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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가는 애정 (하)

leeyouyuu

감정 데이터 시스템을 담당했던 핵심 엔지니어가 왜 사랑을 삭제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가설이 난무했다.


공식 기록 어디에도 그의 동기는 남아 있지 않다. 중앙 컴퓨터실에서 발견된 로그는 단 한 줄뿐이다. remove(Love/*). 2046년에 이르는 현재까지도 이 로그를 주제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유력하게 손꼽힌 가설은 총 세 가지다.


첫 번째 가설. 의도설.


공포와 분노, 불안은 수치로 관리가 가능했지만 사랑은 달랐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했고 집단화될수록 폭발적인 변수를 만들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감정 데이터의 불균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엔지니어가 사랑을 가장 위험한 감정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새천년을 앞둔 인류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감정 체계에서 가장 통제 불가능한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면 그건 사랑일 거라고.


두 번째 가설. 사고설.


사랑이 삭제된 직후 국안위는 유족의 동의를 근거로 엔지니어의 부검을 실시했다. 부검 보고서엔 그의 사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과로에 의한 전신 피로 누적 및 생체 리듬 붕괴. 심혈관 기능의 급격한 저하. 신경계 반응 소실. 미세혈관 파열 흔적 다수. 장기간 수면 부족. 고농도의 카페인 섭취로 인한 생체계 무력화 가능성이 높음. 사인은 외부 요인 없이 발생한 피로사로 추정됨.


당시 시스템 개발팀에 속해있던 또 다른 엔지니어의 증언에 따르면, 시스템 가동 직전까지 개발팀 팀원들은 극도의 과로 상태였다고 한다. 그들은 잠을 줄여가면서 마지막 패치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경로를 호출했을 수도 있다. 혹은 테스트용 명령어가 실서버에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사고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논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진 건 사랑Love과 잡음 데이터Lofi의 스펠링이 유사하여 벌어진 실수라는 가설이다.


문제의 시스템은 음성 명령과 텍스트 명령을 병행하여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일부 구간에서는 자동 보정 기능이 작동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그날 새벽. 중앙 컴퓨터실의 소음과 지연된 네트워크 응답, 그리고 피로의 순간 속에서 엔지니어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사랑을 삭제했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시스템은 명령을 수행했고 인류의 감정 체계에서 사랑이라는 항목이 영구적으로 삭제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엔지니어가 사랑이 정말 위험할 거라고 판단해서 삭제한 건지, 사랑이 잡음처럼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워서 삭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는 언제나 동기보다 먼저 세상을 바꾸니까.




멀리 돌아가는 애정 (하)




간밤에 함박눈이 내렸다.


눈 덮인 캠퍼스는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정문에서부터 교내로 이어지는 인도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있다. 학생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잰걸음으로 걸었지만 간혹 하얗게 파묻힌 캠퍼스 풍경에 감탄하곤 했다. 운동장 한 켠에는 누군가 만든 눈사람이 장난처럼 서 있다. 아무도 거쳐 가지 않은 벤치엔 흰 눈만이 고요하게 반짝이고.


기말고사가 끝났다. 2학기 종강과 동시에 김정수는 짐 정리를 시작했다. 시험을 잘 봤는지 말아먹었는지 하는 감상에 젖을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승찬이 열받게 구는 걸 보기 싫었던 것도 있고. 과목 하나 에이쁠 놓쳤다고 좆됐다며 발광하는 이승찬과 김정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애를 욕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럴 때만큼은 멀리하고 싶다. 애정이란 그런 것이다.


이삿짐 박스가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방은 텅 비어갔다. 내 방이 이렇게 넓었나. 아니, 그냥 우리 집 자체가 존나 넓은 듯. 김 과장이 내어준 소파에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던 김정수는 문득 떠올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집에 세 사람이 살았단 걸.


평범한 직장인이던 김 과장. 부잣집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온 박 여사. 그리고 김정수.


부적합자는 이런 걸 보고 꼴림을 느낌? 누군가 교실 컴퓨터로 남녀가 관계하는 영상을 틀어놓고 지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씨발. 방금 봤냐. 웩. 존나 더러워. 그럼 김정수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영상을 보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와 자꾸만 경로를 이탈하려는 시선은 김정수가 부적합자라는 선명한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수는 흔하디 흔한 제 이름처럼 보통의 삶을 사는 게 소원이었다. 박 여사가 땅돌과 모텔로 들어가는 걸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땅돌. 인생에 불현듯 굴러들어 온 돌과 동거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정상투성이의 세상에서 버젓이 하트 모양 심장을 갖고 태어난 규격 외의 너와 파트너가 될 줄 대체 그 누가 알았을까. 목장갑을 끼고 멀뚱멀뚱 서 있는 곽지석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김정수는 서툴고 여물지 않은 김정수다. 왜 그러고 있어요. 실실 쪼개며 묻자 곽지석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수그렸다.



도와드릴게요.

저 짐 별로 없어요. 혼자 해도 돼요.



