."
김정수는 이 순간을 매일같이 후회했다. 취준생이 무슨 여행이냐며 다그쳤어야 했나. 아니지, 누군 군대에 있는데 치사하게 여행이나 가는 거냐고 고집이라도 부렸어야 했다. 당연히 대답은 뭐,
맘 편히 쉬다와. 그래서, 출국은 언젠데?
당장 내일. 나 추진력 미쳤지.
뭐? 야 씨. 너 혼자 보내는 거 못미더운데. 막, 길 잃고 그러는거 아니겠지.
야. 그래도 나 낼모레면 스물 셋인데 이제.
그래봤자 고졸 아냐?
에이씨.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일학년 때 회화 수업 좀 잘 들어 두는 건데. 나 그거 에프 맞아서 재수강 했잖아. 김정수는 좀 레전든데...? 나는 그래도 디제로 맞았거든? 진짜 둘 다 수준하고는... ...
모든 대화는 지루할 정도로 가벼웠다. 그리고 모든 헤어짐이 그렇듯 어색하게 손인사나 주고 받으며 부대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었다. 출국하기 전에 연락 남겨. 나 폰 여섯시에 받으니까 그때라도 답장할 게. 지석은 입꼬리 당겨 웃으면서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 나갈 때까지 연신 손을 흔들었다. 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그때라도 추우니까 먼저 들어가라고 말 하는 편이 좋았을 걸, 하고 또 후회했다. 지금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으려나. 터미널을 빠져나가는 버스 창 너머로 작아지는 곽지석을 떠올리는 일은 여전히 제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2023. 12. 13.
오후 18 : 02
핸드폰 받고, 전원 켜고. 익숙하게 데이터를 켜는 와중에 상단바에 급하게 알림이 우수수 들이쳤다. 메시지 28통. 부재중 전화 13통. 수신인 엄마. 건일이 형. 학생회 사람들. 그리고 제일 먼저 뜬 메시지 미리보기. 새로운 카카오톡 메시지가 있습니다 ...
정수야 진짜 어떡하냐
포털사이트 제일 상단에 걸린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시카고행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폭발해 인근 섬에 추락. 현재 사상자를 파악하고 있다고.
김정수는 끝까지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지석이 카톡으로 보냈던 항공편. 기사 속 항공편과 일치함을 알았을 때 까지도 곽지석은 늦잠을 자서 분명히 비행기 시간을 미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연신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분명 비행이 길어지는 탓에 아직 회신을 하지 못했으리라고 단언했다. 현실 감각이 무뎌짐을 느꼈을 때 쯤, 더이상 이 일에 대해 알아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주변에서 온 연락을 확인하기엔 당장 겁이 났고, 흰 바닥에 부어진 검은 글자를 정신없이 읽기만을 몇시간 째 반복했더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돼서 그랬다.
그렇게 꼬박 나흘 째. 훈련 도중 부대장이 정수를 부르면서 그랬다. 어머니께 연락을 받았다고. 삼일장이라고 들었으니 꼭 삼일 째 오후에는 부대로 복귀해야한다는 말도 전한다. 정수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로 되 묻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물으니 부대장이 퍽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러더라.
지석이라는 친구,
꽤 친한 친구라고 들었는데.
2023. 12. 16.
꽤 친한 친구
수일만에 뵌 지석의 어머니는 몰라 뵐 정도로 얼굴이 야위어있었다. 그리고 미처 갈아입지 못한 정수의 군복 자락을 붙들고 한참 동안을 흐느껴 우셨다. 김정수도 그제서야 꾸역꾸역 참았던 눈물을 뱉어냈다. 지석의 사고 소식을 들은지 4일만의 일이었다.
훼손이 심해서 신원파악이 어려웠다고 했다. 인솔 후에 손가락을 확인했는데, 그때 반지 안에 박힌 이름 각인을 보고나서야 신원확인이 됐다고.
김정수는 그날 태어나 처음으로 한나절을 내내 목놓아 울었다. 앞에 놓인 영정사진 속 지석이 너무 따뜻하게 웃고 있어서. 사진은 스물하나 겨울무렵에 이런저런 핑계로 함께 찍은 증명사진. 여권 사진이 맘에 안 든댔나. 과제하기 싫은데 사진이나 다시 찍자고 그랬던가. 이유가 어찌 됐든 같이 사진관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증명사진 하나씩 나눠 갖고 있으니 사진사 아저씨가 서비스라며 우정사진도 찍어줬었다. 그 사진 아직도 지갑 안에 있는데. 아, 그 지갑도 지석이가•••. ...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억 속에는 어디에나 지석이 있다.
2023. 12. 23
전역
정수는 지석의 흔적을 지우기 보단 지워질까 두려워 더 악착같이 곱씹고 끌어 안는 쪽을 택했다.
이 날 김정수는 복무부적합 사유로 조기전역했다. 부대에 복귀한지 삼일차에 군 병원에 실려갔다가 내려진 결정이었다. 우수병사였던 김정수가 모든 훈련에서 열외 되자 보다못한 동기와 선임의 요청도 한 몫 했다고 했다. 정신적으로 너무 아프고 피폐했다.
