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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가는 애정 (상)

leeyouyuu

사랑이 멸종했다. 아니, 사랑은 단 한 번도 멸종을 원한 적 없으므로 문장을 다시 쓰겠다. 사랑이 멸종됐다. 지구 멸망보다 빨랐고 기후 위기보다 확실했다.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12시 정각에 일어난 일이었다.




*




새천년을 앞둔 세계는 근거 없는 예언과 기술적 공포가 뒤섞여 어딘가 불안정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2000년이 되면 ATM기가 작동하지 않을 거라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현금을 사재기했다. 일본에서는 새천년 대비 생존 키트를 집집마다 구비해놓자는 캠페인이 열렸다. 한국에서는 성경의 예언과 컴퓨터의 오류가 같은 선상에서 논의됐다. 유럽에서는 전력망이 한꺼번에 폭주할 거라는 루머가 퍼져 촛불 따위의 도구가 품절됐다. 전 세계에서 종말 시계가 등장했고 몇몇 광신 집단은 대피소를 만들어 어떤 의식을 벌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컴퓨터가 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해 핵미사일이 오발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새천년을 맞이하는 순간, 세상이 초기화될 거라고 떠들었다. 모든 소문은 근거가 없었으나 공포는 이유보다 전염력이 빨랐고 상상력은 논리보다 더 폭력적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집단 정서 붕괴였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쉽게 울었고 쉽게 싸웠다. 작은 다툼도 금세 비관으로 번져갔다. 혼란 속에서 UN은 국제정서안정관리위원회―이하 국안위―를 출범시켜 인류의 감정 체계를 모니터링하고 관리했다.


국안위가 전 인류의 감정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한 건 1996년부터였다. 각국은 개개인의 심장에 작은 칩과 센서를 삽입하여 감정을 실시간으로 기록했고 모든 데이터는 국안위가 구축한 거대한 네트워크망에 저장됐다.


이윽고 1999년 12월 25일, 제네바의 만국회의장에서 긴급 국제회의가 열렸다. 각국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내려진 결론은 단 하나. 인류의 감정 데이터를 통합하여 새천년을 적대시하는 요소를 제거하라.


결정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안개처럼 뒤덮인 불안은 잠재우기 위해 국안위는 1999년 12월 31일 23시 55분, 인류의 감정을 하나의 구조 안에 모아 정리하는 시스템을 가동하라고 명령했다.


1999년 12월 31일 23시 56분, 각국의 감정 조절센터는 일제히 시스템을 가동했다.


2000년 1월 1일 00시 01분, 네트워크망에서 오류가 보고됐다.


2000년 1월 1일 00시 04분, 시스템 개발팀은 즉시 연구소 지하로 내려갔다. 중앙 컴퓨터실에 도착한 개발팀을 반긴 건 책상에 엎어져 있는 엔지니어와 그가 남긴 마지막 로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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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가는 애정 (상)




사비를 들여 신경망 검사를 다시 받았다. 결과는 부적합으로 3년 전과 동일했다. 김정수는 보건소를 빠져나오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껐다 켜며 방황하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아갔을 때, 시간은 9시 51분이었다.


여름방학 첫날 아침부터 이승찬의 자취방을 쳐들어가는 길이다. 김정수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서 어플 하나를 다운로드했다. 생전 처음이다. 파트너를 구하는 어플 그딴 것에 미래를 걸어보는 건. 아니, 그딴 건 아니지. 말이 좀 심하네. 무려 국가에서 공인한 어플인데. 그것도 김정수 같은 부적합자를 위해서.


2046년의 인류는 사랑을 질병으로 인식하고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인간의 신경망 깊숙이 남은 희미한 흔적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신경망 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은 남들보다 사랑에 취약하다. 이상 정서 반응을 보일 확률이 높다. 부적합자에게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다.


결혼은 더 이상 애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이 멸종된 뒤, 국가는 인구 유지와 사회 안정을 이유로 만 25세부터 33세까지의 성인을 결혼 적령기로 지정했다. 정해진 나이가 되면 국가가 배정한 사람과 결혼해야 했고 부부는 의무적으로 함께 살아야 했다. 누군가는 스스로 족쇄를 차는 꼴이라고 비난했지만 결혼만큼 확실하고 안정적인 노후 대비 정책은 없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의무로 하는 결혼. 인구 유지를 위한 섹스. 다분히 본능적인 임신과 출산.


김 과장과 박 여사는 2022년에 결혼하여 2023년에 김정수를 낳았고 그러므로 김정수는 사랑을 모른다. 맹세한다. 살면서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적 없다. 그런데 부적합자라니. 것도 두 번이나. 존나 억울하지. 내가 아니라 검사 기계에 문제 있는 거 아냐? 진상처럼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성격 못 되는 김정수는 그저 어플 속 프로필을 완성해 갈 뿐이다. 닉네임. 정직하게 이름 석 자 김정수. 나이. 스물넷. 성별. 남성. 프로필 사진에는 어제 학교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찍은 셀카 하나 올려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SHAREMEET. 국가가 나서서 개발한 파트너 매칭 어플이다. 이용자는 주로 결혼을 할 수 없는 부적합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가 국가 차원에서 어플까지 개발하면서 부적합자를 챙기게 된 계기는 10년 전 일어난 부적합자 동반 자살 사건에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부적합자 세 사람이 오픈 채팅을 통해 연락을 이어가다가 동반 자살을 계획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한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부적합자에게도 마련하라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김 과장은 시위 관련 뉴스를 볼 때면 항상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부적합자라서 그런지 감정적이라나 뭐라나. 듣는 부적합자 기분 나쁘게.


불과 몇 시간 전, 김정수는 배짱 좋게 식탁 위에 쪽지 하나 남겨놓고 집을 나왔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아버지랑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연 끊겠다는 말은 아니구요. 그냥 좀 떨어져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실종신고 하지 마세요. 알아서 잘살아 볼 테니까요.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게 맞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방법이 없다. 박 여사와 이혼한 뒤 김 과장은 하루가 다르게 정신병자가 되어갔다. 김정수는 아들 된 노릇으로 매일 같이 김 과장의 폐와 간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그러든 말든 김 과장은 미친놈처럼 술을 마셨고 담배를 뻑뻑 피웠다. 정말 박 여사를 사랑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집안 꼬라지 하고는. 입을 열면 원망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침묵을 택한다. 이런 날이면 부적합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혼자 살다가 고독사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억울하게만 느껴진다. 아냐. 그럴 순 없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엔딩을 맞이할 순 없다. 그리고 SHAREMEET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적합자에게 허용된 거의 유일한 안전장치다. 사랑에 취약한 부적합자일지라도 가족처럼 서로를 케어하며 지낼 동거인을 마련할 수 있도록 개발된 파트너 매칭 어플. 김정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SHAREMEET를 켰다. 지역 설정까지 마치고 홈 화면으로 돌아가자 자신처럼 동거인을 찾고 있으면서도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프로필이 보였는데, 전부 남자였다. 부적합자 특성상 교환 불가능하세요 :)


얘네 다 에이아이는 아니겠지. 반신반의하며 화면을 내리던 김정수가 눈썹을 들썩였다.