지석 씨, 이래서 힘쓸 수는 있어요? 삼시세끼 잘 챙겨 먹는 거 맞죠? 김정수는 무슨 드라마 남주 같은 대사를 읊조리며 곽지석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잘 하면 한 손으로 양쪽 손목을 제압할 수 있을 듯했는데, 시도해 보려다가 말았다. 분위기 이상해질 것 같아서. 고딩 때 애새끼들이 보여준 질 나쁜 영상에서 꼭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아서.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새끼가 나쁜 건지, 하게 만든다고 진짜 한 새끼가 나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곽지석이 살고 있던 집은 남자 혼자 사는 것치고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돈돼 있었다. 오히려 너무 깔끔해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주방 겸 거실이 나왔는데, 그 안쪽으로 방문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중 오른편에 있는 방이 곽지석의 침실이었고 김정수는 남은 방을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짐 정리를 대강 끝낸 후, 주방을 둘러봤다. 싱크대는 연식이 느껴졌지만 상판은 말끔했고 손잡이도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냉장고 문에는 메모지가 하나 붙어 있었는데, 가까이서 살펴보니 약 복용이나 심박수 등을 체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김정수는 괜히 주위를 살피다가 눈길을 돌렸다. 거실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좁은 공간 한가운데에는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비실비실한 파트너를 먹여 살리려면 당분간 주방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구청에서 파트너 등록 절차를 밟은 뒤, 처음으로 곽지석을 데리고 마트에 갔던 날만 해도 그랬다. 그 애는 카트를 밀며 김정수의 뒤를 쫄랑쫄랑 밟기만 했을 뿐 이렇다 할 식욕을 보이지 않았다. 호불호를 물어도 우유 들어간 것만 아니면 다 괜찮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다 괜찮다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카트에 닥치는 대로 식재료를 담았다. 곽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이렇게 많이 사요?

냉장고 텅 비었던데요.

이거 사면 누가 다 먹는다고…

너요.

나요?

네. 곽지석이요.

김정수는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나 뭐 먹는 거 본 적도 없으면서. 곽지석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빈틈없이 채워진 냉장고. 비슷한 시간에 꺼지고 켜지는 백열등.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먹는 아침. 잠이 덜 깬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면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김 과장한텐 미안하지만 김정수가 원했던 식사 시간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트너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나. 김정수는 멍하니 생각한다.


하루는 두 뺨을 가볍게 때리며 졸음을 쫓아내는 곽지석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말 편하게 하지 않을래요? 어차피 우리 동갑인데. 곽지석은 우물쭈물 답했다.



그렇긴 한데 저 사실 빠른이에요.

알고 있었어요.

제가 언제 말한 적 있어요?


곽지석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아뇨. 우리 집 박 여사가 알려줘서 알았어요.

……

걱정 마요. 내가 아는 건 네 이름이랑 생일이 전부니까. 너 다음 달에 생일이잖아요.



사실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알긴 해요. 그 말은 삼켰다. 김정수는 그저 곽지석을 빤히 쳐다봤다. 사생활 터치하지 않기. 그 규칙을 퍽이나 잘 지키고 있으니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눈빛으로.



정수 씨 생일은 언젠데요?

뭐라고요?

정수 씨 생일은 언제냐고요.

어… 죄송해요. 잘 안 들려요.



아니이, 쪼옴… 겨우 테이블 하나 사이에 둔 게 전부인데 어떻게 안 들릴 수 있냐고오. 곽지석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네 생일. 언제냐고.

아, 내 생일?

……

6월 26일.



반말 따낸 김정수가 킥킥 웃었다. 잘 들리면서 안 들리는 척하기는. 곽지석이 이마를 짚었다. 이제 알겠다. 정수 씨 통제 성향 있죠. 부루퉁하게 묻자 김정수는 또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어어. 대답 잘 들었고.


그날 밤, 곽지석은 빨간색 볼펜으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면서 중얼거렸다. 내년 유월에도 살아있으려나.





새해를 앞두고 김정수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집 근처에 있는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언제부턴가 동네에 실종 어르신을 찾는다는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어디 계시는 걸까. 출근길엔 언제나 가벼운 의문이 동행했고 안타까움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쉽게 증발한다. 건너편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졌다.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그러면서도 김정수는 착실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카페 아르바이트는 처음이었지만 일은 어렵지 않았다. 커피머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계는 자동화 방식으로 작동됐기 때문에 할 일이 많지 않았고 외울 것도 적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영수증을 확인하는 틈을 타 기계가 먼저 움직인다. 원두 종류나 분쇄도, 추출 시간 등이 전부 자동으로 세팅되어 있어 컵을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알림이 울리면 컵을 들어 올려 무게를 확인하는 건 습관이다.


김정수는 가끔 생각한다. 이 카페에서 가장 쓸모없는 건 나일 지도 모른다고. 김정수는 또한 생각한다. 이 카페에 내가 있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퇴근길에 녹초가 되어 이곳을 방문하는 곽지석을 기다리기 위함이라고.


곽지석은 항상 같은 음료를 시켰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완성되는 음료. 복숭아 아이스티. 꼭 지 같은 것만 시키네 싶었다. 피로에 짓눌린 눈꺼풀을 버겁게 들어올리는 곽지석을 향해 설탕 덩어리를 건네면 그 애는 같이 퇴근하자며 말꼬리를 늘린다. 김정수는 웃음을 삼키며 시간을 확인했다. 크리스마스까지 두 시간 남았다.


정장 차림의 곽지석은 몇 번을 봐도 어색하다. 저번 주부터 백화점에서 시향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그 애는 매일 같이 기깔나게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했다.


커피도 기계가 만드는 마당에 시향지 나눠주는 일을 사람이 한다는 게 잘 납득되지 않았다. 2035년 즈음부터 기계가 대체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동일한 거리. 동일한 타이밍. 동일한 손동작. 동일한 시선과 각도. 동일한 방식으로.


곽지석은 설명했다. 그러한 완벽함이 오히려 집단 정서 반응을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특히 부적합자처럼 감정 회로가 예민한 사람에게는 패턴화된 자극조차 위험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발표된 후로 백화점은 예전처럼 불균질한 인간을 고용하여 시향지를 나눠주기로 했단다. 그 애는 브랜드 내부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기도 하다면서 슬쩍 영업 비밀을 흘렸다.


