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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

G_G



사람들은 왜 이리 지독하게도 영원에 집착하는가?


영원토록 영원하자는 말, 그건 허상일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언젠간 우리에게도 이별이라는 게 다가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왜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 할까?


그렇지 않은가.

십수 년 전에는 세기를 넘어서도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차원을 넘어서 너를 찾으러 오는.. 이승이 막고 저승이 막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약속한 첫눈이 온다면 반드시 너를 찾아오겠다는 그런 사랑이 대세였다지만


요즘은 낭만보다는 도파민을 더 중요한 가치로 두는 삶이 많아지지 않았나.

사람들은 더 이상 낭만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좇지.



생각해 보자.


전 애인과 이성들을 한 공간에 밀어 넣고

그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을 우린 즐기곤 한다.


어딘가 허점이 가득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차악을 선택하게끔 하는 구조를 우린 더 이상 기이하다고 하지 않고


대부분이 해피엔딩이며 귀여운 동물들이 가득 나오는 동X농장보다 한때 영원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이제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부부가 나와서 서로를 헐뜯는 프로그램의 조회수가 훨씬 높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영원하고 싶어 할까?



왜 당장의 하루하루에 만족하지 못하고 굳이, 영원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가



영원이란 실체 없는 허상을




왜?





"와.. 진짜 나랑 안 맞는다."

온도 작가의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를 읽은 김정수의 첫 평이었다.



-



29세 아홉수 회사원 김정수는 간만의 약속 없는 휴일에 큰맘 먹고 동네서점에 가서 요즘 유행이라는 생일책을 사 왔다. 날짜가 적힌 봉투 속에 책이 랜덤으로 들어있는 거라는데, 가챠에 환장하는 내가 이걸 참을 수 있을 리가.


인스타그램 추천 탭에서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길래, 그리고 댓글 좀 보니까 다들 우연히 읽게 된 책이 너무 좋았다길래..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에 앉은 그는 중반쯤 읽다가 퍽 하고 덮어버리곤 한숨 푹 내쉬었다. 어 제목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필사하려고 노트도 가져왔는데....."




김정수는 영원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가능한지, 영원이 정확히 뭔지, 또 무엇의 영원을 바라는지를 글로써 설명하기엔 불분명하지만, 그는 그저 영원과 낭만 속을 헤엄치고 싶은 사람이었다.


메마른 현실이 한 해씩 쌓여가도 봄엔 벚꽃잎을, 가을엔 단풍잎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낭만의 영원 속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김정수는 어느 정도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본인의 바운더리 속에 집어넣은 모든 인연을 지금까지도 이어 나가고 있다.

'내 사람'이라는 타이틀 속에 많은 사람을 두진 않지만, 들여놓기만 하면 평생 내 사람인 거다.

일 년에 두어 번은 꼭 만나고 생일엔 잊지 않고 축하 연락을 하고. 커피 한잔하면서 시시콜콜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마도 김정수는 30년쯤 지나서도 이 사람들과는 인연을 이어 나가고 있을 것이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학 천 마리가 낭만인가요?

정수 X 지석

w.지지






그러니까!

왜 하트도 아니고 뜬금없이 학을 왜 접냐는 거야..

조류 공포증 있는 사람은 사랑할 자격도 없다는 거야 뭐야 참나..



그리고 말이야,

사랑의 의미면 486.. 뭐 이런 숫자가 맞지 않나?

1000마리는 너무 오바잖아 솔직히 이건 좀 부담스럽지; 약간 징그럽고..

이건 낭만이 아니라 무식이고 미련이지 안 그래?


에ㅔㅔ 휴.. 아무튼간에 나는 이 감성 이해 못 하겠다;;



.

.

.

.



라고 847번째 학을 접던 낭랑 18세 곽지석이 말했다.




"곽지석 또 왜 저럼?"

"몰라 또 정수형이겠지 뭐."

"지금 내면에서 사랑과 가치관을 두고 타협하는 중인가 봐."



야이놈들아다들리거든얼른와서손이나좀보태봐 나 동굴증후군인지 터널증후군인지 생기기 일보 직전이니까;;; 아니다 그래도 이건 내가 접는 게 맞지 그럼 내가 접는 동안 옆에서 내 입에 젤리 하나씩 좀 넣어줘 봐 형님 당 떨어진다 얘들ㅇ..



?

뭐야 이 새끼들 언제 사라졌어.



(지석이 입과 손에 모터를 다는 동안 친구들은 조용히 매점으로 튀었다.)



"아오 곽지석 입이 방정이다 방정이야ㅏ...(851번째 학을 접으며)"



-



"낭만이 밥 먹여주냐?;;"


"먹여준다 왜!!"



