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잘 키운 친구가 되어줘!
눌
지석은 공원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서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채팅방은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낸 게 언제였더라. 손목을 들어 워치의 운동 시작 버튼을 눌렀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 저녁. 선선한 공기가 뺨을 스치자 지석은 무의식적으로 보폭을 늘렸다.
몇 발자국 앞에서 누군가 전화를 하며 걷고 있었다. 캡모자를 눌러쓴 남자였다.
“응, 나 공원에 산책 나왔어.”
매일 듣던 톤. 그렇다고 바로 확신하기엔 아직 이르다.
지석은 걸음을 늦추지도, 더 다가서지도 않은 채 보폭을 맞췄다. 너무 가까워지지 않게, 한두 걸음 뒤에서.
"알았어. 일산 가면 연락할게."
일산.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다. 주말에 일산 간다고.
손을 뻗어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자 남자가 돌아섰다. 캡모자 아래로 얼굴에 그림자가 지고 당황한 기색이 먼저 스쳤다.
지석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
“혹시… 말차정수기?”
잠깐의 정적.
“…네?”
남이 들으면 헛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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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4주년! 신규 용사 초대 이벤트》
「초대장을 받고 등록한 기존 유저, 신규 유저 모두에게 드립니다!
마스터 스텔라 코스튬 세트
전설의 영웅 비약 500개….」
정수야 캐릭터 생성하고 접속만 해주라 접속만. 아니 나 게임 잘 안 해. 내가 너 교양 과제 도와줄게 제발. 과제는 됐으니까 학식 두 번 네가 사라. 아 두 번은 좀… 박준영 보상받기 싫어? 아닙니다! 당연히 사드려야죠!
교복 입은 학생들이 큰 소리로 탄성을 내지르고 한쪽에선 라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정수는 공짜 학식 두 번을 위해 피시방에 따라와 온라인 게임 아르카나에 캐릭터 생성을 마쳤다. 게임에 흥미는 없지만, 그래픽이 제법 화려해 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하다 보면 재밌다니까? 네가 게임을 안 하고 살아서 그래. 어쨌든 난 접속 1시간만 채우고 집에 간다. 준영이 뭐라 떠들든 정수는 보상 수령 조건만 달성하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시스템] 명란젓코난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명란젓코난] ㅎㅇ요
[갓더땅돌] 코난 형 ㅎㅇ 옆엔 누구셔?
[명란젓코난] 내 친군데 신규 이벤트 좀 해달라고 끌고옴ㅋㅋ
[갓더땅돌] 내가 소매넣기 해서 장성시킨다.
"소매넣기가 뭐야?"
[갓더땅돌] 말차님 안녕하세요ㅎㅎ
엘프 귀를 한 금발 긴 생머리 여자 캐릭터가 정수 앞으로 다가왔다.
[시스템] 갓더땅돌 님의 교환신청입니다.
[말차정수기] 이게 뭐예요? 이거 다 저 주셔도 돼요?
[갓더땅돌] 다 가지세요~~ 얼마 안 해요ㅋㅋ
"네가 방금 받은 게 소매넣기지."
준영이 눈썹 하나 꿈쩍 안 하고 답했다. 이왕 받은 거 스토리 퀘스트라도 진행해보라는 둥 몇 가지를 일러주더니 머리에 헤드셋을 썼다.
갓더땅돌이라는 유저는 교환 창을 빈칸 없이 채워 넣었다. 포션, 초보자용 장비, 쓸 수 있을 법한 것들까지. 정수는 얼떨떨한 상태로 거래를 끝냈고, 곧바로 친구 요청이 들어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수락 버튼을 눌렀다.
갓더땅돌은 정수의 곁에 붙어 무엇을 어떻게 진행하면 되는지 일대일 전담 내비게이션을 자처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접속한 지 세 시간이 지나있었다.
게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흘렀다.
