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탈락하지 않습니다!
여름
탈락 안내 문자는 예상보다 짧았다. 고맙다는 말도, 아쉽다는 말도 없이 딱 한 줄이었다.
- 이번 회차 촬영에는 함께하지 않게 되셨습니다.
핸드폰 화면을 끄니 공허한 표정만이 남았다. 탈락한 이유는 딱 하나, 너무 솔직했다. 연애 프로그램인데 솔직하면 안 된단다. 지랄. 마음 한켠에서는 아직 내가 살아남았을 확률을 계산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하지만 기대는 늘 조용하게 남아있다가 가장 먼저 배신한다.
하지만 사랑은 탈락하지 않습니다!
〈매칭〉
대한민국 @플릭스 1위 퀴어 연애 프로그램. 선택받은 사람만이 다음 회차로 간다.
연애 리얼리티. 사랑을 찾는 프로그램이라고 했지만, 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을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쇼였다. 그니까 내가 이딴 프로그램에 나오게 된 이유는...
나이 스물다섯. 이름 김정수. 딱히 특징이랄 것도 없다. 180에 가까운 179? 뭐 이런 거. 애인이랑 헤어져서 술 먹고 연애 프로에 신청한 거. 이런 멍청한 생각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근데 이렇게 탈락할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던 거지.
곽지석과 서로 호감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나? 물론 나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확신이 없어서. 곽지석은 나보다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나와 곽지석은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탈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번엔 머릿속이 자책으로 바뀌었다. 난 왜 이리 사랑이 하고플까.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상처가 쌓여가는 걸 보고 싶은 건가.
"아직 안 가세요?"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정수를 불러왔다.
"아... 택시가 잘 안 잡히네요. 이번 장마는 오래 가나 봐요."
"그러네요. 옆에 앉아도 되죠?"
곽지석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 공간엔 연애도, 경쟁도 없었다. 탈락자 둘 뿐이었다.
"우리, 방송에 거의 안 나온 사람들 맞죠?"
지석이 웃지도 않고 말한다. 정수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정확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는 인터뷰 열 번 했는데 두 번 나왔어요. 말 너무 많이 했대요. 지석의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솔직하면 안된대요. 연애 프로인데. 정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지석은 아무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함이 이유라면, 지석의 탈락 이유는 정반대였다.
"지석 씨는 좋은사람인데, 설렘은 안 느껴져요."
그 문장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었다. 좋은 사람. 그 말은 언제나 탈락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쓰였다. 곽지석과 김정수는 정반대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탈락.
밖에서는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기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 두 사람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두 사람은 혼자인 게 두려웠다.
"이상하죠."
"카메라 없으니까 진짜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지석이 말하고, 이어서 정수가 잠시 지석을 보고 웃었다.
"그럼 이건 방송용 멘트 아니네요?"
그가 말했다.
"좋다."
그날 두 사람은 전화번호를 공유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서로를 보듬어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지석은 그 말을 곱씹었다.
좋다.
누군가가 나와의 대화를 그렇게 말한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의 선택만을 바라왔다. 대상이 무엇이든 먼저 손을 뻗으면 미끄러져 숨이 턱, 하고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항상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아무도 나를 고르지 않으면 그건 내 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바빠서. 조건이 안 맞아서. 타이밍이 아니어서. 이런 핑계들만 내뱉기 바빴다. 아니,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다치지 않는 쪽이 좋아서. 그래서 늘 조심했다. 인간 곽지석의 감정을 드러내기 전에 표정을 지우고, 말을 하기 전에 한번. 또 한 번.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는 곽지석이 되었고, 무난하고 착한 사람. 이 말이 나를 살렸다.
하지만 카메라에선 그 말은 그냥 탈락 사유였다. 무난하고 착하면 카메라가 붙지 않았고, 편집은 건너뛰고, 마지막은 탈락. 매정한 단어 하나만이 남았다. 나는 거기서 처음 알았다. 안전하게 사는 건 누군가에게는 존재감이 없다는 뜻이었다. 김정수 그 사람은 나와 달랐다. 그는 솔직했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했고, 틀리면 틀렸다고 말했다.