어머니는 정수가 당장 본가로 돌아오길 원하셨지만, 정수는 일단 무작정 제 자취방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책상엔 휴가 때 지석과 함께 했던 부루마블 판이 그대로 널린 채다. 쓰레기통엔 급하게 나가느라 분리수거를 잊은 주스 병과 과자봉지가 나뒹굴었고. 항상 함께 시켜 먹던 단골 빙수집의 도장판이 발 끝에 어지럽게 채였다.
빙수가 먹고 싶다던 지석의 말에 한겨울에 무슨 빙수냐며 핀잔을 줬었는데. 그게 고작 열흘 하고 하루 전 일이라는게 믿기지 않아서 별안간 눈물이 뚝 멎었다. 실감이 안 나.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내려치다 끝에는 연신 딸꾹질을 했다. 매일이 그저 꿈 같다. 아무래도 그렇지. 당장 곽지석이 없는 세상이 현실일 리 없으니까.
2023. 12. 24
D-day
그래. 아무튼 이 이야기는 꿈에서 깬 현실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곽지석이 없는 꿈. 울다가 지쳐 잠든 정수가 눈을 뜬 건 제 자취방 바닥 한 가운데였다. 지금이 몇 시지. 온통 캄캄해진 방 안에 어정쩡히 앉아 손은 부지런히 핸드폰을 찾는다. 아 어디에 있는 거야.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었다.
아, 깼어?
"으응."
느릿하게 대꾸했다. 여전히 손은 바닥을 뒤적거리는 와중이다. 어딨지 진짜... 지석아, 불 좀 켜볼래? 어 잠시마안...
탁ー. 소리를 내며 환해진 방 안에서 기어코 핸드폰을 찾아낸다. 방석 밑에 들어가 있으니까 못 찾았지... 중얼거렸더니 지석은 와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야, 이게 뭐라고 웃겨... 따라 웃으며 시선을 옮기려다 끝내 정수는 그만 우뚝 멈춰버리고야 만다.
아직 웃음기가 서려있는 입꼬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급하게 다른 한 손을 들어 볼에 남은 눈물자국을 쓸어내니 질척한 온기가 손끝에 스몄다.
뭐지,
꿈이 아니네.
잠시 동안은 안도했다.
이내 숨을 꾹 참은 가슴께로 심장이 불안하게 내달렸다. ... ... 꿈이 아니야? 끝내는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더라. 불안한 심장 소리가 귓가를 윙윙 맴돈다. 톡,탁,톡,탁 이질적인 시곗바늘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것만 같다. 살짝 그러쥔 손아귀에 어느새 땀이 조금 베였다. 한참을 그렇게 멈춰 서있던 정수가 끝내는 숙였던 고개를 비척비척 들었다.
' ...꿈이 아니라면...? '
별안간에 아랫턱이 벌벌 떨려 이가 탁탁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입 아귀가 맞지 않는 것처럼 잇새가 벌어져 떨리는 것만 같다.
...지석아.
근데 너.
어, 왜?
"... ... 너,
죽었잖아."
메리크리스마스
2023. 12. 25
D+001
"빙수에 망고 추가. 빨리 시켜야 돼. 오늘 크리스마스라 늦으면 주문 밀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채근한다. 익숙한 듯 어플 켜서 빙수 담고. 토핑 추가 하고. 옆에서 지켜보던 지석이 이내 흡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주문 눌러봐, 이제 배달시간 90분 뜬다.
"헤엑."
"와... 120분은 너무 한데?"
화면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지석이 포기한 듯 침대에 등을 기댔다. 역시 크리스마스다 이거냐. 내뱉는 음조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다리면 금방 오겠지. 그때까지 게임이라도 하던가.
"시도는 해봤는데, 이거 터치가 안 돼."
"아."
"뭐가 되는지 뭐가 안 되는지 모르겠네."
아 그러니까. 잠시만... 그니까.
정리를 좀 해보자고.
자... ... 우선.
자명하게 '확실한 사실'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곽지석은 죽었다. 24년 12월 13일 상공에서 폭발한 비행기가 태평양 바다 어딘가에 추락했고, 탑승자는 전원 사망. 그 안에 지석이 있었다.
야 ... 진짜 존나 놀랐거든 나도. 눈 떴더니 내 장례식장이더라니까?
비행기 떨어지던 거 까지는 기억나는데. 눈 떴더니 우리 엄마랑 형이랑 울고 있고...
그럼 여기서 질문 첫번째. 왜 이런 상태가 된 건지. 그리고 또,
"왜 내 눈에만 보이는 건지."
"글쎄다."
뭐하나 명확한 게 없어서 정수는 혼란스러웠다. 아직까지도 지석이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걸까. 아니면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지난 밤에는 진지하게 병원이라도 가야하나, 하는 고민을 하느라 지석의 존재를 애써 못 본 척 하기도 했다.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지석은 벨이 울리자마자 제 손으로 직접 현관문 앞에 놓인 빙수를 들고 방에 돌아왔다. 대박 120분 다 개뻥이네. 금방 오는데? 봉투 안에서 익숙한 듯 수저를 꺼내들며 지석이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꿈이나 환영은 아닌 거 같고... ...
"너 확실히 죽은 거 맞지?"
"너도 봤잖아. 화장도 했는데."
