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back.jpg
head.png

사랑은 탈락하지 않습니다!

여름

탈락 안내 문자는 예상보다 짧았다. 고맙다는 말도, 아쉽다는 말도 없이 딱 한 줄이었다.


- 이번 회차 촬영에는 함께하지 않게 되셨습니다.


핸드폰 화면을 끄니 공허한 표정만이 남았다. 탈락한 이유는 딱 하나, 너무 솔직했다. 연애 프로그램인데 솔직하면 안 된단다. 지랄. 마음 한켠에서는 아직 내가 살아남았을 확률을 계산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하지만 기대는 늘 조용하게 남아있다가 가장 먼저 배신한다.




하지만 사랑은 탈락하지 않습니다!






〈매칭〉 

대한민국 @플릭스 1위 퀴어 연애 프로그램. 선택받은 사람만이 다음 회차로 간다.


연애 리얼리티. 사랑을 찾는 프로그램이라고 했지만, 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을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쇼였다. 그니까 내가 이딴 프로그램에 나오게 된 이유는...



나이 스물다섯. 이름 김정수. 딱히 특징이랄 것도 없다. 180에 가까운 179? 뭐 이런 거. 애인이랑 헤어져서 술 먹고 연애 프로에 신청한 거. 이런 멍청한 생각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근데 이렇게 탈락할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던 거지.


곽지석과 서로 호감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나? 물론 나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확신이 없어서. 곽지석은 나보다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나와 곽지석은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탈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번엔 머릿속이 자책으로 바뀌었다. 난 왜 이리 사랑이 하고플까.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상처가 쌓여가는 걸 보고 싶은 건가. 




"아직 안 가세요?"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정수를 불러왔다.


"아... 택시가 잘 안 잡히네요. 이번 장마는 오래 가나 봐요."


"그러네요. 옆에 앉아도 되죠?"


곽지석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 공간엔 연애도, 경쟁도 없었다. 탈락자 둘 뿐이었다. 


"우리, 방송에 거의 안 나온 사람들 맞죠?"


지석이 웃지도 않고 말한다. 정수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정확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는 인터뷰 열 번 했는데 두 번 나왔어요. 말 너무 많이 했대요. 지석의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솔직하면 안된대요. 연애 프로인데. 정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지석은 아무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함이 이유라면, 지석의 탈락 이유는 정반대였다.


"지석 씨는 좋은사람인데, 설렘은 안 느껴져요."


그 문장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었다. 좋은 사람. 그 말은 언제나 탈락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쓰였다. 곽지석과 김정수는 정반대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탈락.




밖에서는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기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 두 사람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두 사람은 혼자인 게 두려웠다.


"이상하죠."

"카메라 없으니까 진짜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지석이 말하고, 이어서 정수가 잠시 지석을 보고 웃었다. 


"그럼 이건 방송용 멘트 아니네요?"

그가 말했다.

"좋다."


그날 두 사람은 전화번호를 공유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서로를 보듬어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지석은 그 말을 곱씹었다.


좋다.


누군가가 나와의 대화를 그렇게 말한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의 선택만을 바라왔다. 대상이 무엇이든 먼저 손을 뻗으면 미끄러져 숨이 턱, 하고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항상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아무도 나를 고르지 않으면 그건 내 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바빠서. 조건이 안 맞아서. 타이밍이 아니어서. 이런 핑계들만 내뱉기 바빴다. 아니,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다치지 않는 쪽이 좋아서. 그래서 늘 조심했다. 인간 곽지석의 감정을 드러내기 전에 표정을 지우고, 말을 하기 전에 한번. 또 한 번.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는 곽지석이 되었고, 무난하고 착한 사람. 이 말이 나를 살렸다.


하지만 카메라에선 그 말은 그냥 탈락 사유였다. 무난하고 착하면 카메라가 붙지 않았고, 편집은 건너뛰고, 마지막은 탈락. 매정한 단어 하나만이 남았다. 나는 거기서 처음 알았다. 안전하게 사는 건 누군가에게는 존재감이 없다는 뜻이었다. 김정수 그 사람은 나와 달랐다. 그는 솔직했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했고, 틀리면 틀렸다고 말했다. 


나는 선택하지 않아서 탈락했고, 그는 선택해서 탈락했다. 결국 결과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김정수는 달랐다.

그 차이가 자꾸 걸렸다. 둘 다 같은 결과였다. 그러나 카메라 뒤에서 지는 무게가 달랐던 것이었다. 나는 사랑을 얻지 못한 게 아니라,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그걸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 하필이면 같은 탈락자였다. 



그리고 그게,


처음으로


조금 설레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김정수한테 연락이 왔다. 문장 몇 개로 이루어진 메시지가 다였다. 왜지. 왜 떨리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정원에 와 있는 듯 했다. 아무리 사랑이 고파도... 웃음만 나왔다. 지석이 어지러운 정원에서 상사화를 찾을 때.


띠링- 



"아...존나 바보같다. 문자 하나가 이렇게 호들갑 떨 정도인가?"


지석은 휴대폰 화면을 세 번이나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김정수의 첫 문장이 너무 공손해서 혹시 스팸인지를 의심하곤 하고.


| 혹시 다음 주에 시간 되실까요?



지석은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 눕다가 반사적으로 다시 일어났다. 평소라면 "네 시간 됩니다" 정도로 끝났을 테지만 지금은 머리가 복잡해 아무런 텍스트도 적을 수 없었다.



|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녁 같이 먹어요.



여기서 지석은 호흡이 조금 꼬였다. 저녁이라는 말 하나에,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단백질 바를 괜히 깨물었다. 맛이 없는 건 지금 지석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답장을 보내기 직전, 지석은 손가락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장을 써 내려갔다. 물론 오타는 덤으로. 


보내고 나서 지석은 소파 위 기타에 머리를 박았다. 한숨만 나오는 회사원용 문자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리는 바람에. 아...시발...


| ㄴ

| ㅇ네

| 스케줄 보고 연락 드릴게요


김정수의 마지막 답장을 보고 지석은 괜히 이불을 걷었다가 다시 덮었다. 내가 진지하게 보였나? 아니 근데 또 귀엽네... 아니 귀엽다는 말은 아니고, 그, 아 씨 뭐야...


그러다 지석은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아무것도 아닌 척 냉수 한 잔을 드링킹했다. 컵을 내려두고 또 화면을 켰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그래도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수는 지석에게 문자를 보내고 난 뒤 휴대폰을 뒤집어놓고 잠시 기다렸다. 답장이 금방 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바쁘시던데, 밴드도 하시고 과제도 하셔야 할 텐데. 


그런데 1분 만에 답장이 왔다.


| ㄴ

| ㅇ네

| 스케줄 보고 연락드릴게요



정수는 답장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

오타에

반듯한 말투.

스케줄 보고 연락을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