나는 선택하지 않아서 탈락했고, 그는 선택해서 탈락했다. 결국 결과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김정수는 달랐다.
그 차이가 자꾸 걸렸다. 둘 다 같은 결과였다. 그러나 카메라 뒤에서 지는 무게가 달랐던 것이었다. 나는 사랑을 얻지 못한 게 아니라,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그걸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 하필이면 같은 탈락자였다.
그리고 그게,
처음으로
조금 설레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김정수한테 연락이 왔다. 문장 몇 개로 이루어진 메시지가 다였다. 왜지. 왜 떨리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정원에 와 있는 듯 했다. 아무리 사랑이 고파도... 웃음만 나왔다. 지석이 어지러운 정원에서 상사화를 찾을 때.
띠링-
"아...존 나 바보같다. 문자 하나가 이렇게 호들갑 떨 정도인가?"
지석은 휴대폰 화면을 세 번이나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김정수의 첫 문장이 너무 공손해서 혹시 스팸인지를 의심하곤 하고.
| 혹시 다음 주에 시간 되실까요?
지석은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 눕다가 반사적으로 다시 일어났다. 평소라면 "네 시간 됩니다" 정도로 끝났을 테지만 지금은 머리가 복잡해 아무런 텍스트도 적을 수 없었다.
|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녁 같이 먹어요.
여기서 지석은 호흡이 조금 꼬였다. 저녁이라는 말 하나에,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단백질 바를 괜히 깨물었다. 맛이 없는 건 지금 지석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답장을 보내기 직전, 지석은 손가락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장을 써 내려갔다. 물론 오타는 덤으로.
보내고 나서 지석은 소파 위 기타에 머리를 박았다. 한숨만 나오는 회사원용 문자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리는 바람에. 아...시발...
| ㄴ
| ㅇ네
| 스케줄 보고 연락 드릴게요
김정수의 마지막 답장을 보고 지석은 괜히 이불을 걷었다가 다시 덮었다. 내가 진지하게 보였나? 아니 근데 또 귀엽네... 아니 귀엽다는 말은 아니고, 그, 아 씨 뭐야...
그러다 지석은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아무것도 아닌 척 냉수 한 잔을 드링킹했다. 컵을 내려두고 또 화면을 켰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그래도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수는 지석에게 문자를 보내고 난 뒤 휴대폰을 뒤집어놓고 잠시 기다렸다. 답장이 금방 올 거라곤 기 대하지 않았다. 바쁘시던데, 밴드도 하시고 과제도 하셔야 할 텐데.
그런데 1분 만에 답장이 왔다.
| ㄴ
| ㅇ네
| 스케줄 보고 연락드릴게요
정수는 답장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
오타에
반듯한 말투.
스케줄 보고 연락을 준다고?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승낙도 거절도 아닌 애매모호한 무언가. 정수는 자기 입가에 올라온 미세한 웃음을 느꼈다. 지석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상상됐다. 침착하게 답장했다 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귀까지 빨개져 있을 얼굴이 떠올랐다. 정수는 단 한 문장만 보내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곤 혼자 생각했다.
저 정도면 이미 반은 온 거지
정수는 문자 버튼을 누르고서도 한참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가 지석을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설명하지 못한 문장 하나,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 하나. 그걸 어딘가에 내려놓 고 싶었다. 문자로는 부족했다. 기억이 끼어들어야 하는 테이블이 필요했다. 따뜻한 그릇 하나면, 어쩌면, 굳어있는 말들이 녹을 수 있으니.
〈매칭〉 두 번째 선택의 마지막 날, 서로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카메라는 돌고, 선택은 해야 하고, 근데 확신은 없다. 그때 정수는 입술을 깨물었고 지석은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거절이 아닌 확신의 선택이었다.
"너 싫어서 아니야."
"그냥, 좋으니까 조심하고 싶었던 거야."
정수는 촬영이 끝난 직후 지석에게 이렇게 말하고 떠나려는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말 안 하면 지석이가 너무 속상해할 텐데. 지석이 또 강아지처럼 앉아있을 텐데. 지석이랑 더 얘기 못 할텐, 아- 이건 내 잘못이니까 취소.
