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 돌아가는 애정 (상)
leeyouyuu
사랑이 멸종했다. 아니, 사랑은 단 한 번도 멸종을 원한 적 없으므로 문장을 다시 쓰겠다. 사랑이 멸종됐다. 지구 멸망보다 빨랐고 기후 위기보다 확실했다.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12시 정각에 일어난 일이었다.
*
새천년을 앞둔 세계는 근거 없는 예언과 기술적 공포가 뒤섞여 어딘가 불안정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2000년이 되면 ATM기가 작동하지 않을 거라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현금을 사재기했다. 일본에서는 새천년 대비 생존 키트를 집집마다 구비해놓자는 캠페인이 열렸다. 한국에서는 성경의 예언과 컴퓨터의 오류가 같은 선상에서 논의됐다. 유럽에서는 전력망이 한꺼번에 폭주할 거라는 루머가 퍼져 촛불 따위의 도구가 품절됐다. 전 세계에서 종말 시계가 등장했고 몇몇 광신 집단은 대피소를 만들어 어떤 의식을 벌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컴퓨터가 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해 핵미사일이 오발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새천년을 맞이하는 순간, 세상이 초기화될 거라고 떠들었다. 모든 소문은 근거가 없었으나 공포는 이유보다 전염력이 빨랐고 상상력은 논리보다 더 폭력적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집단 정서 붕괴였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쉽게 울었고 쉽게 싸웠다. 작은 다툼도 금세 비관으로 번져갔다. 혼란 속에서 UN은 국제정서안정관리위원회―이하 국안위―를 출범시켜 인류의 감정 체계를 모니터링하고 관리했다.
국안위가 전 인류의 감정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한 건 1996년부터였다. 각국은 개개인의 심장에 작은 칩과 센서를 삽입하여 감정을 실시간으로 기록했고 모든 데이터는 국안위가 구축한 거대한 네트워크망에 저장됐다.
이윽고 1999년 12월 25일, 제네바의 만국회의장에서 긴급 국제회의가 열렸다. 각국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내려진 결론은 단 하나. 인류의 감정 데이터를 통합하여 새천년을 적대시하는 요소를 제거하라.
결정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안개처럼 뒤덮인 불안은 잠재우기 위해 국안위는 1999년 12월 31일 23시 55분, 인류의 감정을 하나의 구조 안에 모아 정리하는 시스템을 가동하라고 명령했다.
1999년 12월 31일 23시 56분, 각국의 감정 조절센터는 일제히 시스템을 가동했다.
2000년 1월 1일 00시 01분, 네트워크망에서 오류가 보고됐다.
2000년 1월 1일 00시 04분, 시스템 개발팀은 즉시 연구소 지하로 내려갔다. 중앙 컴퓨터실에 도착한 개발팀을 반긴 건 책상에 엎어져 있는 엔지니어와 그가 남긴 마지막 로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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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가는 애정 (상)
사비를 들여 신경망 검사를 다시 받았다. 결과는 부적합으로 3년 전과 동일했다. 김정수는 보건소를 빠져나오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껐다 켜며 방황하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아갔을 때, 시간은 9시 51분이었다.
여름방학 첫날 아침부터 이승찬의 자취방을 쳐들어가는 길이다. 김정수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서 어플 하나를 다운로드했다. 생전 처음이다. 파트너를 구하는 어플 그딴 것에 미래를 걸어보는 건. 아니, 그딴 건 아니지. 말이 좀 심하네. 무려 국가에서 공인한 어플인데. 그것도 김정수 같은 부적합자를 위해서.
2046년의 인류는 사랑을 질병으로 인식하고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인간의 신경망 깊숙이 남은 희미한 흔적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신경망 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은 남들보다 사랑에 취약하다. 이상 정서 반응을 보일 확률이 높다. 부적합자에게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다.
결혼은 더 이상 애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이 멸종된 뒤, 국가는 인구 유지와 사회 안정을 이유로 만 25세부터 33세까지의 성인을 결혼 적령기로 지정했다. 정해진 나이가 되면 국가가 배정한 사람과 결혼해야 했고 부부는 의무적으로 함께 살아야 했다. 누군가는 스스로 족쇄를 차는 꼴이라고 비난했 지만 결혼만큼 확실하고 안정적인 노후 대비 정책은 없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의무로 하는 결혼. 인구 유지를 위한 섹스. 다분히 본능적인 임신과 출산.