땅돌. 어쩐지 익숙한 닉네임을 발견했다. 김정수는 기억을 더듬으며 땅돌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이다. 개새끼 같기도 하고. 말티즈나 치와와. 소형견을 닮았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잘생겼다는 감상만이 남는 외모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답답해 죽겠네. 미간을 찌푸리고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던 김정수가 이내 짧게 탄식했다.


기억났다. 울 부모님 이혼하게 만든 개새끼. 어쩐지 반반하게 생겼더라. 박 여사는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에 약하다. 김정수는 제 엄마 등짝에 빨대 꽂아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튄 땅돌의 프로필 사진을 최대로 확대해본다. 다시 보니까 좀 재수 없게 생김. 말티즈 개뿔. 치와와 지랄. 땅돌은 혼모노다. 순도 백 퍼센트 개새끼다.


 


*




꼭 1년이 되어간다. 김 과장과 박 여사가 이혼한 건. 그리고 겨울이었다. 김정수가 박 여사의 외도를 목격한 건. 그날은 존나 추웠다. 하늘에선 눈이 펑펑 내렸고 김정수는 우산도 없이 걸었다. 정수리에 솜털 같은 눈송이를 보송보송 달고 뛰다시피 걸었다. 이 날씨에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고문이었다. 3분 뒤에 오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이 골목만 지나면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지름길이긴 한데 평소엔 지나다니지 않는다. 모텔촌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멸종됐어도 섹스라는 행위는 여전히 성행하고 싸구려 모텔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한 세기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부적합자만이 모텔을 찾는다는 점. 사랑이 전염됐다든가, 아니면 정말 욕구를 풀기 위해서 온다든가. 어쨌든 아직도 허름한 모텔촌이 존재하는 이유다. 인간이란 참 징그러운 존재다.


김정수는 후회한다. 그냥 큰길로 갈 걸. 그랬으면 박 여사가 땅돌의 팔짱을 끼고 지저분한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꼬라지를 보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야마가 돈다. 결국 버스를 놓쳤고 기분도 잡쳤으니까.


빡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조금 울었다.


아니, 울진 않았다.


아냐. 울었을걸.


사실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김정수가 박 여사의 외도에 분노한 이유는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사랑 그딴 건 세기말에 멸종한 지 오래였으므로 김정수의 분노는 차라리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정상에서 벗어나 비정상이 될 수도 있다는 초조함.


그날, 금성모텔 앞을 서성이던 땅돌은 멍청하게도 대학교 과잠을 입고 있었다. 우연인지 미친인지는 몰라도 그 애가 걸치고 있던 과잠은 김정수가 다니는 학교의 것이기도 했다. 그것도 소프트웨어공학과. 공부깨나 하는 새끼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뭐 그리 당당하다고 유부녀한테 용돈 받으러 오는 길에 과잠을 입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김정수는 혀를 찼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마침 택시가 정차했다.


불 꺼진 집 안은 깜깜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티브이 소리와 희미한 불빛이 아니었다면 김 과장이 소파에 퍼질러 누워있단 걸 몰라볼 뻔했다. 김 과장은 알까. 지금쯤 박 여사는 주름살 하나 없이 탱탱한 놈 밑에 깔려있을 거란 걸.


심란했다. 김정수는 방문을 닫고 인스타그램을 쥐 잡듯이 털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공학과 공식 계정을 시작으로 파도를 타고 또 탔다.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는 사람부터 태그된 사람, 댓글 단 사람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목적지는 작고 하얀 놈.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감정 파동 그래프가 수차례 널뛰었다. 심장에 삽입된 칩과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워치가 쉴 새 없이 경고음을 울렸다. 정신 차려보니 달이 기울고 있었다. 마침내 박 여사를 모텔로 데려간 남자를 발견하고 김정수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찾았다. 작고 하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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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얼굴값을 못하는 성격인 듯했다. 볼 것 없는 피드에 딱 하나 올라와 있던 셀카에 감사를 전한다. 눈 땡그랗고. 입술 뚱뚱하고. 소형견 닮았고. 맞는 것 같다. 내가 찾던 개새끼. 땅돌일일사.





그로부터 2주 뒤, 김 과장과 박 여사는 이혼 서류를 들고 가정법원에 출석했다. 술 취한 김 과장이 제 앞에 아들을 앉혀놓고 밝히기를 박 여사의 신경망이 특정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오류를 일으켜 이상정서반응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이상정서반응의 원인이 외도에 있다는 것을 이혼 사유로 꼽았다.



그게 끝이야? 또 할 말 없어?



김정수가 질겁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라지만 아빠는 엄마한테 배신감 같은 걸 좆도 안 느껴?

새끼가 애비한테 말본새하고는.

그동안 벽이랑 살았어? 어떻게 사람이 그래?

부모 가르치려 들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 번번이 흥분하지 좀 말고.

……

그러다가 사고 치는 거야. 한순간에 눈 돌아가서.



김 과장이 충혈된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김정수는 박 여사의 진단서를 몇 번이고 읽어본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이게 말이야 좆대가리야. 특정 상황이라는 게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천하의 박 여사가 이상정서반응을 보이는 거야. 땅돌 그 새끼가 뭘 어떻게 했길래 99퍼센트로 적합 판정 받은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거냐고. 이거 진짜 기계 문제 아냐? 김정수는 진단서를 집어 던지고 안방으로 향했다.


김정수가 물었다. 정말 할 거예요? 이혼. 긴 여행을 가는 것처럼 짐을 정리하던 박 여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럼 가짜로 하게?

왜요? 걔도 엄마 보면 심장이 이상하대요?

걔? 너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모르는 척하느라 고생했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위로 좀 해주면 안 돼요? 중간에 끼여서 이도 저도 못하는 거 짜증 나는데.

김정수 다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엄마. 나 스물셋이야.

걔도 스물셋이야.

……

빠른 연생이라고 했던 것 같아. 1월이었나. 2월이었나. 긴가민가하네.

…안 궁금해요.



알려주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까. 1월 14일이겠지 뭐. 김정수는 손톱 거스러미를 쥐어 뜯으며 생각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엄마가 정말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박 여사는 말을 돌리는 식으로 상황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엄마가 잘못한 거잖아.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맞는 거잖아. 아빠가 회사에서 잘린 뒤로 좀 멍청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 내버려두고 지 아들뻘한테 무려 사랑을 느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헌데 우리 박 여사는 어째서 이렇게 담담하고 태연할 수 있는 걸까. 까닭 모를 감정이 차올랐다. 분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도 같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를 모르겠어서 더 답답했다. 김정수는 조용히 제 엄마와 눈을 맞췄다. 박 여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곧 생일이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그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괜찮다고 그러는 거 있지.

안 궁금하다니까 그러네…

정수야.

……

엄마가 지석이한테 생일 선물을 챙겨준대도 그건 사랑은 아닐 거야.



