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
G_G
사람들은 왜 이리 지독하게도 영원에 집착하는가?
영원토록 영원하자는 말, 그건 허상일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언젠간 우리에게도 이별이라는 게 다가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왜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 할까?
그렇지 않은가.
십수 년 전에는 세기를 넘어서도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차원을 넘어서 너를 찾으러 오는.. 이승이 막고 저승이 막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약속한 첫눈이 온다면 반드시 너를 찾아오겠다는 그런 사랑이 대세였다지만
요즘은 낭만보다는 도파민을 더 중요한 가치로 두는 삶이 많아지지 않았나.
사람들은 더 이상 낭만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좇지.
생각해 보자.
전 애인과 이성들을 한 공간에 밀어 넣고
그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을 우린 즐기곤 한다.
어딘가 허점이 가득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차악을 선택하게끔 하는 구조를 우린 더 이상 기이하다고 하지 않고
대부분이 해피엔딩이며 귀여운 동물들이 가득 나오는 동X농장보다 한때 영원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이제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부부가 나와서 서로를 헐뜯는 프로그램의 조회수가 훨씬 높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영원하고 싶어 할까?
왜 당장의 하루하루에 만족하지 못하고 굳이, 영원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가
영원이란 실체 없는 허상을
왜?
"와.. 진짜 나랑 안 맞는다."
온도 작가의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를 읽은 김정수의 첫 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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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아홉수 회사원 김정수는 간만의 약속 없는 휴일에 큰맘 먹고 동네서점에 가서 요즘 유행이라는 생일책을 사 왔다. 날짜가 적힌 봉투 속에 책이 랜덤으로 들어있는 거라는데, 가챠에 환장하는 내가 이걸 참을 수 있을 리가.
인스타그램 추천 탭에서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길래, 그리고 댓글 좀 보니까 다들 우연히 읽게 된 책이 너무 좋았다길래..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에 앉은 그는 중반쯤 읽다가 퍽 하고 덮어버리곤 한숨 푹 내쉬었다. 어 제목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필사하려고 노트도 가져왔는데....."
김정수는 영원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가능한지, 영원이 정확히 뭔지, 또 무엇의 영원을 바라는지를 글로써 설명하기엔 불분명하지만, 그는 그저 영원과 낭만 속을 헤엄치고 싶은 사람이었다.
메마른 현실이 한 해씩 쌓여가도 봄엔 벚꽃잎을, 가을엔 단풍잎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낭만의 영원 속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김정수는 어느 정도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본인의 바운더리 속에 집어넣은 모든 인연을 지금까지도 이어 나가고 있다.
'내 사람'이라는 타이틀 속에 많은 사람을 두진 않지만, 들여놓기만 하면 평생 내 사람인 거다.
일 년에 두어 번은 꼭 만나고 생일엔 잊지 않고 축하 연락을 하고. 커피 한잔하면서 시시콜콜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마도 김정수는 30년쯤 지나서도 이 사람들과는 인연을 이어 나가고 있을 것이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
정수 X 지석
w.지지
그러 니까!
왜 하트도 아니고 뜬금없이 학을 왜 접냐는 거야..
조류 공포증 있는 사람은 사랑할 자격도 없다는 거야 뭐야 참나..
그리고 말이야,
사랑의 의미면 486.. 뭐 이런 숫자가 맞지 않나?
1000마리는 너무 오바잖아 솔직히 이건 좀 부담스럽지; 약간 징그럽고..
이건 낭만이 아니라 무식이고 미련이지 안 그래?
에ㅔㅔ 휴.. 아무튼간에 나는 이 감성 이해 못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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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847번째 학을 접던 낭랑 18세 곽지석이 말했다.
"곽지석 또 왜 저럼?"
"몰라 또 정수형이겠지 뭐."
"지금 내면에서 사랑과 가치관을 두고 타협하는 중인가 봐."
야이놈들아다들리거든얼른와서손이나좀보태봐 나 동굴증후군인지 터널증후군인지 생기기 일보 직전이니까;;; 아니다 그래도 이건 내가 접는 게 맞지 그럼 내가 접는 동안 옆에서 내 입에 젤리 하나씩 좀 넣어줘 봐 형님 당 떨어진다 얘들ㅇ..