위의 대화에서 낭랑 18세 곽지석은 주로 질문 담당이지만 그의 사랑스러운 애인은 대답 담당이었기에, 그리고 그런 애인을 곽지석이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 가녀린 낭만에 무게를 실어주기로 했다.



열여덟 곽지석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정수가 그 예쁜 눈 잔뜩 접어가며 아하하하! 하고 웃어준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하지

김애순만의 곽관식이 되어준다고 내가.

...김관식만의 곽애순인가?

암튼!

큼흠흠, 널 향한 내 맘에 돈이라면 아마 난 빌리어네ㅇ,

(? : 지렁이도 잡아줄 수 있나요?)



.....그래ㅐ!!지렁이도 젓가락으로 슬쩍 집어 줄 수 있다(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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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석이 말하는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다


두루뭉술한 시가보다는 정확한 결괏값이 나오는 수학을 더 좋아하고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건 다 상술이라고 생각하는 곽지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수가 웃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단풍잎을 잡을 때까지 나무를 발로 있는 힘껏 차줄 거고 정수가 드라마를 보면서 우와 학 천 마리 받으면 진짜 감동일 것 같아.. 라고 한마디 하면 10일 밤새워서 하루에 백 개씩 무지개 색깔로다가 접어줄 거다.



...물론 실제로 정수가 학 천 마리를 접어줄 수 있냐고 두 눈을 빛낼 줄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보호대를 한 손목으로(일부러 오바했다.) 정수에게 무지갯빛 학 천 마리가 담긴 상자와 함께 수능 응원을 건넸을 때 정수는 감동한 눈으로 지석을 숨 막히게 안아 들었고, 지석은 손목이 순식간에 멀쩡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날 저녁 가족들과의 식사를 끝내고 집 앞 놀이터에서 만난 정수가 시험의 결과를 알려주듯 시원한 웃음을 보여줬을 때엔, 김정수 내가 낳았나 하는 착각까지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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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석이 학 천 마리를 접어 사랑이란 공식을 증명할 때, 김정수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줬다.

유난히 우주를 좋아하는 지석을 위해 온갖 특별한 달이 뜨는 날마다 옥상 열쇠를 어떻게든 받아왔다.

야간자율학습 이란 걸 하는 열여덟 열아홉의 특권이었다.



지석의 눈엔 새까만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그 커다란 달이 가득 찼고, 정수에겐 지석의 그 반짝이는 눈이 가득 찼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엔 함께 소원도 빌었다.


오늘 밤 별똥별이 떨어질 거란 뉴스에, 지석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며 소원을 대본마냥 스케치북에 써 들고 왔지만 (정수 수능 잘 치게 해주시고 저는 키 좀만 더 크게 해주세요!!!!)

정수는 대본을 쓰지 않았고, 소원 또한 비밀에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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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엔 서로의 명찰에 달려 있었고, 체육복 안쪽 라벨에는 이름을 굳이 초성으로 적어뒀다.



"기역, 지읒.., 시옷! 됐다ㅎㅎ"


"형, 똑같이 적었다가 실수로 바뀌면 어떡해?"


"그럴 일은 없을걸? 사이즈로 알아볼 수 있어ㅋㅋ"


"맞는 말인데 좀 자존심 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으으!!"




김정수 하면 곽지석, 곽지석 하면 김정수가 자연스레 따라왔다.


2학년 학생들에게 김정수는 아, 그 맨날 지석이 기다리는 형? 으로 통했고

3학년 학생들은 곽지석을 김정수의 애착인형 정도로 떠올렸다.




김정수의 졸업식 날 곽지석은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주려 했으나 또르르 흐르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대로 환한 미소 속에 흘려보내며 마지막일 교복 차림의 김정수를 눈에도, 카메라에도 한가득 담아냈다.(필름 카메라부터 폴라로이드까지 잔뜩 이고 지고 왔다. 야 저기 저 개오바 사진작가 누구임? / 아 쟤 걔잖아 그 김정수 애착 인형 / 아 ㅇㅋ)



"지석아 나 졸업한다고 우리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속상하게 왜 울어~ 너 형 이제 안 볼 거야?"


"아니이..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정수우..."


"우리는 여전할 거야 지석아. 그저 환경이 조금 달라질 뿐인 거야, 알지?"


”킁... 알겟스흐니까 정수 빨리 브이나 해.."



별똥별 뉴스가 떴던 그날 밤 김정수가 고요히, 그러나 간절히 빈 소원은 뻔하게도 영원이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찰나에 속으로 우리의 영원을 분명히 세 번 외쳤으니, 낭만 소년은 작고 사랑스러운 내 이과 소년과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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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