김 과장과 박 여사는 2022년에 결혼하여 2023년에 김정수를 낳았고 그러므로 김정수는 사랑을 모른다. 맹세한다. 살면서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적 없다. 그런데 부적합자라니. 것도 두 번이나. 존나 억울하지. 내가 아니라 검사 기계에 문제 있는 거 아냐? 진상처럼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성격 못 되는 김정수는 그저 어플 속 프로필을 완성해 갈 뿐이다. 닉네임. 정직하게 이름 석 자 김정수. 나이. 스물넷. 성별. 남성. 프로필 사진에는 어제 학교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찍은 셀카 하나 올려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SHAREMEET. 국가가 나서서 개발한 파트너 매칭 어플이다. 이용자는 주로 결혼을 할 수 없는 부적합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가 국가 차원에서 어플까지 개발하면서 부적합자를 챙기게 된 계기는 10년 전 일어난 부적합자 동반 자살 사건에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부적합자 세 사람이 오픈 채팅을 통해 연락을 이어가다가 동반 자살을 계획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한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부적합자에게도 마련하라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김 과장은 시위 관련 뉴스를 볼 때면 항상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부적합자라서 그런지 감정적이라나 뭐라나. 듣는 부적합자 기분 나쁘게.
불과 몇 시간 전, 김정수는 배짱 좋게 식탁 위에 쪽지 하나 남겨놓고 집을 나왔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아버지랑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연 끊겠다는 말은 아니구요. 그냥 좀 떨어져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실종신고 하지 마세요. 알아서 잘살아 볼 테니까요.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게 맞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방법이 없다. 박 여사와 이혼한 뒤 김 과장은 하루가 다르게 정신병자가 되어갔다. 김정수는 아들 된 노릇으로 매일 같이 김 과장의 폐와 간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그러든 말든 김 과장은 미친놈처럼 술을 마셨고 담배를 뻑뻑 피웠다. 정말 박 여사를 사랑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집안 꼬라지 하고는. 입을 열면 원망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침묵을 택한다. 이런 날이면 부적합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혼자 살다가 고독사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억울하게만 느껴진다. 아냐. 그럴 순 없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엔딩을 맞이할 순 없다. 그리고 SHAREMEET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적합자에게 허용된 거의 유일한 안전장치다. 사랑에 취약한 부적합자일지라도 가족처럼 서로를 케어하며 지낼 동거인을 마련할 수 있도록 개발된 파트너 매칭 어플. 김정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SHAREMEET를 켰다. 지역 설정까지 마치고 홈 화면으로 돌아가자 자신처럼 동거인을 찾고 있으면서도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프로필이 보였는데, 전부 남자였다. 부적합자 특성상 교환 불가능하세요 :)
얘네 다 에이아이는 아니겠지. 반신반의하며 화면을 내리던 김정수가 눈썹을 들썩였다.
땅돌. 어쩐지 익숙한 닉네임을 발견했다. 김정수는 기억을 더듬으며 땅돌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이다. 개새끼 같기도 하고. 말티즈나 치와와. 소형견을 닮았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잘생겼다는 감상만이 남는 외모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답답해 죽겠네. 미간을 찌푸리고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던 김정수가 이내 짧게 탄식했다.
기억났다. 울 부모님 이혼하게 만든 개새끼. 어쩐지 반반하게 생겼더라. 박 여사는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에 약하다. 김정수는 제 엄마 등짝에 빨대 꽂아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튄 땅돌의 프로필 사진을 최대로 확대해본다. 다시 보니까 좀 재수 없게 생김. 말티즈 개뿔. 치와와 지랄. 땅돌은 혼모노다. 순도 백 퍼센트 개새끼다.