근데 그 완벽한 계획이... 촬영이 끝나자마자 지석이 도망가는 바람에 바로 망가졌다. 근데 그가 정류장에선 먼저 다가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행동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시 친하게 지내자는 건가? 뭐, 파트너라도 하자고? 곽지석의 의도를 아무리 생각해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의도를 물어보기 위해, 이 식사 자리를 만든 건데-
얘...왜 모르는 척해?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둘은 반찬만 툭툭 건드렸다. 정수는 젓가락을 굴리다 말고 마지막에 한 줄 꺼냈다. 그날은 제가 좀 겁났어요. 미안해. 지석은 안다고. 저도 그랬다고. 형식적인 말만 오고 갔다. 그날은 그저 그렇게 마치는 하루였다. 사과만 남았-
"우리 집 마당에 상사화가 있어요"
"나중에 보러 와요. 지석이 꽃 좋아한다 하지 않았나?"
정수가 말했다.
"...네 형."
사과만 남은 줄만 알았던 저녁 식사에 다음 약속도 같이 따라왔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8월 둘째 주 수요일이었던가. 메시지가 하나 왔다.
| 상사화는 이번 주에 제일 예뻐요
| 지석아 언제 올래?
형이 며칠 사이에 여우가 돼서 왔다. 토요일에 갈게요. 하나를 보내고 나는 한순간에 소녀처럼 상사화의 수줍은 개화를 바랐다.
정수의 창가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물 먹은 흙냄새가 났고 햇빛은 유리창을 넘어 화분 가장자리만 따뜻하게 데웠다. 상사화의 잎은 크게 뻗어있진 않고 줄기 끝의 꽃들만 붉은빛을 단단히 머금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지석은 그 앞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 말이 없을 때는 원래 장난부터 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손가락 한 마디로 꽃잎 끝을 톡 건드리며 멈췄다.
"이거..."
지석이 꺼낸 한마디가 너무 작아서 정수가 듣고도 못 들은 척해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다.
"이거 진짜 형 같네요."
정수가 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석은 고개를 숙인 채, 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끌었다.
"겉으로는 말 없고, 안엔... 색 많고. 형 같아요."
정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저기 저 식탁 위 물컵을 가지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손이 지석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그 순간이, 아주 잠깐인데, 순간 중의 순간에 두 사람에게 정적이 흘렀다. 지석의 눈이 살짝 커지는 건 움직임 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표정보다 눈이 더 놀라는 사람. 지석은 손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다 말았다.
정수는 컵을 들어 물을 따랐다. 그리곤 말했다.
"응, 어..."
"밖에 나가서 커피 한잔하고 헤어질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말. 붉어지는 귀 끝. 지석은 그걸 보고 입술 안쪽을 눌러 웃음을 참았다. 웃으면 도망갈까 봐. 자기 귀는 더 빨간 건 모르고.
둘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화분 앞에서 꽃이 서 있는 모양을 같이 바라봤다. 꽃은 말을 하지 않는데 두 사람의 망설임까지 대신 보여주는 것처럼 조용히 붉은 색을 유지했다. 그날의 초대장은 손 대신 피하지 않은 거리를 거쳐 전달됐다.
정수는 현관 쪽 불을 켰다. 문 앞 공간은 넓지 않았다. 한 사람은 신발을 꺼내고 다른 한 사람은 기 다려야 하는, 한 번에 두 명이 움직이기엔 애매한 폭. 정수는 지석의 신발을 대신 꺼내주었다. 아무 말 없이 내주는 습관 같은 거. 거절하기 힘들 만큼 자연스러웠다.
지석은 신발을 받으려다 몸을 살짝 틀었고,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정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굳이 피하지 않고 단단한 얼굴로 말했다.
"지석이 넘어지면 안 되잖아."
"그치? 무슨 상상해ㅋㅋ"
아...형 진짜...
"다 들키네요. 형한텐."
지석은 신발 끈을 조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 자세로 말하면 덜 떨릴 거라 믿는 사람처럼.
"저 그날도... 그냥 피한 거 아니에요. 형 보고 겁난 거에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정수의 눈꺼풀이 아주 짧게 떨렸다.
몇 초의 공백이 흘렀고 정수는 문을 열었다.