사랑은 없어졌지만 호감은 남아있다. 기계 대비 인간을 고용했을 때 시향지 수령률과 브랜드 호감도가 올라가고 매장 체류 시간도 길어진다. 같은 향수라도 기계가 내밀면 그냥 지나치던 인간들이 잘생긴 애가 웃으면서 주면 받아주더라. 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정도로 막 잘났다는 건 아니고.


인스타그램 털었을 때만 해도 얼굴값 더럽게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곽지석은 이따금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써 아침이 왔음을 부정했는데, 그럴 때면 김정수는 그 애를 토닥이며 말했다. 지석아, 일어나. 얼굴값 하러 가야지.


무우슨 얼굴값을. 곽지석이 쪽팔린 듯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당겼다. 너만 모르는 네 예쁘장한 외모로, 그런 차림으로 웃음을 파는 곽지석을 떠올리면 김정수는 어쩐지 부아가 치밀었다. 이유도 모르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네가 웃어준 사람들 눈알 다 뽑아버릴까. 험악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전히 이유는 알지 못한 채.


마감을 끝내고 카페를 나섰다. 으아아 춥다. 곽지석이 오들오들 떨며 걸음을 재촉했다. 내일은 좀 풀린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흰 숨이 퍼져나갔다. 곽지석이 희미해진다. 그리고 다시 선명해진다. 그 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 그럼에도 귓불이 붉다. 살을 에는 날씨다. 여린 피부가 빠알갛게 물드는 까닭을 추위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 밤이다.


일은 어때? 김정수가 물었다. 곽지석은 웅얼웅얼 대답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되고. 손님이랑 눈이 마주쳐도 잠깐이고. 전부 내일이면 잊을 사람들이고. 그래서 좋아. 편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마주할 수 있으니까.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다면서 곽지석은 크리스마스 탓을 했다. 내일은 또 얼마나 바쁠까. 머리도 말리지 않고 침대에 누우려 하길래 쫓아가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 감기 걸려.



곽지석을 양 다리 사이에 앉히고 타박했다. 무어라 변명하는 목소리가 헤어드라이어의 소음에 묻힌다. 김정수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곽지석은 기분 좋은지 아예 몸을 기대왔다. 졸려? 조용히 묻자 그 애는 큭큭 웃으며 도리질했다. 순간마다 시선이 교차하고 테이블에 올려둔 아이스티는 얼음이 다 녹은 지 오래다. 그 애가 손목을 붙잡아왔다. 드라이어의 전원을 끈 다음, 넌 고요 속에서 입술을 뗐다.


메리 크리스마스, 정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쌓인 눈이 녹기도 전에 몰려온 눈구름. 형형색색의 우산. 실종 어르신을 찾습니다. 점멸하며 재촉하는 신호등 초록불. 빙판길. 미끄러지지 않으려 소심하게 뻗는 걸음. 커피머신의 전원을 켜기도 전에 몰려온 손님. 따뜻한 카페라떼. 따뜻한 아메리카노. 루이보스. 레몬차. 매장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에이아이로 만들어진 캐롤. 그러나 음원차트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노래. 사랑 없는 시즌송을 흥얼거리며 김정수는 곽지석을 기다린다. 오늘도 그 애가 올까. 마시지도 않을 복숭아 아이스티를 시키러.


크리스마스가 끝나기까지 두 시간 남았다. 곽지석은 오지 않았다. 김정수는 까닭 모를 서운함을 느낀다. 혼자 걷는 거리는 이토록 쓸쓸하다.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길을 잃은 노인은 아직도 이 거리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까. 이름. 김경란. 실종 직전 인상착의. 조금 굽은 허리.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김. 낡은 갈색 가디건에 버건디색의 바지를 입고 있음. 이제는 외울 것 같은 포스터를 무심히 쳐다보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건너편 버스 정류장 의자에 한 사람이 누워있다. 정류장을 무심코 지나치려던 김정수는 그가 버건디색의 바지를 입고 있음을 깨닫고 멈춰 선다.


가로등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뜯어왔다. 김정수는 사진 속 노인과 초라하게 몸을 움츠리고 잠든 노인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봤다. 이 사람은 틀림없는 김경란이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부터 해야 하지. 경찰서에 전화를 해야 하나. 아니면 포스터에 적혀있는 번호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데 근방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수… 거기서 뭐 해?



곽지석이었다. 김정수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그 애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112에 전화를 걸었다. 몇 분 뒤 도착한 경찰은 포스터 속 노인과 버스 정류장에서 발견된 노인이 동일 인물임을 확신했다. 얼마 안 있어 도착한 노인의 가족도 그가 그들이 찾던 김경란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더했다. 얼떨결에 친절을 베푼 셈이었다. 곽지석이 얼빠진 표정으로 김정수를 훔쳐봤다. 김정수는 저보다 더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사랑과 동시에 낭만도 사라졌다지만 크리스마스 밤을 경찰서에서 보낼 거라고는 상상 못 했다. 그것도 곽지석과 함께. 죄를 지은 건 아니었고 그 반대라면 반대였다. 처음 김경란 씨를 발견하셨을 때 상태는 어땠습니까. 아는 분은 아니시죠. 쏟아지는 질문은 잘못 없는 사람도 회개하게 만들었다. 형광등의 밝기가 지나치게 밝았다. 기가 다 빨렸다. 곽지석은 앉은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고꾸라지려는 얼굴을 제 어깨에 기대게 한 김정수가 눈앞의 가족을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손자로 보이는 남자. 그건 분명 이승찬이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듯했다. 노인은 가족에게 인계되어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실종 사건은 해제 처리가 됐고 두 사람 또한 고생하셨다는 한마디와 함께 풀려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뻗었다. 곽지석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내일은 또 얼마나 바쁠까. 전날 흘러가는 식으로 했던 말이 예언이 됐나 보다. 곤히 잠든 그 애 얼굴을 옆에서 바라본다. 가슴이 일렁인다. 김정수는 심호흡을 했다. 혹시라도 스마트워치가 경고음을 울리면 겨우 베개에 머리를 누인 곽지석이 깰지도 모른다. 다만 김정수는 조용히 속닥인다. 지석아, 메리 크리스마스.





