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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익명 C

“지석아, 일어나야지.”

“정수... 나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실험하다가 늦게 잔 거야? 그러게 내가 적당히 하다가 자라고 했지.”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오늘은 안돼. 뉴스 나오는 날이잖아. 라디오 틀 거니까 얼른 나와.”

“우웅...”


그러나 지석은 일어나지 않았고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정수는 지석이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고 지석을 들어 올렸다.


“으앗, 지금 뭐 하는 거야!”


놀란 지석은 버둥거렸다.


“그러게, 진작에 내 말을 들었으면 됐잖아.”

“알았어, 미안해, 내 발로 갈게. 내려줘.”

“맨입으로? 들어 올린 값은 줘야지.”


정수는 자연스럽게 한쪽 볼을 들이댔다.


“내가 올려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빨리.”

“쪽. 이제 됐지?”


정수는 고개를 돌려 반대쪽 볼을 들이댔다.


“여기도.”

“아잇, 진짜. 쪽. 이제 내려줘.”

“알았어.”


정수는 웃으면서 지석을 내려놨다.

그런 다음, 거실로 나가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


- 안녕하십니까. 가장 빠른 소식을 전해드리는 정부 뉴스입니다. 드디어 오늘 정부에서 안전구역과 관련한 대책을 발표하였는데요, 이것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김대책 재난대책위원장님을 저희 스튜디오로 모셔봤습니다.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십니까. 재난대책위원장, 김대책 입니다.

- 이번에 안전 구역과 관련해서 새로 나온 대책이 나왔다고 들었는데요?

- 네, 맞습니다. 좀비 사태 선언 1년 만에 저희 정부가 강서와 강북을 중심으로 안전 구역을 형성하는 데 성공을 했었죠. 형성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 이제 이 안전 구역으로 현재 좀비 사태에서 살아남으신 생존자분들을 데려올까 합니다.

- 그럼 먼저 안전 구역에 대한 설명 간단하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 네. 이 안전 구역은 시민분들이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전과 비슷한 환경으로 복구하는 데 초점을 두었는데요, 현재로서는 통신망, 전력, 정수 시설들이 반 정도 복구가 된 상태입니다.

- 맞습니다. 저도 방송국 출근을 위해 지금 시범적으로 안전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요, 인터넷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게 진짜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다시 정책 이야기를 이어서 해볼까요?

- 좋습니다. 

- 이 정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 건가요?

- 먼저, 서울은 좀비가 꽤 많이 정리되었기 때문에 서울 안에서 살아남으신 분들은 아마 주기적으로 군용차로 호송할 예정이고요. 경기도부터는 1인 구조 헬기로 호송할 예정입니다.

- 1인 구조 헬기요? 그러면 한 명 밖에 못 타는 거 아닌가요?

- 네, 맞습니다.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는 아직 좀비가 창궐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 정부는 현재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1인 구조 헬기 10대를 통해서 생존자분들을 구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무래도 헬기 개수가 한정되어 있기에 구역을 나눠서 헬기를 보낼 예정입니다. 

- 구역은 어떻게 나뉘었나요?

- 각 도시 안에 구가 있지 않습니까? 그 구당 한 명씩 헬기를 탈 수 있도록 정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가족과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 만약 한 명이 헬기로 먼저 구조가 되었다면 남은 사람은 그 헬기가 전국을 돌고 다시 그 지역의 차례가 되었을 때 구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족과 떨어지기 싫으신 분은 살던 곳에 계속 남으시면 되고요. 안전 구역까지 차를 운전할 수 있으시다면 저희가 간단한 확인 절차를 가진 다음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 그렇군요. 그럼 구조 일정과 헬기의 착륙 위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 구조는 오늘부터 진행될 예정인데요, 1주 차는 경기 남부, 2주 차는 경기 북부… 이렇게 진행이 될 예정이고요. 경기 남부에서의 착륙 위치는 xx시 oo구 oo구청 앞, xx시 bb구 bb구청 앞, ... 이 되겠습니다.

-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경기 남부에서 생존하고 계신 분들 중 구출을 원하시는 분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셔야겠네요.

-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그리고 이 안전 구역으로 오게 되시면 정부에서 거처를 하나씩 배정해 드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주마다 식료품, 식수 등을 배급해 드릴 예정이니 아무래도 오시는 게 좋겠죠?

- 그렇네요. 누가 됐든 헬기를 정말 타고 싶을 것 같아요. 오늘 이렇게 저희 뉴스에 나와서 정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정말 감— 치직... 치지직...


...



“헬기가 착륙하는 곳이 마침 우리가 있는 곳 근처네. 지석아, 너는 구조 헬기 타고 나가.”

“너는? 너도 가야지.”

“어떻게 같이 나가. 너도 들었잖아. 한 구역당 한 명 밖에 못 나가는 거. 지금 이 상황에 자동차 운전하기도 쉽지 않고. 우리 둘 다 무면허잖아.”

“아니야. 그래도 같이 나가야지.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내가 나갈 방법은 따로 알아볼게. 너는 빨리 나가서 백신 연구해야지. 지금 이 정도까지 진도가 나간 건 너밖에 없을 거야.”

“그래도...”

“네가 희망이야. 말마따나 내가 물려도 네가 만든 백신이랑 치료제로 나 다시 살려주면 되잖아.”

“그럼 다음 구역... 다음 구역에라도 가 있어, 응?”

“그러다가 그 구역에서 꼭 구출 받아야 할 사람이 구출 못 받으면 어떡해. 여기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큰 내가 남아야지.”

“대체 왜... 나... 나 너 없으면 안 돼... 안된다고...”

“나도 너 없으면 안 돼. 그래서 너 보내는 거야. 난 네가 사는 게 더 중요해. 넌 내 전부니까. 그니깐 내 말 들어. 맨날 내 말 들어줬으니깐 이번 한 번만 더 들어줘.”

“.....”

“얼른 짐 챙기자. 연구했던 데이터들 다 가져가야지. 거기서도 연구하려면.”


그렇게 정수와 지석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음 날이 되고, 그들은 헬기가 도착하는 곳 근처에서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정수야, 여전히 이 선택에는 변함이 없는 거야?”

“응,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알겠어... 내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꼭 금방 와야 해. 알겠지?”

“응. 새로운 거처에 가면 청소 잘하고 있어야 해. 끼니 거르지 말고. 나 금방 갈 거니까. 가면 그동안 잘 있었는지 확인할 거야.”

“응. 정수도 약속 하나 해. 물리지 않기로.”

“응, 약속. 혹시 만약에 내가 너무 안 와도 나 찾으러 나오지 마. 네 안전이 우선이니까.”


정수의 말이 끝난 뒤, 그들은 매우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그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그들은 이 온기가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어느덧, 저 멀리서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가. 자리 뺏길라.”

“알았어. 헬기 소리 때문에 좀비들 몰려올 거니까 정수도 얼른 가.”

“그래, 살아서 보자.”


그렇게 지석은 헬기를 타러 떠났고 정수는 살아남기 위해 길을 나섰다.



***



안전 구역으로 발을 들인 지 2주가 지나고 지석은 절차에 맞게 거처를 배정받았다.

거처를 배정받은 지석은 가자마자 뉴스를 들을 라디오를 설치하고 얼마 없는 방 중 하나를 실험실로 정했다.

지석이 진행하고 있던 백신 (겸 치료제) 연구는 자체적으로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알바를 가고 밤에는 실험실에서 백신 연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정수의 소식도 계속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 안면도 트고 연락도 하고 정보들을 공유하면서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지석은 틈날 때마다 생존자 목록을 열람했었는데 최근에는 사망자 목록도 같이 열람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헬기 하나당 한 사람만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헬기를 타기 위해 생존자들끼리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사망자 명단이 공개될 수 있게 된 과정은 이러했다. 헬기 착륙장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헬기의 블랙박스로 다 녹화가 되며 그 영상을 보고 신원을 특정해서 명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진작에 보고 받았지만 별다른 개선 없이 묵묵히 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지석은 정수가 이런 것에 참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혹시나 휘말렸을까 봐 걱정되어 열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단 다 정수의 이름은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겠지...? 제발...

명단을 열어볼 때마다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한 지석은 정수 형의 무탈을 기도하며 명단을 덮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두 달이 지났고, 그동안 지석은 2차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석은 실험에 성공하자마자 정신없이 실험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말했다.


“나 드디어 2차 백신 연구에 성공했... 아, 맞다. 아무도 없다는 걸 잠시 잊었네... 이렇게 성공하면 항상 정수가 축하해줬었는데... 오늘 들어온 생존자 목록이나 봐볼까.”


지석은 오늘도 생존자의 목록을 열람해 보았지만 역시나 정수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수는 뭐 하고 있는 걸까... 살아서 보자고 약속했으니깐 분명 살아 있겠지...? 이제 2차 백신 연구까지 성공했는데... 만약 변했다면 얼른 3차까지 성공시켜서 정부에 보고하고 정수부터 찾으러 가야지.

그렇게 다시 한번 의지를 다진 후, 지석은 실험을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러다 한 달 뒤, 이웃 주민에게서 신기한 연락을 받게 되었다.


- 지석 씨, 이거 봤어요? [링크]

- 제가 SNS를 잘 안 해서... 이게 뭔데요?