어느 날부터 정수는 더 이상 뒤를 보지 않았다. 던전에서 발이 맞았고, 실수해도 흐름이 끊기지 않았다. 지석은 정수가 죽으면 웃었고, 정수는 지석의 체력이 빠지면 먼저 앞으로 나갔다. 둘이 붙으면 실패해도 다시 들어갔다.
약속은 늘 짧았지만 한 번 접속하면 최소 한 시간은 함께했다. 같은 시간에 로그인하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둘은 길드에서도 한 세트처럼 불렸다.
어느 날, 쪽지가 하나 도착했다.
형 나 담주 시험이라 당분간 접속 못 해. 나 없이도 잘 키우고 있어.
정수는 잠깐 멈췄다가 답장을 보냈다. 응원 외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약 일주일 만에 아르카나에 접속하니 익숙한 타이틀 배경음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쪽지함을 열자 메시지가 연달아 쌓여 있었다.
[from. 말차정수기] 땅돌아 시험 끝났어?
[from. 말차정수기] 나 레벨업 열심히 해놨는데
[from. 말차정수기] 이제 게임은 안 해?
세 통이나 보냈네. 지석은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쪽지를 천천히 읽었다. 어디 갔냐는 말도, 빨리 오라는 말도 없었다. 친구 창을 열어 접속 중인 걸 확인하자마자 키보드를 두드렸다.
[1:1 대화 >> 말차정수기] 형 나 그렇게 보고 싶었다며~~
곧바로 답이 왔다.
[1:1 대화 << 갓더땅돌] 시험 잘 봤어?
[1:1 대화 >> 말차정수기] 그럼ㅋㅋ 나 이과 1등임
[1:1 대화 << 갓더땅돌] 오 대단한데
[1:1 대화 >> 말차정수기] 나 1등 했으니까 맛있는 거 사줘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다. 반쯤은 농담, 반쯤은 진심.
잠깐의 공백 뒤에 답이 왔다.
[1:1 대화 << 갓더땅돌] 너 어디 사는데?
[1:1 대화 >> 말차정수기] 서울 강동구!
[1:1 대화 << 갓더땅돌] 어 나도 그쪽인데?
지석은 손을 키보드에서 떼지 못했다.
[1:1 대화 >> 말차정수기] 길 가다가 밥 사달라는 사람 있음 나야ㅎ
[1:1 대화 << 갓더땅돌] 그래ㅋㅋ 그 대신 유효기간 한 달.
그때는 몰랐다. 한국은 작고 서울은 그중에서도 고작 0.6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 채팅을 나눈 지 사흘째 되던 날에야 비로소 떠올랐다.
"응, 나 공원에 산책 나왔어."
수많은 사람 중 별 뜻 없던 통화 한 마디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지석은 그 말을 들은 자리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지석은 키보드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줬다.
말차형 즉사기 온다!
오케이-
30초 후 궁 돈다. 쿨 돌면 바로 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보스 발탄을 처치하셨습니다. 잠시 후 퇴장맵으로 이동합니다.]
와 펜던트 나왔다! 형 가질래?
진짜 그래도 돼? 이거 비싼 거 아니야?
난 이미 있지롱. 강화할 때 화면공유 켜. 터지면 놀리게.
땅돌아 고마워…
고맙다는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뉴비 키운다는 게 거창한 일은 아니었다. 저렇게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던전이야 백 번이고 돌 수 있었다.
공원에서 그 목소리가 들렸을 때, 지석은 생각도 하기 전에 발을 멈췄다.
"혹시... 말차정수기?“
"누구…?“
"따, 땅돌이에요."
“땅돌이? 진짜 너야?”
정수는 한동안 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을 갓더땅돌이라 소개한 소년은 생각보다 작았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가 유난히 가늘었다. 시선이 발끝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동안, 먼저 입을 연 건 지석이었다.
“저, 옆에서 걸어도 돼요?”
정수의 시선이 벤치로 향했다.