?
뭐야 이 새끼들 언제 사라졌어.
(지석이 입과 손에 모터를 다는 동안 친구들은 조용히 매점으로 튀었다.)
"아오 곽지석 입이 방정이다 방정이야ㅏ...(851번째 학을 접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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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밥 먹여주냐?;;"
"먹여준다 왜!!"
위의 대화에서 낭랑 18세 곽지석은 주로 질문 담당이지만 그의 사랑스러운 애인은 대답 담당이었기에, 그리고 그런 애인을 곽지석이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 가녀린 낭만에 무게를 실어주기로 했다.
열여덟 곽지석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정수가 그 예쁜 눈 잔뜩 접어가며 아하하하! 하고 웃어준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하지
김애순만의 곽관식이 되어준다고 내가.
...김관식만의 곽애순인가?
암튼!
큼흠흠, 널 향한 내 맘에 돈이라면 아마 난 빌리어네ㅇ,
(? : 지렁이도 잡아줄 수 있나요?)
.....그래ㅐ!!지렁이도 젓가락으로 슬쩍 집어 줄 수 있다(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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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석이 말하는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다
두루뭉술한 시가보다는 정확한 결괏값이 나오는 수학을 더 좋아하고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건 다 상술이라고 생각하는 곽지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수가 웃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단풍잎을 잡을 때까지 나무를 발로 있는 힘껏 차줄 거고 정수가 드라마를 보면서 우와 학 천 마리 받으면 진짜 감동일 것 같아.. 라고 한마디 하면 10일 밤새워서 하루에 백 개씩 무지개 색깔로다가 접어줄 거다.
...물론 실제로 정수가 학 천 마리를 접어줄 수 있냐고 두 눈을 빛낼 줄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보호대를 한 손목으로(일부러 오바했다.) 정수에게 무지갯빛 학 천 마리가 담긴 상자와 함께 수능 응원을 건넸을 때 정수는 감동한 눈으로 지석을 숨 막히게 안아 들었고, 지석은 손목이 순식간에 멀쩡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날 저녁 가족들과의 식사를 끝내고 집 앞 놀이터에서 만난 정수가 시험의 결과를 알려주듯 시원한 웃음을 보여줬을 때엔, 김정수 내가 낳았나 하는 착각까지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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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석이 학 천 마리를 접어 사랑이란 공식을 증명할 때, 김정수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줬다.
유난히 우주를 좋아하는 지석을 위해 온갖 특별한 달이 뜨는 날마다 옥상 열쇠를 어떻게든 받아왔다.
야간자율학습 이란 걸 하는 열여덟 열아홉의 특권이었다.
지석의 눈엔 새까만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그 커다란 달이 가득 찼고, 정수에겐 지석의 그 반짝이는 눈이 가득 찼다.
별똥 별이 떨어지는 날엔 함께 소원도 빌었다.
오늘 밤 별똥별이 떨어질 거란 뉴스에, 지석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며 소원을 대본마냥 스케치북에 써 들고 왔지만 (정수 수능 잘 치게 해주시고 저는 키 좀만 더 크게 해주세요!!!!)
정수는 대본을 쓰지 않았고, 소원 또한 비밀에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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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엔 서로의 명찰에 달려 있었고, 체육복 안쪽 라벨에는 이름을 굳이 초성으로 적어뒀다.
"기역, 지읒.., 시옷! 됐다ㅎㅎ"
"형, 똑같이 적었다가 실수로 바뀌면 어떡해?"
"그럴 일은 없을걸? 사이즈로 알아볼 수 있어ㅋㅋ"
"맞는 말인데 좀 자존심 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으으!!"
김정수 하면 곽지석, 곽지석 하면 김정수가 자연스레 따라왔다.
2학년 학생들에게 김정수는 아, 그 맨날 지석이 기다리는 형? 으로 통했고
3학년 학생들은 곽지석을 김정수의 애착인형 정도로 떠올렸다.