- 한 번 들어가 봐요. 한 꼬마가 정수 형을 아는 눈이 크고 강아지를 닮은 곽지석이라는 형을 찾고 있대요. 지석 씨가 정수라는 분을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징이 딱 지석 씨 같아서요.

- 감사합니다. 알려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저 맞아요. 지금 당장 찾으러 가보겠습니다.

- 그래요. 가족 꼭 찾기를 바라요.


정수... 정수라고 했다. 내가 그동안 애타게 찾던 이름이 일면식도 모르는 꼬마에게서 나왔다. 저 꼬마는 누구고 정수를 어떻게 알게 된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수의 근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겠지. 만나러 가봐야겠다.

지석은 곧바로 그 꼬마의 위치를 알아보았고 현재 남아 있는 가족이 없어 정부에서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지석은 바로 정부 소유의 위탁 시설로 찾아가 그 꼬마와의 만남을 요청하였고 빠르게 승인을 받아 그 꼬마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안녕, 꼬마야? 내가 곽지석 이라는 형인데 혹시 정수 형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

“정수 형은요….”



***



살아서 나갈 계획? 사실 그런 건 없다. 다 지석이를 안심시키려고 했던 말이었다.

몇 달이 걸리더라도 좀비들을 잘 피해 걸어가 그곳에 도달하는 것밖에 없었다.

사실 지석이가 옆에 있을 때는 내가 형이니까 강한 척, 덤덤한 척을 해왔었다.

실제로, 그런 척이라도 하니 한결 나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진짜 혼자가 되었고, 나는 지금 너무너무 무섭다.


그렇게 옆에 아무도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갑자기 정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놀란 정수는 눈물을 멈춰보려고 했지만, 눈물은 쉽사리 멈춰지지 않았다.

그동안 갖고 있었던 부담감, 불안함, 무서움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순간적인 감정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정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청난 시간이 지나고 감정을 다 쏟아붓고 난 뒤에야 눈물이 점점 멎어갔다.

마음을 추스른 정수는 의지를 굳게 먹었다.

가보자.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꼭 해내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꼭 지키고 말 거야.

정수는 이렇게 희망적인 말들을 계속 되뇌며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틀을 쉬다가 걷다가를 반복하고 안전 구역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흐으윽...


어...? 이게 무슨 소리지...?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걸으니 어떤 꼬마가 시체들 사이에 앉아 울고 있었다.

시체가 왜 이렇게 많지...? 아, 설마. 뉴스에서 들었던 헬기 자리 뺏기인가. 생각보다 문제가 많이 심각하네... 옆에 있는 시체는 부모님인 거겠지... 참 마음이 안 좋네...


“꼬마야, 여기에 얼마나 있었던 거야? 밥은 먹었어? 물은 마셨고?”

“.....”

“꼬마야?”

“살려주세요...”


이 말만 남긴 채 꼬마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 쓰러지면 안 되는데. 너무 울어서 탈수 증세가 온 건가? 물... 물을 먹여야겠다. 물이 어디있더라...

정수는 쓰러진 꼬마에게 억지로 물을 먹인 다음, 그 꼬마를 안고 근처 상가로 들어갔다.

몇 시간이 지나고, 꼬마는 깨어났다.


“흐억... 헉... 헉...”

“일어났어? 물부터 마실래? 옆에 뒀어.”

“누구세요...? 저... 저도 죽이실 건가요?”

“아냐아냐. 나 그런 사람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된 건... 어른들이 잘못한  거야. 내가 대신 사과할게. 미안.”

“.....”

그 꼬마는 눈치를 보더니 옆에 있던 물을 마셨다.

“으하... 그래서 아저씨는 누구세요...?”

“아...저씨... 큼큼. 나는 김정수라고 해. 그리고 되도록 형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내가 아직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 것 같거든. 나 이래 보여도 25살이야. 지금 좀 힘들어서 늙어 보이는 것뿐이라고.”

“그럼 저도 꼬마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제가 키는 좀 작아도 엄연한 12살이거든요.”

정수는 꼬마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꼬마야. 네 이름은 뭐야?”

“저 꼬마 아니라고요. 쳇. 제 이름은 김명훈이에요.”

“그래, 명훈아. 형이 지금 맛있는 거 먹을까 하는데 너도 먹을래?”

“네, 좋아요.”

“알았어.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 봐.”

“네.”


그렇게 정수는 명훈이의 컨디션이 회복될 때까지 음식을 계속 먹이면서 그곳에 며칠 머무르게 되었고, 그동안 둘은 서로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며 친해지게 되었다.

상가를 떠나기 전날 밤, 명훈이는 그동안 궁금했었던 것을 정수에게 물어보았다.


“형,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응, 뭔데?”

“형은 왜 이렇게 힘들게 걸어서까지 안전 구역에 가려는 거예요? 거기까지 걸어가는 것보다 주변에 터 잡아서 사는 게 더 안전한 거 아니에요?”

“그치. 이렇게 움직이는 건 위험도가 더 크지. 근데, 사랑하는 사람이랑 약속했어. 거기서 다시 만나기로. 내가 그 사람을 먼저 안전 구역에 보냈거든. 그 사람은 안전 구역에 같이 가길 원했는데 나는 그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안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고집을 좀 부렸어. 그렇게 고집을 부렸으니, 그 고집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아... 그래서 이렇게 힘들게 다니는... 에? 그나저나 사랑하는 사람이요? 누군데요? 어떤 사람인데요?”

 “곽지석이라고 진짜 귀엽고 잘생기고 예쁘고 멋지고 똑똑한 사람이 있어.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이야.”

“형.”

“왜?”

“몰랐는데 주접이 되게 심하시네요.”

“이건 주접이 아니라 사실이야. 진짜 한번 만나봐봐.”

“네... 그럼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음... 첫만남이라... 잊을 수가 없지. 전세 사기 때문에 알게 됐어.”

“전세 사기요?”

“응, 집값만 부모님이 지원해 주시면서 혼자 살려고 얻은 집이 있었는데, 입주 이틀 전에 집주인 분께 전화가 온 거야. 입주일을 조금만 미뤄줄 수 있냐고. 그래서 내가 상관은 없는데 왜 그런 거냐고 물으니까 한 남학생이 부동산 직원한테 사기를 당해서 지금 거기에 입주해있다고 그 애가 나가야 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어.”

“형은 사기가 아니었어요?”

“응, 나는 부동산 사장님이랑 계약했던 거고 그 남학생은 부동산 직원이랑 계약했었던 거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그 직원이 사기꾼이었던 거지. 아무튼, 미뤄진 이유를 듣고 전화를 끊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남학생이라는 게 참 마음에 걸리는 거야. 그 집을 얻을 학생이면 내 또래일 텐데 돈도 없을뿐더러 살 곳도 없어진 거잖아. 그래서 집을 슬쩍 찾아가 봤어. 그냥 좀 마음에 걸리니까... 조용히 보고만 올 생각으로 간 거였는데, 집 앞에서 그 남학생이 영혼 빠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더라고. 그러다가 조용히 울더라. 그때 그 모습을 보는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 그래서 그 학생이 다 울기를 기다리다가 조용히 다가갔어. 그러고는 냅다, 저랑 같이 살래요? 라고 말했지.”

“아무 설명도 없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긴 한데. 나는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까 같이 살자고 말해볼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 처음엔 설명할 생각은 못 했고 머릿속에 있던 말을 내뱉고 나서야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말을 덧붙였었어. 아주머니한테 사정도 들었고 혼자 살기에도 좀 넓은 집이니까 같이 살면 좋지 않냐고. 근데 그렇게 다 말하고 나니까 날 되게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 같은 거야.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당혹스러운 상황이니까. 나도 초면인 사람한테 이런 제안을 해본 건 처음이었고... 그래서 눈을 감고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근데요?”

“그때 돌아온 답변이 뭐였냐면, 원래 제가 이런 거 예의상 한번 거절하는데 지금은 예의 차릴 겨를이 없다고 다시 집 구하는 동안 몇 달 만이라도 같이 살아도 되냐고 그러더라. 그래서 그때 처음 통성명을 하고 같이 살게 됐어. 그러다가 그 남학생이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된 거고.

일단 여기까지. 첫 만남이 좀 신선했지?”

“진짜 신기해요. 그렇게 만날 수도 있다니... 근데 그럼, 그 사기꾼은 잡혔어요?”

“좀비 사태 터지기 전에 잡히긴 했는데, 돈은 못 돌려받았지. 이미 그 사람이 다 써버려서.”

“아...”

“아무튼, 난 그때 지석이랑 같이 살지 않았더라면 진짜 재미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 같아. 그리고 난 진작에 좀비가 됐을 수도 있어. 어떻게 보면 그게 제일 마음이 편한 선택지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지금은 아니야. 내겐 살아남을 이유가 있거든. 그 이유로 지금도 악착같이 살아남고 있는 거야.”


정수의 이야기를 들은 명훈은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을 받은 정수는 부끄러움에 손부채질하다가 시계를 보았다.


“어이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새 나라 어린이는 얼른 자시죠.”

“형도 지금 같이 자요.”

“알겠어. 먼저 자고 있으면 곧 옆으로 갈게.”


그렇게 명훈이는 먼저 자고, 정수는 한동안 생각에 빠져있다가 잠에 들었다.



***



어느덧 다시 움직여야 하는 날이 오고, 명훈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정수는 명훈이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명훈아, 나 너한테 얘기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뭔데요?”