"이제 안 피하면 돼. 나도 그래"
정수의 말 하나하나는 선언이었다. 확신도 강요도 아니었다. 지석은 말 대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찬 바람이 들어왔다. 시원한 여름바람이 둘의 온도 차이를 잠시 지워놓았다. 멀리 걷지 않아도 가까워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정수는 집에 돌아온 뒤 현관에 아직 남아 있는 낯선 체온의 잔여를 오래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지석이 서 있던 구역. 신발 끈을 조이며 고개를 숙이던 자세. 아무것도 아닌 동작이었는데 정수의 머릿속이 자꾸만 그 장면을 떠올렸다.
휴대폰은 뒤집어 놓았지만 알람 진동이 올 때마다 시선이 흔들렸다. 절대 먼저 연락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늘 상대가 생각할 시간을 주는 쪽.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간을 밀어내면 오히려 흐려질 것 같았다.
자정이 되었을 때, 정수는 아주 짧은 문장 하나를 만들어 적었다.
| 잘 들어갔지?
부탁도 감정도 의도도 없는 단순한 말.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말.
지석은 1분 만에 답장을 보냈다.
| 넵 덕분에요
덕분? 정수는 다시 보았다. 짐을 들어준 것도 앞장서준 것도 아닌데 뭘 덕분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피하지 않게 해준 거. 지석은 그런 사람이다.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 사람. 정수는 화면을 끄려다 다시 하나를 보냈다.
| 내년에 꽃 보러 또 올래?
질문이라기보단 그냥 앞으로도 오라는... 그런 문자였다. 지석은 답장이 조금 늦었다. 늦어진 시간만큼 확신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가고 싶어요
좋아한다. 그립다. 사랑한다- 그런 감정선이 아니라 가고싶다는 동사 하나로, 그 말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다음 만남은 정수가 먼저 시간을 만들었다. 점심 무렵, 러닝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기 전에 지석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 밥 먹었어?
| ㅇ아직 안먹었어요 왜요?
왜냐고 묻다니. 정수는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 같이 먹자
지석은 그 말을 읽었을 것이고
답을 쓰려다가 지우는 중일 테고
망설일 테고
결국엔 예를 말할 것이다.
정수는 그런 과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답장은 단순했다.
| 넵 좋아요
그 한 줄은 분명히 확신의 형태를 띠었다. 준비, 망설임도 없다고 믿었다.
지석이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형, 그때 이후로 좀 편해졌어요. 저만 그런 거에요?"
정수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표정이 아니라 관심을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에 가까웠다.
"아- 그 뭐랄까... 형이 그랬잖아요. 이제 안 피하면 된다고... 그게 좀 남아서..." 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기억한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형도요?"
"응."
길지 않은 대답, 그렇지만 거짓 없는 응. 지석의 어깨가 살짝 내려갔다. 사람의 긴장은 입보다 어깨부터 풀린다는 것을, 정수는 알고 있었다.
"저, 그때 마지막 선택 안한 거... 진짜 겁 때문에 그래요. 그, 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누가 아니래?"
"형은...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왜?"
"형은 제가 형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잖아요."
정수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응, 맞지. 근데 겁먹어서라고 생각 들었어. 나도 그랬으니까. 정수의 말 한마디가 마치 지석을 구원해 주는 듯했다. 겁이 맞다. 선택을 안 한 것도 맞다. 그러므로 굳이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김정수와 곽지석의 선택이 같아서. 서로를 이해해서.
"근데 선택 때문에 자꾸 생각나요."
생각? 놓쳤다는 후회? 기억의 잔상? 무엇이 생각난다는지 정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형이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어졌어요. 프로그램 끝났는데, 이상하죠?"
아- 지석아. 이제 정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지석은 동력이 있는 사람이다. 망설였지만 멈추지는 않는 사람. 정수는 지석을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었다. 이제는 귀가를 확인할 수 있는 문자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대신 작은 부탁을 하나 했다.
"다음에 올 때 책 하나 챙겨와."
"왜요?"
"네가 좋아하는 거 나도 알아야지."
명쾌한 이유. 단단한 방식. 상대 취향을 알아보려는 시도. 그게 정수가 하는 첫 번째 사랑 방식이었다.