2023. 12. 30
D+006
곽지석이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어쨌든 내 눈에는 지석이 보였다. 곽지석은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고, 또 손을 뻗으면 손에 닿는 곳에 있다. 예전처럼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지석은 사고가 하룻밤의 꿈인 것처럼 다시 정수에게 돌아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팔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중학교 때부터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제는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좀 버겁게 느껴졌다. 사고 이후로 지석이 없었던 ー없었다는 말은 조금 웃긴가ー 지난 열흘 남짓의 시간동안 수없이 많이 곱씹었으니까. 그 팔년의 시간이 마치 어제의 일인 것 처럼 뜯어서 되내이고 곱씹기를 반복했었다.
처음으로 야자째고 열두시까지 피씨방에서 뻐겼던 날도. 시험 망쳤다고 몰래 소주 깠다가 걸려서 먼지나게 맞았던 날도. 우산도 없이 한참을 뛰어 함께 집에 돌아오던 날에도 ... ... 철없는 시절 그 어떤 순간을 떠올려보라고 해도 그 모든 순간엔 지석이 있었다.
옆 집 살던 애. 유난히 친했던 이웃집 동생. 심심하면 만나서 놀 수 있는 친구. 조금 지나서 보니 가족. 이를 '꽤 친한 친구'라고 정의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가까운 존재였으니 정수는 지금 당장의 이 모든 일들이 그닥 실감이 안 났다.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곽지석이 공부를 시작한 것도 김정수 때문이었으니 말 다했다. 저, 형이랑 같은 대학갈래요. 단지 이유가 그 뿐이었으니. 마땅한 목표도, 진로도, 앞으로의 계획도 전혀 없이 지석은 진짜로 정수를 따라 서울로 상경했다. 옆집 사는 동생이었던 지석은 같은 빌라 사는 후배가 됐고, 학교에서는 서로 더 친하다 할 동기도 친구도 없이 김정수 옆에 걔, 곽지석 옆에 그 형이 됐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따지는 일은 어느덧 의미가 없어졌다.
지석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응... 모르겠어. 그러고는 또 웃기. 사실 서로 이미 대답은 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대로여도 좋으니까 그냥 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 언제까지고 이대로, 같이 있을 수 있을까. 형만 괜찮다면?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면 ... 형이 좀 슬프겠지. 나는 나이를 먹는데, 너는 안 먹을 거 아냐. 어, 그건 좀 개꿀인데?
자꾸만 머릿속엔 이기적인 생각들이 들어찬다. 지석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땅한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 의미없는 질문을 계속 중얼대면서.
두 사람이 고민 끝에 찾은 곳은 허름한 무당집이었다. 여기가 용하대. 하루종일 머리싸매고 지석을 어떻게 보내줘야 할지만 고민한 끝에 찾아온 곳이었다. 너 일단은 귀신이잖아. 용하다는 무당이라도 찾아가봐야지. 음... 근데 김정수 너 갑자기 들어갔다가 소금이라도 맞으면 어떡해? 그렇게 해서라도 된다면 일단은 맞아야지......
"니 옆에 그 미친 남자 뭐야?"
"아. 제 눈에도 보여요."
아 그래? 다짜고짜 말을 붙여오던 무당이 끝내는 싱겁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옆에 선 의문의 미친남자가 고개까지 젖혀가며 하하하 웃다가 말고 끝내는 좀 찝찝한 표정으로 그랬다. 저기요, 저 미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 지석의 말은 듣는 척도 않고 쌀 한 줌 쥐어 바닥에 펴 내더니 그러더라. 너네 둘다 여기 와서 앉아봐. 이건 사연을 좀 들어봐야겠는데. 예상과는 다른, 어쩐지 조금 미적지근한 반응에 민망해진 두 사람은 잘 짜인 팔색 방석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자는 여전히 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채다.
"넌 어쩌다 바다에 빠져 죽었어?"
"우와. 어떻게 아세요?"
"혼이 아직도 바다에 빠져있으니까 알지."
생에 태어난 날이 얼마나 중요한데. 니 팔자를 보니 꼬일 대로 꼬였네... 너같은 애들 한 평생 물 조심하라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우와, 진짜요? 그럼 가짜겠니. 너는 보니까 ...
"원래 진즉 죽었어야 됐는데."
"헤엑."
면전에 대고 한다는 소리가 이런 무서운 소리라니. 지석이 입 턱 막는 시늉하면서 그랬다. 귀신이 면전이 어딨어? 듣다보니 것도 맞는 말 같아서 끝내는 고개를 끄덕. 그건 또 그렇네요. 얼굴 면상은 없지만서도 남 말은 잘 듣는 귀신이 착하게 앉아서는 귀를 기울인다. ... ... 그러니까 하고 싶으신 말이 뭐예요? 듣자 하니 곽지석은 진작에 죽을 운명이었다나. 원래 죽을 날 받아 놓고 태어났는데 더 살아서 그렇대. 그니까 제가 왜요?
"원래 운명을 바꾸기도 하고 그래."
"운명을 바꿀 수 있는데 저는 왜 죽었어요?"
"얘, 너는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다니까?"
아니이. 그러니까!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면서요... 근데 왜 저는 물에 빠져 죽은 거냐구요. 지석이 끝내는 조금 답답한 듯 묻는다.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거였다면, 도대체 어떤 운명을 거슬렀기에. 지석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 아가. 너는 어차피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다니까 그래? 그 자체의 사실은 못 바꿔.