커피머신에 원두를 채워 넣고 있을 때였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은 이승찬이었다.


이승찬. 그 세글자에 지난 크리스마스의 기억이 둥둥 떠올랐다. 실종된 노인을 찾는다는 포스터와 버건디색 바지. 살면서 처음 타본 경찰차. 아는 분은 아니시죠. 심판하던 문장. 어깨에 기대어 선잠을 자던 곽지석.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찰나 망설이던 김정수는 휴게실로 방향을 틀어 전화를 받았다. 이승찬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상기되어 있었고 전화의 용건은 뻔했다. 실종됐던 노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할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한 달 전부터 실종 신고를 해놨는데 어떤 연락도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고. 지금은 병원에 계신다는 설명과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줄임표 같은 침묵. 불안정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그날 제대로 인사하지 못해 마음에 걸렸다는 문장. 당황해서, 정신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고백과 부모님이 꼭 한 번 인사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제안.


김정수는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자신은 특별히 한 일이 없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고 정말 그게 전부라고 덧붙였다. 상대의 고마움이 거래로 바뀌는 걸 원치 않았다. 그날의 일은 그저 우연이고 기적이었으며 돌아서면 사라져야 할 순간이었다.


통화가 끝나고도 김정수는 한동안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누군가의 삶이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간 대가로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완벽한 적합자라고 생각했다. 인생이 계획대로 굴러가는 사람. 김정수가 감히 비교하지 않으려 했던 부류의 인간. 그런 이승찬에게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표정이 흐트러지고, 말이 길어지고, 숨을 고르는 틈이 생기는 순간이 존재했다. 김정수는 문득 생각한다. 적합자라고 해서 결함이 없는 건 아니란 것을. 다만 고장이 드러나지 않도록 설계된 상태일 뿐이라는 걸. 균열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떤 균열은 규격 안에 숨겨질 뿐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자연스럽게 곽지석이 딸려 왔다. 하트 모양의 심장. 기준치를 넘나드는 감정 파동. 당연한 것도 늘 조심해야 하는 삶. 그 애는 언제나 비정상이었다. 부적합자. 그중에서도 완벽하게 불완전한. 삶을 무사히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선 파트너가 필요한 사람. 정상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내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 곽지석과 함께 있을 때면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무얼까. 연민이라고 부르기엔 자꾸 선을 넘고.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 남아 있고. 책임감이라고 하기엔 자주 흔들린다. 손목을 붙잡고, 머리를 말려주고, 돌아오지 않는 밤을 기다리는 이 마음은 어디에 속해야 할까.


균열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감정도 마냥 이상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드러난 걸지도 모른다고.


김정수는 다시 매장으로 돌아와 원두통을 열었다.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퍼진다.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기계가 움직인다. 세상은 여전히 정해진 방식으로 돌아가고 적합자와 부적합자는 여전히 구분되어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자신과 곽지석이 나란히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울타리 밖이 아닌 경계선 위에.




*




백화점에선 늘 비슷한 냄새가 난다. 향수 매장에서 새어 나오는 향. 화장품 코너의 파우더 향. 입구에서 밀려오는 차가운 겨울 냄새. 정신이 아찔한 와중에도 여전히 정장은 어색하기만 하다. 곽지석은 수시로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본다. 와꾸 상태 괜찮은지, 와이셔츠에 주름이 잡히진 않았는지, 아침이면 항상 김정수에게 물어보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김정수는 다 괜찮다고 했지만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만 같다. 혼자 된 기분. 백화점 매장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입구에서만 서성이는 게 꼭 이도 저도 아닌 제 처지를 비유하는 것 같아서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개같이 버틴다. 단기로 바짝 벌고 이 바닥 뜨는 게 곽지석의 계획. 얼마 안 남았다. 며칠만 썩으면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백화점을 찾는 손님이 늘어났다. 곽지석도 덩달아 바빠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정수가 일하는 카페를 찾아간 이유는 정말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냥 애착 인형처럼 심신에 안정을 주는 무언가가 필요해서.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입가에 경련이 날 정도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라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복숭아 아이스티는 귀여운 핑계. 곽지석은 테이블에 엎어져서 말꼬리를 늘렸다. 정수, 같이 퇴근하자아…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집에 돌아와 씻고 나온 사이 밤이 깊어졌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곽지석을 일으켜 세운 김정수가 바닥을 두드렸다. 앉아봐. 머리 말려줄게. 김정수의 가슴팍에 기대 그 애를 올려다보던 곽지석이 큭큭 웃었다. 김정수는 곽지석의 앞머리를 말리느라 여념이 없고 힐끔 쳐다본 시계 시침은 열두 시를 막 넘긴 참이다. 곽지석은 찬찬히 눈을 깜박이며 드라이어의 전원을 껐다. 정적만이 감돌던 그때. 정수, 메리 크리스마스. 속삭인 고백은 성탄절이기에 허락되는 신기루.





어깨를 주무르며 매대를 정리했다. 시향지를 한 장 뽑아 들었을 때였다. 낯익은 모습이 시야에 걸렸다. 짧은 스포츠머리. 조금 그을린 피부. 편한 운동복 차림. 구두 대신 운동화. 기라는 기는 모조리 앗아가는 백화점 조명 아래서도 곽지석은 이도연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애가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빛바랜 기억에 물감을 엎은 것처럼 순식간에 색이 입혀졌다.