“저기… 앉아서 얘기할까.”
지석은 벤치에 앉아 정수를 올려다봤다. 얇은 긴팔 아래 곧은 어깨선, 허리에 질끈 묶은 바람막이. 모자챙에 눌린 앞머리가 눈가에 엉겨 붙어 있었다.
“형 목소리 진~짜 똑같네요.”
정수가 고개 를 숙였다. 그제야 시선이 마주쳤다. 맑고 큰 눈.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빛이 흔들렸다. 눈 밑에 도톰한 애교살, 통통하게 올라온 입술. 게임에서는 반말 잘만 하더니.
"게임에서처럼 말 편하게 해."
근처 사냐는 물음에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 이름은 김정수야."
순간 지석은 말차정수기라는 닉네임이 먼저 떠올랐다. 화면 속에서 부르던 이름이 사람 얼굴을 얻었다.
“난… 지석. 곽지석이야.”
발끝에 힘을 주었다. 전에 했던 약속 기억해? 밥 사준다던 거. 정수는 그랬지, 하고 짧게 답했다.
핸드폰 화면을 한 번 누르자 펭귄 배경 화면이 켜졌다. 시각은 이미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다.
에취!
짧은 재채기 소리가 정적을 깼다. 차가워진 밤공기에 무릎 아래로 드러난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바람이 스치자 정수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춥지. 집에 들어갈래?”
지석은 벤치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마실 거라도 사 올 테니까 10분만 더 있으면 안 돼?”
말아 쥔 주먹을 다리 위에 모으고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순간 지석의 무릎 위로 천이 덮였다. 정수의 바람막이로 찬바람이 한 겹 가로막혔다.
"넌 여기 있어. 마실 건 내가 사 올게."
정수는 바람막이를 덮어주고는 금방 다녀오겠다며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불러야 하지. 형이라는 말은 이미 한 번 꺼냈는데,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버린 느낌이었다. 이름을 입에 올리기엔 조심스럽고 닉네임을 떠올리면 조금 전 얼굴이 먼저 겹쳤다.
‘정수 형.’
목 끝에서 멈췄다. 게임에서는 쉽게 불렀던 말이었다. 어색함에 고개를 숙인 그때,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정수는 핫초코를 건네며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앗뜨-. 모락모락한 김이 올라오는 컵을 입술에 댔다. 따가운 열기가 먼저 퍼졌다. 호호 불어 한 모금 넘기니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처음엔 그냥 이런저런 얘기였다.
게임은 언제부터 했는지, 학교는 어디인지. 수능 얘기가 나왔지만 지석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바쁘긴 한데 게임 할 시간 정도는 있다고.
전공 이야기가 나오자 정수는 잠깐 시선을 옮겼다. 도예학과라고 했다. 빚고, 깎고, 굽는 일.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몇 번 넘기더니, 사진 한 장을 지석 쪽으로 기울였다.
지석은 무심코 몸을 숙였다. 작은 점들이 촘촘히 박힌 접시. 규칙적인데 이상하게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지는 모양이었다.
“이거 형이 만든 거야?”
별거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아무리 봐도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진짜 예쁜데. 만드는 거 재밌겠다.”
정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지석을 한 번 보고, 다시 화면을 봤다. 그러다 조용히 물었다.
“해보고 싶어?”
“응.”
생각할 틈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정수의 눈꼬리가 아주 조금 풀렸다. 언젠가 공방에 오면 도와주겠다고. 약속이라고 하기엔 가벼웠고, 흘려버리기엔 묘하게 남는 말이었다.
지석은 그게 신기했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괜히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느껴져서.
"...“
"덕분에 나도 재밌어."