“너만 괜찮다면 나는 너랑 같이 안전 구역에 가고 싶은데, 가서 나랑 지석이 형이랑 셋이 살아보지 않을래? ”

“정말요...? 제가 그래도 될까요?”

“그럼, 분명 지석이도 좋아할 거야.”

“그렇다면... 저 같이 가고 싶어요. 형이랑 함께하고 싶어요.”

“그래, 이제부터 우리는 함께야. 무르는 거 없기다.”

“당연하죠.”

“그럼 가볼까?”

“네!”


아이를 데리고 가다 보니 정수의 예상보다 안전 구역에 가는 시간이 더 지체됐지만,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걸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겼고 어느덧 안전 구역이 있는 곳의 옆 지역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지역에는 넓은 밭들과 주택들로 구성된 마을이 있었고, 좀비 몇 마리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거기에 있는 밭은 좀비 사태 이후로 하나도 관리가 되지 않았기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명훈아, 이 마을만 잘 넘으면 안전 구역 근처까지 갈 수 있어.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따라오면 돼. 잡초가 많으니까 형 손 꼭 잡고. 알았지?”

“네.”


그렇게 둘은 조용히 밭을 걸어가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 끝에 거의 다다랐는데,


갑자기



챙그랑-!!



하고 무언가 발에 챈 소리가 밭에 울려 퍼졌다.

명훈이가 걸음을 내딛다 무성한 잡초에 가려져 있던 양동이를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한순간에 주변 좀비들에게 이목이 쏠렸고, 그것들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명훈아, 뛰어.”


정수는 명훈이의 손을 꼭 잡고 주택들이 가득한 골목으로 뛰었다.

하지만 좀비들은 청각뿐만 아니라 후각도 뛰어난 개체들이었기에 따돌리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막다른 길을 마주해버린 정수는 총을 꺼내 들었다.

소음기를 붙여도 소리가 꽤 나서 되도록 안 쓰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탕! 탕!


약간의 총성이 울려 퍼지고 사태는 진정되었다.


“명훈아,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그때, 갑자기 명훈이가 급하게 소리쳤다.


“형, 뒤에...”

“뒤에...? 억.


한순간이었다.

막다른 길 안쪽에 숨어있었던 좀비에게 총을 들고 있던 손이 물리고 말았다.

정수는 급하게 반대쪽 손으로 칼을 꺼내 좀비를 죽였지만, 물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형, 괜찮아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정수는 식은땀이 나고 조금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지만 안 그래도 자책하고 있는 아이에게 더 많은 죄책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기에 이 사실을 숨겼다.

끝까지 주변을 확인하지 않은 건 내 실수니까...


“괜찮아. 괜찮으니까 얼른 가자. 물리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야 변이되니까 아직은 괜찮아. 그 전에 너라도 들어가야지. 내가 너 들어가는 건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가자.”

“형...”


정수는 물리지 않은 손으로 명훈이의 손을 잡고 그 마을을 빠져나갔고, 걷다 보니 어느새 안전 구역 입구에 있는 검문소 근처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검문소에 가기 전, 둘은 근처 상가에서 잠시 몸을 숨겼다.


“명훈아, 이제부턴 혼자 가야 해. 들어가면 지석이 형 꼭 찾고 형이 물렸...다는 말도 해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네가 치료제 만들 때까지 잘 버티고 기다려보겠다는 말도 전해주고...”

“.....” 

“그리고 명훈아,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더 잘 버텼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형. 제가 진짜 조심했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저 진짜 죄송해서 안전 구역 못 들어갈 것 같아요. 그냥 저 형 옆에 있으면 안 돼요?”

“내가 널 어떻게 데려왔는데. 그건 안 돼. 얼른 가.”

“형...”

“얼른.”

“..... 들어가면 지석이 형 꼭 찾을게요. 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이제 나한테 너무 가까이 붙지 말고. 잘 가. 언젠가 다시 보자.”


그렇게 명훈이는 눈물을 꾹 참으며 검문소로 향했다.

이제 혼자네... 나는 곧 좀비가 되겠지. 내가 물렸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정신은 멀쩡하네. 변하기 전까지 근처에 생존할 곳을 좀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정수는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생존할 곳을 찾아 떠났다.



***



“정수 형은요... 저 때문에 좀비에 물리셨어요.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형이 치료제 개발할 때까지 잘 버텨보겠다고 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저 때문이에요.”


정수 형이... 물렸다고...? 아니... 대체 왜...  저 꼬마가 뭐길래... 

그래. 정수라면... 정수는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쟤도 살고 싶었을 텐데 어쩔 수 없었겠지... 애한테 무슨 원망을 하겠어. 됐다. 

하... 그 방법을 써봐야 하나. 또 쓰고 싶지 않았는데.


“.....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못 말할 것 같아. 미안.”

“괜찮아요, 당연히 그러실 수 있어요.”


어린애치고 되게 의젓하네... 입도 무거울 것 같고...


“꼬마야, 이름이 뭐야?”

“명훈이요. 김명훈. 12살이에요.”

“명훈... 그래, 명훈아. 혹시 한 달만 여기 있어 줄 수 있니? 한 달 뒤에 형이 꼭 데리러 올게.”

“네, 그건 할 수 있어요. 근데 왜...”


이어서, 지석은 조용히 명훈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가 정수 형 여기로 데려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네? 어떻게요?’

‘그건 방법이 있어.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알겠지?’

‘네, 조용히 있을게요.’


지석은 잘 꾸며진 사유로 애를 한 달 뒤에 데려가고 싶다고 정부에 요청하였고 다행히 허가가 떨어졌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지석은 가방을 간단히 챙기고 브로커를 통해 알아놓은 개구멍으로 안전 구역을 조용히 나왔다.

이 근처에서 헤어졌다고 했는데...

지석은 지도를 보며 정수가 갈만한 곳을 추리하기 시작했다.


정수 형 성격으론 1층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자기가 사람들을 쫓아가기도 쉽고 죽임을 당하기에도 쉬우니까. 그럼 위층을 선택했을까? 그것도 아니야. 왜냐하면, 좀비는 빠른데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가속도가 붙겠지. 그러면 사람들을 쫓아가서 공격하기 쉽잖아. 그 점을 고려했을 때 정수 형이 절대 선택하지 않을 곳이야. 그럼 답은 지하지. 지하에 편의점이나 슈퍼가 있는 건물을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지석은 다섯 군데의 거처 후보를 정하고 한 곳씩 방문하면서 조용히 정수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덧, 마지막 후보로 정한 편의점을 돌기 시작했다.


‘정수야, 김정수. 여기 있어?’


내가 잘못 생각했나... 아님 벌써 변한건가...


‘..... 설마 곽지석이야?’

옆 코너에서 정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지석은 곧장 그리로 향했다.


“김정수...”

“지석아...”


지석은 정수를 보자마자 정수를 향해 다가갔고 정수는 다가오는 지석을 한쪽 팔로만 밀어내며 말했다.


“더 가까이 오지는 말고. 언제 변할지 몰라. 위험해.”

“나쁜 놈. 좀 안길 수도 있지. 아직 안 바뀌었잖아.”

“혹시 모르잖아. 조심은 해야지.”


하... 또... 또 내 안위가 먼저다.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잠깐의 포옹도 허용해 줄 수 없는 걸까.


그렇지만 지석은 정수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착잡한 마음은 묻고 화제를 돌렸다.


“정수...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많이. 정말 많이.”

“나도야. 나 너 다시 보려고 진짜 노력 많이 했어. 했는데... 미안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김빠지게 사과부터 하고 있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애는 또 뭐고.”

“그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렇게 정수와 지석은 그들이 함께 있지 못했던 몇 달 동안 있었던 일을 공유하였다.

정수의 말을 듣고 나니 지석은 정수가 왜 그 애를 데려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너도 명훈이 데려오는 거에 동의한 거지?”

“그래, 어차피 같이 살 생각이었어. 너한테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니까.”

“아 맞다, 나 너한테 또 할 말 있어. 나 그때 실험체 되길 잘한 것 같아. 그때 1차 백신 안 맞았으면 이렇게 일주일 동안 못 버텼을 거야.”

“뭐라고? 잘한 건 아니지. 지금 결과가 좋더라도 그 당시에는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어. 불안정한 걸 뭘 믿고 맞겠다고 한 건지...”

“네가 만든 거잖아. 내가 널 믿지 누굴 믿냐. 근데 나 효과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아. 요즘 정신이 좀 오락가락해. 그리고... 이쪽 손은 피부가 좀 변했어. 아무래도 물린 곳이라 그런 것 같긴 해.” 

“..... 그래서 사실 내가 2차 백신을 들고 오긴 했어. 이러면 안 되지만... 너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걸 또 네 몸에 넣을 생각밖에 하지 못해서 미안해. 근데 물렸다고 하니까 이 방법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더라.”

“무사히 완성했구나. 다행이다. 고생했어. 나는 또 맞아도 돼. 괜찮아.”

“근데 진짜 내가 또 맞춰도 되겠어...?”

“진짜 괜찮아. 이미 한번 맞았는데. 두 번이 어렵냐. 내가 고개 돌리고 있을 테니까 놔줘.”