*
꼭 1년이 되어간다. 김 과장과 박 여사가 이혼한 건. 그리고 겨울이었다. 김정수가 박 여사의 외도를 목격한 건. 그날은 존나 추웠다. 하늘에선 눈이 펑펑 내렸고 김정수는 우산도 없이 걸었다. 정수리에 솜털 같은 눈송이를 보송보송 달고 뛰다시피 걸었다. 이 날씨에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고문이었다. 3분 뒤에 오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이 골목만 지나면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지름길이긴 한데 평소엔 지나다니지 않는다. 모텔촌이기 때문이 다.
사랑이 멸종됐어도 섹스라는 행위는 여전히 성행하고 싸구려 모텔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한 세기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부적합자만이 모텔을 찾는다는 점. 사랑이 전염됐다든가, 아니면 정말 욕구를 풀기 위해서 온다든가. 어쨌든 아직도 허름한 모텔촌이 존재하는 이유다. 인간이란 참 징그러운 존재다.
김정수는 후회한다. 그냥 큰길로 갈 걸. 그랬으면 박 여사가 땅돌의 팔짱을 끼고 지저분한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꼬라지를 보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야마가 돈다. 결국 버스를 놓쳤고 기분도 잡쳤으니까.
빡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조금 울었다.
아니, 울진 않았다.
아냐. 울었을걸.
사실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김정수가 박 여사의 외도에 분노한 이유는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사랑 그딴 건 세기말에 멸종한 지 오래였으므로 김정수의 분노는 차라리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정상에서 벗어나 비정상이 될 수도 있다는 초조함.
그날, 금성모텔 앞을 서성이던 땅돌은 멍청하게도 대학교 과잠을 입고 있었다. 우연인지 미친인지는 몰라도 그 애가 걸치고 있던 과잠은 김정수가 다니는 학교의 것이기도 했다. 그것도 소프트웨어공학과. 공부깨나 하는 새끼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뭐 그리 당당하다고 유부녀한테 용돈 받으러 오는 길에 과잠을 입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김정수는 혀를 찼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마침 택시가 정차했다.
불 꺼진 집 안은 깜깜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티브이 소리와 희미한 불빛이 아니었다면 김 과장이 소파에 퍼질러 누워있단 걸 몰라볼 뻔했다. 김 과장은 알까. 지금쯤 박 여사는 주름살 하나 없이 탱탱한 놈 밑에 깔려있을 거란 걸.
심란했다. 김정수는 방문을 닫고 인스타그램을 쥐 잡듯이 털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공학과 공식 계정을 시작으로 파도를 타고 또 탔다.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는 사람부터 태그된 사람, 댓글 단 사람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목적지는 작고 하얀 놈.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감정 파동 그래프가 수차례 널뛰었다. 심장에 삽입된 칩과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워치가 쉴 새 없이 경고음을 울렸다. 정신 차려보니 달이 기울고 있었다. 마침내 박 여사를 모텔로 데려간 남자를 발견하고 김정수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찾았다. 작고 하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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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얼굴값을 못하는 성격인 듯했다. 볼 것 없는 피드에 딱 하나 올라와 있던 셀카에 감사를 전한다. 눈 땡그랗고. 입술 뚱뚱하고. 소형견 닮았고. 맞는 것 같다. 내가 찾던 개새끼. 땅돌일일사.
그로부터 2주 뒤, 김 과장과 박 여사는 이혼 서류를 들고 가정법원에 출석했다. 술 취한 김 과장이 제 앞에 아들을 앉혀놓고 밝히기를 박 여사의 신경망이 특정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오류를 일으켜 이상정서반응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이상정서반응의 원인이 외도에 있다는 것을 이혼 사유로 꼽았다.
그게 끝이야? 또 할 말 없어?
김 정수가 질겁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라지만 아빠는 엄마한테 배신감 같은 걸 좆도 안 느껴?
새끼가 애비한테 말본새하고는.
그동안 벽이랑 살았어? 어떻게 사람이 그래?
부모 가르치려 들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 번번이 흥분하지 좀 말고.
……
그러다가 사고 치는 거야. 한순간에 눈 돌아가서.