그렇게 말하는 박 여사는 누구보다도 멀쩡해 보였다. 말투는 또렷했고 눈빛은 곧았다. 순간 김정수는 자신이 아주 큰 착각에 빠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뭔가 놓친 게 있다. 뭔가 놓치고 있다. 그리고 박 여사는 그 무언가를 죽어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땅돌일일사. 그 새끼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수로 땅돌과 접촉할 수 있을까. 김정수가 그 애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빠른 연생이라는 쓸데없는 사실과 지석이라는 본명뿐인데. 대뜸 디엠 보내기? 나 김정수라고 하는데 박정아 아들이거든? 너 우리 엄마랑 뭔 짓 했냐. 보내면 당빠 차단 당하겠지. 초딩처럼 싸움 거는 것도 말 안 되는 나이다. 점점 나잇값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김정수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순 허공이 하얗게 부서졌다.




*




조만간 집 나온다, 나온다 하더니 진짜로 나왔네.



김정수를 자취방에 들이면서 이승찬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는 이승찬은 우수한 적합자다. 부러운 새끼. 앞날 창창한 새끼. 바닥에 드러누운 김정수가 괴로운 소리를 냈다. 누구보다도 잘살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만 경로를 이탈하고 있었다. 누가 방해하는 것마냥. 신경망이란 놈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95퍼센트나 부적합하고. 엄마는 집 나갔고. 아빠는 미쳤고. 와중에 나는 맨몸으로 가출했고. 어느 것 하나 정상의 범주에 드는 게 없었다.


파트너 매칭 어플을 거듭해서 새로고침 하던 김정수는 다시금 땅돌의 프로필을 발견한다. 김정수의 본가로부터 985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땅돌은 바람직한 자기소개를 앞세워 구미를 당겼다. 서로 사생활 터치하지 않고 가사만 분담해서 동거하실 파트너 구합니다ㅏ 별 이모티콘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반려묘 키우시는 분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ㅜㅜ 별 이모티콘.


사생활 터치 안 하고 가사만 분담. 바라던 바다. 벼락 맞은 것처럼 가출한 새끼가 반려묘를 데리고 있을 리도 없다. 따라서 모든 조건은 충족된다. 김정수는 핸드폰 화면을 오래 응시했다. 땅돌을 향한 마음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얘를 만나서 화를 내고 싶은 건지. 너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대가리라도 후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제 와서 박 여사랑 어떤 거래를 한 거냐고 캐묻고 싶은 건지.


금성모텔 앞에서 땅돌을 발견한 시점으로부터 1년이나 지나서일까. 감정은 불투명한 장막 뒤에 가려진 것처럼 희미했다. 맥없는 마음이 이리저리 휘둘렸다. 이승찬이 양은 냄비 들고 와서 짜파게티 존나 잘 끓여졌다고 지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 운명을 탓할 사람이 필요한 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땅돌에게 채팅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왜 나서서 일을 꼬아대는 건지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땅돌과는 중앙로의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걔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벌써 알고 있는데도 연달아 채팅이 왔다. 알았어, 알았다고. 너 알약 그려진 검은색 반팔 입고 있는 것도. 지금 오는 중인 것도 금방 도착한다는 것도 알겠으니까 강아지 이모티콘 그만 보내. 김정수가 헛웃음을 쳤다. 동거인이 아니라 반려견을 만나러 온 듯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괜히 발로 차며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눈길을 옮겼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작고 하얀 놈이 보였다. 우와. 땅돌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연예인 보는 기분. 김정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땅돌을 쳐다봤다. 그 애는 민망한지 입가를 가리고 헤프게 웃었다.



저… 얼굴에 뭐 묻었어요?

네?

계속 쳐다보시길래…



그제야 김정수는 시선을 거두고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을 닮은 것 같아서요. 뻔뻔하게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지껄이자 땅돌은 빠르게 수긍했다. 아아, 그러시구나.


그 애는 자신을 곽지석이라고 소개했다. 성이 곽씨였구나. 김정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스물넷이라고 알렸을 때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박 여사가 1년 전에 흘린 정보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는 덕분이었다.


그러나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이어진 곽지석의 증언은 김정수의 예상을 비껴간 것이었다. 정수 씨는 대학교 다니세요? 저는 일 학년 때 자퇴했어요. 돈 벌려고요. 제가 심장이 좀 안 좋아서 수술을 해야 하거든요. 수술을 하려면 파트너가 꼭 필요하고요.


애초에 SHAREMEET라는 어플 자체가 부적합자를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람은 본 적 없었다. 김정수가 짐짓 놀란 얼굴로 물었다. 수술이요? 곽지석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감점 요인이 될까요?

아니, 그건 아닌데요…

귀찮게 안 할게요. 지금까지 혼자 잘 해왔어요.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나쁜 놈 만들어요.

죄송해요. 근데 진심이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제 생각엔 안 괜찮은 것 같아요.

저 안 괜찮아요?

제 신경망도 95퍼센트나 부적합해요. 근데 의사한테 심장 수술하라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다행이다. 정수 씨 건강한가 봐요.

지석 씨.

넵.

저희 벌써 동거하기로 결정된 거예요?

네?

제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요. 사생활 터치하지 말까요?



곽지석은 별다른 대꾸 없이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 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정수 씨… 정밀 검사해 본 적 있어요?

…아뇨.

저 열네 살, 그러니까 만 나이로 열네 살이요. 그때 의무로 신경망 검사 받잖아요.

그쵸.

저는 결과가 어땠냐면요. 적합도 아니고 부적합도 아니고 오류가 떴어요, 기계에. 그래서 정밀 검사를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는 거예요. 웃기죠.

……

대학 병원에 가래요. 씨티 촬영도 하고 무슨 초음파 검사도 했어요. 주사가 지인짜 아픈 거 있죠. 어쨌든 그렇게 검사를 했는데… 의사쌤이 제 심장이 하트 모양이래요. 20세기 사람처럼요.



스마트워치가 웅웅 울리며 경고를 쏟아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감정이 널뛰고 있다는 경고일 게 뻔했다. 왜 초면의 사람한테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김정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파트너 제의를 거절하고 싶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내보일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곽지석에게서 낯익은 얼굴이 투영되어 보였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어쩌면 너도 나처럼 네 운명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러나 딱 거기까지. 곽지석의 말투에는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무언의 벽이 있었고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그 애는 말했다.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 잘 맞는 파트너 찾으시길 바랄게요.





이승찬의 자취방에 빌붙은 지 나흘째 되던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실종신고를 했단다. 미친 김 과장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한 모양이었다. 그날, 한 통의 전화를 계기로 김정수는 궁상맞은 일탈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마음 맞는 동거인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갔다. 김정수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독립은 아직 이르다고. 김 과장의 정신병이 자신에게 옮겨붙을 것 같아도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자고.