말하고 나니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정수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정말 늦었으니까 집에 가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석은 몇 걸음 가다 멈춰 손바닥을 펼쳐봤다. 핫초코를 쥐고 있던 자리가 아직 따뜻했다.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시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인도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정수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힐끗 돌아봤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누워 습관처럼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알림 상단에 오픈채팅 메시지가 떠 있었다. 늘 있던 방이었다. 접속 시간이나 파티 공지 같은 말만 오가던 곳이라 안 읽은 메시지가 유독 눈에 걸렸다.
지석아 잘 들어갔어?
갓더땅돌이 아니라 곽지석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다.
응. 다음에 또 봐.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다음이 언제인지 일부러 묻지 않았다. 그 말을 먼저 꺼내는 순간 이 만남이 지금보다 무거워질 것 같아서였다.
집에 돌아온 정수는 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시선은 천장으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어렸다.
곽지석. 고3.
게임에서는 그냥 땅돌이였다. 나이도, 학년도 필요 없던 이름. 그런데 이제는 자꾸 다른 장면들이 따라붙었다. 재채기를 하던 모습, 핫초코 불던 입매, 바람막이를 덮어준 순간 올려다보던 표정들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집어 들자 오픈채팅방에 남아 있던 문장은 하나였다.
「응. 다음에 또 봐」
다음이 언제냐고 물으면 되는데. 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다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놨다. 천천히 가자. 게임에서 매일 보는 사이니까 급하게 굴 필요 없어.
정수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기약 없는 약속만 남긴 채, 밤은 조용히 흘러갔다.
그 뒤로도, 지석이 보기엔 정수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접속하면 인사를 했고, 파티에 들어오면 익숙하게 던전을 돌았다. 말투도 목소리도 공원에서 들었던 그대로였다.
다만 현실 얘기로 이어질 때면, 대답은 늘 애매한 데서 멈췄다. 글쎄. 조만간. 조만간이라는 말은 대답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날도 함께 던전에 들어갔다. 여긴 내가 할 테니 형은 뒤에 봐줘. 원래라면 바로 알았다는 대답이 들려야 했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석은 뒤에서 막아줄 거라 믿고 몬스터를 끌었다. 하지만 백어택이 들어왔다. 정수의 캐릭터가 엉뚱한 곳에 서 있었다. 화면이 흑백으로 변했다. 방어 실패로 인한 전멸이었다.
“아… 미안하다. 내가 늦었어.”
웃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사과하는 사람은 늘 정수였지만, 웃음까지 빠진 건 처음이었다.
“리트하느라 길어졌네.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스파게티. 형도 얼른 들어가.”
건조한 대답. 정수는 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석의 목소리에 웃음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통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정수는 숨을 들이켰다가 그대로 멈췄다.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화면만 바라봤다. 방금까지 함께 있던 닉네임은 어느새 로그아웃 표시로 바뀌어 있었다.
정수가 먼저 말을 걸면 답은 돌아왔다. 파티를 부르면 들어왔고, 플레이에 지장은 없었다. 다만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웃음이 없었고, 예전에 알던 리듬과 어긋나 있었다.
지석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수 형이라는 호칭은 여전히 게임 안에만 남아 있었다.
정수는 늘 같은 시간에 접속했고, 지석은 점점 늦게 들어왔다. 함께할 때는 여전히 호흡이 맞았다. 신호를 주고받고, 몬스터를 잡고, 아이템을 나눴다. 그런데 끝나면 인사는 없었다. 로그아웃 표시만 남았다.
어느 날은 한 시간, 어느 날은 두 시간. 어떤 날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1:1 대화 << 갓더땅돌] 왔어?
[1:1 대화 >> 말차정수기] 응
그게 전부였다.
정수는 채팅창을 닫았다. 파티 목록에 지석의 이름이 다른 던전에 떠 있었다. 헤드셋을 벗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흘쯤 지나자, 정수는 혼자 던전을 돌다 중간에 나왔다. 재미가 지지리도 없었다.
오픈채팅방 마지막 메시지는 여전히 ‘응’ 한 글자였다.
정수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지석아
지웠다.