"방법만 니 생(生)이 선택하는 거야."
바다에 빠져 죽든. 강에 빠져 죽든. 접시에 코를 박고 죽어도 물에 빠져 죽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 방법만 니가 선택하는 거고, 운 좋게 좀 더 살았다 싶은 거지. 원래는 진작에 죽었어야 됐다니까 ... ... 당최 답이 나지 않는 대화에 정수는 조금 당황했다. 도무지 끼어들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얼떨떨해 하고 있으려니 여자가 대뜸 그러더라. 아님 물에 크게 빠진 적 있나 생각해봐. 그때 액땜 한 번 했을 수도 있고.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럼 니 주변에 이름에 물, 들어가는 사람있어?"
뭐든 좋아. 물의 기운을 줄 수 있는 거... 자, 이제 한자의 기원으로 거슬러가면 물이라는 거는 말이야 水수 변을 쓰는 것 전부 물에 포함이 되는데 ... ...
물 ... ... 수,
"음... 김정수?“
얘요. 그러면서 대뜸 정수를 가리키는 거다. 응? 그리고서는 그래서, 뭐요? 하는 표정으로 지석이 어깨를 살짝 으쓱였더니. 그런 지석을 흘끔. 정수를 흘끔. 연신 번갈아보던 무당이 끝내는 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 큰소리로 웃어 버렸다.
아, 잠깐만 잠깐만. 이거 흥미가 좀 생긴다... 얘...
"너 이미 물에 빠진 적 있는 거 같은데.“
또 다시 상에 놓인 쌀을 한 움큼 쥐어 책상에 뿌려내며 그런다. 너 성불해야겠네. 성불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얘, 사람이 말하면 좀 끝까지 들을래? 요즘 귀신새끼들은 왜 이렇게 엠지하니. 죄송합니다. 지석이 민망한 듯 뒷머리 긁적인다.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았으면 제 때 못 간 건 지 내가 다 궁금하네.
"김정수?"
"어, 네."
"여기 니 이름 한자로 두 자만 써 봐.“
정正수洙. 바를 정 자에 물가 수자를 쓴댔다. 애당초 살면서 제 이름 한자로 몇 번이나 써봤겠냐고. 주머니 뒤져서, 지갑 꺼내서. 주민등록증 이름 옆에 적힌 한자 보고는 삐뚤빼뚤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턱 괴곤 그 꼴 내려다보고 있는 무당이 쌀 한톨 한톨 옮기다가 말고는 픽 웃었다. 너 뭐하니? 아 쓰라고 하셔 가지고... 응, 그래 마저 써라. 그렇게 삐뚤한 글자로 마지막 획을 그었더니, 그 새를 못 참고 여자가 또 하하하하 웃었다.
톡톡. 종이 위에 눌러 쓰여진 획을 따라 툭, 손을 가져다 대면서. 이름에 잘 안 쓰는 한자인데... 작게 읊조리다 다시 지석을 보면서는 그러더라.
응, 너는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나보네 ...
"원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했다 싶을 때. 부적 하나 써줄테니까 그거 같이 태워."
"저 하고 싶은 일 많은데 ... 일단 부자 됐어야 했는데 못 됐어요."
에흐. 확실히 보니까 이 남자 제 정신은 아니야... 여자가 끝내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혀를 쯧 찼다. 아 농담이에요. 붙어오는 지석의 말엔 이제 마땅한 대꾸도 않고 여자가 바삐 글씨를 써내려간다. 시간 많이 없어. 이러다 평생 떠돌다가 너한테 해 입힐지도 몰라. 그리고,
"안부 인사는 꼭 제 때 해놔. 괜히 보내놓고 다시 찾아오는 애들 꼭 있다."
2023. 12. 31
D+007
우리 바다보러 갈래?
먼저 말을 꺼낸 건 지석이었다. 바다? 그럴까? 생각해보니 우리 한번도 같이 바다 본 적 없네. 정수의 말끝에 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벌써 몇 년 짼데 새해에 일출 같이 보는 거는 또 처음이네. 그러게 이거 너랑 해보고 싶었던건데... ...
무작정 두 사람은 동해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정수는 목도리까지 칭칭 감아맸지만 지석은 얇은 후드 차림이었다. 미국 가는데 뭔 후줄근한 후드티만 덜렁 입고 갔어? 거기 날씨 어떤지 몰라서 가자마자 사 입으려고 아무거나 입었거든. 너 안 추워? 물으니 고개만 연신 끄덕이다가 그랬다.
"나 추위 이런 건 하나도 안 느껴져."
아 맞다... 너 죽었지. 진심으로 한 말 이었는데 지석은 또 숨 끊어질세라 꺽꺽 웃으면서는 그랬다. 아 진짜 나도 이게 뭔가 싶은데.
"너랑 같이 있으면 나 죽은 거 계속 까먹게 돼."
곱씹자니 무서운 말이었다. 그럼, 그렇게 그냥 잊은 채로 있으면 안 되나. 덜컥, 그런 무서운 욕심이 드는 말. 혹시나 내가 정말 미친 건 아닐까 ... 정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이제 앞으로는 '원래 있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지석이 없는 게 자연스러운 시간을 나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 이렇게 너를 곁에 두고, 계속 보고 싶어서 보내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1월 1일. 이 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같이 일출을 봤다. 너랑 몇 년을 봤는데 왜 같이 바다에 갈 생각을 못했지? 그러게... 바다가 새빨개.