이도연이 미간을 좁혔다. 지난날을 더듬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지난날에 내가 있긴 하구나. 곽지석은 안도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곽지석?

……

나 이도연. 기억나?



마침내 곽지석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 이도연이 반가운지 손을 내밀었다. 곽지석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시향지를 꽉 쥐었다.


여기서 뭐 해? 아르바이트 하는 거야? 악수를 거부당했음에도 이도연은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붙여왔다. 향수 매대. 각 잡힌 옷차림. 시향지. 상황 파악은 빠르게 끝났다. 곽지석은 멋쩍게 웃었다. 굳이 웃을 필요 없었는데도 그냥 웃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발가벗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너는?

나?

넌 뭐 하고 지냈는데?



태연한 척 근황을 물었다. 곽지석을 훑어보던 이도연이 묘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나 그냥저냥 살았지.

……

너 살 빠졌네.



턱짓하며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존나 곤란했다. 스마트워치를 찬 손목을 등 뒤로 숨기고 남은 한 손으로 시향지를 내밀었다.



이제 가.

손님을 쫓아내도 되는 거야?

너부터가 날 직원으로 안 대하고 있잖아.

당연하지. 아는 사인데.

영업방해 어쩌고로 찌르기 전에 가라 좀.

…맞다. 넌 항상 이랬지.

……

나한테만 유독 싸가지 없었어. 그래. 기억나.



곽지석은 대꾸하는 대신 매대 위를 정리하는 척 바삐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손이 계속 헛돌았다. 모양 빠지는 꼬락서니를 비웃기라도 하는 건지 이도연이 가볍게 웃었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잖아. 나한테만 벽 세우고.

지금은 일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아… 일하는 중이라서 말 똑바로 안 섞어주는 거야?

……

그럼 일 끝나고 만나자. 연락할게. 번호 알려줘.



뒤로 물러난 만큼 이도연이 한 발짝 다가왔다. 그때 다른 직원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렁뚱땅 번호를 넘겨줄 뻔했다. 그 애가 사라진 자리에 서서 곽지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따라 유독 발걸음이 처졌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헛돌았다. 김정수를 보고 싶다가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를 서성이는 김정수를 발견한 건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을 헤아리며 털레털레 걷던 찰나였다.



정수… 거기서 뭐 해?



김정수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곽지석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112에 전화를 걸었고 난생처음 경찰차를 탔다.


다행히도 죄를 지은 건 아닌지라 무사히 풀려났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걸었다. 어쩌다 실종된 노인을 찾게 됐는지, 노인의 가족이 나타났을 때 왜 그리 당황스러워 했는지 곽지석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말을 아꼈다. 사생활 터치하지 않기. 혹시라도 그 규칙을 어길까 봐.


그러나 김정수는 말했다. 노인을 데리러 온 가족 중 친구가 있었다고. 곽지석은 습관처럼 반응하다가도 김정수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말을 나한테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 그리고 내가 함부로 들어도 되는 건가. 이것도 어찌 보면 사생활의 한 부분 아닌가. 그러나 김정수는 자꾸만 스스럼없이 말했다. 시험 망쳤다고 지랄 떠는 걸 제외하면 걔가 그리도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마치 곽지석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너한텐 다 말해줄 수 있어.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 것처럼.





크리스마스 이후로도 이도연은 몇 번이나 곽지석 앞에 나타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시간대가 같았고 동선도 묘하게 겹쳤다. 곽지석은 그 애를 알아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일부러 찾아와서 긁어대려는 심산이라면 굳이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너 몇 시에 퇴근해?



다만 이렇게 여전한 얼굴과 말투로 말을 걸어오면 도리가 없었다. 웃음을 팔고 사는 서비스직이 손님의 말을 계속 씹는 건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으므로 누가 봐도 곽지석은 을이었고 이도연은 갑이었다. 곽지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답했다.



곧 끝나.

그럼 같이 나가자.



같이 퇴근하자는 말이 이렇게 좆같은 거였나. 이도연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게 아니라 정말 생각난 김에 던진 말이라는 듯이 무덤덤한 작태가 꼭지 돌게 만들었다. 언제까지고 감정 소모만 할 수는 없었다. 곽지석은 객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같이 나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가 오늘.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





술이 들어가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건 중심이다. 시야는 시선을 따라가지 못하고 사물의 윤곽이 겹쳐 보였다가 다시 갈라진다.


이도연 또한 곽지석과 별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그 애는 눈을 껌벅이며 지껄였다. 넌 항상 이런 식이었어. 아무것도 말을 안 해주잖아. 나만 네 앞에서 광대짓하고.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어쩐지 슬퍼 보이는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던 곽지석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속이 울렁거렸다. 



말할 수 있는 게 좆도 없으니까 말을 못 한 거야…



곽지석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음절마다 모서리가 깎여나갔다.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리거나 반대로 아득히 멀어졌다. 옆 테이블에서 시작된 웃음소리가 갑자기 공격적이게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아무 뜻 없는 한마디에 괜히 울컥했다. 감정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왜 말을 못 해.

……

너 나 좋아한 건 아니지? 그치? 그럴 리가 없지.



엉망으로 자세가 무너진 이도연이 연거푸 술잔을 꺾었다.


그만 마셔. 나 너 책임 안 질 거야. 다짐하듯 곱씹는 머릿속이 흐리멍덩했다. 기억이 느슨해졌다. 평소엔 꼭 잠가두던 생각들이 술기운을 타고 슬금슬금 새어 나왔다. 말하지 않기로 한 말, 잊어버리기로 한 얼굴들이 순서 없이 무작위로 떠올랐다. 몸덩이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반면 판단은 가벼웠다.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 망가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일의 내가 수습하겠지.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곽지석이 맛탱이 간 눈깔로 이도연을 노려봤다.