김 과장이 충혈된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김정수는 박 여사의 진단서를 몇 번이고 읽어본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특정 상황에서 호흡 곤란, 체온 상승, 심박수 과다 증가 등 전형적인 이상정서반응이 관찰된다. 이는 결혼 생활 유지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이게 말이야 좆대가리야. 특정 상황이라는 게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천하의 박 여사가 이상정서반응을 보이는 거야. 땅돌 그 새끼가 뭘 어떻게 했길래 99퍼센트로 적합 판정 받은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거냐고. 이거 진짜 기계 문제 아냐? 김정수는 진단서를 집어 던지고 안방으로 향했다.
김정수가 물었다. 정말 할 거예요? 이혼. 긴 여행을 가는 것처럼 짐을 정리하던 박 여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럼 가짜로 하게?
왜요? 걔도 엄마 보면 심장이 이상하대요?
걔? 너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모르는 척하느라 고생했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위로 좀 해주면 안 돼요? 중간에 끼여서 이도 저도 못하는 거 짜증 나는데.
김정수 다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엄마. 나 스물셋이야.
걔도 스물셋이야.
……
빠른 연생이라고 했던 것 같아. 1월이었나. 2월이었나. 긴가민가하네.
…안 궁금해요.
알려주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까. 1월 14일이겠지 뭐. 김정수는 손톱 거스러미를 쥐어 뜯으며 생각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엄마가 정말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박 여사는 말을 돌리는 식으로 상황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엄마가 잘못한 거잖아.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맞는 거잖아. 아빠가 회사에서 잘린 뒤로 좀 멍청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 내버려두고 지 아들뻘한테 무려 사랑을 느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헌 데 우리 박 여사는 어째서 이렇게 담담하고 태연할 수 있는 걸까. 까닭 모를 감정이 차올랐다. 분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도 같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를 모르겠어서 더 답답했다. 김정수는 조용히 제 엄마와 눈을 맞췄다. 박 여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곧 생일이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그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괜찮다고 그러는 거 있지.
안 궁금하다니까 그러네…
정수야.
……
엄마가 지석이한테 생일 선물을 챙겨준대도 그건 사랑은 아닐 거야.
그렇게 말하는 박 여사는 누구보다도 멀쩡해 보였다. 말투는 또렷했고 눈빛은 곧았다. 순간 김정수는 자신이 아주 큰 착각에 빠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뭔가 놓친 게 있다. 뭔가 놓치고 있다. 그리고 박 여사는 그 무언가를 죽어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땅돌일일사. 그 새끼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수로 땅돌과 접촉할 수 있을까. 김정수가 그 애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빠른 연생이라는 쓸데없는 사실과 지석이라는 본명뿐인데. 대뜸 디엠 보내기? 나 김정수라고 하는데 박정아 아들이거든? 너 우리 엄마랑 뭔 짓 했냐. 보내면 당빠 차단 당하겠지. 초딩처럼 싸움 거는 것도 말 안 되는 나이다. 점점 나잇값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김정수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순 허공이 하얗게 부서졌다.
*
조만간 집 나온다, 나온다 하더니 진짜로 나왔네.
김정수를 자취방에 들이면서 이승찬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는 이승찬은 우수한 적합자다. 부러 운 새끼. 앞날 창창한 새끼. 바닥에 드러누운 김정수가 괴로운 소리를 냈다. 누구보다도 잘살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만 경로를 이탈하고 있었다. 누가 방해하는 것마냥. 신경망이란 놈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95퍼센트나 부적합하고. 엄마는 집 나갔고. 아빠는 미쳤고. 와중에 나는 맨몸으로 가출했고. 어느 것 하나 정상의 범주에 드는 게 없었다.
파트너 매칭 어플을 거듭해서 새로고침 하던 김정수는 다시금 땅돌의 프로필을 발견한다. 김정수의 본가로부터 985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땅돌은 바람직한 자기소개를 앞세워 구미를 당겼다. 서로 사생활 터치하지 않고 가사만 분담해서 동거하실 파트너 구합니다ㅏ 별 이모티콘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반려묘 키우시는 분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ㅜㅜ 별 이모티콘.
사생활 터치 안 하고 가사만 분담. 바라던 바다. 벼락 맞은 것처럼 가출한 새끼가 반려묘를 데리고 있을 리도 없다. 따라서 모든 조건은 충족된다. 김정수는 핸드폰 화면을 오래 응시했다. 땅돌을 향한 마음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얘를 만나서 화를 내고 싶은 건지. 너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대가리라도 후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제 와서 박 여사랑 어떤 거래를 한 거냐고 캐묻고 싶은 건지.