"형은요? 형이 좋아하는 거도 하나 알려줘요."
정수는 답을 하려다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상사화."
그 말은 감정의 자백 없이도 고백에 가깝게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날 밤. 정수의 핸드폰은 두 번 진동했다.
첫 번째는 도착했다는 보고. 반말은 덤으로.
| 형 나 도착
두 번째는 짧은 한 줄
| 책 고를 거야 내가 좋아하는 거
정수는 휴대폰을 침대 옆에 두고 불을 끄려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상대보다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
| 시간 오래 걸려도 돼. 네가 좋아하는 거면 아무거나.
과장 없는 문장. 그저 상대의 취향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길이. 이게 정수가 하는 두 번째 사랑 방식이었다. 정수는 핸드폰을 뒤집으며 생각했다. 선택은 한 번 아니지.
그리고 그날의 연락은
조금 긴 밤을 남겼다.
정수는 불을 끄고 누웠다. 눈을 감았는데, 생각은 쉬지 않았다. 누군가의 취향을 기다리겠다는 말은 사실 상대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선언이기도 했다. 예전엔 그걸 몰랐다. 빨리 잡아야 하고. 확신이 있어야 하고. 말을 할 거면 깔끔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이 번엔 아니었다. 말 대신 시간을 건넬 수 있다는 것. 확신보다 여지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세 번째 사랑 방식이라면 정수는 그걸 받아들이고 싶었다.
잠에 들기 전,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 형 나 책 두 개 골라도 괜찮아요??
정수는 베개 옆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지만 바로 답장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없었고 무슨 말을 골라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천천히 입력했다.
| ㅋㅋ괜찮아
전송음이 울리고 그제야 불안이 사라졌다. 정수는 그것으로 충분한 밤을 만들었다.
정수는 식탁 위에 놓인 책 두 권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지석이 골랐다는 산문집, 그리고 짧은 소설. 표지는 따뜻했고, 종이 냄새가 났다. 책에 손을 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정수는 아직 누군가의 취향을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둘은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늘었다. 정수는 짧은 문장을 보냈고 지석은 길지 않은 단답으로 대답했다. 감정은 그리 깊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언어의 길이가 남았다.
주말, 정수는 상사화 화분 옆에 책을 놓고 지석을 기다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리듬이었다.
"형. 저예요."
정수는 문을 열어주면서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문을 받쳐두고 길을 내줬다. 지석은 운동화 끈을 풀며 고개를 들었다. 형. 제가 좋아하는 문장 부분 접어놨어요. 책 봤어요? 정수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이따 읽어볼게.
그 말이 누군가의 세계를 읽을 준비라는 걸 지석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가까워졌다. 지석은 정수가 좋아하는 물의 온도를 기억했고 정수는 지석이 말할 때 컵을 살살 만지고 얘기를 시작하는 습관을 캐치했다. 둘 다 표현은 느렸고 고백은 자연스러운 시점이 아니었다. 그냥 정수는 지석을 자주 보고 싶어 했고 지석은 정수 근처에서 겁이 덜 났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귀기로 한 날은 특별한 의식이 없었다. 정수는 소파에 기대서 책을 읽고 있었고 지석은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며 앉아 있었다. 뚜렷한 고백이 아니라 조용한 인정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지석이 먼저 끊어냈다.
"형, 저희는 무슨 사이예요?"
정수가 책을 덮었다.
"좋아하는 사이."
"그럼... 사귀는 거 맞죠? 착각한 거 아니죠...?"
정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둘은 말 뒤에 어떤 입맞춤도 포옹도 없었다. 다만 안도의 호흡만 겹쳤다.
연애는 말 없고 단단했다. 정수는 하루에 두 번 정도 아주 짧은 문장을 보냈다.
밥 먹었어?
지석아 목도리 챙겼어? 오늘 춥다
애정 표현이라고 부르기엔 건조했지만 지석은 그게 좋았다. 그는 형식적 사랑이 아니라 습관이 느려진 온도를 믿는 사람이었다. 둘의 연애는 우연히 잡아놓은 균형 위에 서 있었다.
띠링-
정수와 지석 두 사람 모두에게 메시지 하나가 전송되었다.