슬펐다. 알아서 잘 산다니까 왜 실종신고 했냐고 따지면서도 김정수는 안도를 느꼈다. 눈에 익은 집안 풍경. 알코올 냄새. 새끼가 애비한테 말본새하고는. 귀에 딱지 얹을 정도로 들은 띠꺼운 문장. 될 대로 떠들어대는 뉴스. 폭력처럼 반복되는 앵커의 목소리. 불 꺼진 거실. 다만 티브이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만이 김 과장의 비쩍 마른 몸덩이를 비출 때. 김정수는 안도했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고 동시에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 자신을 미워하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정수는 박 여사가 제도를 벗어나기로 한 이유를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사랑은 수단이었을 뿐, 박 여사는 그저 익숙하게 목을 졸라오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학교 후문 쪽에 위치한 만복슈퍼 앞에서 곽지석과 조우한 건 겨울의 초입에 있었던 일이다. 왜 정작 만나고 싶을 땐 만날 수 없고 만날 생각 없을 땐 이리도 기적처럼 만나지는 걸까. 품이 큰 패딩 지퍼를 턱끝까지 올려 얼굴을 파묻은 그 애는 제 주위를 빙빙 도는 고양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긋 올라온 애굣살이 눈에 밟혔다. 김정수는 보폭을 좁히며 곽지석을 관찰했다. 미안해. 너무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내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잇써어… 중얼거리는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김정수가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았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 혀끝으로 입천장을 가볍게 두드리며 손짓하면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가 총총 걸어온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시선이 느껴졌고 김정수는 그 시선 끝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건너편에 말을 걸었다. 저희 여름에 만나지 않았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살며시 눈을 치켜뜨면 입술을 달싹이는 곽지석이 보인다. 무릎을 펴고 곧게 선 김정수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시간 진짜 빠르다. 그렇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곽지석은 동문서답했다. 파트너 구하셨어요? 김정수는 그 애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석 씨는요?

저도 아직이요.

벌써 12월인데요?

적반하장 대박.

저는 사정이 있었어요.



혼자 발끈했다. 쪽팔렸다. 곽지석은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는지 큭큭 웃었다. 흩날리는 웃음소리가 밉지 않았다. 김정수는 멋쩍은 듯 눈썹뼈를 매만졌다.



학교는 무슨 일이에요?

잠깐 친구 만나러 왔어요. 대학 친구.



그렇구나. 습관처럼 반응하며 김정수는 어기적어기적 허리를 숙였다. 저 그럼 가볼게요. 꾸벅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서려는데 어깨 너머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정수 씨! 그 어플 아직 삭제 안 했죠? 김정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2학기 종강을 앞두고 있다. 날씨는 매섭게 춥고 며칠 전엔 첫눈이 왔다. 12월 중순, 일용직을 전전하던 김 과장은 어느새 다시 아침에 집을 나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동안 손도 대지 않던 셔츠와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출근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즈음 김정수는 아침을 거르는 일이 잦았다. 기상 시간이 비슷해진 김 과장과 나란히 식탁에 앉아 아침을 함께 먹는 건 고역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시험 범위를 대갈통에 욱여넣느라 새벽을 뜬 눈으로 보내면서 김정수는 다짐했다. 체할 바엔 굶고 말겠다.


그날도 아침 패스하고 현관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돌연 김 과장이 말을 걸어왔다. 늦었냐? 김정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늦진 않았지만 여유롭지도 않았다. 미적지근하게 고개를 젓자 김 과장은 입을 오물거리며 눈치를 봤다.



네 엄마, 어린놈이랑 놀아나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네?



김 과장이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 그냥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잠, 잠깐만.



느닷없는 자백이었다. 김정수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뭐라고요? 되물으며 김 과장의 말을 복기했다. 그러니까 김 과장은 박 여사의 외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여사에게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고분고분 이혼을 해줬다는 얘기 아냐.


아빠 성격에 그런 짓을 했다고?


저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라던데 나는 이제 천애 고아가 될 일만 남은 건가. 당황스러움을 감출 길을 알지 못해 김정수는 눈만 빠르게 깜박였다. 김 과장도 이 상황이 낯 뜨겁긴 한 건지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독백하듯 말했다.



미안하다.



헛웃음 치며 시계를 곁눈질했다. 이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뜸 들였다간 지각이다. 그러나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는 의문과 김 과장의 술버릇과 박 여사의 올곧던 눈빛과 곽지석이라는 변수가 김정수의 어깨를 짓눌렀다.


기묘한 아침이다. 김정수는 학교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평소엔 믿지도 않는 오하아사 순위를 찾아봤다. 2046년 12월 11일 오하아사 1위. 게자리. 오늘은 끌림의 하루예요. 멀어졌던 인연이 다시 손을 내밀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행운이 찾아올 수 있어요. 당신의 한마디와 당신의 존재만으로 누군가는 숨을 돌립니다.


다시 손을 내민다는 멀어졌던 인연이 곽지석일 줄은 몰랐지.


점심시간이었다. 이승찬과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SHAREMEET]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최근에 접속한 적 없어 방치된 프로필에 누가 관심을 가졌을까. 김정수는 귀찮다는 낯빛으로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메시지의 주인은 다분하게 의외인 인물이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곽지석은 괜히 메시지 여러 개 보내서 미리보기 창을 숨기는 방법도 쓰지 않고 정직하게 물어왔다. 김정수는 진동벨이 울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있었다. 이제 아주 당연하게 나한테 가져오라고 시키네? 이승찬이 개탄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정수는 햄버거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목 넘김이 거북해서 콜라만 들이켰다. 내일 전공 하나 남았는데. 그것도 시험 범위 졸라 많은데. 시간 없는데. 공부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김정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저녁에 잠깐 만날 수 있어요.


이제 와서 캐묻는 게 맞았다. 진작 그랬어야 했다. 박 여사와 땅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무작정 메시지 보내놓고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이승찬이 가방에서 에이포 파일을 꺼냈다. 아오 썅. 외울 거 존나 많네. 걔는 필기 자료를 들여다보며 성질을 부렸다. 김정수가 작게 맞장구를 쳤다. 그니까. 언제 다 하고 있냐. 그때 다시 알림이 울렸다. 곽지석이었다.


저희 저번에 만났던 카페에서 뵐까요.


저번이라기엔 시간이 꽤 흐르지 않았나. 김정수는 지금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리의 행인보다 훨씬 얇았던 곽지석의 옷차림을 떠올리며 답장했다.


좋아요.





해질녘 하늘은 유려한 색의 커튼을 닮았다. 어두컴컴하지만 어렴풋이 불빛이 남아있는 거리를 걷다 보면 기분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곽지석과 만나기로 한 카페에 가까워질수록 감정 파동 그래프가 요동쳤다. 높은 곳에서 아찔하게 추락하는 듯했다.


이곳까지 불러냈으니 음료는 제가 사겠다며 곽지석은 알량한 양심값을 지불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아침 드라마 찍는 것 같잖아. 진짜 중요하고 심각한 얘기하러 온 것 같고. 그렇게까지 똥폼 잡긴 싫었다. 정적이 더 길어지기 전에 끊어내야 한다. 김정수가 슬며시 고갯짓했다. 용건 있어서 메시지 보낸 거 아니에요? 얘기하세요. 그러자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곽지석이 헛기침을 했다.



아직 파트너 없다고 하셨죠.

맞아요.

안 구한 거예요, 못 구한 거예요?

후자였어요.

…지금은요?