금성모텔 앞에서 땅돌을 발견한 시점으로부터 1년이나 지나서일까. 감정은 불투명한 장막 뒤에 가려진 것처럼 희미했다. 맥없는 마음이 이리저리 휘둘렸다. 이승찬이 양은 냄비 들고 와서 짜파게티 존나 잘 끓여졌다고 지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 운명을 탓할 사람이 필요한 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땅돌에게 채팅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왜 나서서 일을 꼬아대는 건지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땅돌과는 중앙로의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걔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벌써 알고 있는데도 연달아 채팅이 왔다. 알았어, 알았다고. 너 알약 그려진 검은색 반팔 입고 있는 것도. 지금 오는 중인 것도 금방 도착한다는 것도 알겠으니까 강아지 이모티콘 그만 보내. 김정수가 헛웃음을 쳤다. 동거인이 아니라 반려견을 만나러 온 듯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괜히 발로 차며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눈길을 옮겼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작고 하얀 놈이 보였다. 우와. 땅돌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연예인 보는 기분. 김정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땅돌을 쳐다봤다. 그 애는 민망한지 입가를 가리고 헤프게 웃었다.
저… 얼굴에 뭐 묻었어요?
네?
계속 쳐다보시길래…
그제야 김정수는 시선을 거두고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을 닮은 것 같아서요. 뻔뻔하게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지껄이자 땅돌은 빠르게 수긍했다. 아아, 그러시구나.
그 애는 자신을 곽지석이라고 소개했다. 성이 곽씨였구나. 김정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스물넷이라고 알렸을 때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박 여사가 1년 전에 흘린 정보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는 덕분이었다.
그러나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이어진 곽지석의 증언은 김정수의 예상을 비껴간 것이었다. 정수 씨는 대학교 다니세요? 저는 일 학년 때 자퇴했어요. 돈 벌려고요. 제가 심장이 좀 안 좋아서 수술을 해야 하거든요. 수술을 하려면 파트너가 꼭 필요하고요.
애초에 SHAREMEET라는 어플 자체가 부적합자를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람은 본 적 없었다. 김정수가 짐짓 놀란 얼굴로 물었다. 수술이요? 곽지석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감점 요인이 될까요?
아니, 그건 아닌데요…
귀찮게 안 할게요. 지금까지 혼자 잘 해왔어요.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나쁜 놈 만들어요.
죄송해요. 근데 진심이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제 생각엔 안 괜찮은 것 같아요.
저 안 괜찮아요?
제 신경망도 95퍼센트나 부적합해요. 근데 의사한테 심장 수술하라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다행이다. 정수 씨 건강한가 봐요.
지석 씨.
넵.
저희 벌써 동거하기로 결정된 거예요?
네?
제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요. 사생활 터치하지 말까요?
곽지석은 별다른 대꾸 없이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 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정수 씨… 정밀 검사해 본 적 있어요?
…아뇨.
저 열네 살, 그러니까 만 나이로 열네 살이요. 그때 의무로 신경망 검사 받잖아요.
그쵸.
저는 결과가 어땠냐면요. 적합도 아니고 부적합도 아니고 오류가 떴어요, 기계에. 그래서 정밀 검사를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는 거예요. 웃기죠.
……
대학 병원에 가래요. 씨티 촬영도 하고 무슨 초음파 검사도 했어요. 주사가 지인짜 아픈 거 있죠. 어쨌든 그렇게 검사를 했는데… 의사쌤이 제 심장이 하트 모양이래요. 20세기 사람처럼요.
스마트워치가 웅웅 울리며 경고를 쏟아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감정이 널뛰고 있다는 경고일 게 뻔했다. 왜 초면의 사람한테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김정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파트너 제의를 거절하고 싶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내보일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곽지석에게서 낯익은 얼굴이 투영되어 보였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어쩌면 너도 나처럼 네 운명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러나 딱 거기까지. 곽지석의 말투에는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무언의 벽이 있었고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그 애는 말했다.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 잘 맞는 파트너 찾으시길 바랄게요.