“아마 이번에도 며칠은 열나고 아플 거야. 그래도 버텨줘. 이렇게 염치없는 부탁 해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고 얼른 놔주기나 해. 난 벌써 마음의 준비 끝냈어. 이겨 낼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이번 약속은 내가 꼭 지킨다.”

“알았어, 그럼 놓을게.”


지석은 성호경을 긋고 잠시 기도한 다음, 정수에게 2차 백신을 놓았고, 정수는 곧 잠에 들었다.

그렇게 정수는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



이게 무슨 냄새지...? 뭔가를 굽는 냄새인데... 햄인가...?

정수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정수, 일어났어?”


지석이가 프라이팬에 햄을 굽고 있었다.


“아, 역시 고기 냄새가 효과가 좋네. 가스버너랑 프라이팬 찾아오기 잘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보이잖아. 햄 굽지. 너 깨우고 먹일 겸.”

“이건 어디서 구한 건데? 아니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이것들은 근처에 있던 음식점에서 주워 온 거고 너 주사 맞은 뒤로 5일 정도 지났어,”

“5일?”

“응. 너 3일 내내 열났어. 막 잠꼬대도 하던데?”

“무슨 잠꼬대?”

“그건 비밀. 되게 기분 좋은 잠꼬대였어.”

“뭐야...”

“얼른 밥 먹어. 먹고 움직여야지.”

“그래.”


정수는 밥을 건네받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때, 지석은 정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이거 가지고는 지금 당장 다 낫지는 않는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보기에 좋지도 않은 거 그만 보고 밥이나 줘,”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꼭 치료해 줄게. 진짜로.”

“말이라도 고맙다. 얼른 먹고 출발하자.”


그렇게 두 사람은 빠르게 밥을 먹고 채비를 한 다음 지석이 나왔던 개구멍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걸어가는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지석아, 근데 왜 아까 햄을 구운 거야?”

“햄이 주변에 많이 보이기도 했고 뭔가 정수라면 고기 냄새에 일어날 것 같았어.”

“뭐? 고기 냄새에 일어날 것 같다고? 그거 무슨 의미인데?”

“별 의미 아닌데? 찔리는 거 있어?”

“와... 아니. 너...”


그러고 지석은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정수는 단숨에 지석을 쫓아가서 지석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지석이는 자기도 모르게,


“앗, 차가워!”


라고 말해버렸다.

그 말을 들은 정수는 황급히 지석에게서 손을 뗐다.


“나 많이 차가워? 맞다. 좀비 체온이 좀 더 차갑지. 미안.”

“아, 아니... 이렇게 티 내려고 했던 건 아닌데...”

“아니야,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어. 아직... 다 돌아온 게 아니니까... 완전히 다 치료가 돼야 인간인 거잖아...”

“.....”

“.....”


둘은 서로의 심정을 너무나도 이해했기에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최소한의 대화만 하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걸어갔다.


정수와 지석은 집에 돌아가고 나서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지켜야 할 규칙과 명훈이를 데려올 공간을 마련하느라 바빴다.

그 결과, 지석이는 자신이 쓰던 방을 명훈이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거실에서 칸막이를 치며 자기로 했다. 좁은 집에서 공간 활용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느덧 명훈이를 데려오기 전날, 지석은 한 상자를 들고 정수의 방을 찾아갔다.


“정수, 나 들어가도 돼?”

“이미 들어왔으면서. 그건 뭐야?”


그때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지석은 다시 정수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정수에게 줄 선물을 고민했고, 떠오른 것은 바로 장갑이었다.


“이거 장갑이야. 내가 옷 꼼꼼하게 입고 있어도 터치하는 거 신경 쓰는 것 같길래...”

“지석아...”

“그리고 거실로 나와볼래?”


정수는 바로 장갑을 끼고 난 다음,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와보니 엄청 커다란 곰 인형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건 뭐야?”

“혹시나... 전처럼 나 안고 싶은데 못 안고 있는 거면 편하게 안으라고... 아니면... 내가 정수 안을 때 쓰지 뭐. 아니, 난 사실 인형도 필요 없어. 그냥 안을 수 있긴 해. 바로 이렇...”


그 말을 듣자마자 정수는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지석을 안았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미안하지.”


그렇게 둘은 한동안 서로를 계속 안았다.

시간이 좀 지나고, 정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 나도 준비한 게 있었는데...”

“뭔데?”

“별 건 아니야. 내가 행정상으로는 실종자 신분이어서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온라인 주문도 할 수가 없어서 뭘 산 건 아니고... 그래서 고민을 좀 해봤는데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더라.”


정수는 조그마한 종이 세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정수 이용권’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짜 꼭 시키고 싶은 거 있을 때 이거 쓰면 꼭 해준다. 진짜. 딱 세 번.”

“오, 뭐야. 튕기는 거 없이?”

“응, 근데 뭐 내가 네 말 많이 들어주는 것 같은데 꼭 필요한가 싶기도...”

“완전 필요해. 진짜 최고의 선물이다.”

“좋은 말 맞지?”

“그럼. 찔리는 거 있어?”

“아이, 또 시작이네.”


지석은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정수는 도망가는 지석을 금방 붙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게 안 좋았던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이게 되었다.



***



“명훈아, 진짜 비밀이야. 알았지?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물론이죠. 저 진짜 얘기 안 해요.”

“좋아, 이제부터 우리가 살게 될 집은 여기야. 조용히 들어와.”

“네.”


명훈이는 지석의 안내를 받아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집에 들어간 명훈이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정수 형은요? 정수 형 어딨어요?”

“저쪽 방 앞에 가서 조용히 노크해 봐.”


명훈이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을 조용히 노크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맞춰 문이 열리고 정수는 명훈이를 맞이했다.


“명훈아!”

“정수 형...”


감정이 북받쳐 오른 명훈이는 정수에게 달려들었다.


“어어. 안기지는 말고 손만 잡자. 형 엄청 차갑다.”

“형 아직 안 좋아요?”

“아무래도... 아직 다 낫지는 않았지.”

“미안해요...”

“사과 그만하라고 했지. 괜찮아.”

“네...”

“우리 명훈이 그동안 뭐 하면서 지냈어?”

“저는...”


둘은 계속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고,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자 지석은 그들을 거실로 불렀다.


“자자, 어느 정도 얘기했으면 나오자.”

“왜? 무슨 일 있어?”

“저희 뭐 해요?”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띵동-!


그때,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지석은 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문 앞에 놔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나서 현관으로 나가 봉지 하나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 날엔 파티해야지. 치킨 먹자. 사이드로 치즈볼까지 시켰어.”

“오, 곽지석~”

“지금 당장 손 씻고 올게요. 화장실이 어디죠?”

“저기 있어. 다녀와.”

“아무래도 이런 거 안 먹은 지 오래되긴 했지. 많이 먹고 싶은가보다.”

“맞아. 지금 엄청 금값인 거 알지? 나 진짜 거금 들였다. 이거 구하겠다고 일 진짜 열심히 했어.”

“잘했어. 내가 나갈 수는 없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알아볼게. 다시 분담해야지.”

“응. 어서 세팅하자.”


비록 치킨의 양은 적었고 음료도 없었지만, 같이 즐기기엔 더할 나위 없는 양이었다.


“자자, 한 손에 물컵을 들고. 잔 부딪히면서 내가 우리 가족의 앞날을 이라고 하면 다 같이 위하여! 라고 외치는 거야. 알았지?”

“좋아.”

“네.”

“우리 가족의 앞날을,”

“위하여!!”


그렇게 이날, 새로운‘가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피는 안 섞였지만, 피보다 진한 ‘가족’이.


***


시간이 흘러 안전 구역이 확대되고 안정화가 되면서 간이 학교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명훈이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하루는 체육 수행평가를 도와달라며 정수와 지석을 불렀다.


“그니까 요즘 학교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데 곧 평가를 본다고? 근데 연습하고 싶다는 거지?”

“네. 아무나 저랑 배드민턴 쳐주세요.”

“지금 저녁이긴 하다만 내가 아무리 가리고 나간다고 해도 배드민턴장에 있는 건 좀 그렇지? 지석아 네가 같이 나가줘야겠다.”

“내가?”

“어, 너 배드민턴 칠 줄 알잖아. 치면서 둘이 시간도 좀 보내고 그래. 난 집에서 청소나 하고 있을게.”

“알았어. 명훈아, 갈까?”

“네!”


그렇게 지석과 명훈은 밖으로 나가 배드민턴장으로 향했다.


“몇 번 쳐보고 고쳐야 할 점 있으면 알려줄게. 한번 해보자.”

“네.”


“받아칠 때는 셔틀콕이 채에 평평하게 더 잘 맞게~”


“셔틀콕은 채에 닿을 때까지 끝까지 바라보고~”


...


“흐하... 잠깐 쉴까?”

“좋아요...”

“잘 알아듣고 잘 고치는데? 이대로라면 문제없을 것 같다.”

“헐... 진짜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형 덕분이에요.”

“에이, 난 그냥 자세 잡아준 게 다야.”

“진짜로 형 덕분이에요. 형은 어떻게 이렇게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요?”

“어? 나 둘 다 잘하는 거 아니야. 그냥 하는 거야. 평범한 수준이지.”

“에이, 거짓말. 제가 본 건 뭔데요. 이렇게 배드민턴도 치고 연구도 하잖아요.”