야
이것도 지웠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채팅창을 닫았다.
지석도 그랬다.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게임은 켜지지 않았다. 시작 버튼 위에 커서만 얹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형이랑 할 때는 분명 재미있었는데.
끝내 클릭하지 못하고, 화면이 먼저 어두워졌다.
그다음 날 밤, 지석이 접속했다.
[1:1 대화 >> 말차정수기] 형 나 이제 게임 잘 안 할 것 같아
[1:1 대화 << 갓더땅돌] 왜
[1:1 대화 >> 말차정수기] 요즘 좀 정신없어
[1:1 대화 << 갓더땅돌] 갑자기?
[1:1 대화 >> 말차정수기] 갑자기는 아니고
잠깐의 공백 후 메시지가 이어졌다.
[1:1 대화 >> 말차정수기] 그냥 뭔가 달라진 것 같아서
[1:1 대화 >> 말차정수기] 형 나 피하는 거야?
[1:1 대화 << 갓더땅돌] 아니야
[1:1 대화 >> 말차정수기] 그럼 뭔데
[1:1 대화 >> 말차정수기] 그때 만난 거, 불편했어?
정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얼굴을 감쌌다.
[1:1 대화 << 갓더땅돌] 그게 아니라
[1:1 대화 >> 말차정수기] 그럼 뭔데
채팅으로는 안 된다. 정수는 마우스를 움직여 팀 보이스 방을 만들었다.
[1:1 대화 << 갓더땅돌] 보이스 들어와
답이 없었다. 30초쯤 지나서 지석이 들어왔다. 마이크는 끝내 켜지지 않았다. 정수는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지석아."
대답 은 없었지만, 말을 이어 나갔다.
"나 너 싫어하는 거 아니야. 공원에서 만난 것도… 좋았어."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정수는 모니터 속 지석의 캐릭터를 봤다. 가만히 서 있었다.
"근데 그 뒤로…“
정수는 잠깐 말을 멈췄다.
"뭐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정수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밥 사준다고 했는데 안 지켰잖아.”
정수는 눈을 감았다. 헤드셋 너머로 희미한 숨소리만 들렸다. 마우스를 쥔 손에 땀이 맺혔다.
잠깐의 정적 후 지석의 마이크에 불이 켜졌다.
"형."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도... 매일 생각했거든. 형이 왜 저러나.“
숨을 들이켰다.
"근데 물어보면 형이 더 불편해질 것 같아서.“
"미안해.“
"사과는."
지석이 숨을 골랐다.
"사과는 만나서 받을게."
지석의 캐릭터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내일 6시에 봤었던 공원으로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알았어."
잠깐의 침묵 뒤에 지석이 덧붙였다.
"형, 나 게임 안 접어."
"...응?"
"형이랑 하는 거 재미있거든."
그 말을 남기고 지석이 팀 보이스를 나갔다. 로그아웃 표시가 떴다. 정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내일 6시에 올림픽공원. 헤드셋을 벗고 그대로 책상에 이마를 묻었다.
다음 날 오후, 지석은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시계는 5시 30분을 가리켰다.
공원에 도착하니 5시 40분이었다. 저번에 앉았던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10분이 흘렀다.
5시 55분.
가까워진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짧아진 머리, 검정 가죽 재킷 아래로 넓 은 어깨가 보였다. 정수였다.
"지석아."
"형."
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이지색 코트가 몸을 넉넉하게 감싸고, 안쪽의 검은 후드가 목선을 따라 얹혀 있었다. 언제 왔냐는 물음에 나도 방금 왔다고 답했다. 밥 먹으러 가자고 하자 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가 앞장서 미리 알아둔 식당으로 향했다.
김치찌개 2인분을 주문하고 마주 앉자, 테이블 위에 물컵만 놓였다. 정수의 물컵 가장자리에 입술이 잠깐 더 머물렀다. 내려놓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나도 좀 생각해봤는데.”