맞아. 나 너 좋아했어.

뭐?

너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거 아냐? 그래서 나 일하는 데 찾아와서 자꾸 귀찮게 괴롭힌 거잖아. 왜 아닌 척해. 넌 뭐, 넌 뭐 얼마나 깨끗하고 결백하길래 밑장 빼 씨발놈아.



어깨에 힘이 풀렸다. 자꾸 벽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숨을 들이마시는데 흉곽 안쪽이 따끔거렸다. 시야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이도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가슴 안쪽이 조여왔다. 심장이 제 모양을 잃은 것처럼. 둥글게 수축해야 할 것이 어딘가 뾰족하게 접히는 기분. 심장 박동이 잘못된 경로를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곽지석은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을 문질렀다.


이건 술 때문이 아니다. 이상정서반응이다.


이도연의 얼굴을 똑바로 본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감정 파동 그래프가 기준치를 훨씬 초과했음을 알리는 불쾌한 소음이 가게를 가득 채웠다. 눈앞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바닥으로 쏟아질 것처럼 기울었다. 곽지석은 스마트워치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테이블을 붙잡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았고. 이도연 앞에서 두 번씩이나 이 꼴을 보이는 건 최악이었다.



야… 괜찮아?



이도연이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곽지석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나 놓칠 뻔했다. 버겁게 잠금을 풀고 핸드폰을 이도연 쪽으로 내밀었다.



이거.

……

전화… 걸어줘.

누구한테?



이도연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정수.



그 말을 끝으로 다리가 풀렸다.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고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핸드폰 신호음이 울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는데. 의식이 끊기기 직전 떠오른 얼굴 하나. 정수. 김정수. 내 하나뿐인 파트너.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하얀 천장이 전부였다. 이곳은 병원이고 나는 입원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긋지긋한 클리셰를 다시금 마주한다. 기계음. 규칙적인 박동. 잘 설계된 호흡. 곽지석은 느릿느릿 눈길을 돌렸다. 그 끝엔 김정수가 있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나오질 않고 다만 김정수만이 선명하게 보인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던 그때였다. 이도연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야?



네가 설명하라는 듯 김정수가 곽지석에게 눈짓했다. 뒷골이 선득해진다.



고등학교 때 친구.



입술을 달싹이던 곽지석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제게 쏠리는 시선에도 이도연은 개의치 않았다. 김정수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잔가지를 쳐낸 단답이 오히려 두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잠시간 정적만이 감돌았다. 병실 안의 기계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때마침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간호사였다. 그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면회는 한 분만 가능하세요. 정중하면서도 규정은 규정이라는 말투였다.



제가 있을게요. 



선수 친 사람은 김정수였다. 저 얘 파트너예요.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파트너 한 분만 남아주세요. 환자분은 아직 안정이 필요한 상태라서요.


졸지에 쫓겨나게 된 이도연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미안. 회복 잘하고. 나중에 연락할게. 간다. 그 애는 괜스레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머뭇거리다가 병실을 빠져나갔다.



연락?

……

쟤 그냥 친구 아니지.



조용해진 병실에 김정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곽지석이 마른세수를 했다. 아마도 어젯밤, 이도연에게 핸드폰을 건넸을 때 전화번호를 털린 듯했다.



정수… 은근슬쩍 규칙 어기지 마.

무슨 규칙.

서로 간섭 안 하기로 했잖아.

그거 먼저 어긴 사람 너야.

내가 언제…

선 그을 거면 전화는 왜 했어?

전화한 게 잘못이야?

걱정하게 만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돼?

……

분명 너한테 전화가 왔는데 받는 사람 목소리는 네가 아냐. 그리고는 하는 말이 곽지석 쓰러졌으니까 와달래. 병원 도착하니까 넌 잠들어 있고, 처음 보는 사람이 네 옆을 지키고 있는데…



격양된 목소리가 점점 누그러졌다. 이내 고개를 떨군 김정수가 풀이 죽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화내지 마. 심장에 안 좋대.

화낸 적 없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곽지석이 김정수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눈썹을 늘어트리고 올려다보자 그제야 김정수가 표정을 풀었다.



넌 다른 사람 눈에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



심박수 그래프가 미세하게 요동친다. 곡선과 직선을 오가는 그것은 꼭 하트 모양을 닮았다.



아프지 마.



사랑은 내가 다 할게. 널 상처 주지 않을게. 그러니까 아프지 마. 차마 애정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은 겨우 이런 것. 김정수는 손을 뻗어 곽지석의 입술 위에 손바닥을 얹는다. 상체를 천천히 숙인 건 다분히 고의적이며 의도를 전부 읽고도 곽지석은 피하지 않는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시야가 선명해졌다. 초점이 흔들리던 세계가 한 지점으로 모인다. 그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다.


손바닥을 사이에 두고 두 입술이 포개졌다. 온기가 느껴진다. 숨이 조금 가빴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곽지석은 제 심장이 하트 모양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긍정한다.





이틀 뒤, 이도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곽지석은 받지 않았다. 양심에 찔리기도 했고. 양심 같은 거 없었어도 원래 그러려고 했고.


이도연은 한 통의 음성을 편지처럼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김정수가 커피 팔러 간 사이 곽지석은 겨우겨우 음성을 확인했다. 그 애는 말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지 정말 몰랐다고. 난 너와 좀 더 친해지고 싶은 것뿐이었다고. 그런데 너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고 그게 항상 서운했다고. 백화점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계속 피하려고만 하길래 오기를 부렸다고. 그런데 네가 그렇게 쓰러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그러면서 그 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미안해.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야. 몸조리 잘하고. 건강해라.