“운동은 배드민턴이랑 수영만 배워서 좀 할 줄 아는 거고 나머지는 잘 못해. 연구는 계속하다 보니까 하게 되는 거고.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야. 그냥 배운 거라도 잘하자, 열심히 해서 내 걸로 만들자 라는 마음으로 이 정도 할 수 있는 거야.”

“그래도 배운 거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거고 잘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냥... 내게 주어진 일을 꾸준히 시도하고 보니 할 수 있게 된 거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 잘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난 그냥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형... 너무 멋있는 거 아니에요?”

“아잇, 뭘 이런 거 가지고...”

“형 진짜 멋져요. 저도 형처럼 되고 싶어요.”

“참... 자꾸 낯 간지럽게 할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형이 쏜다.”

“그럼 저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뭐야, 바로 나오는데? 이 말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아이스크림? 그거면 돼?”

“네, 그거면 충분해요.”

“좋아, 슈퍼 가자.”


그렇게 지석과 명훈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배드민턴을 마저 쳤다.

그런 다음, 둘은 밤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둘만 있는 시간이 흔치 않아서일까, 명훈은 지석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형,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

“정수 형 첫인상 어땠어요?”

“갑자기?”

“아니 그냥... 아까 형이 말하는 거 들으니까 정수 형 처음 만났을 때 해줬던 얘기가 생각나서요. 지석이 형은 자기한테 어떤 사람이고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런 거 얘기해줬었거든요.”

“정수가 그랬었어? 뭐라고 했는데?”

“에이, 그건 형이 먼저 말하시면 말할게요. 듣고 바뀌면 안 되잖아요.”

“뭐? 알았어. 첫인상이라... 나한테는 약간 황금 동아줄 같았어. 얘기 들어서 알겠지만, 진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한테 손을 내밀어 준 거잖아. 돈도 잃고 집도 잃고 진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는데 집에 같이 살게 해주겠다? 너무 고마웠지. 진짜 일생일대의 행운이잖아. 그래서 나한테는 황금 동아줄 같았어.” 

“와, 황금 동아줄이라니... 근데 사실 저도 정수 형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조금 두려웠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저한테도 황금 동아줄인 사람인 것 같아요. 형 덕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으니깐요. 그럼 형한테 정수 형은 어떤 사람이에요?”

“음... 정수는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도록, 표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야. 정수 덕분에 나 자신을 가둬놨던 마음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달까...? 무조건 숨고 사린다고 좋아지는 건 없다는 걸 정수를 통해 알게 됐어. 지금도 감정을 표현하는 건 쉽지 않다만, 그래도 많이 달라지려고 노력하고 있어.

근데 정수랑은 오히려 가까운 사이가 되니까 서로의 감정을 너무 잘 알아서, 금방 알아채 주니까 감정을 표현하지 않게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 그치만, 달라져야지. 내가 더 노력해야지.”


“와... 형들은 진짜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서로 너무 잘 맞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아껴주고 이해해 주려고 하잖아요. 너무 좋은 관계인 것 같아요. 저한테도 이런 사랑이 올까요...?”

“그럼 올 수 있지. 너 아직 애야. 이제 고작 13살 된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중에 꼭 좋은 인연이 찾아올 거야.”

“그렇겠죠? 그래도 일단 전 행운아인 것 같아요. 지금 저에게는 정수 형, 지석이 형이라는 너무 좋은 인연이 찾아왔잖아요.”

“헐... 명훈아. 지금 형을 좋은 인연이라고 해준 거야? 고맙다... 형 진짜 감동받았다... 형도 명훈이가 너무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해. 내가 많이 아끼는 거 알고 있지?”

“에에? 갑자기 저한테 감동 멘트는 왜 날리시는 거예요. 저는 이런 거에 면역 없단 말이에요. 이런 말은 정수 형한테 가서 많이 해요.”

“너 너무하다... 나름 형이 용기 내서 표현한 건데... 됐어. 앞으로 너한테 표현 안 할 거야.”

“네네.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저한테는 하지 마시고 정수 형한테 자주 가서 표현해요.”

“진짜? 나 진짜 그렇게 한다.”

“네.”

“그럼 얼른 들어가자. 정수 잠들기 전에 정수한테 사랑한다고 해야 해.”

“그래요, 얼른 가요.”


그렇게 지석이와 명훈이는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지석이는 정수를 찾았다.


“정수, 정수.”


그러자, 정수가 방문을 열며 나왔다.


“왜 찾아? 뭔 일 있...”


지석은 질문하는 정수의 손을 냅다 잡고서는 손깍지를 끼웠다.


“정수야, 내가 진짜 너 사랑하는 거 알지? 내가 요즘 표현을 많이 못 해줬는데,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명훈아,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얘 왜 이래?”

“아, 그게 좀 사연이 있어요. 네. 그냥 충분히 들으세요. 좋은 말이잖아요.”

“뭐야...? 일단 고맙긴 한데... 어... 나도 사랑해.”


정수의 답을 들은 지석은 손깍지를 풀었다.


“됐다. 오늘의 할 일 끝. 잘 자.”

“진짜 뭐야...? 아, 잠깐만. 둘 다 방에 들어가지 말아봐.”

“뭔데?”

“왜요?”

“우리... 내일 옥상에서 외식할래? 고기 구워 먹자.”

“갑자기? 언제 내가 몰래 외식하자고 할 때는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못 하겠다면서...”

“그냥... 갑자기 하고 싶어졌달까. 오늘 마침 근무 수당이 들어왔거든.”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아이, 없어. 그런 거.”

“근데 그럼 집에 고기가 있어요? 냉장고에 없었던 것 같은데...”

“집에 없어. 사 와야지. 아침마다 정육점 오픈런 열리잖아. 인당 1인분씩 주니까...”

“아,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지석이 형이랑 저랑 둘이서 1인분씩 사 오라고요?”

“그렇지. 돈은 내가 줄게.”

“너 되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맞잖아. 당연한 거. 나가기 싫으면 먹지 말든가.”

“누가 싫대? 가야지.”

“그러면... 지금 당장 씻고 자야겠네요. 저 먼저 화장실 좀 쓸게요.”

“그래.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얼른 씻고 자.”


그렇게 명훈이는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거실에 남아 있던 지석이 정수에게 물었다.


“진짜... 별일 없는 거 맞지?”

“왜 이렇게 걱정이야. 괜찮아. 별일 없어.”

“알겠어. 늦었으니까 얼른 자. 잘 자.”

“응, 너도.”


***


다음 날, 정수는 옷을 갈아입으며 방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2차 백신을 맞은 뒤로 몸이 다 낫지 않았고, 오히려 특이하게 변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부색이 많이 변했네... 벌써 몸의 반이나 초록색으로 바뀌었다니...

그래도 백신 덕에 괴사는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곧 옷으로도 숨기기가 힘들어지겠네. 언제 한번 애들한테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괜히 마음에 짐만 안겨주는 거 아닌가 싶다...

그렇게 정수는 자신의 몸을 좀 더 살펴보다 다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때, 고기를 사고 돌아온 지석이 정수의 방문을 열었다.


“정수야, 우리 고기 사왔...”

“야, 들어올 때 노크하라고 했지. 맛있는 부위로 사 왔어?”

“.....”

“뭐야... 왜 말을 안 해.”

“김정수, 너 이거 뭐야?”


아뿔싸. 나 아직 옷을 덜 입은 상태였지.


“이거 뭐냐고. 언제 이렇게까지 변한 건데.”

“얼마 안 됐어... 때 되면 말해주려고 했어.”

“그때가 언젠데.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으면 나한테 바로 얘기했어야지. 난 너 이런 줄도 모르고... 하...”


그렇게 지석은 잠시 생각에 빠진 뒤, 손에 들고 있던 고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야, 지석아. 곽지석.”


정수는 빠르게 옷을 입고 뒤따라가 문고리를 돌렸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지석아, 문 좀 열어봐.”

“오늘 고기는 둘이서 먹어. 그리고 내가 나올 때까지 저녁마다 문 앞에 밥 좀 갖다주라. 여기서 먹게.” 

“야... 곽지석.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왜 밥을 따로 먹어.”

“나가서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나 이제 집중할 거라 조용히 좀 해주라.”


지석의 대답에 정수는 말문이 막혔고, 결국, 정수는 잠긴 문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형, 계속 저렇게 둘 거예요? 저렇게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던 게 벌써 5일째에요. 5일째.”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자기가 계속 안에 있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려. 그리고 저렇게 된 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여기에 형 책임이 왜 있는 건데요. 문을 걸어 잠근 건 자기 선택이잖아요.”

“.....”

“.....”

“명훈아, 우리 오랜만에 바깥바람 쐬러 나갈래? 나 놀이터에서 그네 타고 싶어.”

“좋아요, 이따 나가요.”

“고마워.”


그렇게 시간이 지나 밤이 되고, 정수와 명훈은 조용히 밖을 나가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와아. 시원하다. 역시 가을밤이야.”

“지금이 딱 시원할 때이긴 하죠.”

“오, 그네에 사람 없다. 너도 옆에 탈래?”

“네, 근데 왜 갑자기 그네가 타고 싶었던 거예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나한테 누가 그랬거든. 나랑 타는 그네가 제일 재밌다고. 그 김에 바람도 좀 쐬고 싶어서. 앞으로 이런 날이 흔치 않을 거잖아.”

“아...”


