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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가는 애정 (하)

leeyouyuu

감정 데이터 시스템을 담당했던 핵심 엔지니어가 왜 사랑을 삭제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가설이 난무했다.


공식 기록 어디에도 그의 동기는 남아 있지 않다. 중앙 컴퓨터실에서 발견된 로그는 단 한 줄뿐이다. remove(Love/*). 2046년에 이르는 현재까지도 이 로그를 주제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유력하게 손꼽힌 가설은 총 세 가지다.


첫 번째 가설. 의도설.


공포와 분노, 불안은 수치로 관리가 가능했지만 사랑은 달랐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했고 집단화될수록 폭발적인 변수를 만들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감정 데이터의 불균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엔지니어가 사랑을 가장 위험한 감정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새천년을 앞둔 인류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감정 체계에서 가장 통제 불가능한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면 그건 사랑일 거라고.


두 번째 가설. 사고설.


사랑이 삭제된 직후 국안위는 유족의 동의를 근거로 엔지니어의 부검을 실시했다. 부검 보고서엔 그의 사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과로에 의한 전신 피로 누적 및 생체 리듬 붕괴. 심혈관 기능의 급격한 저하. 신경계 반응 소실. 미세혈관 파열 흔적 다수. 장기간 수면 부족. 고농도의 카페인 섭취로 인한 생체계 무력화 가능성이 높음. 사인은 외부 요인 없이 발생한 피로사로 추정됨.


당시 시스템 개발팀에 속해있던 또 다른 엔지니어의 증언에 따르면, 시스템 가동 직전까지 개발팀 팀원들은 극도의 과로 상태였다고 한다. 그들은 잠을 줄여가면서 마지막 패치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경로를 호출했을 수도 있다. 혹은 테스트용 명령어가 실서버에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사고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논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진 건 사랑Love과 잡음 데이터Lofi의 스펠링이 유사하여 벌어진 실수라는 가설이다.


문제의 시스템은 음성 명령과 텍스트 명령을 병행하여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일부 구간에서는 자동 보정 기능이 작동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그날 새벽. 중앙 컴퓨터실의 소음과 지연된 네트워크 응답, 그리고 피로의 순간 속에서 엔지니어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사랑을 삭제했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시스템은 명령을 수행했고 인류의 감정 체계에서 사랑이라는 항목이 영구적으로 삭제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엔지니어가 사랑이 정말 위험할 거라고 판단해서 삭제한 건지, 사랑이 잡음처럼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워서 삭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는 언제나 동기보다 먼저 세상을 바꾸니까.




멀리 돌아가는 애정 (하)




간밤에 함박눈이 내렸다.


눈 덮인 캠퍼스는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정문에서부터 교내로 이어지는 인도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있다. 학생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잰걸음으로 걸었지만 간혹 하얗게 파묻힌 캠퍼스 풍경에 감탄하곤 했다. 운동장 한 켠에는 누군가 만든 눈사람이 장난처럼 서 있다. 아무도 거쳐 가지 않은 벤치엔 흰 눈만이 고요하게 반짝이고.


기말고사가 끝났다. 2학기 종강과 동시에 김정수는 짐 정리를 시작했다. 시험을 잘 봤는지 말아먹었는지 하는 감상에 젖을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승찬이 열받게 구는 걸 보기 싫었던 것도 있고. 과목 하나 에이쁠 놓쳤다고 좆됐다며 발광하는 이승찬과 김정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애를 욕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럴 때만큼은 멀리하고 싶다. 애정이란 그런 것이다.


이삿짐 박스가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방은 텅 비어갔다. 내 방이 이렇게 넓었나. 아니, 그냥 우리 집 자체가 존나 넓은 듯. 김 과장이 내어준 소파에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던 김정수는 문득 떠올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집에 세 사람이 살았단 걸.


평범한 직장인이던 김 과장. 부잣집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온 박 여사. 그리고 김정수.


부적합자는 이런 걸 보고 꼴림을 느낌? 누군가 교실 컴퓨터로 남녀가 관계하는 영상을 틀어놓고 지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씨발. 방금 봤냐. 웩. 존나 더러워. 그럼 김정수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영상을 보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와 자꾸만 경로를 이탈하려는 시선은 김정수가 부적합자라는 선명한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수는 흔하디 흔한 제 이름처럼 보통의 삶을 사는 게 소원이었다. 박 여사가 땅돌과 모텔로 들어가는 걸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땅돌. 인생에 불현듯 굴러들어 온 돌과 동거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정상투성이의 세상에서 버젓이 하트 모양 심장을 갖고 태어난 규격 외의 너와 파트너가 될 줄 대체 그 누가 알았을까. 목장갑을 끼고 멀뚱멀뚱 서 있는 곽지석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김정수는 서툴고 여물지 않은 김정수다. 왜 그러고 있어요. 실실 쪼개며 묻자 곽지석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수그렸다.



도와드릴게요.

저 짐 별로 없어요. 혼자 해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