실은 제가 지석 씨 처음 만나고 얼마 안 지나서 본가로 돌아갔어요. 그래서 당장은 필요가 없는 거죠.

아니, 오, 그렇구나. 그런데, 음, 아… 본, 본가로…



애써 웃는 낯에 당혹감이 가득하다. 반응이 지나치게 투명해서 웃음이 차올랐다. 김정수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구나.

네에…



낑낑거리는 개새끼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곽지석이 말꼬리를 늘렸다. 하는 행동만 보면 학교 과잠 입고 유부녀 만나러 갈 깡다구는 없어 보이는데. 우린 어쩌다 이렇게 엮여버린 걸까. 김정수는 자꾸만 곽지석이 궁금하다. 하트 모양의 심장을 꺼내 보고 싶다. 그 심장에 귀를 대고 박동을 느껴보고 싶다. 저 애를 곤란하게 하고 싶다. 막무가내로 울린 다음 구해주겠다고 손을 내밀고 싶다. 넌 우리 가족을 망가트렸으니까 그 정도 벌은 받아도 돼. 이건 정당방위야. 그런 충동으로 손끝이 저려올 때였다. 곽지석이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만복슈퍼 앞에서 고양이 쓰다듬어주셨잖아요. 그때 생각했어요. 정수 씨랑 파트너 하고 싶다고요.



김 과장의 느닷없는 자백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얼떨떨하다. 오늘 시간 되냐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부터 파트너 제안을 다시 해올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유까지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김정수가 볼을 긁적였다. 고양이… 그래, 고양이 귀엽지. 근데 고양이 몇 번 쓰다듬어줬다고 파트너 합격이면 세상에 곽지석 파트너가 도대체 몇백만이냐고. 그러나 곽지석은 말한다. 제가 못하는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고양이를 아무렇지 않게 만질 수 있는 사람. 음식 완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내줄 수 있는 사람.


형이 한 달 전에 결혼해서 방이 비었단다. 형제가 한집에서 같이 살았던 모양이다. 바로 들어와서 살 수 있으니 집 구할 걱정 안 해도 됨. 월세 반띵. 가사 분담. 사생활 터치 없음. 김정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김 과장이야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양반이니 혼자서도 잘 살 것이고. 애초에 독립을 누구보다 원한 게 김정수 본인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딱 한 가지 있다면.


지석 씨, 작년 겨울에 뭐 했는지 기억나요? 예사롭게 묻자 곽지석은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양 김정수를 쳐다봤다. 김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전 알 것 같아요. 모텔 앞에서 지석 씨를 봤거든요.

……

어떤 여자랑 같이 안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실시간으로 변하는 그 애 표정이 퍽 볼만했다. 사색이 됐다가, 제 딴에는 아닌 척 태연하게 눈을 부릅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가 이내는 헛웃음을 터트린다. 김정수는 턱을 괴고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이제 기억나죠. 그럼 말해봐요. 우리 엄마랑 뭐 했어요?




*




형과 함께 보육원에 들어간 것. 곽지석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최초의 기억이다. 부모님 두 분 다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대요. 왜, 저번 주에 눈 엄청 많이 와서 도로가 꽁꽁 얼었잖아요. 어른들은 저들끼리 속닥이며 형제의 손을 잡아 이끌었고 형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다. 이름과 생년월일만이 새겨진 목걸이가 두 사람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만 14세가 되면 대한민국 국민은 의무적으로 신경망 검사를 받아야 한다. 부모 없는 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날 검사를 받은 보육원 원생 13명 중 11명이 적합자였고 1명은 부적합자였는데, 곽지석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의사는 말했다. 대학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대학 병원에는 곳곳에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대개 링거 주사를 맞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 본 좀비를 닮았다. 무서웠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했지만 어렸던 곽지석의 눈에는 예외라는 게 들어오지 않았다.


정밀 검사의 결과는 사흘 뒤에나 나왔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면서 곽지석은 윤영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선생님, 저도 입원해요? 왜요? 저 어디 아파요? 윤영은 웃으며 곽지석의 손을 고쳐잡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영의 등 뒤에 딱 붙어 진료실을 찾았다. 오는 길에도 팔뚝에 무서운 걸 달고 로비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곽지석은 겁에 질려서 의자에 앉았다. 옆에 앉은 윤영이 안심하라는 듯 곽지석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여기 보시면… 심장 모양이 일반인하고 달라요. 위쪽은 둥근 호가 두 개 붙어있고, 아래는 뾰족하고.



의사는 모니터를 돌려 포인터로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컴퓨터 화면엔 씨티 촬영의 결과가 담긴 영상물이 담겨있었다. 안경을 들어 올린 의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하트처럼 생겼잖아요. 그렇죠? 윤영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에는 보기 드문 케이스예요. 그래도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닙니다. 20세기 사람들은 하트 모양 심장을 가지고도 잘 살았으니까요.



의사는 몇 장의 그래프를 덧붙여 띄웠다. 잔물결처럼 흔들리는 곡선들이 일정한 구간에서 불규칙하게 치솟고 있었다. 포인터 끝이 그 부분을 툭 건드렸다.



보이시죠? 이 구간들. 감정 자극에 노출될 때 심박과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합니다. 쉽게 가라앉지도 않고요. 원래라면 신경망이 감정을 걸러내 안정적으로 유지해 줘야 하는데, 우리 지석 친구는 그 조절 기능이 조금 약해요. 구식 회로처럼요. 그래서 정서적 자극에 과하게 반응하는 거고요.

……

전근대 문헌에서는 이런 증상을 상사병이라고 불렀는데… 들어보셨을까요?



의사의 설명은 차분했지만 말끝마다 무언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윤영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들어봤죠, 네.


잠시 후, 의사는 포인터로 다른 그래프를 가리켰다. 그는 파형이 번쩍 솟구치는 구간을 강조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누군가를 강하게 좋아하게 되는 순간, 신체가 감당을 못할 수도 있어요. 과호흡, 실신, 심장 통증 같은 것들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

당장은 치료법이 없어요. 꾸준하게 관리를 하거나… 아니면 아이가 더 큰 후에 심장 교체 수술을 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은 정말 많이 숙고하고 결정하셔야 돼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이 쏟아졌다. 곽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영을 올려다봤다. 얼른 그가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했다. 옷자락을 쥐고 보채자 윤영이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소리 없이 말했다.


괜찮아.