세상이 정신없이 온통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그 사이 머릿속도 복잡하게 엉겨붙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다. 바람이 뺨을 때리다 말고 ... 바다 끝 지평선이 어느덧 불투명한 푸른 빛으로 아득히 잠겨 가던 순간. 정수는 별안간 몸을 급히 틀어 지석을 봤다. 야 너...! 급하게 뻗은 손은 차게 식은 지석의 손을 채어 잡는다.
"응?"
"아, 아니야."
니가 갑자기 사라져버릴까봐. 이 말은 끝내 삼켜냈다. 생각을 곱씹다 이내 말하기를 포기해버렸다. 바람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소리가 멎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바다 끝이 아득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대로 너도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아 괴로웠다. 내가 진짜 미쳤나봐. 정수가 혼란스러운 듯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그냥 불러봤어. 너는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나보네 ... 문득 떠오른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파도소리와 함께 아득히 부서져 내려간다.
"지석아."
"으응."
이리와. 그리고는 마른 품을 힘주어 꼭 끌어 안는다. 그대로 품에 안긴 지석도 팔을 들어 정수의 등을 마주 안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저보다 한참이고 작은 지석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고개 들 생각을 못했다.
자꾸만 잔인한 마음이 든다. 이대로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워 미칠 것만 같다. 잔인한 마음이라는 건, 지금 이 슬픈 마음 속에도 너와 닿았다는 것에 떨림을 느끼는 내가 역겨워서일까. 아님 마지막이라는 핑계로 나만 마음 편한 이기적인 선택을 해버릴까봐, 너의 마지막에 내가 친구로도 기억되지 못할까 봐 ... 그렇게라도 내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일까. 자꾸만 그런 잔인한 마음이 든다.
벌써 형도 스물 셋이네. 어, 뭐야 갑자기... 그냥요.
나는 김정수랑 서른에도. 마흔에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날 뒤에도 계속 같이 있을 줄 알았어. 나도. 흘끔 내려다 보는 지석의 얼굴이 노을 따라 붉게 물든다. 지금 이게 꿈일리 없잖아 맞지. 그런 지석의 볼을 저도 모르게 조금 쓸었더니 지석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는 히죽히죽. 크하하. 볼에 닿은 제 손을 놓치기 싫은 듯 제빨리 손을 들어 잡는다. 어느덧 눈꼬리까지 접어 웃는 얼굴로는 그런다.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라는 건... 뭐였을까, 응?
2024. 01. 08
D+015
벌써 지석이 돌아온지 꼬박 보름이 지났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곽지석을 보내지 못한게. 어느덧 보름 째가 됐다.
그 사이 정수는 자다가도 일어나 옆자리를 확인해보는게 습관이 됐다. 곽지석 거기 있지? 으응.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다시금 눈을 붙일 수 있다. 그러면서 잠이 들기까지 연신 속으로 되내었다. 지석아 갑자기 사라지지마. 지석은 그런 정수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는 듯 연신 마른 등을 쓰다듬었다. 등을 쓰담아내리는 지석의 손이 차가웠다.
"우리 놀이공원 얼마만이지?"
나 고삼 때 이후로 처음일 걸? 지석의 목소리가 어딘가 들떠있다. 그러니까, 근데 ... ... 아. 자연스레 대꾸하려던 정수가 멈칫. 주위를 둘러보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정수에게로 꽂힐 때 즈음. 진짜, 내 눈에만 보이는 거 맞구나. 가끔 이렇게 실감이 날 때면 정수는 또 가슴 한켠이 무거웠다. 곽지석이 진짜 없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마음이 괴로워서 그랬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제는 내게 남은 이 시간이 더이상 길지 않음을 또 온몸으로 체감했다. 이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놀이공원을 떠나기 전, 지석이 마지막으로 적었던 [하고 싶은 일 목록]에 적혀 있던 관람차에 발을 딛으면서 생각한다. 이제 정말 얼마 안남았구나. 실감이 되기 시작하니 괜히 코끝이 조금 아렸다. 눈가가 시큰시큰 올라오는 듯한 기분에 몰래 소매 끝으로 눈을 비볐다. 지석이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는 그런다. 아 김정수 진짜 그만 울어.
"나 보고 싶을 때마다 울 거야?"
속도 좋게 그런 얘길한다. 김정수는 끝내 뚝 눈물을 흘렸다. 곽지석 진짜 이기적이야... 그런 말도 덧붙인다.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해. 죽은 사람 앞에 두고 한다는 소리가 너 이기적이라는 말이라니. 저도 모르게 뱉어 버린 말에 숨을 작게 꾹 삼켜버렸다. 복잡하게 심장이 뛰었다. 곽지석 진짜 존나 못 됐네. 진짜 너무하다. 그런 의미 없는 말 다 접어두고는 그냥 딱 한마디 해버렸다.
"... 내가 너 없이 속 편히 어떻게 살아."