김정수의 졸업식 날 곽지석은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주려 했으나 또르르 흐르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대로 환한 미소 속에 흘려보내며 마지막일 교복 차림의 김정수를 눈에도, 카메라에도 한가득 담아냈다.(필름 카메라부터 폴라로이드까지 잔뜩 이고 지고 왔다. 야 저기 저 개오바 사진작가 누구임? / 아 쟤 걔잖아 그 김정수 애착 인형 / 아 ㅇㅋ)
"지석아 나 졸업한다고 우리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속상하게 왜 울어~ 너 형 이제 안 볼 거야?"
"아니이..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정수우..."
"우리는 여전할 거야 지석아. 그저 환경이 조금 달라질 뿐인 거야, 알지?"
”킁... 알겟스흐니까 정수 빨리 브이나 해.."
별똥별 뉴스가 떴던 그날 밤 김정수가 고요히, 그러나 간절히 빈 소원은 뻔하게도 영원이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찰나에 속으로 우리의 영원을 분명히 세 번 외쳤으니, 낭만 소년은 작고 사랑스러운 내 이과 소년과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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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정수는 자기도 모르게 옛 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곤 머리를 헝클였다.
열아홉에서 스물아홉이 된 김정수는 더 이상 별똥별에 대고 소원을 빌지 않는다. 여전히 감수성은 풍부하지만, 기대하지 않는다. 열아홉부터 스물넷까지. 5년간 꾸었던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나 김정수는 한겨울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지석아 있지, 나 졸업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글 써보려고."
"허얼 정수 짱멋있어ㅓ..그러면 나중에 우리 얘기도 써주라ㅏ"
"ㅋㅋㅋ알겠어. 내가 다 쓰고 나서 너한테 제일 처음으로 보여줄게. 네가 추천사도 써줘야 된다 알겠지?"
“에엥 당연하지 혀엉. 나 지금부터 뭐라고 쓸지 고민 들어간다아ㅏ"
글 쓰는 것을 좋아하던 국어국문학 전공 김정수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의 글엔 언제나 지석이 물들어있었기에 지석을 잃은 그는 더 이상 작가의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대신 휴일이면 서점 도장 깨기를 하며 책을 사 읽곤 했다. 김정수 나름의 타협점이었다.
그렇게 쌓인 책이 벌써 책장 한 면을 다 채웠고, 김정수는 그렇게 스스로를 지탱함과 동시에 갉아먹었다. 누구보다 현실에 타협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타협하지 않았으나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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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지가 5년이다.
5년이란 시간은 강산도 절반은 변했을 시간이고
중학생이던 사촌 동생이 이마에 민증을 붙인 채 편의점에 들어갈 시간이며
스무 살이던 여동생은 1년을 휴학하고도 졸업할 시간이다.
근데 왜,
왜 고작 글 몇 줄에 5년 전 겨울로 강제 소환당하는 건지.
김정수는 절반도 못 읽은 채 덮어버린 책 표지를 바라보며 쓴 커피를 마셨다. 문득 떠오른 옛 추억은 생각보다 더 깊이 착색되어 있었기에.
작년에 그만둔 직장동료 얼굴은 벌써 흐릿한데 5년이나 지난 그 얼굴은 왜 그 뾰족한 송곳니의 위치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건지 편파적인 기억장치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간만의 휴일을 과거 회상에 모조리 쓰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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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변한다.
으음... 안 변하는 것도 있지
우리?
ㅋㅋㅋ응 우리
어느 날 연애에 관해 토론하는 티비 속 패널들을 보며 둘은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저 문장의 괄호 속에 '사람'도, '사랑'도 들어갈 수 있지만 '우리'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애초에 저 괄호의 크기에 맞지 않는다고.
저런 문장이 우리를 담기엔 너무나도 작고 각져있다고.
"그럼? 그럼 우리는 어디에 담겨 정수?"
"음... 일단 넌 나한테?"
"에에엥?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도 너 나한테 기대있잖아~ 그런 거지 뭐ㅋㅋ"
"흐음 그렇긴 해. 그럼 정수도 나한테 담겨라! 우린 서로가 딱 맞는 것 같아ㅏㅏ"
그 후로도 각종 드라마,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서 단 한 번도 우리가 저 뻔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고, 지석이도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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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만했던 탓이었을까.
"정수, 우리 이제 그만하자."
"무슨 소리야 지석아. 뭘 그만하자는 건데."