윤영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고. 그러니 안심하라고.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치료법이 없어서 평생을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게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과 같은 뜻인 줄도 모르고 멀쩡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친구를 사귀되 깊은 관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 모든 걸 알려고 하지 말 것. 매일 감정 일기를 써서 검사를 받을 것. 윤영은 신신당부했고 곽지석은 시킨 대로 했다. 그럼 정말 괜찮을 거라 믿었고 당장은 괜찮았으니까. 친구에게 생일 선물은 줘도 생일 파티엔 가지 않았다. 아파서 학교를 결석한 짝꿍의 병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윤영은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다. 그 애가 좋아하는 과자와 상비약 몇 개를 챙겨 집 앞에 두고 오는 게 곽지석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친구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적당한 건지 분간이 어렵다. 친구의 병문안을 가지 못해 슬펐고 슬퍼 슬펐어 슬픔 슬프고 슬펐으나 슬펐지만 슬펐는데 슬퍼요 정말 많이 슬펐어요 선생님 제가 이런 걸 쓴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매일 아침 시무룩하게 일기장을 내밀면 윤영은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곽지석을 쳐다봤고 그날 밤 다시 펼쳐본 일기장엔 꼭 이런 코멘트가 적혀있었다. 그렇지 않아 지석아. 이 세상에 무의미한 건 없어. 뭐든 의미가 있단다. 지금은 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어른이 되면 선생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도연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곽지석을 반겼다. 마주치는 얼굴과 들려오는 목소리, 눈에 보이는 모든 색깔이 과하게 선명했다. 곽지석은 창가 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지 않으려 했다. 그때 처음으로 말을 붙여온 사람이 이도연이었다. 짧은 스포츠머리. 손에 들린 축구화. 조금 그을린 피부. 누가 봐도 운동하는 사람. 이도연은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면서 동시에 곽지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애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손을 뻗어 황당하다는 듯 웃는 곽지석의 명찰을 만지작거렸다.



곽지석? 성 특이하네.

……

난 이도연. 여자 이름 같지.



그 애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곽지석은 괜히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새 학기에 통성명을 하는 건,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심장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박동이 하트 모양을 따라 쿵쿵 자전하는 것 같았다. 감정 파동 그래프가 치솟는 모양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곽지석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혹시 학교에서 누가 특별히 눈에 띄어도 오래 보지 마, 지석아. 그건 네 진짜 감정이 아니야. 신경망이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것뿐이야. 착각하면 안 돼.


그러나 이도연은 자꾸만 선을 넘어왔다. 책상과 책상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보란 듯이 침범했다. 곽지석의 교과서 모퉁이에 낙서를 했다. 중학교 때 축구를 했다는 둥, 새 축구화가 아직 발에 안 맞는다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곽지석의 쉬는 시간을 모조리 자신으로 채우기도 했다. 그럼 곽지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럴 수 없어 다만 경청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 밤이면 일기장에 이도연을 새겨넣었고 윤영은 그런 곽지석을 걱정했다. 그 도연이란 애랑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곽지석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이도연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맥박이 세차게 뛰었으니까. 팔꿈치라도 부딪치면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으니까. 그 애가 웃는 걸 지켜보기만 해도 심장 안쪽이 간지러웠으니까. 감정 파동 그래프가 기준치를 넘은 지 오래였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으니까.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걸 곽지석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니까.


거리를 둬야 하고, 거리를 둬야 하는데, 거리를 둬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력하게 이도연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날은 체육 수업이 있었다. 3교시였고, 유난히 볕이 따가웠다.



지석아. 패스 좀.



수업이 끝난 뒤 자투리 시간. 곽지석은 이도연의 손에 강제로 이끌려 축구 시합에 참가했다. 쪽수만 채워주면 된다길래 운동장을 뽈뽈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대뜸 이도연이 고갯짓했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축구공이 제 쪽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도연이 있는 곳으로 발을 굴리려고 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운동장이 미묘하게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감각이 지나쳤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찰나였다. 이도연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일순 답답한 공기가 가슴팍을 짓눌렀고 시야가 쪼그라들었다. 운동장 전체가 반 바퀴씩 밀려나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누가 어깨를 잡았는지, 누가 선생을 불러왔는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땅이 푹 꺼지듯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는 점과 그런 날 잡아챈 것이 너였다는 것만이 선명하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하얀 천장이 전부였다. 이곳은 병원이고 나는 입원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긋지긋한 클리셰 속에서 곽지석은 몸을 일으켰다. 살펴본 꼬라지는 가관이었다. 팔에는 주삿바늘이 여러 개 꽂혀 있었고 가슴엔 심전도 패드가 붙어 있었다. 윤영은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선잠이 든 채였다.


곧 의사가 검진표를 들고 나타났다. 정서 자극에 대한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든지 반복적으로 통증이 누적되면 심장 조직이 손상될 수도 있다든지 하는 의사의 설명은 전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속이 메스꺼웠고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체감하지 못하고 있던 감각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불구덩이에 처박힌 듯했다. 의사가 병실을 떠나기도 전에 까무룩 정신을 잃은 곽지석을 껴안고 윤영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약이란 약은 진절머리가 나도록 복용했다. 심박을 낮추는 약. 과호흡을 완화하는 약. 어지럼증을 잡아주는 약. 그리고 또 한 알, 감정 파동을 둔화시키는 약. 하루에 세 번 식후 30분. 맛대가리 없는 병원 밥을 억지로 씹어 삼키는 이유였다.


가끔 상태를 확인하러 온 간호사가 물었다. 오늘은 어떤 감정이 있었어요? 감정을 마치 물건 취급하는 말투였다.



어떤 감정도 있지 않아요.



그렇게 답하면서 곽지석은 이도연을 떠올렸다. 짧은 스포츠머리. 손에 들린 축구화. 그을린 피부. 명찰을 만지던 손가락. 웃을 때 콧잔등을 찡그리는 버릇. 투박하면서도 다정한 태도. 그건 네 타고난 재능. 이도연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곽지석은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기억 속 그 애가 꿈에 나타나지 않길 빌면서.





입원한 지 닷새째 되는 날. 통증은 한풀 꺾였지만 까닭 모를 무력함이 뼛속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매일 챙겨 먹은 약 덕분인지 아니면 반복되는 치료와 검사에 진이 빠져서인지 모르겠다. 꿈도 꾸지 않고 잠에 취했다가 깨어나면 새벽이었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희미한 여명이 창틈을 파고들어 왔다.



심전도는 안정적입니다. 통증 빈도도 줄었고요. 곧 퇴원도 가능할 것 같네요.



아침 회진 도중 의사가 말했다.


가능할 것 같다는 말이 이렇게 허무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남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게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에 있는 삶은 싫었다. 평범한 것들이 더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 애꿎은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도연만 아니었어도.


그래, 너만 없었어도.


네가 선을 넘어오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이게 전부 네 탓일까?


나만 아니었다면.


그래, 내가 적합자였다면.


내 심장이 하트 모양이 아니었다면.


곽지석은 생각한다. 결국 내 잘못이다. 이도연은 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좋아했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 애가 나에게 보여준 다정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다정을 베풀 것이다. 그러니 전부 내 탓이다. 내가 널 멋대로 좋아해서 멋대로 아프다. 사랑이 멸종된 시대에서 사랑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난 이렇게나 무기력하다.


퇴원 수속을 밟고 병원을 나서는 길이었다. 택시 창가에 기대어 흐려지는 풍경을 바라보던 곽지석은 문득 병원에서 나눠준 안내서를 펼쳐봤다.