둘은 약간 숙연해진 분위기로 조용히 그네를 탔다.

가을바람을 한껏 즐길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정수는 그네를 멈추고 입을 뗐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가족 된 지 곧 1주년 되지 않나?”

“맞아요. 그때가 늦가을에서 초겨울 즈음이었으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요.”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형이 가능한 선에서 다 해줄게.”

“전 그냥 생일 때처럼 비싼 밥 먹고 케이크 나눠 먹는 거면 충분해요.”

“진짜 그거면 돼? 막 또래 애들처럼 놀이공원이나 나들이 안 가고 싶어?”

“형 그동안 낮에 잘 안 나갔었잖아요. 갑자기 왜...”

“뭐... 지금이 나가기에는 제일 괜찮은 계절이기도 하고, 추억을 위해서인데 하루 정도야 나갈 수 있지.”

“그럼 그냥 근처에서 나들이나 잠깐 하는 거로 해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형 힘들잖아요.”

“지금 형 생각해 주는 거야? 감동이다.”

“멀리 가서 형 힘들어하는 게 더 고생이어서 그래요. 케어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래. 감동 깨는 거 참 쉽다 정말.”

“저는 오히려 형한테 묻고 싶어요. 형은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나...는 그냥 다 같이 함께 있는 것 말고는 딱히... 보이는 것처럼 내가 언제 바뀔지 모르잖아. 내가 온전할 때 다 같이 뭐라도 하면 그게 다 추억이지 않을까 싶어.”

“형, 그런 소리 하지 마요. 형 안 바뀔 거예요. 저희가 막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주니까 든든하네. 고마워.”

“아, 저 하나 떠올랐어요. 하고 싶은 거.”

“뭔데?”

“저희 가족사진 찍는 거 어때요? 추억 쌓고 싶을 땐 그게 최고죠.”

“좋다. 그럼 카메라 대여하는 걸 좀 알아볼까? 아, 근데 지석이한테도 물어봐야지. 지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더 고민 좀 해보자.”

“형은 지석이 형이 곧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3차 백신 개발이 끝나면 나오지 않을까?”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잖아요.”

“그치. 그치만... 나오게 할만한 방법이 딱히 없는걸. 하나 꽂히는 게 생기면 그것만 파고드는 애라...”

“전 이대로 못 기다리겠어요. 내일 한번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시도해 볼게요. 나오면 둘이 바로 대화해요.”

“어? 무슨 수로...?”

“제가 생각하기에 지석이 형이 꽂힌 건 백신 연구도 백신 연구지만 다른 게 있는 것 같거든요.”

“그게 뭔데?”

“그건 비밀이죠. 저희 이제 들어가요. 저쪽에서 사람들 오고 있어요.”

“그래...”


명훈이는 먼저 그네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생각인거지... 불안한데...

뒤이어 정수도 일어나 명훈을 따라갔다.



***



다음 날 저녁이 되고, 여전히 둘이서만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언제 할 건데?”

“일단 밥부터 먹고요.”

“난 벌써 다 먹었는데?”

“요즘 입맛 없어서 조금밖에 안 먹은 거잖아요. 그럼 방에서 좀 쉬고 있어요.”

“알았어...”


그렇게 정수는 먹은 것을 간단히 치우고 방에 들어갔다.

남아 있던 명훈이는 밥을 마저 먹고 실험실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문 앞에 있는 저녁을 가져가려는 지석에 의해 실험실의 문이 살짝 열렸다.

그때, 앞에 앉아 있던 명훈에 의해 그 작은 틈새가 벌어졌다.


“형, 밖으로 나와요.”


지석은 못 들은 척 문을 다시 닫으려 했지만, 명훈이 온몸으로 막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오라고 했잖아요.”

“나 못 나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아니요. 나와야 해요. 정수 형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그러자, 문을 닫으려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요 며칠 정수 형 계속 밥도 잘 안 먹고요, 한숨만 푹푹 쉬고 있고요, 우울한 거 눈에 다 보이는데 티 안 내려고 하고요, 형이 안 나오는 게 다 자기 때문이라는 소리밖에 안 해요.”

“..... 미안해. 내가... 내가 곧 나갈게. 금방 나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나와야 한다고요. 지금 정수 형한테 당장 필요한 건 치료제가 아니라 사람이고 추억이에요.”

“조금만 더 하면 돼... 조금만...”

“나오라고요.”

“진짜 조금만...”

“나와. 나오라고 곽지석. 그냥 나와! 한 발짝만 떼면 되는데, 왜 그걸 미루고 있는 건데. 대체 왜! 중간에 있는 나도 답답하다고. 왜 내 말 안 들어주는 건데. 하나뿐인 동생 말 좀 들어달라고!”


순간적으로 감정이 터진 명훈이 울며 소리쳤고 그 소리에 놀란 정수가 방 밖으로 나왔다.


“명훈아...”

“소리쳐서 미안해요... 둘이... 둘이 얘기 나눠요. 전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처음 들어보는 명훈이의 울부짖음에 당황을 한 지석은 한동안 얼 탄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정수도 그런 명훈이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지석의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지석의 정신이 차츰 돌아오고 나서야, 정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지석아, 우리 옥상 갈래?”


정수의 질문에 지석은 조용히 방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고, 둘은 걸음을 맞추며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갔다.


“와... 야경 이쁘다. 이 주변도 이제 많이 발전했네. 불 켜진 곳이 진짜 많다.”

“그러게... 주변이 많이 달라졌다.”

“지석아, 우리 오랜만에 노래 들을래?”


정수는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한쪽을 지석에게 건넸다.

지석은 이어폰을 받아들며 물었다.


“무슨 노랜데?”

“들으면 알아.”




“기억나? 우리 옛날에 집 옥상에 나란히 앉아서 이 노래 들었던 거?”


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가 참 기억에 많이 남더라. 눈에 보이는 풍경과 귀를 통해 들려오는 노래도 좋았고 무엇보다 내 옆에 네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거든. 같이 앉아서 하나의 풍경과 하나의 음악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어. 

앞으로도 이렇게 네 곁에만 있으면 행복한 순간들만 이어질 것 같았고, 너와 영원을 약속하고 싶더라.

근데, 행복한 순간들이 이어지려면 나도 노력을 해야 하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내가 온전할 동안 너한테 행복한 기억들만 남겨주고 싶었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너는 나와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들로 살아가기를 원했어.

어떻게 보면 내 욕심일 수 있는데...

그래서 너한테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고 내가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정수의 말을 들은 지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무겁게 입을 뗐다.


“나는... 나는 네가 계속 내 옆에 있길 바랐어. 네가 내 옆에 없는 미래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었어. 그래서 나는 너를 무조건 낫게 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사실, 많이 변해버린 너를 보고 나서 나 자신이 너무 미웠어. 그동안의 너의 변화를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너는 이렇게 한시가 급한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너무 더디게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정신이 확 들더라. 

그런 마음에 백신 연구에만 신경을 쏟기 시작했는데, 이 행동이 널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어. 지금에서야 알았어.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알아서. 네 옆을 비워둬서 미안해.”

“우리 참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러면 안 됐던 거였네. 이걸 너무 늦게 알았다.”

“아니, 아직 안 늦었어. 지금부터 서로에게 더 표현해 주면 되지.”

“그래, 늦은 건 없지. 시작이 반이니까. 더 잘해보자.”

“그래,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수 씨.”

“네, 잘 부탁드려요. 지석 씨.”


그렇게 둘은 악수를 하며 화해를 한 뒤에, 옛날 추억들을 곱씹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늦은 새벽이 되었고 쌀쌀한 새벽공기를 견디지 못해 결국 옥상을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명훈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지석에게 질문했다.


“아, 맞다. 우리 가족 된 지 곧 1주년이라 밖으로 나들이도 나가고 가족사진도 찍기로 했는데, 어때?”

“좋다. 말 나온 김에 내일 당장 나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자.”

“네.”

“명훈이한테도 얘기해놔야겠다.”

“아, 명훈이... 사과해야겠지. 어린애 속을 내가 너무 썩였다.”

“그래, 넌 좀 나빴어. 나도 사과해야지. 그렇게 눈치 보고 있을 줄은 몰랐어. 우리 참 못된 어른이다.”

“그러게. 우리 참 못됐다. 지금이라도 달라져야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지.”


그렇게 정수와 지석은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음 날 다 같이 사과하면서 사태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 사태를 계기로 셋의 사이는 더 돈독해졌으며 서로에게 감정을 더 표현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연말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정수는 연말 분위기를 낼 겸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서 둘 곳을 고민하고 있었다.


“명훈아, 어디에 트리를 두는 게 좋을까?”

“트리 시켰어요?”

“응.”

“아... 저기 가족사진 옆은 어때요?”

“어디 얘기하는 거야? 저기 평범한 사진 옆에? 아니면 저기 친밀한 사진 옆에?”

“저건 볼 때마다 부담스럽네요. 대체 그 개그 프로가 뭐라고 오마주를 한 건지... 평범한 거 옆에 두죠.”

“진짜 여기서 세대 차이를 느끼네. 옛날에 유명했던 거야. 그러니까 그게 어떤 거냐면...”


그때, 지석이 소리치며 실험실에서 나왔다.


“완성했어!! 3차 백신을 만들었어 내가아아아아!!”