"헤어지자고...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여느 커플이 그렇듯, 김정수와 곽지석은 5년의 연애 기간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처음엔 헤어지자는 말 의 무게가 그들에게 너무나도 무거웠지만, 그 또한 반복하다 보면 무게가 덜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렇게 헤어져도 결국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굳은 믿음. 이 믿음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별의 언어를 가볍게 만들었고,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켰다.
남들과 다를 것이라, 특별할 것이라 믿었던 우리는 남들과 같은 흔한 이별을 했다.
김정수는 이성적인 곽지석이 좋았고, 곽지석은 감성적인 김정수가 좋았지만
곽지성이 이성적이고 김정수가 감성적 이라 둘은 영원할 수 없었다.
곽지석은 더 이상 김정수의 낭만 놀음에 맞춰주고 싶지가 않았고 김정수는 곽지석의 논리적 판단을 그만 듣고 싶었다. 그놈의 퍼즐 놀이를 할 심적 여유가 시간과 함께 점점 사라져갔다.
곽지석에게는 확실한 현재가 중요했고, 김정수에게는 그려질 미래가 중요했다.
그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꼭 맞는 퍼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 또한 남들과 별반 다를 것 없었음을.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넣다 그만 조각을 구겨버렸음을.
( 사랑 )은 변한다.
( 우리 )도 변한다.
결국엔 우리도 그 일반명제의 근거가 되었다.
끝없는 미래를 바랐던 사람과 현재도 바랄 수 없게 된, 어느 때보다도 추웠던 그날의 겨울밤을 김정수는 모순적이게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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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출근하기 싫다
주말 내내 뒤척이느라 잠을 못 잔 김정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사에 가던 중 한 배너를 발견했다.
<인기 작가 온도 초청 강연>
장소 : 한국도서관
일시 : 1월 7일 18:30~20:00
그 온도 작가?
유명한 사람이었나 보네..
...가볼까.
주말 내내 뒤척인 원인의 시발점을 그 책으로 결론지은 김정수는 홧김에 가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책을 좋아하지만, 단 한 번도 작가를 궁금해해 본 적은 없었다. 글을 읽는 데에 오히려 방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나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왜 글로 써 내리고 출판까지 할 정도로 영원을 미워하게 되었는지..
(...작가가 아니라 전 애인의 심리가 궁금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됐고, 사실은 그저 충동이었다. 그때의 김정수가 그 순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의 김정수는 명쾌히 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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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일정이 생기기만 하면 일이 몰 리는 건 기분 탓일까?
강연장까진 10분 거리, 지금 시간은 6시 24분.
다리를 달달 떨며 겨우 일을 마치고 6시 40분쯤 강연장에 도착한 김정수는 남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뛰어오느라 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든 그는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아, 안녕하세요. 작가 온도입니다. 많은 분이 자리해 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하핫.."
익숙한 목소리.
단상에서 단정한 차림으로 한 손엔 마이크를, 한 손엔 포인터를 쥔 작가 온도는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서 있는 자세 하며 그 멋쩍은 말버릇까지. 주말 내내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던 그의 5년 전 애인.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를 쓴 작가 온도는 곽지석이었다.
아니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겠지. 곽지석이 무슨 작가를 해 아니야 아니겠지
.
.
.
.....왜 맞냐고.
그러면 그 책 제목도,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도 다 우리 얘기인 건가
와, 진짜 최악.
김정수를 덮친 놀라움 다음의 감정은 빡침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김칫국일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당시의 김정수는 그런 이성적 사고를 할 틈이 없었다.)
머리가 차게 식은 김정수는 충동적이었던 지난 모든 선택을 후회하며 멍하니 단상을 바라봤다.
단상 위의 곽지석.. 아니, 온도 작가는 멋쩍었던 첫인사와는 다르게 능숙하게 강연을 이어 나갔다. 지금 눈에 비치는 저 모습이 그가 알던 곽지석과는 너무나 달라서 낯설게 느껴졌다. 마지막 이별 후엔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싶어서, 그리고 그 끝을 이젠 우리도 적응해야 할 것 같아서.. 모든 소식을 끊고 지냈기에, 김정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에 이질감을 느꼈다.