심장 교체 수술. 성공률 57%. "정서적 자극에 대한 과민 반응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치였다. 버리고 또 버려도 자라나는 사랑은 나를 오염시켰다. 그러나 현대 의학은 말한다. 개선될 수 있다. 완화될 수 있다. 살아볼 수 있다. 평범하게 또 보통처럼 살아볼 수 있다. 단, 43퍼센트의 절망을 뚫는다는 전제하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보육원을 나왔다. 규정상 만 18세가 되면 더는 보육원에 머물 수 없었다. 퇴소 면담 마지막 날, 윤영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곽지석을 끌어안았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옛날엔 하트 모양 하나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었대. 88년도에 태어나셨거든. 그땐 말이야. 사람들이 연애편지를 썼대. 사랑을 담아서. 그러니까 지석아, 넌 잘못되지 않았어. 봐, 선생님도 부적합자야. 그런데 이렇게 울면서도 난 잘 살고 있고 잘 살아갈 거야. 그러니 약속해. 너도 잘 살아갈 거라고.


고아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곽지석은 벽장에서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짐을 꺼내 본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새겨진 목걸이. 별 볼 일 없는 옷가지. 몇 장의 기념사진. 박제된 기억 속 형제는 환하게 웃고 있다. 놀이공원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모든 게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곽지석은 불안했다. 좆대로 해도 되는 나이가 됐으나 좆대로 하면 안 된단 걸 알아버렸다. 좋든 나쁘든 이제부터는 전부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그때 형은 이미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다. 원룸에서 생활하던 형은 곽지석과 살림을 합치려는 요량으로 급하게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년을 버티며 살았다. 그러는 동안 곽지석은 대학에 들어갔고 형은 직장을 전전했다. 그럭저럭 살아지는 줄 알았다. 그럭저럭 살아지니까 더는 특별히 다를 것도 없을 줄 알았다. 형에게 약혼자가 생기기 전까지는.


내가 결혼해서 나가 살게 되면 너 혼자 괜찮겠어? 그 말을 죽기보다 듣기 싫어서 곽지석은 대학교를 자퇴했다. 그저 돈을 벌어 수술을 하기 위해서.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그러나 완전한 자의는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고 졸업장을 따고 싶었으니까.


빡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조금 울었다.


아니, 울진 않았다.


아냐. 울었을걸.


사실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어차피 마음 붙일 데도 없었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러면서도 곽지석은 밖에 나갈 때면 과잠을 입었다. 대학생이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그렇게 보이기를 바랐다. 껍질뿐이어도 좋으니까. 어차피 내 쓸모는 껍질에만 있으니까.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은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겨두고 전부 적금 통장에 집어넣었다. 형은 정말 수술을 해야겠냐며 말리는 눈치였지만 곽지석은 완강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었다.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는다. 그 어느 쪽도 좋았다. 적합자로 살아가는 건 꽤 괜찮은 삶일 것 같았다. 하트 모양의 심장을 갖고 살 바엔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형한텐 반 절짜리 진심만 내비쳤다. 확률은 낮아도 성공만 하면 병이 말끔하게 낫는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맘에도 없는 말로 형을 설득했다.


형도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하루는 술에 취해 그런 말을 했고 형은 울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심장과 곽지석의 심장을 바꾸고 싶다면서.


그렇다. 심장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다. 자신과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확신만 생겼다. 돈이 필요했다. 조바심은 불안을 키웠고 불안은 곽지석을 낯선 곳으로 데려갔다. 고액 아르바이트. 사생활 보장. 출퇴근 시간 자유. 2차 강요 없음. 불온한 문장 사이로 눈에 띄는 간절함이 있었다. 사랑을 연기해 주실 분 구합니다. 남편과 이혼할 수 있도록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세요. 저를 천하의 썅년으로 만들어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결혼은 사랑의 결과가 아닌 국가 정책의 일부다. 따라서 한 부부가 이혼을 하려면 다음의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만 했다. 현저한 이상정서반응 진단. 또는 배우자의 명백한 과실. 이 과실에는 외도, 폭력, 중대한 거짓말 등 사회적 기준에서 결혼 유지가 불가한 사항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인간은 누군가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지 않고 사랑에 빠지지도 않는다. 동기 없는 외도란 구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고 이혼 사유 중에서도 가장 드문 케이스다. 그러므로 국가는 외도를 현저한 이상정서반응 진단과 더불어 명확한 과실로 보기 때문에 증거만 있다면 이혼이 수월했다. 역설적으로 외도는 이혼을 허락받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고, 구인 공고 사이트에 의문스러운 글을 올린 한 여자는 그 출구를 함께 찾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들어는 봤다. 신경망 검사 결과를 조작하고, 외도한 척 알리바이를 쌓아 이혼을 하는 부부가 있다는 걸. 그러나 그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데 필요한 제삼자가 본인이 될 거라고는 곽지석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구인 공고 보고 연락드립니다. 덜컥 문자를 보냈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돈에 눈이 멀었나. 헛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곽지석은 바잡은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렸다. 답장은 새벽 두 시쯤 왔다. 편돌이 인생 전전하던 곽지석이 한창 물류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박 여사와는 그렇게 만났다.





박 여사로부터 이혼에 성공했다는 근황을 전해 들었다. 그날 밤 통장에는 두둑한 금액이 입금됐다. 통장에 찍힌 액수를 세어본다. 다시 세어본다. 또다시 세어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세어본다. 잘못 셌을 수도 있으니까. 곽지석이 서서히 흰자위를 드러냈다. 고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수술할 수 있었다. 곽지석은 숫자를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박 여사는 종종 오래된 모텔로 곽지석을 불러 제 아들 얘기를 했다. 곽지석과 동갑이고 키도 덩치도 조금 더 크다던 아들은 박 여사에게 있어서 삶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존재라고 했다. 만약 사랑이 죄가 아니라면 기꺼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소중하다고 했다.



첫 번째는 뭔데요?

내 삶. 나한텐 그게 제일 중요해.



곽지석이 물었고 박 여사가 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개인을 구하고 집단을 망친 씹새끼가 되는 건가. 곽지석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셀프로 뺨도 때렸다. 한 가정을 파괴하고, 박 여사의 아들을 저처럼 부모 없는 놈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죄책감. 미처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 구역질처럼 몰려왔다.


이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은 게 뭐길래. 수술을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뭘 원하길래 나는.


누군가를 상처 입힌 돈으로 나 혼자 살겠다고 심장을 교체하는 게 다 무슨 소용 있을까.


어차피 성공률도 57퍼센트밖에 안 되는 수술.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냥 죽을까.


죽을까.


죽을까.


죽자.


죽어버리자.


번개탄을 구하러 만복슈퍼를 찾아간 건 억하심정의 결과였다. 심사가 비비 꼬여 찾아간 그곳에서 곽지석은 청년, 죽을 용기로 살아 라는 말이나 듣고 쫓겨났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맘대로 안 되는데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데요. 그런 연민과 자기혐오에 빠져 발길 가는 대로 걷고 있을 때였다.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가 다가와 발치에 얼굴을 비벼댔다.