이승찬의 자취방에 빌붙은 지 나흘째 되던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실종신고를 했단다. 미친 김 과장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한 모양이었다. 그날, 한 통의 전화를 계기로 김정수는 궁상맞은 일탈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마음 맞는 동거인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갔다. 김정수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독립은 아직 이르다고. 김 과장의 정신병이 자신에게 옮겨붙을 것 같아도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자고.
슬펐다. 알아서 잘 산다니까 왜 실종신고 했냐고 따지면서도 김정수는 안도를 느꼈다. 눈에 익은 집안 풍경. 알코올 냄새. 새끼가 애비한테 말본새하고는. 귀에 딱지 얹을 정도로 들은 띠꺼운 문장. 될 대로 떠들어대는 뉴스. 폭력처럼 반복되는 앵커의 목소리. 불 꺼진 거실. 다만 티브이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만이 김 과장의 비쩍 마른 몸덩이를 비출 때. 김정수는 안도했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고 동시에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 자신을 미워하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정수는 박 여사가 제도를 벗어나기로 한 이유를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사랑은 수단이었을 뿐, 박 여사는 그저 익숙하게 목을 졸라오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학교 후문 쪽에 위치한 만복슈퍼 앞에서 곽지석과 조우한 건 겨울의 초입에 있었던 일이다. 왜 정작 만나고 싶을 땐 만날 수 없고 만날 생각 없을 땐 이리도 기적처럼 만나지는 걸까. 품이 큰 패딩 지퍼를 턱끝까지 올려 얼굴을 파묻은 그 애는 제 주위를 빙빙 도는 고양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긋 올라온 애굣살이 눈에 밟혔다. 김정수는 보폭을 좁히며 곽지석을 관찰했다. 미안해. 너무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내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잇써어… 중얼거리는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김정수가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았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 혀끝으로 입천장을 가볍게 두드리며 손짓하면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가 총총 걸어온다. 그리 멀 지 않은 곳에서 시선이 느껴졌고 김정수는 그 시선 끝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건너편에 말을 걸었다. 저희 여름에 만나지 않았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살며시 눈을 치켜뜨면 입술을 달싹이는 곽지석이 보인다. 무릎을 펴고 곧게 선 김정수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시간 진짜 빠르다. 그렇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곽지석은 동문서답했다. 파트너 구하셨어요? 김정수는 그 애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석 씨는요?
저도 아직이요.
벌써 12월인데요?
적반하장 대박.
저는 사정이 있었어요.
혼자 발끈했다. 쪽팔렸다. 곽지석은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는지 큭큭 웃었다. 흩날리는 웃음소리가 밉지 않았다. 김정수는 멋쩍은 듯 눈썹뼈를 매만졌다.
학교는 무슨 일이에요?
잠깐 친구 만나러 왔어요. 대학 친구.
그렇구나. 습관처럼 반응하며 김정수는 어기적어기적 허리를 숙였다. 저 그럼 가볼게요. 꾸벅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서려는데 어깨 너머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정수 씨! 그 어플 아직 삭제 안 했죠? 김정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2학기 종강을 앞두고 있다. 날씨는 매섭게 춥고 며칠 전엔 첫눈이 왔다. 12월 중순, 일용직을 전전하던 김 과장은 어느새 다시 아침에 집을 나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동안 손도 대지 않던 셔츠와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출근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즈음 김정수는 아침을 거르는 일이 잦았다. 기상 시간이 비슷해진 김 과장과 나란히 식탁에 앉아 아침을 함께 먹는 건 고역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시험 범위를 대갈통에 욱여넣느라 새벽을 뜬 눈으로 보내면서 김정수는 다짐했다. 체할 바엔 굶고 말겠다.
그날도 아침 패스하고 현관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돌연 김 과장이 말을 걸어왔다. 늦었냐? 김정수는 슬쩍 시 간을 확인했다. 늦진 않았지만 여유롭지도 않았다. 미적지근하게 고개를 젓자 김 과장은 입을 오물거리며 눈치를 봤다.