관람차는 정상으로 향한다. 그 사이에 정수는 생각했다. 보고 싶을 거라는 말도. 이제껏 못했던 고백 같은 건 저 깊은 마음 속에 묻어 둬야지. 지석이가 아무런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게. 떠나기 전 마지막 내 모습이 추해 보이지 않게. 지석이에게 그저 좋은 친구로, 형으로 남을 수 있게. 후회없이 이 날들을 추억할 수 있게.
"갖고 싶은 거 있어?“
이제 곧 생일인데. 그 말에 지석이 끝내는 또 작게 끅끅 웃어버렸다. 그러면, 나 이거 혹시 들고 갈 수 있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 걍 돈 내지 말고 어디 뷔페가서 도둑질이라도 함 할까? 뭘 해도 마땅치가 않네 참. 웃자고 던진 지석의 말에 어쩐지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매년 자연스레 함께 했던 서로의 생일에, 올해도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감사해지다니.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게 진짜였나보다.
멍하니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던 정수의 소매를 지석이 잡아 끌었다. 밖에 봐봐. 사람이 엄청 조그만해. 지석이 눈꼬리 접어가며 웃으니, 정수도 그런 옆 얼굴을 힐끔 보다 따라 웃어버렸다. 하늘에 가면 이렇게 사람들 다 작게 보일까?
"글쎄다. 너 죽으면 천국가려나."
"에이, 아직 안 가봐서 모르지."
두 사람은 바보같이 또 웃는다. 그 사이 잠시나마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모르고 걷는 조그만한 사람들. 풍선을 든 채로 행복해보는 연인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 정수는 문득 저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돌아가고 싶다. 나도. 이런 생각을 할수록 괴로움에 정신이 잠식되는 것 같다. 이제 더이상 곽지석과 나눴던 평범한 일상으로 함께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
지석아, 사라지지마.
이제 이런 이기적인 생각들은 마음 깊숙히 넣어두기로 한다.
2024. 01. 13
23 : 50
결국 와 버리고야 말았다. 생일을 10분 남기고 정수와 지석은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매년 서로 티나는 서 프라이즈로 준비했던 케이크는, 올해는 지석이 고르고 정수가 직접 사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케이크 꺼내 초를 꽂고 불을 당길 때까지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지석이 한마디 했다. 정수야, 초 불기 전에 소원 비는 거 알지? 응 알지. 지석이 웃었다. 여전히 눈꼬리도 접어 웃는, 내가 잘 아는 그 얼굴로 히죽 웃으면서 그랬다. 라이터 부싯돌을 굴리던 정수의 손이 멈칫, 촛대 앞에 멈춰섰다. 원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했을 때 ... 순간 여자의 말이 귓가를 스친 건 기분 탓인가. 정수가 불 붙이기를 멈추고 마주 앉은 지석을 본다.
"너, 소원이 뭐야?"
"안 되지. 말하면 안 이뤄진대."
"내가 못 들어주는 거야?"
응. 지금 당장 천억을 들고 와도 너가 못 해줘. 아니 뭐 그런 ... ... 지석은 그냥 웃을 뿐이다. 남은 엄마랑 형을 위해서도 소원을 빌어야 돼...
케이크 옆에 놓인 [하고 싶은 일 목록] 의 종이 제일 하단에 적힌 것. 생일 축하해줘. 지석이 하고 싶다던 일 마지막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다. 빙수 먹고 싶어. 바다 보러 가자. 내 납골당 구경할래. 엄마랑 형한테 안부 전화 해줘. 관람차 타러 가자 ......
그리고 마지막 날은 지석의 생일로 정했다. 정말로 더이상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그날 부적을 태우면 되겠다는 얘기를 나누면서.
"야 김정수"
"응?"
에잇. 지석이 순식간에 손가락으로 푹 떠낸 생크림을 정수의 코에 펴 발랐다. 아 진짜 곽지석... 으하하하하하하 아니 이걸 매년 당한다고? 웃는 지석의 얼굴을 들여다 보던 정수도 끝내는 따라 웃어버렸다. 얼굴에 생크림 얹은 채로 웃던 정수가 지지 않겠다는 듯 곧장 떠낸 크림을 지석의 볼에 발랐다. 아 진짜 김정수 개초딩! 그러면서 도 두 사람은 정신없이 웃는 걸 멈출 생각이 없다.
정신없이 웃다보니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조금은 무서웠다. 이제 이 행복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 인정하고 보내주는 일이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지석이가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저 웃는 얼굴이 너무 그리워지면 어떻게 해야하지. 지석이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혼자 남겨진 내가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는 아직 생각을 못해서 문득 너무 두려워졌다.
촛농은 빠르게 타 들어가 케이크 위로 한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정수는 속으로 꾹꾹 한 글자 한 글자. 곽지석 이름 세 글자만 꾹꾹 눌러 담은 소원을 빌어낸 다.
지석이가 어디에서든 행복할 수 있길. 꼭 천국에 가서 행복하길. 내 슬픔이 조금은 무뎌지길. 그래도 정수는 이 슬픔까지도 온전히 지석의 것이라 완전히 잊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지석의 머리가 작게 떨렸다. 안 울기로 했잖아. 말하는 정수의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져 새었다. 소매 끝을 당겨 눈가를 닦아내던 지석이 끝에는 웃었다. 아 미안. 안 울기로 했었다, 그치...