강연이 끝난 뒤, 사람들의 사인과 사진 요청을 받아주는 곽지석을 보며 김정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줄의 맨 뒤에 섰다.
비로소 마지막 차례인 김정수가 앞에 다다랐을 때, 곽지석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
"안녕하세요 온도 작가님. 작가가 되신 줄은 몰랐네요 강연까지 하시는 줄도. 그런데 작가님 책 중에서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는 되게 익숙하더라고요. 마치 '우리' 얘기인 것처럼요"
"네.. 네? 아니 그게,"
"아니에요. 우연이겠죠. 마지막 순간에 저한테 낭만이니 영원이니 그런 소리 지겹다던 작가님이 영원에 대한 회의적인 글을 쓴 것도, 그런 글의 제목에 하필 학 천 마리가 들어가는 것도요."
"아니, 아뇨아뇨 잠깐만요. 그 책 끝까지 읽어보셨어요..?"
"아뇨? 제 가치관이랑은 곧 죽어도 안 맞는 책인 것 같아 절반도 못 읽었네요. 글을 읽는 것뿐인데 상처를 받는 느낌이라."
5년 만에 만난 첫사랑과의 대화가 이런 식이라니.
김정수가 가끔 상상해 봤던 재회는 이런 유치하고 감정적인 대화가 아니었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닌 법이니까.
곽지석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눈치였으나 막상 그 앞에 서니 설움 섞인 화가 난 김정수는 마지막 마디를 끝으로 곧장 뒤돌아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열 오른 얼굴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되새기던 김정수는 몇 발짝 걷지도 못하고 손이 붙잡혔다. 뒤를 돌았을 때 그 자리엔 역시나 예상한 인물이 있었다.
"잠시만 형, 김정수, 잠깐 얘기 좀 해. 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얘기? 난 더 할 말 없어. 내가 약속이 있어서, 갈게."
-
....
하아아아 김정수 진짜 진짜 최악.. 약속도 없잖아 너....
5년 만에 만난 첫사랑과의 마지막을 레전드 하남자처럼 장식한 김정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형준이
형준아
작업실이야?
형준이) 응? 응 나 작업 이제 막 끝났어. 왜?
아니
술이나 마실까 해서
형준이) 형이 웬일이래?
그래 뭐. 몇 시쯤?
나 아직 회사 근처라 가는데 20분 정도 걸려
작업실 앞 인생맥주 ㄱㄱ
그래서.
무슨 일인데?
정수가 자리에 앉아 겉옷을 벗자마자 형준이 말했다.
금요일도 아니고 월요일 저녁에 형준에 작업실 근처까지 온 이상, 숨길 순 없단 걸 김정수도 잘 알고 있다.
사장님 생맥 두 잔이랑 순살치킨 하나 주세요...
김정수가 서점에 갔던 날부터 오늘까지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형준은 별다른 제스처 없이 가만히 들었다.
"그러고 나왔는데 바로 집 들어가기 싫어서 너한테 연락했지 뭐."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아까 곽지석도 연락 왔더라. 5분만 일찍 연락하지 나 정수형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라고 했거든."
"걔도? ......아, 잠시만 그러면 걔도 내가 너한테 방금 연락해서 만났다는 거 알겠네?!"
아.
망했다.
김정수 망신살 대박이네 진짜...
"형, 그래서 형은 뭘 어쩌고 싶은 건데?
헤어진 지 5년이나 됐는데 개가 그런 책을 쓴 게 무슨 상관이야. 뭐 다시 만나고 싶은 거야?"
"아야 형준아 아프다 조금만 살살 해주라.."
형준은 고민했다.
5년 전 단절된 두 사람이지만 둘 다 형준과는 꾸준히 안부를 묻고 지냈기에 대충 이게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내가 과연 이 관계에 개입을 하는 게 맞는 것인가, 하는 고민.
그래서 물어본 것이었다. 김정수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사실 곽지석의 입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과학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진득이 앉아 있는 건 그렇게도 싫어하던 개가 돌연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이유도 김정수 때문이었고, 그 좋아하는 우주 얘기가 아닌 웬 철학적인 글을 쓰는 중이라 들었을 때엔 확신했다. 아, 얘의 세상엔 여전히 김정수가 있구나 하고.