아닐걸. 어쩌면 너도 날 좋아했을지도 몰라. 네가 사랑에 무지하여 깨닫지 못한 것뿐, 사랑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을지도 몰라.


안녕이란 말 없이도 영원히 이별할 수 있구나. 곽지석은 선명한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슬픔은 이따금 사랑의 동의어가 되곤 한다. 사랑한단 말 없이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면. 닳고 닳은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면.


병실 서랍에 꽂혀 있던 수술 안내서를 다시 꺼냈다. 이미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읽을 때마다 같은 문장에서 눈길이 멈췄다. 심장 교체 수술. 성공률 57%. "정서적 자극에 대한 과민 반응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




언젠가 김 과장이 말한 적 있다. 옛날에는 학교 다닐 때 수업 듣기 싫으면, 선생님한테 첫사랑 얘기를 해달라며 졸랐다고. 때는 김정수의 생일이었고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자리였다.


첫사랑이라. 생소한 단어다. 그리고 이도연을 첫사랑이라 칭하며 옛 얘기를 하는 곽지석은 하나도 즐겁지 않아 보인다. 원래 사랑이란 게 이렇게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감정이었나. 새해 첫날부터 병실에 갇혀 우울한 얘기를 하고 있는 처지가 서럽다. 크리스마스엔 경찰서에 가질 않나. 어째 곽지석과 파트너가 된 후로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휘말리는 것 같다.


2046년 12월 31일.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날의 일이다. 입원한 김에 수술 날짜를 잡고 싶다면서 곽지석이 직접적으로 수술 얘기를 꺼낸 건. 그때까지만 해도 김정수는 무지했다. 며칠 뒤, 담당의와 면접을 하고 나와서야 알았다. 그 애가 결심한 수술이 반반의 확률로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걸. 성공률이 고작 6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정확히는 57%. 듣도 보도 못한 수치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해? 항상 묻고 싶었어. 왜 이렇게 필사적인 건지. 왜냐니. 정수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지. 김정수가 물었고 곽지석이 답했다. 그 애는 바보같이 웃었다. 괜찮을 거야. 수술에 성공해도 내가 정수를 사랑한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애당초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감히 사랑을 입에 담은 너는 민망한지 눈을 피한다.


목덜미가 홧홧하다.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멸종된 이유. 엔지니어가 사랑을 삭제한 이유. 이렇게나 사사롭고 골치 아픈 감정 따윈 사라져야 마땅하다. 김정수는 어쩐지 울고 싶어진다.





곽지석의 상태가 급변한 건 새벽 무렵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담당의와 수차례 면담을 하고도 차마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어 수술 날짜가 뒤로 미뤄지던 날들 중 하나였다. 분명 저녁을 먹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병원 밥맛 없다면서 안 먹으려는 곽지석을 달래려고 숟가락으로 비행기 태우면서 재롱도 떨었는데. 그럼 넌 부쩍 마른 팔뚝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고 그렇게 지나가야 마땅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그리도 괴로워하는 건 처음 봤다.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급하게 뛰어오는 담당의와 간호사. 환자분, 숨 쉬세요. 저 보세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곽지석은 왼쪽 가슴팍에 손을 얹고 비명을 질러댔다. 심장이 제자리에 있지 않는 것처럼. 똑바로 뛰어야 할 것이 비틀린 궤도를 따라 미끄러지는 것처럼.


심박수 그래프가 또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사이렌처럼 울리는 경고음이 트라우마처럼 뇌리에 박혔다. 담당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덤덤하게 지시했다. 정서 자극 차단하세요. 보호자 분리 필요합니다.


쫓겨났다. 입에 담고 싶은 이름은 아니지만, 이도연이 그랬던 것처럼 김정수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방금 제가 뭘 본 건지 코끝이 시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지난번 보인 이상정서반응도 파트너 분을 염두에 둔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간호사로부터 전해 들었을 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하트 모양인 게 그렇게 문제가 된대요? 20세기 사람들은 그러고도 잘만 살았다면서요. 지석 씨도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거 아니에요? 병원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걸으면서 김정수는 언젠가 곽지석을 잔인하게 몰아갔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째서 우린. 어째서 넌. 어째서 난. 이래야만 해. 자책하면서 바라본 하늘은 빌어먹게 파랗다.


짧은 일탈을 끝내고 병동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간호사실에 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잠깐 선생님이랑 얘기 가능하실까요.


진료실이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들락날락한 공간인데도 숨이 막혀왔다. 환자의 상태를 전달하는 의사의 표정에서 드물게 예민한 기색이 보였다. 심장이 덜컹했다. 가슴 한가운데에 묵직한 돌덩이가 얹은 느낌이었다. 김정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심박과 호흡이 매우 불안정해요. 심장에 통증도 다시 올라왔고요. 지금으로써는 일반 병실에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상했다. 의사의 설명은 아주 정리되어 있었는데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처럼 들렸다. 김정수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중환자실로 옮겨야 합니다. 방법이 없어요.



중환자실. 낯선 단어였다. 설명이 아니라 판결처럼 들렸다. 김정수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곽지석을 떠올리자 지금까지의 망설임이 한꺼번에 부끄러워졌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오늘은 괜찮아 보인다고. 내일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왜냐하면 나 사실 널 잃을까 봐 무서워, 지석아.


널 지키려고 했던 부정들이 사실은 겁먹은 날 회피하려는 마음이었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 한 번 안 했다고 이렇게까지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될 줄 알았다면 이토록 멍청하게 굴진 않았을 것이다. 김정수는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이대로 곽지석을 잃을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붙잡을지, 김정수는 갈림길 앞에서 발목을 접질린 어린아이처럼 방황한다. 그러나 곽지석은 말했다. 괜찮을 거야. 수술에 성공해도 내가 정수를 사랑한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김정수는 고개를 들고 의사를 똑바로 봤다. 서명할게요. 끝내 내뱉은 한마디는, 더는 아프지 말라는 말만으로는 그 애를 지킬 수 없는 단계에 와버렸다는 자각과 동시에 하는 선언. 김정수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널 아프게 한 만큼 이번엔 내가 감당할게. 무서운 건 내가 다 가져갈 테니까 넌 부디 살아만 줘.