"...김정수 나 없어도 잘 지내야 돼."
"맨날 곽지석 뒷바라지 하던 사람이 누군데."
"감동적인 말 할 타이밍이야."
밥 잘 챙겨먹어. 너 시험기간만 되면 밥 잘 못챙겨 먹으니까. 응. 그리고 가끔 우리 형이랑 부모님도 만나주라. 그렇게 안 보여도 엄청 형 걱정 많이 할거야. 알겠어. 또 마지막으로 ...
"너무 많이 울지마."
나 장례식장에서 너 우는 모습 보고 진짜 충격받았나봐. 살면서 너 그렇게 우는 모습 처음봐가지고... 그니까 울지마. 슬퍼서 나도 눈물날 거 같애. 형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 당연한 얘기잖아.
그런 당연한 얘기 주고 받으며 시선이 닿았을 땐 끝내 눈물이 터졌다. 아 둘 다 울지 말자면서. 정신없이 눈물을 닦아 내는 와중에 촛농이 떨어져 크림 위를 적셨다. 그래도 이렇게 다 전하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프지 말고. 행복해야 돼."
너는 꼬부랑 할아버지 될 때까지 살아야지. 백살 넘게 살구.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지석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정수가 무어라 대답하려고 입을 떼어도 목이 자꾸만 쿡 막혀 새는 소리가 났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머리에 어지러이 가득찼다. 그래. 마음속에 간직하자. 지석이가 나를 좋은 친구로만 기억할 수 있게.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을 애써 정리하고 나서야 고개를 조금 끄덕일 수 있었다. 지석이 마주보고 작게 웃었다.
"내년 생일도 함께하자."
반쯤 녹아 기울어진 촛불 위로 종이를 그을 렸더니 끝내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을거야. 지금도 보고싶어.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지... ...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 속에 들어찬다. 끝에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 재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정수는 감았던 눈을 뜨지 않았다.
지석아, 나는 니 인생을 대신 살고 싶을 만큼. 내가 그 바다에 빠지고 싶은 만큼. 내가 니 운명에 대신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너를......
.... ....
"... 어,"
"나 왜, 안 사라지지."
2024. 01. 14
곽지석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꼬박 하루를 뜬눈으로 지새웠다. 지석이 사고를 당한 바다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니,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 없어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지석이 사라지지 않았을 때 사실…. 조금은 안도했다. 온갖 혼란스러운 감정에 시달리면서도 끝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쳤다고 자책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사라지지 않았구나. 꿈은 아니겠지.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떠도 곽지석은 사라지지 않았다. 끝내는 안심했다.
내가 사라지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되뇐 탓인가? 만약 그러면 어떡하지. 지석이 이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다 내가 죽은 후에도 이승에 남아서 나를 기다리면 어떡하지. 계속 바보같은 생각에 눈물이 났다. 곽지석은 사라지지도 못하고 그저 옆에서 묵묵히 내 눈물을 닦아줬다. 울지 마. 정수야 울지 마. 형 내가 미안해. 그런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왜 우리는 전처럼 행복하지 못하지. 일 년이 온전히 돌아 다시 찾아올 니 생일에도 너는 그대로일까. 내가 방금 내년 생일에도 함께 하자던 말이, 이승에 남아달라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김정수는 스스로 자책하고 끊임없이 절망했다.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해.
"너 정말 하고 싶은 거 다 한 거 맞아?"
"응... 이제 정말 없는데."
대답하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떨렸다. 오물거리는 입술 끝에는 작게 망설임이 서렸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지.
어느덧 하루가 꼬박 지난 생일의 해도 저물고 있다. 점점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작정 뛰쳐나온 한강 변의 둔치를 걸으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수면 위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수가 그랬다.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너 생일에 소원. 뭐라고 빌었어?"
혹시 그것 때문인 거 아닐까. 그걸 이뤄야 니가,
근데 소원... 말하면 안 이뤄지잖아. 멈춰선 지석이 조금 망설이는 목소리로 그랬다. 어색한 듯 괜히 억지로 웃는 얼굴로 그러더라. 넌 지금도 그런 말이 나와? 어리광 피울 때 아닌 거 알면서…. 화낼 생각은 없었는데. 지석아 너 바보같이 굴지 좀 마. 너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정수야."
"응, 또 왜..."
급하게 돌아 중심을 잃은 상체가 앞으로 쏟아졌다. 지석이 그런 정수의 품에 푹 안겨든다. 등까지 꼭 끌어안은 채로 금세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갑작스레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돼 조금 당황한 정수의 손이 허공에 붕 떠버렸다. 놀란 것도 잠시, 지석의 어깨를 끌어안은 정수도 끝내는 지석의 어깨에 곧장 고개를 묻었다.
"소원... 말 안 할래."
"응, 안 해도 돼..."
더이상 돌아갈 수 없다면, 나는 널 위해서 함께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고. 무턱대고 전부 속삭이고 싶다. 그게 니 운명이라면 니 운명에 같이 뛰어들고 싶을 만큼…….