“헐!! 진짜? 곽지석 짱. 너 인정. 진짜 고생했다.”

“역시 전 형이 만들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수고 많았어요.”

“저번에는 혼자여서 너무 외로웠었는데, 이번에는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이젠 혼자일 때는 없을 거야. 마음껏 자랑해.”

“좋아좋아. 기쁨의 댄스~ 사지 분리 댄스~”

“그게 대체 무슨 춤이야...”

“그나저나 따로 백신 맞고 싶은 날 있어? 맞춰서 준비해 놓을게.”

“음... 나는 내년에 맞고 싶어. 너희랑 크리스마스도, 새해 카운트다운도 함께하고 싶거든.”

“그래, 아직 시간 있으니까. 내년에 맞자. 너 맞고 나면 정부에 보고해야겠다.”

“그럼 저희 이번 달은 좀 즐겨요. 다시 나아갈 내년을 위해서.”

“그럴까? 뭐부터 하지...”

“일단, 옥상에 올라가서 눈사람부터 만들어야겠는데요?”

“눈사람? 헐, 눈 온다.”

“대박, 눈오리 만들어야겠다. 내 눈오리 집게가 어딨더라... 지석이 닮아서 종류별로 모아뒀는데...”

“그거 아마 창고 안에 있을 거예요.”

“나는 빨리 씻고 나와야겠다...”

“아직 눈 쌓이려면 기다려야 해요. 천천히 준비해요.”


그렇게 그들은 그날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하는 진짜 즉흥적인 시간을 보냈고 누구보다 행복한 추억들을 쌓았다.


“야야, 빨리 자리에 앉아. 카운트다운 시작한다.”

“벌써? 알았어. 갈게.”

“자, 5, 4, 3, 2, 1. 해피뉴이어!!”

“올해 진짜 잘 버텨 내보자. 해내 보자.”

 “아자아자 파이팅!!”



***



“정수야, 준비됐어?”

“응, 준비됐어.”

“내가 아직 안 됐어. 후...”

“당사자는 난데 왜 이렇게 떨어.”

“네 운명이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긴장된달까?”

“솔직히 나도 많이 떨리거든? 근데 너라서 믿는 거야.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아, 이런 멘트 보통 내 담당인데.”

“뭐, 역할이 바뀔 수도 있는 거지.”

“하긴. 그럴 수 있지. 후... 으럇! 나도 이제 준비됐어.”

“좋아, 잘 부탁해.”

“응, 잘 버텨줘.”


이번에도 지석이는 성호경을 긋고 잠시 기도를 한 다음, 정수에게 백신을 놓았다.

정수가 잘 버텨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정수가 백신을 버텨내는 일주일 동안, 지석에게는 바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정부에 백신 개발을 보고하고 정부 소속 연구원이라는 신분을 부여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로 인해 매스컴을 타게 되면서 잘생기고 똑똑한 연구원으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방송 출연 제의도 많이 받게 되었는데 지석은 정부와 관련된 인터뷰가 아니면 다 거절을 하였으며 정수를 간호하는 데 시간을 많이 쏟았다.


“형 왔어요? 오늘은 좀 늦었네요.”

“응, 정부 쪽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서 그거 해결하고 오느라 좀 늦었어. 정수는 어때?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됐는데.”

“아직 조용해요. 그나저나 피부색이 완전히 돌아오지를 않네요.”

“그러게. 이 변색을 막지 못하면 다시 좀비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이유가 뭘까요?”

“아무래도 초기에 맞았던 성분들이 좀비 바이러스와 만나면서 변이 세포가 생긴 것 같아. 백신 맞고 나서부터 피부가 괴사는 안 되고 피부색만 변했잖아. 아마 그거랑 관련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어찌 됐든 이것도 아직 3차니까 불안한 약물이기도 하고...”

“그래도 심장만 뛰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맞죠?”

“그치, 심장이 멈추면 최소 하루부터 최대 일주일 안에 좀비로 변하게 되니까. 아마 변한다면 치료하는 게 더 어려워지겠지... 난 4차 백신 연구 계속하고 있을게. 깨어나면 알려주라.”

“네. 제가 잘 확인할게요.”


정수는 평소에 깨어나야 할 시간보다 조금 늦게 깨어났지만, 평소와 다른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평소와 다른 바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좀비화의 진행률과 속도만 조금 더뎌졌을 뿐, 바뀐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석은 침대에 앉아 있는 정수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미안해, 정수야. 내가 너를 낫게 해줘야 하는데 더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었어야 했었는데...”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내가 말했지. 네가 처음에 만들었던 백신 안 놔줬으면 나 진작에 좀비 됐다니까? 넌 최선을 다했어.”


정수는 조심히 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석은 한동안 울먹거리는 눈으로 정수를 쳐다보다 다시 실험실에 들어갔다.

그래도 저번에 얻었던 교훈 덕에 지석이는 실험이 조금 안 풀린다 싶으면 거실로 나와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정수는 피부색 때문에 밖에 몰래 나가는 것도 더 힘들어져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에 지석이가 더욱이 필요했다.

하루는 정수가 명훈이와 같이 거실에 앉아 TV를 켰는데, 그때 마침 예전에 지석이 인터뷰를 했던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



- 요즘 또 지석 씨가 잘생긴 백신 연구원으로 유명하잖아요.

- 제 주제에 과분할 따름이죠.

- 에이, 너무 겸손하시다. 좀 자만해지셔도 돼요.

- 하하, 감사합니다.

- 그래서 말인데, 지석 씨의 이런 잘생긴 외모와 똑똑한 두뇌 덕에 요즘 인터넷에서‘지석 씨가 애인이 있다, 없다’로 많이들 궁금해하고 계시거든요. 애인 있으세요?

- 아하하하. 제 애인 여부에 다들 너무 많은 관심을 주셔서 조금 부담스럽네요. 그냥 저한테는 먹여 살릴 가족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아, 그래서 회식도 참여를 안 하시는구나. 저희 방송국 여직원들이 오늘 지석 씨가 회식 안 오신다니까 다들 너무 아쉬워했거든요.

- 아... 그러셨구나. 제가 좀 바빠서...

- 그래도 고기 한 점 먹으러 올 생각 없으신가요? 그 정도는 가족이 허락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허락 안 해주면 좀 그렇다. 그죠?

- 안 가겠다는 건 제 선택입니다. 제 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사적인 대화는 그만하시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주세요.

- 아, 네.


...



“형은 지석이 형이 인기 많은 거 걱정 안 돼요? 솔직히 진짜 잘생겼잖아요.”

“잘생기긴 했지. 그렇지만 난 걱정 안 해. 지석이를 믿으니까. 그리고 인기는 자기 의지가 아닌데 어쩔 수가 없지. 근데 저 진행자 너무 무례하다. 공적인 자리에서 저런 질문들을 막 하네...”

“그니깐요. 근데 지석이 형이 저렇게 답해서 저 방송국에 찍혔대요. 그래서 더 이상 섭외 연락이 안 온대요.”

“저런 데는 또 안 가도 돼. 우리 지석이가 뭐가 꿀린다고. 안 부르면 지들이 더 손해지. 지석이한테 잘했다고 말해주러 가야겠다.”


그렇게 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로 향했다.

실험실 문을 여는 순간, 정수는 울고 있는 지석이를 발견했다.

정수는 실험실 문을 조용히 닫고 지석에게 다가갔다.


“뭐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진전이 없어... 뭘 해도 진도가 안 나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는 점점 변해가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정수는 앉아서 울고 있는 지석의 손을 잡고 자신의 심장에 갖다 대며 말했다.


“지석아, 조급해하지 마. 너 자신을 믿어. 너는 언젠가 꼭 답을 찾아낼 거고 성공할 거야. 네 실험의 결과물이 아직 잘 살아 있어. 느껴지지? 내 심장 뛰는 거.”

“사실 나... 크흡... 저번에 네가 크흡.... 몰래 우는 거 봤어... 제일 힘든 건 너일 텐데 크흡... 난 아무 위로도 할 수가 없더라. 근데 넌... 넌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날 위로해 줄 수 있는 거야? 흡... 나도 날 못 믿는데... 어떻게 너는 나를 믿을 수가 있는 거야?”

“별다른 거 없어. 너를 잘 아니까. 사랑하니까 믿는 거야. 지석아, 너는 대단한 사람이야. 너는 맨날 네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없어. 다 대단하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야.”

“.....”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몰래 울었어야 했는데. 괜히 너한테 부담감만 안겼네.”

“아닝, 아니야. 울어도 돼. 그냥 내 앞에서 시원하게 울어줭. 나는 그게 더 나아. 네가 그냥 시원하게 우울한 감정들을... 다 배출했으면 좋겠엉. 맨날 나만 네 앞에서 우는 것 같짜나. 흡... 잠깐만 기다려 봐.”


지석은 정수한테 잡혀있던 손을 풀어내고 실험실 한쪽에 놓여있는 커다란 곰 인형을 들고 와서 정수를 안았다.


“에이, 나 안는다고 눈물 안 나와.”

“있어 봐아. 우리 천천히 얘기해 보장. 저번에 왜 울었던 거야?” 