사실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의 제목을 들었을 때엔 그래서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직도 김정수한테 반박을 하고 싶은 건가? 했지만, 의리로 책을 사서 읽고 나서는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저자가 곽지석이라는 걸 알게 된 김정수가 이렇게 화가 났다는 건.. 뻔하지 뭐.
그런데 헤어진 지 5년이나 된 사이에 이렇게 일희일비하고 있는 김정수를 보아하니,
이 형도 피차일반이구나 싶었다.
애초에 헤어지고 둘 다 연애 한 번 하지 않은 것부터가 뭐..
"형 대충 형이 어떤 심정인지는 알겠거든?
근데 내가 형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조금이라도 덜 쪽팔리고 싶으면 집에 가서 책 다시 읽어. 끝까지."
-
형준과의 찝찝한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김정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내내 모든 선택이 충동이었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지난 5년 내내 곽지석을 못 잊어서 힘들게만 지냈나?
나는 곽지석을 다시 만나고 싶나?
아니 그 전에, 다시 만날 수는 있나?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김정수는 결국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꺼내 왔다.
주로 들어주기만 하던 한형준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사람들은 왜 이리 지독하게도 영원에 집착하는가?
영원토록 영원하자는 말, 그건 허상일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언젠간 우리에게도 이별이라는 게 다가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왜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 할까?
그렇지 않은가.
십수 년 전에는 세기를 넘어서도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차원을 넘어서 너를 찾으러 오는.. 이승이 막고 저승이 막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약속한 첫눈이 온다면 반드시 너를 찾아오겠다는 그런 사랑이 대세였다지만
요즘은 낭만보다는 도파민을 더 중요한 가치로 두는 삶이 많아지지 않았나.
사람들은 더 이상 낭만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좇지.
생각해 보자.
전 애인과 이성들을 한 공간에 밀어 넣고
그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을 우린 즐기곤 한다.
어딘가 허점이 가득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차악을 선택하게끔 하는 구조를 우린 더 이상 기이하다고 하지 않고
대부분이 해피엔딩이며 귀여운 동물들이 가득 나오는 동X농장보다 한때 영원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이제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부부가 나와서 서로를 헐뜯는 프로그램의 조회수가 훨씬 높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영원하고 싶어 할까?
왜 당장의 하루하루에 만족하지 못하고 굳이, 영원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가
영원이란 실체 없는 허상을
왜?
.
.
.
그러나 지금의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 또한 다시 한번 영원을, 낭만을 좇을 것이다
영원을 믿는다기보단, 영원을 바라는 너의 그 마음을 믿어주고 싶다.
영원.
그 단어에 담긴 깊고 짙은 마음들을 이제서야 나는 어렴풋이 이해한다
내가 영원과 낭만을 믿고 싶게 만든 네가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네가 옳았노라고.
네가 옳았고 내가 너무나 어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너는 여전히 너만의 낭만 속을 헤엄치고 있길
너만은 후회하지 않길
누가 뭐래도 너의 소신을 밀고 나가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후회 없는 나날을 보내길 바라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는 사랑스러운 영원의 약속에 당신들은 기꺼이 손가락을 걸어주길.
20xx. xx. xx
온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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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다 읽은 김정수는 자기도 모르게 흘려버린 눈물을 닦아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이미 한 시간 전 보낸 알람이 떠 있었다.
곽지석
곽지석) 형
괜찮으면 이번 주말에 밥이라도 먹을래?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곽지석
곽지석) 형
괜찮으면 이번 주말에 밥이라도 먹을래?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그래
먹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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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주소 없이 보낸 작가 온도, 곽지석의 편지는 정처 없이 떠돌다 종국엔 수신자에게 다다랐다.
온도 작가가 처음부터 이 ( )레터를 회신을 기대하며 쓴 건 아니지만
인간이란 본디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기에 그 또한 막연한 기대와 약간의 두려움을 품에 안은 채 살아갔고, 결국은 회신이 돌아왔다.
열여덟, 열아홉의 풋풋한 학생을 지나 20대의 끝자락에 다시금 마주하게 된 김정수와 곽지석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김정수도, 곽지석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조금은 되담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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