지석이 고개를 들었다.
“너 고3이잖아. 수능도 얼마 안 남았고.”
잠깐 숨을 골랐다.
지석의 표정이 바뀌었다. 웃음기가 걷히고, 대신 시선이 또렷해졌다.
“그게 왜 형 몫이야.”
“괜히—”
“형.”
지석이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한 번에 닿았다.
“형이 시간 뺏는 거 아니야.”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내가 선택한 거야.”
정수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그래도—”
“안 돼.”
짧게 잘랐다.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형 만나는 시간,”
지석은 말을 고르듯 천천히 말했다.
“나한테는 도망 아니고, 쉬는 거야.”
정수는 천천히 지석의 표정을 봤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형이 안 해도 돼.”
테이블에 김치찌개가 놓였다. 정수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지석도 숟가락을 들었다가 멈췄다. 네가 먼저 먹으라는 말과 형이 먼저 먹으라는 말이 겹쳤다.
“…같이 먹자.”
둘이 동시에 숟가락을 움직였다. 식당 안에 국물 끓는 소리만 남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서야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형, 저번에 보여준 그 접시 말이야."
"응?"
지석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정수를 응시했다.
"나도 만들어보고 싶은데. 저번에 공방 와보라고 한 거, 진심이었어?"
정수는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와서 뭐 하나 만들어봐. 내가 옆에 있을게."
"진짜?"
"응. 만드는 거 도와줄게.“
"그럼 이번 주 토요일?"
"좋아."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지석이 어깨를 움츠리자 정수는 말없이 한 발 앞에 섰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겹치는 곳까지 나란히 걸었다. 찌개가 좀 짰다는 말,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는 얘기, 수능 끝나면 제일 먼저 뭘 할 건지 같은 것들.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들어간다는 말에 조심히 가라고 답했다. 지석은 몇 걸음 가다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형.”
“응?”
“오늘 좋았어.”
"..나도.“
그날 이후, 둘은 자주 만났다. 날짜를 세지 않아도 될 만큼.
한 번은 정수 학교 근처 카페에서. 정수가 과제를 하는 동안 지석은 옆에 앉아 창밖을 보기도 하고 핸드폰을 만지기도 했다. 지석은 영상을 보다가 툭 물었다. 물레 돌아가는 속도도 조절할 수 있어? 그럼. 정수는 픽 웃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끔 정수가 고개를 들어 지석을 보면 시선이 마주쳤다.
한 번은 공원에서. 아무 약속 없이 나왔는데 정수도 나와 있었다.
"우연이네.“
"응.“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곁눈질하자 정수도 지석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곧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형, 공방 언제 가?“
"이번 주 토요일. 올래?“
”나도 가도 돼?“
물어보고 나서 이상했다. 분명 지석이 먼저 가고 싶다고 했는데.
정수는 잠깐 생각했다.
”당연하지. 내가 도와줄게.“
---
토요일 오후, 공방 문을 열자 흙냄새가 먼저 밀려 나왔다.
"와...“
선반에는 말라가는 도자기들이, 작업대 위에는 손자국이 남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진짜 별거 없다니까.“
정수는 접시를 한 번 더 안쪽으로 밀어놨다. 앉으라고 하자 지석이 작업대 앞 의자에 앉았다. 정수는 그 뒤에 섰다. 손을 올리라는 말에 지석이 작업대에 손을 올렸다. 정수가 뒤에서 지석의 손을 잡았다.
정수의 손이 지석의 손을 감싸며 천천히 움직였다. 물레가 돌아가고, 흙이 조금씩 올라왔다.
"힘 빼."
"응."
"너무 세게 누르면 망가져."
정수의 목소리가 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지석은 물레만 보려고 했다.
"집중해."
"...응.“
한참을 하다가 결국 흙이 찌그러졌다. 지석은 혀를 찼다.
"망했다."