곽지석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동안 보호자 역할은 그 애의 형이 하기로 했다. 확정된 수술 날짜는 공교롭게도 곽지석의 생일이었고 김정수는 평소처럼 현실을 살다가도 문득문득 곽지석이 보고 싶었다. 수술이 끝나기 전까지 면회 자체가 허락되지 않아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껏 볼 수도 없는 네가 벌써 그립다. 네 생일을 앞두고 계절은 완연한 겨울을 맞이했다고, 밖은 이렇게나 눈이 펑펑 온다고,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그저 슬프다. 너와 마트에 장을 보러 갔던 날. 네 방에서 영화를 봤던 밤. 색깔만 다른 칫솔. 현관에 나란히 놓인 운동화 두 켤레. 원목 테이블. 주말이면 같이 점심을 만들어 먹었던 일.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감추고 환영했던 크리스마스. 신파극 같았던 그날. 기억을 필름처럼 늘어놓으면 곽지석이 가득한데 눈을 뜨고 일어나면 이 기억들이 흰 눈에 파묻힐까 봐 김정수는 두렵다. 흰 눈. 흰 눈에 파묻힌 흰 곽지석. 흰 곽지석의 흰 얼굴. 꿈속의 우린 얼음장 같은 손과 손을 겹쳐 잡고 흰 숨을 불어 넣는다. 그럼 넌 킥킥 웃으면서 코를 훌쩍이고 눈은 소복이 쌓인다.


긴 꿈에서 깨어나 습관처럼 달력을 확인했다. 1월 14일. 수술은 오전 9시 30분에 들어간다고 했으니 지금 출발해야 한다. 김정수는 최소한의 준비만 하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도. 병원 안으로 들어와 만원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보내며 차례를 기다릴 때도. 수술실로 들어서는 곽지석을 멀리서 지켜볼 때도. 다리를 덜덜 떨었다. 손톱 거스러미를 물어뜯었다. 아, 피 난다. 무감하게 눈을 깜박였다. 일 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일 년 같았다.


대기실 전광판의 숫자가 바뀔 때마다 김정수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수술실 번호. 진행 상태를 표시하는 막대. 자동으로 갱신되는 시간. 어느 하나 곽지석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김정수는 자꾸만 그 안에서 의미를 읽어내려 했고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괜스레 긴장했다. 간호사인지, 의사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보호자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숨이 멎었고 수술실 문이 열릴 때마다 동공이 바삐 돌아갔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점점 감각을 마모시켰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소리가 전부 위협처럼 느껴졌다. 카트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 안내 방송의 잡음. 멀리서 들려오는 전화벨. 전부 너무 시끄럽거나 너무 갑작스럽게만 다가왔다.


수술이 끝나고 그 애가 버젓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눈앞에 편지 한 통이 들이밀어졌다. 보내는 사람 곽지석. 받는 사람 김정수. 곽지석의 형은 편지를 대신 전해주며 덧붙였다. 어제 갑자기 편지지 하나만 사달라고 해서 급하게 다녀왔거든요. 기다리는 동안 심심할 수도 있으니까 읽고 있으래요.


심심할 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네 생각하느라 다른 건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와. 김정수는 볼을 긁적이며 편지를 전달받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편지를 다 썼는지… 하여튼 알 수 없는 놈이다.


편지봉투를 쉬이 뜯어볼 수 없었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만 증폭됐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깔아둔 문장.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미리 남겨둔 문장.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가정한 어조. 그런 것들이 가득 적혀 있으면 어떡하지. 미안하다든가 그동안 고마웠다든가 잘 지내라는 인사만 쓰여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건 읽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김정수는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만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곽지석이 그렇게 비겁한 방법으로 이별을 통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김정수는 결국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엔 한 장의 편지지가 무심하게 접혀있었다. 김정수는 천천히 편지지를 펼쳐본다. 보내는 사람 곽지석의 마음을 받는 사람 김정수가 읽기 위해. 간직하기 위해. 훗날 그대로 돌려주기 위해.


그러나 편지지엔 어떤 문장도 적혀 있지 않았고 다만



설명도 이유도 이름도 없이 모양 하나만이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눈을 뜨고 또 떠봐도 빛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선명한 건 제 것이 아닌 심장이 제 안에서 뛰고 있다는 낯선 감각뿐이었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곽지석은 달음박질했다. 아무리 뛰어도 박동이 규칙적이었다. 숨이 차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감정의 밀도가 느슨해진 것 같았다.


저 멀리 출구가 보인다. 최선의 최대로 뛴다. 마침내 머리 위로 태양이 쏟아지는 것처럼 사방이 밝아진다. 나 죽은 건가. 그렇다면 여긴 천국일까. 착하게 살았다고 천국에 보내주신 건가. 너무 고마우시다. 빛을 향해 얼떨떨하게 손을 뻗자 누군가 깍지를 껴왔다. 곽지석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김정수가 가득했다.



지석아.

……

생일 축하해.



앞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아. 곽지석이 작게 탄식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그렇다면 여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지탱 삼아 어떤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밟고 서 있다. 정상도 비정상도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듯이.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어째 종이의 질감이 익숙하다. 보내는 사람 김정수. 받는 사람 곽지석.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펼쳤다.



설명도 이유도 이름도 없이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 하나.


심장을 돌려받았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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