“말하기가 좀 부끄럽긴 한데...  집에만 있는 게 너무 답답하기도 했고...  거울을 봤는데 내가 너무 못생겨 보이는 거야. 그러면서 옛날 얼굴 생각도 나고 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냥 이것저것 잡생각들이 떠오르다 보니까 너무 두려워서 눈물이 났어. 너한테 더 부담될까 봐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잠만. 나 왜 눈물이 나지? 안 울려고 했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지석은 정수의 등을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정수가 많이 힘들었구나아. 괜찮아. 울자. 울어도 돼. 너 전혀 못생기지 않았구... 너 혼자 끙끙 앓을 필요도 없어. 내가 옆에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든 너 되돌려 놓을 거야. 딘짜로.”

“지석아, 고마운 말이긴 한데, 코맹맹이 소리로 그런 말 하고 있으니까 좀 웃겨. 눈물이 쏙 들어간다.”

“뭐라고? 나도 멋지게 위로 좀 해주려고 했는데... 글렀넹.”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우리 조금만 더 힘내보자. 알았지?”

“그래, 할 수 있다. 우리. 해보자.”


그렇게 둘은 마음을 공유하며 더 단단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단단한 사이가 되었다고 해서 지나가는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야속하게도 정수의 좀비화는 날이 갈수록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수는 점점 잠을 잘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억지로라도 잠들기 위해 삼 일에 한 번씩 수면제를 투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점점 내성이 생겨 투여하는 주기를 줄였고 그마저도 잘 통하지 않아 투여하는 양을 늘리기 시작했다.


“으으... 피부도 질겨지다 보니까 주사 맞기가 쉽지가 않네.”

“많이 아팠어? 미안해. 미안해. 내가 더 조심히 꽂았어야 했는데...”

“괜찮아. 괜찮으니까 울지 마. 너 또 눈물 차오르려고 한다. 처음에 울었으면 됐지. 뭘 또 울려고 해. 울보야. 원래 울보는 나였는데 내가 아프고 난 뒤로 바뀐 것 같아. 포지션이.”

“네가 내 상황 되어봐.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거든? 나 정도면 많이 참는 편이야.”

“그래, 알았어. 자고 일어나면 우리 가족 2주년인 거지?”

“응, 하루 뒤에 일어날 거야. 피곤할 텐데 얼른 자.”

“응, 나 재우고 묶는 거 잊지 말고. 불안하니까. 이번엔 진짜 확실히 묶어놔야 해. 저번처럼 대충 묶지 말고.”

“알았어. 이번엔 진짜 제대로 묶을게. 잘 자.”

“응.”


지석이는 정수를 재운 후 줄로 간단하게 묶은 뒤 조용히 방으로 나왔다.

그런 다음, 실험실로 향했고 4차 백신의 마지막 안정성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번 실험 결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우리 가족에게 최고의 2주년 선물을 할 수 있을 거야... 제발... 성공하길... 

지석이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걸까. 그날 실험은 무사히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정수한테 제일 먼저 말해줘야지... 나아질 수 있다고...

그렇게 지석은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되고, 명훈이 급하게 지석이를 깨웠다.


“형, 일어나봐요. 빨리.”

“어...? 왜? 무슨 일 있어?”

“정수 형이... 안 일어나요.”

“뭐라고? 다시 말해봐.”

“정수 형이 안 일어난다고요! 눈을 안 떴어요!”

“정...정수가... 왜...”


지석은 급하게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와 정수의 방으로 향했다.

명훈이의 말대로 정수는 눈을 뜨지 않고 처음 그 상태 그대로 누워있었다.

지석은 누워있는 정수의 윗옷을 벗겼다.

심장이 있는 위치를 제외하고는 피부가 다 초록색으로 변해있었다.

지석은 바로 정수의 심장에 손을 갖다 댔다.

심장은... 다행히 뛴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어떡해요? 미동이 없어요. 지금 일어날 시간이 한창 지났는데...”

“일단... 내가 어제 백신을 완성했거든? 조금 더 지나도 안 일어나면 그거 넣어보자.”

“약을 완성했어요? 진짜 다행이다... 수고했어요, 형.”

“아니야, 그동안 네가 고생이 많았지. 나 좀 씻고 올 테니까 방 밖에 나와서 일어나는지 확인 좀 해줘. 혹시 모르니까.”

“네.”


지석은 정수를 확실하게 묶고 명훈이와 같이 방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 안 일어나는 거야... 대체 왜...”

“.....”

“맞다, 그게 있었지. 정수 이용권. 전에 줬던 정수 이용권 그거 지금 쓸게. 세 개 다 쓸게. 다 쓸 거니까 일어나 봐 제발...”

“.....”

“이거 쓰면 꼭 들어준다면서... 약속 지킨다며... 김정수우우...”


지석은 정수의 손을 잡고서 정수를 계속 깨웠다.

하지만, 일어날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형... 벌써 12시간이나 지났어요...”

“벌써? 어떡하지...”

“그냥 백신 놓으면 안 돼요?”

“위험하긴 한데... 그래. 백신 놓자. 준비해 올게.”


지석은 실험실에서 약을 들고 와 정수의 팔에 놓을 준비를 했다.

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지석은 성호경을 긋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평소보다 좀 더 길게 기도를 했다.

지석은 떨리는 손으로 주사기를 집어 들었고, 평소보다 좀 더 많은 힘을 써서 약을 주입했다.

흐어어어... 제발... 제발 이겨낼 수 있기를... 제발...


지석은 그때부터 정수의 옆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계속 기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만큼 간절했기에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형, 잠은 침대에서 자요. 방바닥 불편하잖아요.”

“어어, 한 번만 확인해 보고.”


지석은 자기 전 마지막으로 정수의 상태를 확인해 볼 겸 심장 근처에 귀를 갖다 댔다.


어...? 뭐지...?


정수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잠...깐만. 손을 대보자.


느낌이 없다.


뭐가잘못된거지?

왜아무것도느껴지지않는거지?

몇시간전까지만해도멀쩡했는데?

분명여기만변하지않았는데대체왜멈춘거지?

내판단이틀린건가?

백신을놓지말았어야했나?

내백신이문제가있나?

내가잘못만들었던걸까?

너무많은약물들을주입해서몸이감당할수없어진걸까?

내가내실험에너무확신을했나?

내가해왔던실험들이옳았다고할수있나?

이제난뭘해야하지?

나는너가없으면살아갈수가없는데?

왜먼저심장이멈춰버린거야?

나도널따라갈까?

너를따라가면행복해진너를만날수있을까?

모든게다해결될수있을까?

.

.

.

.

.

.

.


“형, 지석이 형.”


어?


“정신 차려봐요. 왜 그래요? 무슨 일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게...”

“천천히 말해봐요.”

“심장...심장이 안 뛰어...  정수 심장이 안 뛰어... 심장이...”

“지석이 형.”

“심장이...”

“형, 정신 차려요. 제 눈 똑바로 봐요. 정수 형 죽은 거 아니에요. 심장 멈춰도 죽은 거 아니고 좀비 된 거예요. 전보다 치료하는 건 더 어렵겠지만 돌려낼 수 있어요. 형이라면 분명 해낼 수 있어요. 괜찮아요. 살아 있어요.”

“살아 있... 살아 있어...”

“맞아요, 살아 있어요.”


맞다... 살아 있어... 죽은 게 아니야...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염자였지... 괜찮아... 살아있어... 되돌리면 돼... 할 수 있어... 해야만 하고... 해낼 거야... 너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후... 고마워, 정신이 확 깬다. 그래. 난 해낼 수 있지. 해낼 거야. 먼저 자. 난 실험실에...”

“아니요, 오늘은 그냥 자세요. 많이 힘들어 보여요.”

“나 괜찮아. 어. 할 수 있어.”

“방금 진정됐잖아요. 지금 상태에서 뭐 해봤자 효율 안 올라요. 그리고 전 형까지 잃고 싶지 않아요.”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지금 명훈이한테는 나밖에 없는데.

또 이 아이에게 크나큰 아픔을 남겨줄 뻔했구나...


“미안, 지금 잘게. 잘 자.”

“네, 형도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요.”


그렇게 지석이는 거실에 있는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이것까지 모두 정수의 계략인 것 같다는 생각.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취할 행동을 알기에. 그걸 막기 위해 명훈이를 데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역시, 너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구나.



***



지석이는 매일 같이 정수의 방에 가서 정수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좀비로 변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좀비의 여부가 결정되는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근데... 오늘도 좀비로 안 변하면 어떡해요?”

“음... 그래도 피부가 썩지는 않았으니까 살아 있는 거 아닐까? 사실 나도 모르겠어. 두렵다.”

“근데 안색이 좀 더 편해진 것 같지 않아요? 저만 느끼는 건가?”

“그래? 속는 셈 치고 심장에 손 한 번 대볼까?”


지석은 조심스레 정수의 심장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지석의 눈에서 눈물이  하고 떨어졌다.


콩닥... 콩닥... 콩닥...


“울림이 느껴져... 심장이... 심장이 다시 뛰고 있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알고 보니 지석의 약이 적시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지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누워있던 정수의 몸을 그냥 안았다.

원래는 차가워야 했지만, 그때만큼은 뭔가 차갑지 않았다.


다행이다. 너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게 되어서.


이 마음속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걸까.

정수의 팔이 조심스레 올라와 지석이를 감싸안았다.

뒤에서 그 광경을 본 명훈이도 조심스레 그들을 안았다.

그렇게 셋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들의 체온을 공유했다.

다시는 서로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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