팔을 조금 풀어낸 지석이 정수를 본다. 그런 지석을 애써 마주 보지만, 이 큰 눈으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읽어낼 수가 없다. 말 안 할래. 응? 소원. 말을 잇는 지석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리고는 조금 주저했다. 큰 눈이 고민하는 듯 데구루루 굴러 다시금 정수를 봤을 때. 빤히 마주 보던 지석의 얼굴이 이내 가까워지다, 짧게 정수의 입술을 물었다. 쪽. 그리고는 히죽….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정수가 흠칫 놀라 어깨를 작게 밀어내 버렸다. 야…. 너, 뭐…….
아니…. 지석아, 잠시만. 잠깐만…….
"아니... 너 이러다, 이러다 사라지면..."
정수가 급하게 손목을 당겨 지석을 끌어안는다. 와중에도 심장이 정신없이 뛰어서 머리가 멍했다. 지석아 잠시만…. 사라지지 마. 잠깐만, 기다려봐.
급한 대로 멱살을 쥐어 입술을 겹쳤다. 꼴이 퍽 웃겼지만 웃음은 나오질 않았다. 눈물 스민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혀들었다. 그런 잇새 사이로 자꾸만 울음이 새어서. 지석아, 제발 사라지지 마. 마지막 말은 목 끝에 걸려 끝내 내뱉지 못했다.
입술을 당겨다 무는 와중에도 혹시나 지석이 사라질까 손에 닿는 뒷머리, 볼 덩이, 어깨 같은 데를 저도 모르게 연신 더듬었다. 그랬더니 몸을 조금 흠칫 떨던 지석이 정수를 조금 밀쳐내고는 그랬다. 어, 뭐야... 김정수 손버릇이 왜 이렇게 나쁘지. 곧장 웃음이 터질 것 같다가도 다시 두 사람은 바삐 입술을 찾아 물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이제는 진짜로 다시 묻고 싶다.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라는 건 대체 뭐였을까, 응…?
아, 진짜 꿈같아. 끝에는 그런 말도 했다. 진짜로 소원 빌면 이뤄질 줄 몰랐어. 마주 안은 정수가 떨리는 손으로 지석의 등을 쓸었다. ...니 소원, 뭐였는데. 뭐 나랑 키스하는 것도 아니고. 꼴사납게 우는 와중에도 그런 소릴 했다. 아 김정수 진짜 짜증 나. 지석이 큭큭대면서 웃었다. 그냥, 진짜 소원은 비밀로 할래.
"나, 이대로 사라지나 보다."
지석이 보란 듯이 손을 쭉 펴냈더니 드문드문 살점이 투명하게 변했다. 정수가 눈물을 닦다 말고 지석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조심히 가야 돼. 가는 길에도 아프지 말아야 돼. 거기서도 내 생각은 해야 돼. 꼭 천국 가야 돼. 가는 길에 누가 뭐 잘못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다 내가 했다고 해. 내 생각하다 가 울면 안 돼. 나도 안 울게.
그리고…….
정수가 답지 않게 주저한다. 말끝을 흐리며 울음을 삼켰더니 그런 정수를 지석이 부둥켜안으면서 그랬다.
"응. 나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안 해도 알아."
지석이 정수를 더 힘주어 안았다. 이게 설령 마지막이어도 괜찮아. 나는 아마 니가 저 멀리에 콩알만 하게 보이더라도 바로 알아볼 테니까.
"어디에 있든, 항상 같이 있는 거야 우리는."
2025. 12. 25
지석의 사고도 꼬박 일 년이 지났다. 지석을 보내고 나서 정수는 의식해서 밥을 더 먹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 참아보기도 하고.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밤에는 그저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다. 벌써 일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는 시켜 먹지 않게 된 빙숫집의 도장 판도 여전히 냉장고 한구석에 붙어있다. 항상 같이 했던 부루마블 판은 잘 접어서 서랍의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조금은 변한 일상에도 여전히 어딘가에는 곽지석이 있다.
처음으로 맞은 지석이 없는 정수의 생일에는 납골당에 갔었다. 지석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 들고 갔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역시나 지석이 좋아할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곽지석 취향은 내가 제일 잘 알지. 이 케이크 제일 좋아했잖아 너. 항상 나한테 서프라이즈 인 척 하면서 니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오는 거 다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처음 맞는 곽지석 없는 크리스마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올해부터는 뭘 해야 하지. 내 인생에 곽지석 한 명 빠졌을 뿐인데 곽지석 없이 해야만 하는 것들이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분명 날씨 맑다고 그랬는데…."
정수가 퍽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컴컴히 덮인 구름 사이로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왜 크리스마스에 눈도 아니고 비가 와.
끝에는 또 곽지석 생각을 한다. 울지 않기로 했잖아 지석아. 입으로 작게 중얼거리는데, 그런 볼 위로 찬 물방울이 떨어져 튀었다.
"울지 마. 나도 눈물 날 거 같아."
내년에도 잘 부탁해. 아프지 말고. 내 생각하다가 울지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좋아하는 케이크도 꼭 먹고.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야, 지석아."
星が降る夜と眩しい朝が
별이 쏟아지는 밤과 눈부신 아침이
繰り返すような物じゃなく
반복되는 것만 같은 것이 아니라
大切な人に降りかかった
소중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雨に傘をさせる事だ
비에 우산을 씌워주는 거야
いつもそばに
언제나 내곁에
いつも君がいて欲しいんだ
언제나 당신이 있길 바라
目を開けても
눈을 떠도
目を閉じても
눈을 감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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