네 엄마, 어린놈이랑 놀아나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네?
김 과장이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 그냥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잠, 잠깐만.
느닷없는 자백이었다. 김정수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뭐라고요? 되물으며 김 과장의 말을 복기했다. 그러니까 김 과장은 박 여사의 외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여사에게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고분고분 이혼을 해줬다는 얘기 아냐.
아빠 성격에 그런 짓을 했다고?
저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라던데 나는 이제 천애 고아가 될 일만 남은 건가. 당황스러움을 감출 길을 알지 못해 김정수는 눈만 빠르게 깜박였다. 김 과장도 이 상황이 낯 뜨겁긴 한 건지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독백하듯 말했다.
미안하다.
헛웃음 치며 시계를 곁눈질했다. 이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뜸 들였다간 지각이다. 그러나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는 의문과 김 과장의 술버릇과 박 여사의 올곧던 눈빛과 곽지석이라는 변수가 김정수의 어깨를 짓눌렀다.
기묘한 아침이다. 김정수는 학교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평소엔 믿지도 않는 오하아사 순위를 찾아봤다. 2046년 12월 11일 오하아사 1위. 게자리. 오늘은 끌림의 하루예요. 멀어졌던 인연이 다시 손을 내밀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행운이 찾아올 수 있어요. 당신의 한마디와 당신의 존재만으로 누군가는 숨을 돌립니다.
다시 손을 내민다는 멀어졌던 인연이 곽지석일 줄은 몰랐지.
점심시간이었다. 이승찬과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SHAREMEET]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최근에 접속한 적 없어 방치된 프로필에 누가 관심을 가졌을까. 김정수는 귀찮다는 낯빛으로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메시지의 주인은 다분하게 의외인 인물이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곽지석은 괜히 메시지 여러 개 보내서 미리보기 창을 숨기는 방법도 쓰지 않고 정직하게 물어왔다. 김정수는 진동벨이 울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있었다. 이제 아주 당연하게 나한테 가져오라고 시키네? 이승찬이 개탄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정수는 햄버거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목 넘김이 거북해서 콜라만 들이켰다. 내일 전공 하나 남았는데. 그것도 시험 범위 졸라 많은데. 시간 없는데. 공부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김정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저녁에 잠깐 만날 수 있어요.
이제 와서 캐묻는 게 맞았다. 진작 그랬어야 했다. 박 여사와 땅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무작정 메시지 보내놓고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이승찬이 가방에서 에이포 파일을 꺼냈다. 아오 썅. 외울 거 존나 많네. 걔는 필기 자료를 들여다보며 성질을 부렸다. 김정수가 작게 맞장구를 쳤다. 그니까. 언제 다 하고 있냐. 그때 다시 알림이 울렸다. 곽지석이었다.
저희 저번에 만났던 카페에서 뵐까요.
저번이라기엔 시간이 꽤 흐르지 않았나. 김정수는 지금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리의 행인보다 훨씬 얇았던 곽지석의 옷차림을 떠올리며 답장했다.
좋아요.
해질녘 하늘은 유려한 색의 커튼을 닮았다. 어두컴컴하지만 어렴풋이 불빛이 남아있는 거리를 걷다 보면 기분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곽지석과 만나기로 한 카페에 가까워질수록 감정 파동 그래프가 요동쳤다. 높은 곳에서 아찔하게 추락하는 듯했다.
이곳까지 불러냈으니 음료는 제가 사겠다며 곽지석은 알량한 양심값을 지불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아침 드라마 찍는 것 같잖아. 진짜 중요하고 심각한 얘기하러 온 것 같고. 그렇게까지 똥폼 잡긴 싫었다. 정적이 더 길어지기 전에 끊어내야 한다. 김정수가 슬며시 고갯짓했다. 용건 있어서 메시지 보낸 거 아니에요? 얘기하세요. 그러자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곽지석이 헛기침을 했다.
아직 파트너 없다고 하셨죠.
맞아요.
안 구한 거예요, 못 구한 거예요?
후자였어요.
…지금은요?
실은 제가 지석 씨 처음 만나고 얼마 안 지나서 본가로 돌아갔어요. 그래서 당장은 필요가 없는 거죠.