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 돌아가는 애정 (상)
leeyouyuu
사랑이 멸종했다. 아니, 사랑은 단 한 번도 멸종을 원한 적 없으므로 문장을 다시 쓰겠다. 사랑이 멸종됐다. 지구 멸망보다 빨랐고 기후 위기보다 확실했다.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12시 정각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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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을 앞둔 세계는 근거 없는 예언과 기술적 공포가 뒤섞여 어딘가 불안정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2000년이 되면 ATM기가 작동하지 않을 거라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현금을 사재기했다. 일본에서는 새천년 대비 생존 키트를 집집마다 구비해놓자는 캠페인이 열렸다. 한국에서는 성경의 예언과 컴퓨터의 오류가 같은 선상에서 논의됐다. 유럽에서는 전력망이 한꺼번에 폭주할 거라는 루머가 퍼져 촛불 따위의 도구가 품절됐다. 전 세계에서 종말 시계가 등장했고 몇몇 광신 집단은 대피소를 만들어 어떤 의식을 벌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컴퓨터가 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해 핵미사일이 오발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새천년을 맞이하는 순간, 세상이 초기화될 거라고 떠들었다. 모든 소문은 근거가 없었으나 공포는 이유보다 전염력이 빨랐고 상상력은 논리보다 더 폭력적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집단 정서 붕괴였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쉽게 울었고 쉽게 싸웠다. 작 은 다툼도 금세 비관으로 번져갔다. 혼란 속에서 UN은 국제정서안정관리위원회―이하 국안위―를 출범시켜 인류의 감정 체계를 모니터링하고 관리했다.
국안위가 전 인류의 감정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한 건 1996년부터였다. 각국은 개개인의 심장에 작은 칩과 센서를 삽입하여 감정을 실시간으로 기록했고 모든 데이터는 국안위가 구축한 거대한 네트워크망에 저장됐다.
이윽고 1999년 12월 25일, 제네바의 만국회의장에서 긴급 국제회의가 열렸다. 각국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내려진 결론은 단 하나. 인류의 감정 데이터를 통합하여 새천년을 적대시하는 요소를 제거하라.
결정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안개처럼 뒤덮인 불안은 잠재우기 위해 국안위는 1999년 12월 31일 23시 55분, 인류의 감정을 하나의 구조 안에 모아 정리하는 시스템을 가동하라고 명령했다.
1999년 12월 31일 23시 56분, 각국의 감정 조절센터는 일제히 시스템을 가동했다.
2000년 1월 1일 00시 01분, 네트워크망에서 오류가 보고됐다.
2000년 1월 1일 00시 04분, 시스템 개발팀은 즉시 연구소 지하로 내려갔다. 중앙 컴퓨터실에 도착한 개발팀을 반긴 건 책상에 엎어져 있는 엔지니어와 그가 남긴 마지막 로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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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가는 애정 (상)
사비를 들여 신경망 검사를 다시 받았다. 결과는 부적합으로 3년 전과 동일했다. 김정수는 보건소를 빠져나오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껐다 켜며 방황하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아갔을 때, 시간은 9시 51분이었다.
여름방학 첫날 아침부터 이승찬의 자취방을 쳐들어가는 길이다. 김정수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서 어플 하나를 다운로드했다. 생전 처음이다. 파트너를 구하는 어플 그딴 것에 미래를 걸어보는 건. 아니, 그딴 건 아니지. 말이 좀 심하네. 무려 국가에서 공인한 어플인데. 그것도 김정수 같은 부적합자를 위해서.
2046년의 인류는 사랑을 질병으로 인식하고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인간의 신경망 깊숙이 남은 희미한 흔적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신경망 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은 남들보다 사랑에 취약하다. 이상 정서 반응을 보일 확률이 높다. 부적합자에게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다.
결혼은 더 이상 애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이 멸종된 뒤, 국가는 인구 유지와 사회 안정을 이유로 만 25세부터 33세까지의 성인을 결혼 적령기로 지정했다. 정해진 나이가 되면 국가가 배정한 사람과 결혼해야 했고 부부는 의무적으로 함께 살아야 했다. 누군가는 스스로 족쇄를 차는 꼴이라고 비난했지만 결혼만큼 확실하고 안정적인 노후 대비 정책은 없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의무로 하는 결혼. 인구 유지를 위한 섹스. 다분히 본능적인 임신과 출산.
김 과장과 박 여사는 2022년에 결혼하여 2023년에 김정수를 낳았고 그러므로 김정수는 사랑을 모른다. 맹세한다. 살면서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적 없다. 그런데 부적합자라니. 것도 두 번이나. 존나 억울하지. 내가 아니라 검사 기계에 문제 있는 거 아냐? 진상처럼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성격 못 되는 김정수는 그저 어플 속 프로필을 완성해 갈 뿐이다. 닉네임. 정직하게 이름 석 자 김정수. 나이. 스물넷. 성별. 남성. 프로필 사진에는 어제 학교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찍은 셀카 하나 올려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SHAREMEET. 국가가 나서서 개발한 파트너 매칭 어플이다. 이용자는 주로 결혼을 할 수 없는 부적합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가 국가 차원에서 어플까지 개발하면서 부적합자를 챙기게 된 계기는 10년 전 일어난 부적합자 동반 자살 사건에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부적합자 세 사람이 오픈 채팅을 통해 연락을 이어가다가 동반 자살을 계획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한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부적합자에게도 마련하라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김 과장은 시위 관련 뉴스를 볼 때면 항상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부적합자라서 그런지 감정적이라나 뭐라나. 듣는 부적합자 기분 나쁘게.
불과 몇 시간 전, 김정수는 배짱 좋게 식탁 위에 쪽지 하나 남겨놓고 집을 나왔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아버지랑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연 끊겠다는 말은 아니구요. 그냥 좀 떨어져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실종신고 하지 마세요. 알아서 잘살아 볼 테니까요.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게 맞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방법이 없다. 박 여사와 이혼한 뒤 김 과장은 하루가 다르게 정신병자가 되어갔다. 김정수는 아들 된 노릇으로 매일 같이 김 과장의 폐와 간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그러든 말든 김 과장은 미친놈처럼 술을 마셨고 담배를 뻑뻑 피웠다. 정말 박 여사를 사랑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집안 꼬라지 하고는. 입을 열면 원망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침묵을 택한다. 이런 날이면 부적합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혼자 살다가 고독사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억울하게만 느껴진다. 아냐. 그럴 순 없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엔딩을 맞이할 순 없다. 그리고 SHAREMEET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적합자에게 허용된 거의 유일한 안전장치다. 사랑에 취약한 부적합자일지라도 가족처럼 서로를 케어하며 지낼 동거인을 마련할 수 있도록 개발된 파트너 매칭 어플. 김정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SHAREMEET를 켰다. 지역 설정까지 마치고 홈 화면으로 돌아가자 자신처럼 동거인을 찾고 있으면서도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프로필이 보였는데, 전부 남자였다. 부적합자 특성상 교환 불가능하세요 :)
얘네 다 에이아이는 아니겠지. 반신반의하며 화면을 내리던 김정수가 눈썹을 들썩였다.
땅돌. 어쩐지 익숙한 닉네임을 발견했다. 김정수는 기억을 더듬으며 땅돌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이다. 개새끼 같기도 하고. 말티즈나 치와와. 소형견을 닮았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잘생겼다는 감상만이 남는 외모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답답해 죽겠네. 미간을 찌푸리고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던 김정수가 이내 짧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