슈퍼 앞에서 김정수를 만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김정수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건너편에 말을 걸었다. 곽지석은 대답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 덩어리처럼 목구멍에 걸린 탓이었다. 내가 망가트린 가정의 아들. 나 때문에 삶의 기반을 잃은 사람. 네 삶엔 필연적인 결핍이 따라붙을 것이다. 그러나 턱시도 고양이는 김정수의 손길 아래서 만족스러운 울음을 흘렸다. 곽지석은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김정수의 손이 닿는 곳마다 갈망하던 다정이 피어올랐고 심장 박동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제껏 곽지석을 괴롭혔던 통증이 생존 본능이 되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댔다. 저 사람한테 말을 걸어. 너를 붙잡아달라고 부탁해.



시간 진짜 빠르다. 그렇죠.



말을 걸어도 씹어대는 곽지석에게 김정수는 꿋꿋이 대화를 시도했다. 곽지석은 동문서답했다. 파트너 구하셨어요? 김정수는 곽지석과 눈을 맞추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석 씨는요?

저도 아직이요.

벌써 12월인데요?

적반하장 대박.

저는 사정이 있었어요.



불퉁한 말투에서 친숙함을 느꼈다. 큭큭 웃음을 흘리자 멋쩍은 듯 눈썹뼈를 매만지던 김정수가 물었다.



학교는 무슨 일이에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번개탄 사려고 오래된 슈퍼 찾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이딴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겠냐고. 최소한 이 사람 앞에서는 망가진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욕망이었다. 곽지석은 허둥지둥 대답을 지어냈다.



잠깐 친구 만나러 왔어요. 대학 친구.



거짓말을 내뱉고 나서야 곽지석은 깨달았다. 붙잡히고 싶었다. 말려줬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김정수에게 죽음을 원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기모순은 죄책감보다 더 깊게 심장을 파고들었고 거짓으로 치장한 진심은 어쩌면 진심에 가장 가까운 거짓이었다.



그렇구나.



속사정 모르는 김정수는 어기적어기적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저 그럼 가볼게요. 꾸벅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애가 탔다. 괜찮다고 믿어온 내게 괜찮지 않다고 말해준 사람이니까. 처음으로 날 알아봐 준 사람이니까. 곽지석이 눈을 질끈 감고 목청을 높였다. 정수 씨! 그 어플 아직 삭제 안 했죠?




*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곽지석은 침잠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정수 씨 어머님께서 이혼을 하고 싶으시다길래 알리바이 만드는 걸 도와드렸던 것뿐이에요. 모텔에서도 아무 일 없었어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이에요. 진짜로. 정수 씨가 걱정하는 그런 일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곽지석의 낯빛은 덤덤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든 것처럼 보였고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 버려질 걸 알면서도 주인을 따라가는 강아지처럼.



우리 엄마는 적합자예요. 그것도 99퍼센트요. 그런데 이상정서반응을 보였어요. 결혼 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아냐. 이건 내가 원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곽지석은 우리 가족을 해체시킨 장본인. 비난의 화살을 몽땅 받아내야 마땅한 사람. 넌 그래야 한다. 그게 네가 마지막으로 완수해야 하는 임무다. 그런데 넌 왜 결백을 주장하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요. 지석 씨는 결백하다는데 우리 엄마는 그쪽한테 사랑을 느꼈다고요. 두 사람이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말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정수 씨.

말씀하세요.

그 진단서 조작된 거예요.

……

요즘 그런 부부가 많대요. 일부러 이혼하려고 저 같은 사람을 고용하고 진단서를 조작하는…



말끝을 흐린 곽지석이 한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가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다는 몸짓이었다. 김정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혼란스러우면 화가 나든가 아니면 웃음이라도 터져야 망정인데 텅 비어버린 머릿속엔 오직 곽지석의 증언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탈 날 것 없이 깔끔한 문장을 곱씹으며 김정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곽지석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가 자신의 지난 1년을 통째로 비웃는 질 나쁜 농담처럼 느껴졌다. 소파에 무력하게 누워있던 김 과장. 땅돌과 팔짱을 끼고 모텔을 들어가던 박 여사. 그리고 다만 고요하게 내리던 눈. 택시 안에서 쪽팔리게 흘렸던 눈물. 그 모든 게 박 여사의 이혼 설계를 위한 허수아비 역할이었다니.



그럼 대체 왜…

……

과잠은 왜 입고 있었어요? 자퇴했다면서요. 저 속이려고 입었어요? 대단하다. 몰랐는데 지석 씨 진짜 치밀한 사람이었네요. 그렇게까지 해서 지석 씨가 얻고 싶었던 게 뭐예요? 돈? 겨우 돈 때문이에요?



김정수는 간절하게 부탁하듯이 물었다. 곽지석이 제발 그렇다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물었다. 그래야만 곽지석이 비겁한 수단을 써서라도 살고 싶었던 피해자가 아닌, 한 가정을 망가뜨린 가해자로 존재할 수 있다. 그래야만 김정수는 곽지석을 탓할 수 있다. 상황이 꼬여버린 게 전부 곽지석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김정수는 재차 물었다. 심장이 하트 모양인 게 그렇게 문제가 된대요? 20세기 사람들은 그러고도 잘만 살았다면서요. 지석 씨도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거 아니에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곽지석을 마주 봤다. 그 애 눈망울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른다. 곽지석은 고개를 쳐든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깜박인다. 울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건 생각보다 곤욕에 가까웠다. 김정수가 손을 뻗었다. 곽지석의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입속말했다. 울지 마.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마. 내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굴지 마, 제발. 잘못한 건 너잖아. 너여야만 하잖아. 그럼 그 애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소리를 죽이는 몸짓은 서럽기만 하다.



저 욕해도 돼요. 마음껏 하세요.

……

돈도 다 돌려드릴게요.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머리 박으라면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요, 저 얼마든지 원망해도 되는데요…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함부로 추측하지는 마세요.



김정수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곽지석이 애원했다. 모르잖아요. 정수 씨는 절 모르잖아요… 애달픈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눈물에 젖어 무겁게 내려앉은 그 애 속눈썹을 김정수는 망연히 본다.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러하듯 심장이 아릿거린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다.


돈을 돌려주겠다니.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감히 재단하지 말라며 저리도 서럽게 우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잘은 몰라도 꼭 해야 하는 거잖아. 수술. 그래서 넌 돈이 필요했던 거고, 그래서 나와 이렇게 만나게 된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왜 널 함부로 해. 대체 넌 뭔데. 사랑할 수밖에 없게 태어났으면서 왜 정작 너 스스로는 사랑하지 않는 거냐고. 김정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석 씨.

……

그만 울고 나 좀 봐줄래요?



돌려주겠다는 돈을 냉큼 받는 것도 웃겼다. 그건 애초에 제 돈도 아닐뿐더러 돈을 받는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 여기 있잖아요. 나 좀 봐줘요. 부드럽게 타이르자 곽지석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짓무른 눈가. 빨개진 코끝. 젖은 눈. 김정수는 생각한다. 눈이 펑펑 오던 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서 나도 저렇게 울었을까. 정상이 될 수 없는 우린 그런 식으로 버텨왔던 걸까.


곽지석의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충동이 일었고 김정수는 끝내 차오른 마음을 속삭였다. 할게요, 파트너. 이 말 듣고 싶어서 저한테 연락한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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