아-
지석이 말을 꺼냈다. 추운 겨울날 언제나 그랬듯 정수네 집이었다.
"형, 어제..."
"응. 봤어. 매칭에서 연락 온 거?"
정수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 문자는 선택의 그림자를 건드리는 말이었다. 재출연 제의.
'안녕하세요. 매칭 관계자입니다. 매칭 1편에서 탈락하신 곽지석 님과 김정수 님의 연애 소식을 들어 탈락자 특집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미팅 오시면 나누겠습니다. 꼭 연락 주세요.'
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이 아니라 기억을 먼저 떠올리는 시간이었다. 선택의 마지막 날. 카메라가 돌고 확신하지 못한 서로의 손. 정수는 그 순간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편집 화면 속에서 그저 탈락자로 기록되는 것은 무엇보다 쓰라린 일이었다.
정수는 짧게 물었다.
"너 가고 싶어?"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이
"응, 나 이제 안 피하고 싶어. 도망 안 가고 얘기하고 싶고, 우리 얘기를 그냥 남기고 싶고-"
정수는 컵을 만지작거리다 지석의 말을 잘랐다.
"나는 싫어."
"...왜요?"
"또 탈락하기 싫어. 자꾸 생각나. 아직 생생해. 나한텐 아픔이야."
그 말은 이유가 아닌 상처의 형태였다. 지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 이번에는-"
"확신 있어?"
정수가 또 이어 말을 끊었다. 지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확신은 감정이 아니라 결과를 예상하는 능력에 더 가까웠다. 지석은 그런 능력이 없었다. 또한 있다는 척하지도 못했다.
정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상사화 화분 앞에 섰다. 잎은 없고, 꽃대만 곧게 선 모양. 지석은 그게 정수 같다고 했었다. 겉으로 말이 없는데 안에 색이 많 다고. 정수는 그 기억이 불편해졌다. 색이 많으면 뭐하나, 증명 못 하면 끝인데.
지석이 조용히 말했다. 형. 나도 무서워. 정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말 대신 기다렸다. 지석은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감정이 흔들릴 때 손으로 지지대를 찾아야 하는 버릇이 나오는 순간.
"근데 난 무서운 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진 않아."
정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정수에게 위로가 아니라 압박이었다. 겁이 있어도 뛰겠다는 사람 앞에서 멈춰버린 자신을 마주해야 했으니까. 정수는 낮게 말했다.
"그렇게 용감하지 않아도 돼."
“근데 형 나는 그게 용기라고 생각 안 해요. 그냥…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은 거야."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가끔 진심이 해답이 아닐 때가 있다.
정수는 손을 내렸다. 말을 고르고 골라서 겨우 내 뱉었다.
"나는 스스로도 확신 없었고 너도 확신 없었잖아. 그게 기록됐잖아. 그럼 난 또 네 옆에서 탈락자 역할이야?"
"그래서 다시 하고 싶어. 다른 기록 만들면 되잖아."
지석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달라질 게 있어?"
"형이랑 있으면 달라질 거라고 믿어. 나는."
정수는 그 말에서 눈을 피했다. 믿음은 따듯한 말이었지만 책임으로 작아질 때 사람을 압박하는 언어가 된다. 정수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 믿음이 무서워."
지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표정이 아니라 멈춘 어깨선이 먼저 반응했다. 정수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지석의 눈에는 울음도, 미소도 없이 단단한 불안만 있었다. 정수가 그 불안을 보며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동정이 아니었다. 동시에 흔들리는 두 사람의 나란함이었다.
"형, 나는 기다릴 거야. 그게 내 방식이야."
지석은 매칭 섭외 메일을 받은 날, 정수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책상에 앉아 편지 귀퉁이에 적었다.
형, 저는 형에게서 솔직함을 배웠어요.
그 편지는 보내지 않았다. 지석은 편지를 접어 책 사이에 끼워두고 미루는 법을 택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미루는 게 덜 겁났기 때문이다.
며칠 뒤, 정수는 편지를 발견했다. 지석이 서점 계산대에 놓고 간 책 속에 실수처럼 남긴 종이였다. 정수는 그걸 세 번쯤 읽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시작하면 선택을 해야 하니까.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을 자각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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