"괜찮아. 처음이니까.“
정수는 물레를 멈추고 지석의 손에서 손을 떼었다. 따뜻한 온기만 남아 있었다. 다시 하겠냐고 묻자 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조금 나았다. 세 번째는 그럭저럭 찻잔 모양이 나왔다.
"이거면 되겠다."
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냐고, 언제 다 마르냐고 묻자 일주일쯤 걸린다고 답했다.
지석은 자기가 만든 찻잔을 물끄러미 봤다. 삐뚤었지만 그래도 찻잔이었다.
"형이랑 같이 만든 거네."
"응."
"매일 쓸게."
정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마르면 가져가.“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공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작업대를 비췄다. 지석은 손을 씻으며 선반을 둘러봤다.
"형이라고 부르면 이상하지 않아?“
정수는 잠깐 멈췄다.
"...정수라고 불러도 돼."
"...정수.“
한 번 더 불렀다.
"정수우.“
짧게 숨 새듯이 웃었다.
"왜 자꾸 불러.“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는 게 낯설어서라고, 지석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의 공백. 그 사이로 웃음이 겹쳤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이유라는 듯이.
공방 문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집 어떻게 가냐고 묻자 버스 탄다고 답했다. 나도 그쪽이라며 정수가 나란히 걸었다. 말은 별로 없었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수."
"응."
"오늘 재밌었어."
"나도."
지석은 잠깐 망설였다.
"다음에 또 와도 돼?"
"...당연하지."
"그럼 다음 주 토요일?“
”응.“
버스가 왔다. 지석이 올라타려다 뒤를 돌아봤다.
"정수. 잘 들어가."
"너도."
버스 문이 닫혔다. 창문 너머로 정수가 손을 흔들었다. 지석도 손을 흔들었다.
집에 돌아온 지석은 컴퓨터를 켰다.
[시스템] 갓더땅돌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정수는 이미 접속해 있었다.
던전에 입장했다. 헤드셋 너머로 정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됐어?"
"응."
"그럼 시작할게."
호흡이 맞았다. 예전보다 더.
몬스터를 잡고, 실패하면 웃으며 다시 들어갔다. 지석이 위험에 처하면 정수가 먼저 달려왔고, 정수가 실수하면 지석이 웃으며 넘어갔다.
[보스를 처치하셨습니다. 잠시 후 퇴장맵으로 이동합니다.]
"수고했어, 정수."
"응. 지석아."
헤드셋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1:1 대화 << 갓더땅돌] 내일도 해?
[1:1 대화 >> 말차정수기] 당연하지
[1:1 대화 << 갓더땅돌] 그럼 내일 봐
[1:1 대화 >> 말차정수기] 게임에서도
[1:1 대화 >> 말차정수기] 현실에서도
답이 바로 왔다.
[1:1 대화 << 갓더땅돌] 응
[1:1 대화 << 갓더땅돌] 둘 다
지석은 헤드셋을 벗고 의자에 기댔다. 모니터 속 채팅창이 희미하게 빛났다.
제목
Ⅰ 게임에서 애인 사귈 수도 있나요?
고3이고 수능 때문에 게임 좀 줄이려 했는데 문제는 게임 말고 다른 게 생겼습니다.
첨엔 뉴비 나타나서 챙겨주고 키워서 같이 던전 돌고 했는데
최근엔 닉네임 말고 이름으로 부르고 만나서 밥도 먹고 왔어요.
그 뒤로는 평소에도 연락하고 접속하면 같이 있고 그 형 때문에 게임 하는 거 같아요.
그 형이랑 같이 안 하면 재미가 좀 덜한데 이게 정상인가요?
이런 경우 보통 어떻게 되나요. 경험 있는 분들 답 좀 부탁드립니다.
댓글
Ⅰ 고3이면 공부해라
Ⅰ 답정너;
Ⅰ 이미 애인인데 왜 질문함
Ⅰ 수능 끝나고 고백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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